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예술인에게 듣는다 /  무용가 김백봉

춤으로 시작한 인생, 영원히 놓지 못할겁니다

만난사람 : 이병옥(용인대 교수)

 

이병옥 : 몸도 불편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백봉 : 간혹 내 생각과는 달리 표현되어 인터뷰 내용이 전해질때는 참 속상했던 경험이 있는데 이병옥선생님처럼 춤을 진실로 이해하는 분과 대담을 하니 부담이 적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춤 스승과의 인연

: 그 동안에 개인작품 활동한 내용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과 활동한 내용에 대해 먼저 말씀을 듣기로 하죠. 그 중에서 우선 우리 춤에 입문하신 과정부터 들을까요?

: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삶에 있어 선망의 대상이 있을 수 있어서 평생을 그 길로 정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그래도 나한테는 최승희선생님같은 분이 계셨기에 처음의 마음이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여섯살 때 어느 여름날 밤에 자고 있는데 아버지가 흔들어 깨워서는 세장의 사진을 보여줬어요. 그 중에서  장구춤 사진은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죠. 이분은 여자고 춤추는 사람이지만 우리 조선에 자랑이다 하셨어요. 그 때 어린 마음에도 나도 저렇게 되야겠다라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 시작의 발판이었죠. 그리고 나서 최승희선생님 사진이 있으면 돈주고 사서라도 벽에 붙여 놓고 학교 갔다오면 어머니보다 먼저 사진보고 절하고 그랬죠. 중학교 1학년(명륜실과여학교) 때 처음 최승희선생님 공연을 봤는데 그때 당시엔 학생이 공연을 보는 것을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 왔는데 교장선생님이 학교 배지 떼고, 교복 벗고 아버지 책임 하에 갔다오라고 했었어요. 공연이 끝나고 아버지가 앞세우고 간 신문사 기자를 통해서 최선생님 면회를 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만나자마자 최선생님한테  호적을 보여드리니까 최선생님이  비서로 있던 히사꼬한테 “일본아이인 줄 알았는데 조선아이다.”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더니 나이에 비해 키가 크다고 하시면서 손 좀 들어보라고 하시기도 하고, 뒤로 옆으로 세워보시고, 장추화, 하리다요꼬 등의 언니들에게 소개를 했어요. 이듬해 6월 11일날 아버지가 퇴교원서를 써 가지고 학교에 오셔서 절차 밟으시고, 집에 와서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가 가죽구두를 사주셨어요 떠날 때 아버지가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찾아서해라. 사람을 시켜서 하면 안 된다.  이제는 내가 부모가 아니다. 너의 선생님이 너의 부모다. 이제 뭐든지 선생님하고 상의해서 처리해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많이 애썼어요. 일본에 가서는 새학기까지는 학교도 안보내주고, 무용도 못 배우고  해서 어린 마음에 많이 속상했지요.

: 그렇게 마음속 깊이 새겨졌기 때문에 평생동안하는 동기와 정신적인 지주가 됐던 것 아니겠어요. 다음은 최승희선생 밑에서 춤을 배우던 과정, 독립해서 활동하던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주시죠?

 

오늘의 ‘김백봉’이 있기까지

: 최선생님이 제자 키우는 방법이 좀 남다르다고 할까요? 집제자라고 하면서도 집안 뒤치다꺼리까지 다하게 했어요. 한겨울에 그 찬물에서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하면서 어린애가 동상이 걸려서 고생을 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셨는데, 선생님 동경에서 첫무대 나가시기 직전에 학교에 갔다가 집에 와 보니까 기자라는 사람이 손님으로 와 있더라고요. 선생님이 나보고 “차 좀 타와라”하셔서 교복 입은 채로 차를 들고 들어갔는데 기자보고 “너는 참 영광이다. 얘가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텐데 차 대접을 받으니”하셨어요. 평상시에는 한 번도 칭찬 안하고 기르는 제자인데도 남 앞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선생님이 제자를 그런 식으로 키우더라고요. 일반적으로는 하기 힘든 방법이죠. 최선생님은 제자를 교육을 시킨다거나 키우는 데도 속이 깊은 걸 가지고 있어도 공연 때문에 교육시킬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도 설날 3일은 놀았는데 초하룻날은 꼭 연습을 했어요. 오늘 안하면 일년 내내 못하고, 안한다고 하시면서 처음에는 하리다요꼬라는 선배가 기본을 가르쳐주는데 발레를 가르쳐 주더군요. 발레에서 1번부터 5번까지 가르쳐주는데  순서를 몰라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습관이 되어서 봉산탈춤 무보를 기록할 수 있었어요. 처음 무용을 접했는데 유희만 하다가 충격이 컸어요. 그리고 박자를 많이 못 맞춰서 혼도 많이 났어요. 나는 순서 그대로 하는데 자꾸 안 맞는다고 “너 안 가르쳐 줄테니까 집에 가라.”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신궁 옆에 쭉 둘러서 개천을 파 놨는데 거기 가서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죠. 박자가 뭐가 틀렸는지도 알지도 못했는데, 그때 심정으로는 죽고 싶더라고. 내가 강둑에 서 있을 때 다섯살 차이나는 지금의 남편(안제승)이 연습실에서 쳐다보고는 “거기 위험하니까 나와라 빠진다”고 소리치곤 했었어요. 지금은 남편이지만 그때는 내가 어렸으니까 어른과 아이 같은 그런 위치였어요. 그렇게도 무지했던 내가 ‘고전형식’인  지금의 ‘화관무’제일 첫 발표회때 최선생님이 울었어요. 최선생님이 그때 “공부가 무섭긴 무섭구나!”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있어요.

