원로예술인에게 듣는다 / 원로화가 월전 장우성 |
예술이란
쟁이의 손재주가 아니라, 심오한 사상이 뒤따라야한다. 만난사람: 박용숙(본지 편집자문위원) <월전미술관>의 집무실에서 만나뵌 월전(月田)선생은한 살이 모자라는 90세 나이인데도 정정하신 모습이었다. 꼿꼿한 자세로 말씀도 막힘이 없이 힘있는 어조였고 이야기 할 때 두손을 내젓는 제스츄어에도 힘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건강한데는 무슨 비결이 있을 터인데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씀을 열었다. 장 우성 :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지만 만일 그런 배경이 있다면 누구나 건강하지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비결이랄 건 없지만 나름대로 실천해온 것은 과욕을 하면서 정력을 소모하고 몸을 망치는 헛된 일을 되도록 피해왔다는 겁니다. 보약이 따로 없어요. 허욕을 버리면서 정신건강을 지키는 일입니다. 박 용숙 : 작품에 대한 집념도 일종의 욕심인데 선생님은 지금도 작품을 하신다니 그것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일은 없습니까? 장 : 작품에 대한 것도 욕심이겠지만 물욕이나 명예욕과는 다른 종류의 욕심이지요. 좋은 작품을 그리겠다는 집념은 오히려 정신을 하나로 통일시켜주면서 잡념을 밀어내고 헛된 욕심으로부터 화가 자신을 지켜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한주에 한번씩 골프를 치면서 4Km씩 걷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되며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한잔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도 젊게 사는 비결이라면 비결이랄까. 매일 미술관으로 나와 앞뜰에 있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보며 조용히 명상에 잠기는 것도 나로서는 정신건강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박 : 선생님은 1912년생으로 현재 우리화단의 최고령의 원로이십니다. 그러니 만큼 저희들로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살지않았던 시대의 화단상황에 대해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20, 30년대의 화단이랄까, 시대상황이랄까, 특히 선생님은 ‘낙청헌화숙(絡靑軒華塾)’이나 ‘육교한서학원(六橋漢書學院)’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으면 좀 말씀해 주십시오. 장 : 내가 태어난지 2년만에 한일합방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3·1운동이 터져 나오게 되는 시기였으니까, 나의 성장기는 매우 불우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의 집안은 한문학자였던 조부를 비롯해서 모두가 엄격한 반일사상으로 잔뜩 긴장되어 있어서 나로서는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일본유학이나, 일본인 경영의 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지요. 이당(以堂)선생의 ‘낙청헌화숙(絡靑軒華塾)’이나 한문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육교한서학원(六橋漢書學院)’으로 갔던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때 두 학교에서는 오늘날 ‘청학동’모양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것을 주로 가르쳤지요. 하지만 나는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는데 소질이 있어서 이당선생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집안 어른들이 환쟁이 공부를 한다고 극구 반대해서 여간 고초를 겪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그림 그리는 것을 ‘쟁이’라고 업신여기고 오직 글을 읽고 훌륭한 글씨를 쓰는 일만을 대단하게 여겼던 거지요. 그뒤에 책을 통해 공부하면서 나는 그림은 단순히 쟁이의 짓거리가 아니고, 글공부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내용이 뒷바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길로 서울에 올라와 ‘육교한서학원(六橋漢書學院)’에 입학했어요. 당시 이 학원은 상해임시정부요원들을 도와 통역하던 사람들이 강사였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유정렬, 중국인으로서는 조수정과 같은 분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데 나는 거기서 한문은 물론이고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박 : 그 부분과 관련하여 오늘의 미술교육을 보면, 매우 참담한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동양화니 한국화니 하지만, 그런것들을 뒷받침해주는 한문학(漢文學)이라고 할까, 동양의 고전학(인문학)의 커리큘럼이 전무하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오늘의 한국 미술이 단순히 ‘그림쟁이’의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 : 맞습니다. 