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지킴이 /  예인 조도화

한손에 피리, 한손에 장고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

 

“이제, 제일하고 싶은 일이 뭐에요?”
“땅속에 들어가는 거

1914년에 태어나 올해 나이 87세. 곧 미수(米壽)가 되는 조도화(曺道化)옹. 청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며 그의 목소리는 거의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쇠’소리가 난다. 또 지팡이가 있어야 걸을 수 있다. 화장실가기에도 불편한 다리지만 자전거는 아직도 잘탄다. 대문간에 서있는 수십 년 전 패션의 자전거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닦여져 있다.
그는 피리와 장고의 대가이며 ‘능주씻김굿’의 악사 역할을 하며 화순(和順) 능주(綾洲)의 예맥을 이어가는 예인이다. 화순에서 조도화옹은 ‘한 손으로는 피리를 불며 한 손으로는  장고를 치는 명인’으로 통한다. 한 손에는 피리, 한 손에는 장고를 잡는 사람이라는 화순사람들의 전언은 전설적 장구잽이 조도화의 기예를 최고로 예우하는 칭송일 것이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질

그는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187-1호에 살고있다. 능주면 석고리에서 태어났으니 한평생을 능주에서 보내왔다 할 것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 그는 타관을 떠돈 적도 많았다. 중국과 일본에서 요리집을 경영한 적도 있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창극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떠돌며 생활한 적도 있다. 내면 가득한 그의 천부적 재질이 그를 한 자리에 붙잡아 두지 못하였고 그의 재주를 아끼는 주변사람들이 많아 그들 또한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천부적 기예를 아끼는 주변 사람 중에는 그를 이용해 돈벌이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진정 그의 기예를 사랑하여 옆에 두고 듣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조옹의 장구솜씨를 좋아했던 유명정객 몇 명의 이름도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재질은 오롯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선친은 조종율(호적명은 曺正萬)이다. 남사당 출신으로 생각된다. 조정만은 능주 신청(神廳) 출신으로 일찍이 줄타기와 승무에 능했다. 그런 명성이 한양에까지 전해져 고종이 그를 초청하여 공연하게 하였다. 왕앞에서 공연하게 된 조정만은 그의 기예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줄타기를 하면서 줄위에서 승무를 추었다. 이에 감탄한 고종은 조정만에게 정9품의 벼슬을 내렸다. 실제로 고종 앞에서 공연을 했는지 등은 고증을 더 필요로 하는 부분이지만, 한 묶음 정도의 굵기밖에 안되는 줄위에는 서있기도 어렵다. 그런데 그 위에서 승무를 추었다고 하니 그 기예의 출중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줄타기는 남사당의 대표적인 놀이다. 그런데 조도화옹의 선친이 줄타기에 능했다는 점은 조도화옹의 선친이 남사당과 깊은 관련이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남사당과 관련되지 않고 단순히 남사당의 줄타기 공연을 구경한 다음 흥미를 느껴 줄타기를  배웠을 수도 있으나 줄타기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놀이라 전문적인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쉽게 익힐 수 없다. 그리고 뛰어난 재질을 갖지 않고서는 줄타기의 이런 수련과정을 견뎌내기도 어렵다. 따라서 조정만이 줄타기부분에서 최고의 기예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남사당에서 고도의 전수과정을 견뎌낸 결과로 추정된다. 조도화는 선친의 이러한 재질과 수련과정을 견디는 인내를 함께 생득한 것 같다. 그런데 조도화의 이런 재질은 19세가 되어서야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글공부를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8살부터 10살까지는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다. 이때 닦아둔 한문실력은 두고두고 힘이 되었다. 판소리나 국악의 여러 장르를 배울 때, 그 내용을 누구보다 빨리 습득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남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수도 있다 한다. 그리고 서당에서의 한문공부는 경제적으로도 힘이 되었다. 한문해독이 가능했기 때문에 독서가 가능했고 이 때문에 몇 년 전까지 사주팔자 풀이나 택일 등을 해줘서 ‘몇 푼’의 부식비용도 마련했었다 한다. 집에는 책으로 빼곡한 6단짜리 책장이 하나 있는데 이 중에 민속이나 제례, 운명풀이와 관련된 책들이 많다. 한문투성이인 이런 책들을 읽고 주변 사람들 물음에 답했던 것은 모두 서당에서의 한문수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서당을 마친 조도화는 능주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1살부터 13살까지 다녔는데 그 때 같이 다닌 동창중에 널이 알려진 인물로는 광주에 사는 홍남순변호사가 있다. 한문과 한글을 배운 그는 한때 광양에 있던 박춘금(일본 참의원)의 금광에서 서기로 근무했었다. 그러나 그의 숨은 재질은 19세를 지나면서 서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여, 20세가 되던 1933년부터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내면에서 꿈틀대던 천부적 기예와 방랑의 운명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고와 북, 피리, 그의 천부적 재질 위에서 꽃피워