: 최승희선생님 연구소에서 배우시는 과정을 좀 더 이야기해 주시죠?

: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거는 많은 걸 가르쳐 주시는 게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방울이 생명을 유지하듯이 춤이 정말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딱 집어서 가르쳐 주시는 거 그게 기초를 닦는데 필수적인 발판이 됐죠. 최선생님 교육방법은 진도 나가는 것보다 포지션이 안되면 더 안 가르쳐 줬죠. 포지션이 틀리면 너무나 엄격하게 지적하곤 했어요. 나는 많은 걸 배우지  않았지만 그런 선생님한테 오리지널을 배웠어요. 그렇게 좋은 선생님 만난 것이 오늘날의 내가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된 거라고 봐요. 선생님 작품들은 내 눈 안에 내 머릿속 안에 남아 있는 것이 그게 공부고, 눈으로 보고 잡아채야지 요즘처럼 무조건 가르쳐주고 먹여주는 건 소화가 잘 안돼요. 나는 선생님 춤을 배우려면 무대 뒤에서 옷도 다 챙기고, 막 뒤에서 그림자보고서 포즈하고 감정을 익혔죠. 그런데 요즈음의 공부는 기교적인 면은 많이 발전했지만 생명력이 사라져 가는 듯 합니다.

 

김백봉만의 춤세계 만들어…

: 이제는 선생님 밑에서 활동하시다가 독립해서 작품 활동하신 내용하고, 서울에 내려와 활동하신 이야기 등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세요.