참담한 일이지요. 일제가 망하고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켰을때부터 혼란이 온것인데, 이 과정에서 확실하게 ‘우리것’이라는 주체의식이 붕괴하고 말았지요. 잘 아시다시피 왜말로 ‘하꾸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박래품(舶萊品)이라고 외국에서 실어온 물건이라는 뜻이지요. 일제시대에도 일본에서온 ‘하꾸라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었고 미군정시대에도 하꾸라이문화는 과자에서부터 레이션, 박스와 함께온 물건들, 심지어는 박사까지도 무조건 오케이였지요. 그러나 미국문화도 좋지만 미군정시대의 그 미군들의 천박한 저급문화는 전혀 비판할 여지도 없었던거지요. 이런 문화적인 혼란속에서 결국 미술도 무조건 외국의 것만을 숭상하게 되는 길로 빠지게 되었고, 여기서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해방 후, 소위 월북한 문필가, 화가, 음악가들 있잖아요? 나는 그들이 정말 공산주의를 동경해서 북으로 넘어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당시 우리나라에도 사회주의자가 있었어요. 사회주의를 동경한 젊은이들은 머리도 장발형을 했는데, 그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제일 두려워하여 이들을 막 잡아 넣었거든요. 이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망명하여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국내로 들어오면 잡히기도 했지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화가나 문필가들도 당시의 러시아문화를 막연히 동경하는 분위가가 있어서 톨스토이나 푸쉬킨과 같은 작품들도 다 읽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미국 병정들이 들어와 설치는 꼴을 보니까 환멸을 느꼈던거지요. 그때 미군정은 미국의 신사들이 아니라 저급한 수준의 군인들이었다는 조건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이런 정황을 보고서 참된 사회주의는 소련편에 있는 북한이라고 판단하고 월북했던 것이지요. 결국은 북한에서도 그들은 실망하고 도리어 그들로부터 천대받다가 죽어갔잖아요. 화가 김용준, 길진섭, 이쾌대, 최재덕, 김만형등이 다 그렇게 살다가 갔지요. 문학쪽의 이태준 같은 사람은 저도 잘 알지만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에요. 단지 해방직후의 이런 상황에 환멸을 느꼈던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는 잘 알다시피 요새 젊은세대(화가)들 말이에요. 완전히 서구의 불건전한 문화에 빠져서 제정신을 잃고 허둥대고 있지않아요? 나는 하루에도 수십통의 카다로그를 받는데, 그속에는 자기이름과 소개를 영문으로 쓴것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처음에 나는 그것들이 외국에서 전시회를 하기위해 만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이 아니에요.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하면서 온통 영문투성이의 카다로그를 만들고 있었던 거지요. 정말 환멸이에요. 엄연한 우리글이 있는데도 그걸 팽개치고 무작정 영문을 사용하니 한심한 노릇이에요. 그렇게 보면 북한의 ‘자주정신’에 좋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록 못살기는 하지만 ‘자기’라는 걸 또렷이 지키고 있잖아요. 물론 모든 생활여건이 서구화되어있는 오늘의 우리상황에서 그런 유혹을 혼자 도도히 거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해요. 그렇지만 오늘의 화단을 걱정하기 위해서는 그런점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박 : 선생님이 아마도 이당선생을 가장 잘아시는 마지막 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당선생에 대해 궁금한 점은 그분이 한문학에 얼마나 조예가 있었는가하는 점인데 그점은 우리의 한국화단이나 미술교육을 이야기 하는데 매우 중요한 대목이 됩니다. 장 : 그분은 저의 선생님이었지않습니까. 선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좀, 그렇네요. 하지만 기왕 물으셨으니까 이야기지만, 이당선생은 학문적이거나 사상적인 배경이 거의 없는 그저 고운 그림, 이를테면 이쁜 새나 꽃, 미인을 그리는 환쟁이라고 해야하겠지요. 세상이 바뀌어서 오늘날은 환쟁이를 무슨 거장이라고 부르지만 아무튼 그당시 이당은 그저 그림을 베끼듯 그리는 쟁이였지요. 나도 이당선생 밑에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걸 배웠지만 차차, 책을 통해서 예술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걸 배웠어요. 말하자면 그림이라고 하면 동양화정신이 그렇듯이 남화(南華)와 북화(北華)가 다르며 그 양식이 중국의 심오한 정신문화(철학)에 뒷받침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요. 