요릿집을 경영하는가 하면 여러 선생님들에게서 고법, 피리, 판소리 등을 사사받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요릿집을 연 곳은 순천이었고 상호는 승광원(升光園)이었다. 당시의 요릿집은 기생과 같이 술을 마시는 곳이라 한다. 재산이 많지 않았던 그가 요릿집을 경영하였다는 것은 그의 문자속과 회사근무경력 그리고 잘 생긴 외모에 의탁한 돈많은 사람의  위탁경영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는 현재 87세의 고령이지만 그 정도 나이의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는 그 모습이 잘 찍혀 나오지는 않지만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목구비가 여자처럼 유순하고 오밀조밀하게 조화되어 있다. 87세에도 그런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 젊었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마 그가 요릿집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장고, 피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의 얼굴 생김새와 무관치 않았으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이한량선생과 주봉현 국고의 수제자 김막동선생에게서 북을 사사받았다. 그리고 대금과 피리, 태평소를 잘 하던 김흥순에게서 조귀남과 함께 피리를 사사 받았다.
조도화옹은 무등산 자락인 만연산에서 판소리도 배웠다. 그때 교류하던 인물로는 임방울, 조병험, 조몽실 등이 있다. 조옹은 판소리도 배웠지만 그보다 북에 더 매료되어 고법사사에 더 정진했다. 그가 북이나 피리를 배우면 습득 속도가 남보다 빨랐다 한다. 그리고 잘 쳤기 때문에 판소리 잘하는 사람들이 조옹의 고수에 맞춰 판소리를 한 번 불러보기를 원했다 한다. 박초월, 박귀희, 김소희 등과도 짝을 이뤄 판소리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다. 장고와 북, 피리가 그의 천부적 재질 위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 함께 활동하자는 제의도 여러 번 있었지만 서울가면 ‘사람 망가진다’는 생각 때문에 고향 화순을 떠나지 않았다 한다.
그는 21살에 결혼한 첫 번째 부인과는 일 년만에 사별하고 이듬해 두 번째 부인인 공점례(孔占禮)와 결혼했다. 두 번째 부인 공씨는 화순 능주 지역에서 판소리로 이름을 드높인 공창식의 딸이며 함께 국악을 했던 공기남의 여동생이다. 공씨는 현재의 자식 삼남 사녀를 낳고 70년 12월에 기세했다. 지금은 71년에 만난 양분녀(71)와 30년째 해로하고 있다. 양씨는 공씨가 낳은 자식들에 대해 많은 칭찬을 늘어 놓았다.
조옹은 판소리를 많이 배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판소리를 배우던 시절 얘기에서는 한층 신이 나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판소리는 배우기 어렵다. 혹독하게 훈련한다. 누구 누구의 목청은 어떻고 누구 누구의 목청은 어떻고 하는 얘기를  많이 했으나 안타까운 것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점이다. 누구 누구요? 어떻게요? 하고 재차 물을 수도 있었지만 한여름, 땀을 흘리며 애써 답하는 고령의 노인에게 다시 묻는다는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안타까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목에서 피가 나온 다음 맑은 똥물을 마시면 목이 많이 진정된다는 것과 ‘명창 조상현이 똥물을 많이 먹었대’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지역에서는 당골네 자식들중에서 판소리나 국악쪽으로 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보고 듣는 것이  그것이었응께 그럴 수밖에 읍었지’. 보고 듣는 것이 그것이었다는 것은 그 재질과 잠재의식에 흐르는 예술혼의 피를 어쩌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는 것으로 들렸다. 목으로 흐르는 땀을 닦는 조옹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섞어 큰 소리로 하나 더 물었다.
“누구 소리가 제일 좋았어요?”
“송만갑이여. 구례사람이야. 긍께…… 거기, 정정렬이도 좋았재.”
이렇게 배운 그의 기예는 나중에 능주 씻김굿의 맥을 잇는데 바쳐진다. 능주 씻김굿의 맥을 잇기 전 그는 중국의 만주 목단강 주변에서 요릿집을 운영하기도 하고 일본 동경에서 ‘아사쿠사(淺草)’ 싸롱을 운영하기도 했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중국여자, 일본 여자들과 함께 살기도 했으며 애틋한 사랑도 나누었다 한다. 고향에 부인과 자식이 있음에도 그의 이런 식의 방랑생활은 일제강점, 한국전쟁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금강산 비로봉에서 일출도 보았고, 일본 열해(熱海)해수욕장이니 하는 명소와 중국의 명소도 안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서울국악성악연구회의 김용승과 함께 동일창극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일주 했다. 창극단 단원들은 모두 30명 남짓 되었으며 단원 중에는 박기채, 조동선, 정광수, 조난영, 조금옥 등이 있었으며 명창 강도근도 단원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도착하면 포장을 치고 ‘창극을 놀았다’고 하는데 창극이라고 하여 판소리를 분창하여 부르거나 한 사람이 한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수준의 창극이 아니라 여러 관객들 앞에서 판소리의 일부나 민요 등을 부르는 일종의 ‘쇼’와 같은 공연이었다. 조도화옹은 이때 전체 연출을 맡아 하거나 고수의 역할을 했다. 심청가의 슬픈 대목에서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이 장면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한다. 당시 동일창극단 입장료는 40전∼70전이었다. 당시의 화폐가치를  물으니 ‘10원으로 장보던 시절’이라 한다. 정확한 연대와 공연장소 공연프로그램 등이 궁금하였지만 노옹의 건강을 생각하여 다음 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닦은 연출실력과 연기 실력은 1986년 9월 전라남도 주관 제15회 남도문화제 화순군 출연작인 ‘능주들노래’를 연출하여 장려상을 받았고 1987년 10월에도 전라남도가 주관한 제16회 남도문화제 화순군 출연작인 ‘능주들노래’를 연출하여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화순군이 관내 ‘영벽정’에서 주최한 북·장고 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능주 씻김굿’의 기능을 이어가기로 함으로써 화순 능주의 문화지킴이가 된 것이다