: 내가 어떻게 해서 최승희선생의 맥을 잇고, 오늘에 내가 있느냐 하면, 작품세계는 물론 나한테 있지만 작품구성이나 흐름이 뭐라고 집어주지 않아도 선생님과 무대에 같이 서서 선생님 작품을 같이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맥을 이어가는 류가 되는 거잖아요. 무대예술의 구성이라든지, 흐름이 자연스럽게 내 몸에 스며든 것이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춤 따로 배우고 무대 따로 가지기 때문에 예술가가 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최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춤은 명랑하고, 밝고, 깨끗하고 깊은 맛도 있으면서 쾌활하죠. 선생님같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모방하다 보니까 나의 춤 세계가 만들어지더군요. 최선생님의 작품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거의 전부가  생활무용은 아니었어요. 가령 농부가 농사를 짓는다거나, 키질하고 방아 한다거나, 지게 메고 바구니 들고, 꽃 꺾고 나물 케는 등의 생활 속의 무용이 선생님한테는 없었죠. 제가 발표하면서 최선생님하고 다른  면이 선생님을 모방하되 생활무용을 시도했어요. 그래서 첫 발표회때 했던 것이 ‘물긷는 처녀’였어요. 이북에서 물동이 춤을 하는데 지금 이런 이야기하면 뭐하지만 내가 안무했던 몇 가지 동작이 들어있어요. 원래 내가 시골에서 우물가에 살았었어요. 그래서 물긷는 처녀가 물동이 메고  물 길러 나왔다가 동네 아이들하고 놀다가 해 떨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으로 만들었죠. 또 ‘녹음방초’라는 작품은 청년이 지게 지고 봄피리를 불면서 옆으로 지긋이 누워서 봄을 느끼면서 농사짓고, 자연과 더불어 하는 생활무용 중심으로 많이 했죠. 지금은 흔히  다들 많이 하는데 최선생님때는 좋은 춤만, 고고한 주제를 위주로 많이 했죠. 또 한 예로 선생님께서는 내가 안무한 화관무와 같은 음악은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옛날무용을 하려면 악사 선생님들한테서 나오는 게 ‘염불, 도드리, 타령’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10박짜리 음악을 5박으로 끊어서 춤을 다시 했어요. 왜냐면 마지막에 ‘따르르르르르’길게 하던 것을 ‘따꿍’으로 끝내면서 같은 것이라도 춤이 발랄하게 됐죠. 화관무는 내가 스무살에 만든 작품이었는데 그 춤가락을 보고 최선생님이 “그 가락 좋다”라고 하시면서 잘 했다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사위가 좋다. 공부가 무섭다”하시면서 눈물을 훔치셨었죠. 또 ‘지효(至孝)’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심청을 말하는 것이고 솔로였죠. 이것이 처음으로 우리 춤을 가지고 어떤 철학적인 내용이 내포되는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춤으로 창작했죠. 춤가락만 넣어서 추던 춤에서 현대무용같이 내용을 깊이 있게 만들고자 하는 욕심에서 만들었죠. 내용은 무대는 반반한 마루지만 몸 움직임은 전부 큰배를 타고 가는 모습으로 동작을 하면서 효녀 심청의 심정을 표현하고 어떤 때는 배를 타지 않고 심청의 ‘불효여식 심청은 죽사오나 대명천지를 보옵소서’라는 나의 심리적 정신세계를 표현하려고 했었죠. 화관무는 88올림픽때 거족적인 우리민족의 태평성대를 표현하는 춤을 추고 혼자 추던 춤이 몇백 명씩 데리고 하다 보니까 자이언트한 예술이 됐죠. 매스게임이 아닌 운동장에 끌고 나가는 무용예술이었죠.  제가 서울에 정착한 후에 그 밖에 만든 작품으로는 무용극 ‘우리마을에 이야기’, 민요음악만 가지고 어려서 사랑했던 사람이 고향을 떠났다가 노년에 둘이 만났을 때의 회한의 감정을 스토리로 전개한 ‘내고향’, 그리고 무용시의 형식인 ‘숲’, ‘마음’등이 있습니다. 특히 ‘마음’은 ‘지효’와 똑같이 인간의 마음이 표현됐던 작품이에요. 내가 종합적으로 현대무용, 발레 등 최선생님한테 배웠던 기능을 활용해서 무용수들을 훈련시켰기에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처음에 청결한 마음, 인간의 도도함, 사색하는 마음 등을 표현하고, 여러 가지 마음이 갈등을 하는데 결국에는 선한 마음이 갈등을 덮어버린다는 내용으로 그래서 인간의 여러 가지 심리묘사를 국립극장 무대전체를 치마로 덥고 그 속에 40명의 무용수가 들어가서 하나 하나의 마음을 표현했어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춤가락을 기저로 철학적인 것을 표현하는 그 당시에는 처음으로 도전하는 안무스타일이었죠.  

: 멕시코올림픽에 참가했던 것이 ‘고전형식’을 ‘화관무’로 이름을 붙여서 나갔었나요?

: 멕시코올림픽에 가면서 ‘고전형식’하면 영어로 ancient style이라고 하니까 작품 이름이 아니라고 해서 ‘화관무’라는 이름으로 바꿨죠.

: 부채춤은요?

: 부채춤은 이남에 와서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죠. 솔로로 추던 춤을 멕시코올림픽 때 나라에서 의상도 해주고 공연비도 준비가 된다고 해서 군무 작품이 나온 거예요. 그때 안 가려고 했는데 의상 해주는데 왜 안가냐고 해서 갔어요. 그 때 사실 당의 옷 한 벌하는데 얼마나 힘든지.

: 그 때 무당춤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 그렇죠. 무당춤도 대단했죠.  

: 무용극 작품으로는 대표적인 것으로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 ‘우리 마을의 이야기’, ‘심청’, 한국의 전통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 ‘선의 유동’, 시골 노처녀들이 시집을 못 가고 할 일이 없으니까 애들하고 놀면서의 마음을 표현한 ‘싱숭생숭’, 장애자의 꿈을 그린 ‘잊어버린 하늘아래’등이 있죠.