사실 말이지만 그저 이쁜 미인이나 꽃만 그리는 일이 뭐가 대단한 일이라 하겠어요. 어릴때 부모님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까, 그렇게 기를쓰고 반대했던 이유도 저절로 깨닫게 되었던 거지요. 박 : 하지만 오늘날 동양화가들이나 동양화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당시대가 그랬듯이 전혀 학문적이거나 정신적인 자양분도 없는 그저 단순한 쟁이 그림만으로 족하다는 발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해야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장 :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이 미술관에 ‘동방예술연구원’을 개설한 것도 그때문입니다. 나는 서울대에서 15년, 홍대에서 5년동안 가르쳤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실기 중심의 교육으로 그저 쟁이만을 키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예술론이나 미술사와 같은 이론과목이 있었지만 유명무실이었지요. 이 때문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그림에는 그저 그리는 손재주만 있지 정신이 없는거에요. 그래서는 예술이 될 수 없지요. 그점을 보충하기위해 우리 동방예술연구원에 이론 강좌를 개설하고 미대 졸업생 특히 동양화 전공한 젊은이들에게 이론적, 사상적인 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주로 동양고전, 역사, 철학, 화론등 이 방면의 학자나 교수들을 초청하여 주 1회 열고 있는데, 2년코스로 반응이 좋습니다. 강의 노트는 컴퓨터에서 정리한 후 「한벽문고」에 게재하고 이 책자를 전국 미술대학이나 전문가들에게 배포하고 있습니다. 박 : 선생님께서 대학에서 이십년 동안이나 후진을 가르치셨다고 하셨는데 처음 미술대학의 커리큘럼은 어떻게 짰습니까. 장 : 당시 장발씨가 화가로서는 유일한 미국 유학생이었는데 미군정에서 그에게 미술대학을 맡겼지요. 어느날 김용준교수가 장발씨의 심부름으로 느닷없이 나를 찾아와 결국 서울대 미술대학 창설멤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미술대학을 만드는 형편이라 전혀 커리큘럼을 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어요. 급한대로 이론보다는 실기위주의 교육을 시키는데 급급했지요. 학생을 뽑는데 데생용 석고도 없었던 형편이었으니까요. 현재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미술회관 자리에 있었던 문리과 대학 건물에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미학부가 있었는데 창설당시 미술과의 방이 없는 형편이어서 미학부 도서실을 그대로 사용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려운 조건이 나에게는 하나의 행운이었어요. 왜냐하면 그 도서실에는 당시의 우리로서는 감히 구경도 못하는 미술이나 미학에 관한 희귀본들이 가득차 있었거든요. 우리는 그 책으로 가득찬 서가 사이에다 책상을 놓고 앉게 되었는데 자연히 틈만나면 그 책들을 읽게 되었지요. 사실 내가 예술이란 것이 그저 쟁이의 손재주가 아니라, 심오한 사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도 그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요. 특히 선(禪)에 대한 독서를 통해서 남종화(南宗畵)와 북종화(北宗畵)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 송대의 회화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닫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런 분위기 때문에 서울대학 미대가 남화풍의 수묵을 주로 가르치는 대학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무렵 홍대는 주로 천경자씨가 채색화를 그렸기 때문에 북종화의 분위기로 나갔던 것으로 봅니다. 박 : 선생님의 초기작품으로 여겨지는 <청년도, 1956>나 <한국성모자도, 1954>도 그 무렵에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저는 이 작품등이 이당의 영향으로 보았으며 크게 볼때 일본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물론 일본화의 영향이 있다고 해서 결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미술에서도 타국의 영향을 전혀 받지않은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예컨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프랑스는 독일이나 북방의 표현주의, 독일은 남쪽의 인상주의 화풍을 받아 나름대로 지역의 특성을 만들었으니까요. 문제는 외래적인 요인을 어떻게 수용하여 독창성을 발휘했느냐에 있지 않습니까. 장 : 그건 그렇지만 우리상황에서는 그런 지적은 자칫 오해를 부릅니다. 민족주의 감정과 결부되니까요. 사실 나의 그 그림들은 결코 일본화식이 아닙니다. 당시 김용준 교수도 나의 그림을 신문지상에다 구도상으로나 채색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그림이라고 평가했으니까요. 