2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중국과 일본, 전국  곳곳을 방랑하기도 했던 조도화옹은 40대 후반이 되어 화순에 완전히 정착한다. 그러면서 젊은 시절 틈틈히 함께 했던 ‘능주씻김굿’의 무녀들과 함께 그 맥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의 유혹, 유명해진 판소리·고수동학들의 권유등을 뿌리치고 더 이상 화순 능주를 떠나지 않기도 결심한 것이다. ‘능주씻김굿’의 기능을 이어가기로 함으로써 화순 능주의 문화지킴이가 된 것이다.
‘능주씻김굿’의 기능보유자로는 조도화외에 박정녀, 임장업, 조양금 등이 있다. 능주굿은 모두 12거리다. 혼맞이이 굿에서 시작하여 2.조왕굿 3.안당 4.문전굿 5.선부리 6.제석굿 7.오구굿 8.고풀이 9.씻김굿 10.길닦음 11.대신거리 12.사신거리로 끝이 난다. 굿에 사용되는 무구로는 정주, 징, 장고, 꽹과리, 북, 해금, 피리, 호적, 젓대, 손대, 넋, 지전, 넋상자, 허수아비, 길베, 무복, 고깔, 곳대 등이다. 화순부근의 다른 굿과 다른 점은 굿의 거리가 더 많다는 점과 혼을 먼저 불러와서 굿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박정녀와 임장업이 주무이고 조도화 등이 반주를 맡았었다. 박정녀에 의하면 조할아버지는 장고를 아주 잘쳤고 조할아버지 때문에 자신들이 힘든 줄 모르고 며칠씩 무가를 불렀고 굿판을 달궜다 한다. 조옹의 반주가 없으면 굿이 안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능주씻김굿’은 조옹의 표현대로 작파된지 10년이 넘었다. 능주굿의 기능보유자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굿은 안되고 있다. 조옹이 북채와 장구채를 놓은지도 3여년이 넘었고 이제는 피리소리를 내기도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굿을 해달라는 사람도 줄고 나이도 들어서 굿을 그만두었지만 자식들과 그 자식들에게 자기 조상이 무당이었다는 것이 부끄러울 것 같아 자손들에게 짐이 될 수 없어 굿을 그만두었다 한다.
‘능주에 붉은 꽃은 곳곳마다 금산(錦山)이라’하여 풍류과 예인이 넘치던 곳이 능주다. 국악부분에 숱한 인물들을 배출한 곳 또한 이곳이다. 이곳 능주에 남아 닳아가는 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조도화. 늙고 병들어도 기회와 사람만 있으면 자신의 기예를 전하고 싶다 한다. 조사에 동행했던 화순군청 심홍섭 문화재전문위원이 전수할 기회를 꼭 만들겠다고 다짐하듯 얘기했으니 이제 능주굿의 음악이 그 맥을 이어가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