 

대표적인 작품들

: 김백봉선생님의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 나는 ‘화관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부채춤‘을 앞세우더라구요. 화관무를 사람들이 정재무용을 모방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시대적으로 정재 무용을 구경할 수가 없었어요. 언니들이 시집갈 때 활옷 입고 한삼끼고 있던  것이 생각나서 춤이 나온 거예요. 화관무로 한국춤을 추면 반듯해요. 한삼끝까지 자기 춤이 제박자에 전달이 돼야 되요. 그럼으로써 팔의 획이 확실하게 움직이는 요령을 알고, 족두리를 썼기 때문에 흐트러지면 보기 싫어서 몸을 반듯하게 하는 춤의 절대적 요소이면서 가장 기본이에요. 무게도 있고. 부채춤은 우리 나라의 고귀한 품위가 들어가 있으면서, 우아한 미를 간직하고, 의상에서의 귀족적인 색깔이 나타나고, 음악은 창부타령이니까 민속적인 음악을 쓰죠. 한국의 참 고귀한 상이라고 볼 수 있어요. 부채춤은 정말 품위가 있어야 돼요. 또 그 딱딱한 대나무 살을 통해서 부드러운 부채의 포물선을 그리는 미(美)의 조화로움, 부채를 펴고 접는 동작에 기백이 있고 부채의 창호지에서 음률이 흘러요. 그 소리가 연주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돼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좋다고 하는데, 그게 좋은 것이죠. 그리고 작품 ‘만다라’는 최승희 원작 ‘보현보살’을 재구성한 군무로 부처를 통해 명등공양으로 중생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내용의 춤이었고, 무용극 ‘심청’은 한국적인 특징과 용궁장면과 현실을 오버랩시켜 꿈의 세계를 펼쳐낸 대표작이라 할 수 있죠.

 

우리 무용계의 변천

: 선생님께서 오랜 세월 살아오시면서  우리 무용계를 지켜보셨는데, 지금까지 무용계의 산증인으로서 변천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무용에는 기본적인 큰 틀이 있어서  외국무용에서 현대무용과 발레, 우리 춤에서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으로 나뉘는데 창작무용이라고 하면서 딴 짓들을 해요. 우리 춤을 추려면 우리의 기본을 확실하게 몸에 지니고 뭔가  한두 가지라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적인 춤사위를 가지고 창작능력을 발휘해서 풀어 나가야지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짜깁기 하듯이 풀게되면 우리 춤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리고 미래의 전통이 될 수가 없어요. 미래의 전통을 만든다는 입장에서 전통무용을 제대로 출 수 있으면서 창작을 해야죠. 기본은 물론 갖춰져야 되고요. 그것을 푹 우러나게 배우고 창작을 해야지, 그 춤 한가락도 제대로 소화 못하는 사람이 창작한다고 덤비니까 안되는 거예요. 그리고 신체의 특성상 어릴 때부터 몸을 만들고 동작을 만들어 놔야 되는데 교육이 뒤집어졌어요. 어려서부터 하지 않고 대학와서 4년하고 이해타산만 따지지, 무르익은 과일 같은 춤을 추는 무용인이 극히 드물어요. 옛날에는 무용과에 무용하고 싶은 사람이 들어 왔는데 최근에 와서는 대학을 갈려고 무용과를 가요. 또 무용가가 되려면 자기 소신껏 선생님을 선택하고 쫓아가야 되는데 유명한 대학에 가려고 춤이 되든 안되든 그 대학에 류를 배우다 보니까 다 딴 짓들을 하고 있어요. 물론 창작은 딴 짓을 해야되긴 하지만… 예술로서의 무용을 대학의 무용과에만 의존하면 안되요.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진짜 무용가가 되려면 학교수업외로 선생하고 제자가 서로 무용에 미쳐서 연습을 해야 돼요.

 

남과 북의 춤을 바라보면…

: 요즈음 북한무용도 남한에 와서 공연도 하고 그러는데 북한과 남한의 무용이 지향해야 될 문제, 또 북한무용과 남한무용을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죠?