사실, 한국화라는 말은 중국이 ‘국화(國畵)’라고 일본이 ‘일본화(日本畵)’라는 용어를 쓴것에 대한 반응이었는데, 나는 사실 ‘한국화’라는 개념이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지않습니다. 넓은 의미의 동양화라고 생각해요. 박 : <한국성모자도>는 묘법상으로 전통적인 기법을 따르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조선조시대의 초상화처럼 얼굴은 치밀하게, 균질적인 붓질로 그려지지만 옷차림 묘사는 거의 적당한 선으로 얼버무리는 방법이거든요. 그리고 인물의 배경은 거의 여백으로 처리했지 않습니까. 그런가하면 <청년도>는 운보선생의 <가을>이라는 작품에서처럼 인물들(청년)을 중량감있게 그리고 그 배경은 담묵으로 적당히 메꾸었습니다. 장 : <성모자도>를 전통화법의 답습이라고 지적하는 것에는 이의가 있어요. 옷묘사를 선으로 전통적인 인물화법에서처럼 적당히 얼버무렸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얼굴묘사는 그렇지가 않아요. 나의 그림에서는 필치가 다르지요. 무어랄까. 정확히는 표현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운염’에 가까운 느낌이납니다. 그것은 내가 처음 시도한 것이지요. 또 <청년도>는 서울대 10주년을 기념해서 그린 그림으로 그림에 등장하는 청년들이 바로 서울대학생들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인물 묘법은 운보의 그림에서처럼 세밀화법이 아닙니다. 또 배경은 보통 붓질이 아니고, ‘운염법’에 가까운 기법이지요. 박 : 김용준선생이 선생님의 그림을 두고 전례가 없는 독창적인 그림이라고 평가했던 것도 그 부분이 아닐까요. 그건 그렇구요. 선생님은 성인이나 영웅과 같은 고전적인 인물화를 그렸습니다. 마리아는 기독교의 성인이구, 현충사에 그린 이순신상도 영웅이거나 성인입니다. 이 점은 오늘의 화단, 그리고 화가들로서는 별천지의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에는 성자나 영웅이 없는 시대이니까요. 선생님은 이들 성화를 그릴때, 어떤 심정으로 그렸습니까? 장 : 성자나 영웅과 같은 고전시대의 주제가 현대인에게는 물론 거리가 먼 세계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동양화를 공부하자면 이런 주제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보거나 학습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충무공영정>은 당시 조병옥 박사의 권유로 그리게 되었는데 이때 아산 현충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충무공영정이 낡아서 더이상 복원할 수 없는 형편이었던거지요. 처음에는 그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고전의 세계에 한번 도전해 본다는 생각에서 승낙하긴 했는데 막연했지요. 왜냐하면 충무공을 본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었고, 또 충무공을 그린 화상이 전해져왔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조병옥 박사의 권유로 최남선 선생을 찾아가 뵙게 되었는데, 당시 육당은 저에게 서애 유성용의 ‘징비록’을 읽도록 권유하더군요. ‘징비록’을 읽고 또 이순신 전집 2권을 더 구해 다 읽은 다음에야 성인의 이미지를 그려보게 되었지요. 기록들에는 충무공의 인상이 지극히 선비답고 그러면서도 담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요. 선비형얼굴과 담력, 이것이 고전적인 조형미를 뒷받침하는 원리인데, 선비형얼굴은 그렇다치고 담력을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지요. 도대체 담력을 어떻게 초상화에다 그려넣는다는 겁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담력을 눈에서 풍기게 하는거였어요. 그렇게 시도하면서 자연히 옛화가들이 왜 인물을 그릴때 눈의 정기(精氣)를 강조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전정신이지요. 결국 여러분야의 인사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의견을 거쳐 얼굴형을 조금씩 수정한 뒤 완성했지요. 박 : 같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한쪽은 기독교 문명권의 성인이고 또 한쪽은 동양권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른 문화권의 성인, 말하자면 고전을 다루는데 무슨 갈등같은건 없었습니까? 장 : 지금 이야기 했듯이 충무공을 그릴 때는 충무공의 자료 속으로 들어가 그의 인품을 만나야 했듯이 마리아를 그릴 때도 다르지 않았지요. 내가 본격적으로 그린 <마리아도>는 지금 바티칸에 소장되고 있는데, 그 마리아는 물론 모습이 한국 여인이고 그녀가 안은 아기도 우리들의 아기입니다. 또 마리아는 그 옷차림이 궁중예복을 걸쳤기 때문에 전혀 서양냄새가 나지 않는 거지요. 바티칸에서도 호감을 표했구요. 박 : 고전에 대한 이야기 나왔으니 말인데요, 요즘의 우리화단이나 젊은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너무 세속적인 이해와 관련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풍토가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예술가라는 긍지를 갖는다면 그런 태도는 한번쯤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장 : 그렇습니다. 