: 북한무용은 집단무로서 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초기능적인 면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좋은 것만 따지자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정중동의 무게가 있죠.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춤을 보지 않으면 상대방의 춤을 상당히 폄하할 수 있죠. 그들의 춤이 기능적으로 훈련이 잘 된 빠른 기계적인 동작의 흐름이라면, 우리 춤은 자기가 태어난 곳, 즉 넓게 보면 우주라 할 수 있는데 팔 하나를 뻗어도 눈길 한 번을 줘도 그 우주 끝까지 닿을 수 있는 춤이죠. 그 깊은 맛을 낼 수 있죠. 반면에 북한은 기교위주로 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북한 무용을 보면 최승희선생님의 춤의 모습이 맥을 이어서 북쪽의 요즈음 춤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는다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언뜻 가끔 툭 차고 나오는 맵시 같은 것에서 느낌만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은 했죠. 그러나 최선생님의 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는 표현은 좀 비약이 심한 것 같네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주 소련을 가서 구경도 하고, 또 춤선생으로 소련무용가를 불러다 가르치니까 발레스타일로 변할 수 밖에 없었죠. 그리고 우크라이나나 헝가리같은 동구권에서 포크댄스 같은 춤을 자주 접하다 보니까 자꾸 거기에 흡사하게끔 움직임이 닮아갈 수 밖에 없죠. 최승희선생님이 북에서 퇴출되고 나서는 그들이 최선생님한테 춤을 배울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전해듣기로는 6.25 끝나고 중국에서 활동을 한적도 계셨다고 하는데…  6.25 이후에는 안성희가 소련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하는군요. 본래 안성희스타일은 테크닉을 위주로한 재주가 많았어요. 성격이 나랑 전혀 반대의 춤을 췄어요. 북한무용은 이 안성희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죠.

: 그래도 북한 춤은 최승희선생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잖아요?

: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맵시 같은 것에서 같다라기 보다는 느낌이 비슷할 뿐이지요.

: 최승희선생님 작품을 처음으로 보고 감동 받았던 춤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시죠?

: 제자를 청하러 가는 날 선생님 만나기 전에 객석에 앉아서 봤는데, 그 때 공연장에 앉아 있으면서 하늘에 은총을 받아서 성지에 와 있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또 내 생각에 어떻게 나를 아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나만 쳐다보고 춤을 추는 거예요. 보살춤을 추는데 한 손은 일직선을 똑바로 그리면서 내려오고, 한 손은 똑바로 옆을 선을 긋고 지나가면서 나오는 자태에서 풍기는 그 감동을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그 때 봤던  보살춤의 인상으로 지금 내가 보살춤을 추는 거예요. 또  하나는 최선생님의 눈빛이었어요. 객석 구석구석마다 앉은 사람 모두가 다 자기를 보고 춤을 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눈빛이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했는데 언젠가 내가 춤을 추고 내려 왔을 때 아는 사람이 “어떻게 나 있는 자리를 알았어”하는 소리를 듣고 선생님의 그 눈빛에 느낌에 가깝게 왔구나하는 생각을 했죠. 내가 학생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요. 시선을 둘 때 이 지구에서 태양계를 지나 은하수를 지나서 우주 본체의 기를 보려고 하라고. 최선생님의 눈이 바로  그런 것이었어요. 선생님의 춤이 ‘좋다’ ‘이쁘다’를 떠나서 관객을 숨 하나 못 쉬게 끌어들이는 그런 매력이 있었죠. 그만큼 최선생님의 춤에는 후광이 있었어요. 그 만큼의 기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요.

: 그 때 보살춤 외에 어떤 춤이 있었죠?

: 수건 갖고 하얀 저고리에 빨강치마를 입고 ‘한강수야 ---’(곡조가 한강수 타령이 아님) 음악에 맞춰서 쪽찌고 나왔던 생각이 나는데 허리를 꽉 매서 육체의 선이 잘 드러나게 입었죠. 선배언니들이 나와서 짤랑짤랑 소리나는 남방계열에 춤도 관심 있게 봤죠.

: 따님인 안병주교수가 대물림을 하는데 있어서 기대가 될텐데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 누군가가 마지막까지 해주는 것이 대물림이죠. 막내도 하고, 손자도 하고, 손녀도 하고 있지만 춤추는 것은 자기가 연습하면 되지마는 정말 힘든 환경에서라도 굴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속해 주면 대물림인데, 요즈음은 또 옛날에 배웠던 제자들도 찾아와서 같이 공부하고 그러는데 그것이 전부 대물림이죠. 대물림이라는 것은 내 핏줄만 아니라 무용에 있어서의 내 핏줄기 제자들도 다함께 진지하게 내가 있는 동안에는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죠.
최근 우리 무용계는…

: 최근 우리 무용계를 바라보고 느끼신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 한국 춤을 아무리  만들려고 해도 음악이 없어요. 요즈음도 내 심중에 맞게 만들려고 하면 기존의 음악가지고는 못하겠어요. 그만큼 무용가가 창작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작품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작곡의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나한테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어요. 그래도 가장 최근 들어서는 국악과가 생기면서 차츰 해소가 되는 것 같아 반갑기는 하지만… 덧붙여서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무용이 들어가 있어야지 다른 예술과 병행해서 클 수가 있어요. 음악, 미술, 문학 등 타 분야는 다 그렇게 하면서 오로지 무용만 체육의 일부분으로 교장 재량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답답하죠.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춤 잘 추는 나라로 아주 특수한 나라거든요. 이런 교육환경이 무용예술을 말살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다음에 대학교과과정에서 문교부가 교수 연구실적위주의 행정편의주의적인 정책은 절대적으로 개선돼야 해요. 교수가 학생들 잘 가르치는 것을 최고로 인정해 줘야지 교수 자신의 작품 발표회 한 걸 점수제로 하는 것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진흥기금타서 하게되면 몇 명밖에 참가할 수 없다고요. 그러면 나머지 학생들은 언제 무대에 서 보고 언제 춤을 배우냐고요? 내가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교수가 좋은 실력 가지고 얼마만큼 충실히 가르쳤는가를 가지고 점수를 줘야지 자기 발표회하는 것 가지고 점수를 주니까 나와서 발표하기 바빠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교육은 소홀해질 수 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에는 앞서서 했던 것도 지속적으로 하지만 처음에는 생활을 주제로 발표회를 하고, 두 번째는 ‘선의 유동’같이 자진걸음만 연속으로 하는 춤, 그 다음에는 도는  것을 중심으로, 뛰기 전에 ‘생의 약동’같이 발랄한 춤을  추고, 그 다음에 ‘무녀도의 인상’같이 뛸 수 있는 작품을 했단 말이에요. 내가 돌고 뛰는 춤을 추니까  사람들이 한국춤 안 추고 서양춤 춘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 농악을 보면 도는 것이 서양의 동작이라고만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뛰는 것도 그네 타기, 줄타기, 널뛰기 같은 것들이 전부 우리 나라 동작 아니에요? 그렇게 잘 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내가 뛰면 이상하게 서양 점프한다고 하거든요. 내가 춤을 발표할 때는 이번 발표회는 어떤 양식으로 한가지라도 변화한 것을 보여 드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했어요. 여러 작품을 하면서 하나 하나의 춤 속에 뭔가 특별한 동작들을 넣기 위해서 발표회 한번 할 때까지 고통과 고민 속에서 실험적인 생각으로 발표회를 했어요. 기본동작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자면 무용가 각자가 서로 기본동작이라고 하는데, 기본동작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민속춤 안에서, 최선생님을 비롯해 선생님들이 추던 춤들 속에서 정립된 것이에요.

: 그 동안에 활동하시면서 재미있고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 올림픽때 학생들하고 무용수들이 같이 합류해서 화관무를 췄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교육시킬 때 한 자리에 모일 수가 없잖아요. 바둑판을 끊어 놓은 것처럼 따로 수업을 하고 한자리에 모였을 때는 장관을 이뤘죠. 춤을 표시할 때 예를 들어서 팔을 들어 흔들 때 천천히 흔들 때는 ‘버드­나무 버드­나무’했고, 빨리 흔들  때는 ‘흔들흔들’하고, 춤 용어라든가 대형을 지을 때 ‘불어 온다’, 또는‘고구마’, ‘감자’, ‘태양의 열’, ‘태풍에 눈’등으로 화관무 별칭의 이름을 지어주어 몇 천명을 교육시킨 것이 기억나는군요. 끝나고 나서는 ‘내가 올림픽에 참가했다’라는 자부심을 느끼는 학생들을 볼 때 흐뭇했었죠.

: 선생님 최근에 근황은요?

: 활동은 선생님들이 초청해서 작품지도도 하고, 강습회도 하고, 오늘도 경희대에서 강습을 마쳤어요.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까 내 자신을 정리할 시간이 없네요. 그런데 지금도 무용을 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쁘고 그런데 무용을 안 하면 머리 아픈 문제들이 생겨요.

: 그래요. 춤으로 시작한 인생이라  돌아 가시는 날까지 아마 춤을 놓지 못하실 거예요. 선생님 연세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혹시 못 다한 말씀이라도 있으면 마지막으로 한 말씀하시죠.

: 다 할려면 끝이 있나요? 이선생님도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