앞에서 카다로그에 온통 영문으로 자기소개를 늘어놓는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긴 눈으로 보면 쓸만한 화가란 한쪽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그나머지는 모두 거품처럼 사라지고마는 것이지요. 우리 미술계도 화가만 수만명이라니 참 놀랍지요. 물론 예술인구가 많아서 나쁠건 없지만 잘못 생산된 이런 화가들이 작당하여 무슨 운동이니 써클이니하며 설쳐대니 사실, 그림이란 어디 그렇게 작당하여 설치는 일로 해결되는 일입니까. 결국 미술이란,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이고 또 단순한 재주가 아닌 정신적인것의 추구이니 혼자서 탐구할 일이지요. 나는 그런 의미에서 미술이라든가 예술이라고 할때 술(術)자에 불만입니다. 예술이나 미술은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術’자보다 오히려 ‘道’를 써서 예도(藝道)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예술이나 미술이 그저 재주만으로 되는거라면 화가가 그렇게 대단할게 뭐가 있겠어요. 그냥 쟁이인데요. 박 : 미술교육이 잘못되어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선 저도 동감입니다. 손재주만 익히고 머리를 연마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들이 지위, 재물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정말 개탄하는 바이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런 잘못된 관행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장 :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할께요. 어느해 국전이었는데 갑자기 대통령(박대통령때)이 오프닝 세러모니에 참석한다는 것이었어요. 나도 그 현장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당황했지요. 나는 원래 그림이나 그리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그렇게 높은 사람앞에 서있는 것도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형편에서 갑자기 그곳을 빠져나올 용기도 없어서 엉거주춤히 서있었지요. 대통령이 나타나면서 경호원들이 그 전시장에 있던 화가들을 모두 양쪽으로 줄을 서게했는데 나는 어쩔수 없이 뒷줄에라도 서야했어요. 그런데 정작 대통령이 사열하듯 그 앞을 지나면서 악수를 청했는데 앞줄에 선 사람들은 그렇다고치고 뒷줄에 있는 사람들이 대통령의 손을 한번 잡아보려고 마구 설쳐대는 겁니다. 나는 그것을 보며 그때 서글픔을 느꼈어요. 진정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권력자의 손을 한 번 잡아보는 것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그 손을 잡는다고 해서 돈이 생깁니까, 권력이 생깁니까. 돈이라도 왕창 생긴다면 나도 그 틈을 비집고 대통령의 손을 잡았을거에요.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선생님은 젊은이 못지않은 기력으로 호탕하게 웃었는데, 그 모습은 꼬장꼬장한 몸집의 그것도 미수의 나이답지 않게 젊게 보였다.) 박 : 하지만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권력의 손을 잡고서 출세하거나 돈을 버는 화가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구요. 거북스런 질문이지만, 선생님의 애정관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선생님은 잠시 미소만 머금으면서 입을 떼지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우회적으로 물었다.) 서양정신은 부단히 혁명정신으로 이어져왔습니다. 미술의 역사도 그렇구요. 이 점을 애정이나 결혼관에다 대입하자면, 사랑도 부단히 혁명하듯이 바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장 : 나는 물론 서양찬미자가 아니니까, 사랑도 부단히 바꿔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찬동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동양의 교조주의(敎條主義)처럼,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오직 하나만을 고수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찬동하지 않습니다. 빈번한 바꿔치기는 반종이고 파괴이지만 적당한 변화는 쇄신이고 활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박 : 그 적당이라는 것이 문젠데 몇번을 적당이라고 하는 건가요. 한번인가요, 두번인가요. (월전선생은 이 질문에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 웃음속에는 선생이 오직 전통(고전)만을 고수하는 교조주의자가 아니며 그렇다고해서 서구미술의 장단에 무작정 놀아나는 개방주의자도 아님이 풍겨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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