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평론 /  평론의 본질을 밀힌디 3   미술

비평의 함정에 빠진 비평

심상용 (미술평론가, 동덕여대 교수)

 

최근에 이브 미쇼(Y. Michaud)는 자신의 저서 <예술의 위기, La Crise de l’art contemporain>에서 비평의 건강을 문제삼는다. 잘라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비평의 막다른 골목, 각종의 상업적 제약과 행정적 처신 안에서의 상시적 무력감을 지적한다. 이를 위해 그는 보다 현실적인 몇몇 근거를 나열한다.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비평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복수주의와 재빠르게 노화를 추진하는 후기 산업사회의에서 비평의 위세의 상대적 축소, 상호존중의 사회학이 야기시킨 합의와 일치, 그리고 이에 따른 갈등과 논쟁의 부재를 언급한다. (이브 미쇼, 「예술의 위기」 하태완역, 동문선, 1999, 131~133)
그런데, 이 같은 짧은 언급은 하나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것은 비평이 앓고 있는 질병이 단지 현대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가정 같은 것이다. 현대 이전에는 비평이 건강했을 것이라는… 그러나 곧 언급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해다. 몇몇 증세는 사회 구조상 달리 나타났거나, 혹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평은 자신의 젊은 시기에서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건강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 글은 애초부터 권력의 밀실이 관련됐던 비평의 출생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서로 다른 구성인자들을 매개시키는 커뮤니케이션 작용으로서 비평의 특성을 살피게 될 것이다. 비평의 존재론적 한계의 윤곽을 그려보자는 이 시도는, 불가피하게도 비평의 앞날에 대한 예견 같은 것을 담게 될 것이다.

 

비평, 권력의 의붓자식

미술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사실만큼이나 습관적으로 잊어버리는 사실은 비평도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나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조금 덜 망각한다면, 비평을 단지 예술행위에 대한 꽤 지적인 개입이나 작품의 해석 정도로만 간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재 비평이 앓고 있는 병을 이해하려면, 비평이 한 시대의 주어진 커뮤니케이션의 지평 위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커뮤니케이션의 형태와 유형이 변하면, 집단의 성격과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도 바뀐다는 점이다. 즉, 각각의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에는 한 유형의 사회성이 대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금의 비평, 소통으로서 비평  방식 역시 한 분명한 집단의 성격과 그것들의 권력적 상호작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군중심리학자인 귀스타브 타르드(G. Tarde)는 비평의 출현이 프랑스 대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밝힌다. 그를 따르자면, 비평은 혁명정부가 이례적으로 강화했던 현상 중의 하나였다. (세르쥬 모스코비치, 「대중의 시대」 이상률역, 문예출판사, 1996, 331쪽)
아놀드하우저(A. Hauser)도 정치적 격변이 직업적인 비평가들에게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놀드 하우저, 「예술의 사회학」 최성만, 이병진 역, 한길사, 1983, 104쪽)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는 비평을 가장 효과적인 국민교육의 수단으로 간주했던 18세기 영국에서 자명하게 드러났다. 비평은 권력의 선동자였던 것이다. 혁명정부는 정당성의 입증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문학적 재능과 상상력을 겸비한, 이른바 ‘평론가’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비평은 권력의 의붓자식처럼 탄생했다.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수단으로, 선동과 교육의 요구에 의해 역사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널리즘비평과 진정한 예술비평사이의 분업이 이루어졌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신문사를 끼고 작용하는 것이건 대학의 비호를 받는 것이건 큰 차이는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주어진 사회의 존속에 관여하는 세력의 부산물들이고, 비평을 담당하는 자들은 그 세력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보조를 받고 그러한 세력을 방조하는 무리들이었다.”(「아놀드 하우저」 위의 책 91쪽)
저널리즘 비평가들이 그들이 소속된 회사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아카데믹한 비평도(보다 은밀하기는 하지만) 대학강좌의 임명권을 둘러싼 제도에 종속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마치 저널리즘비평과 대학의 아카데믹한 비평  사이에 거대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부산을 떠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비평가들은 처음에는 별 볼일 없이 출발했다. 어느 의회나 궁정의 지역적인 의견을 표현하고, 세력가들의 쑥덕공론과 약점을 보완하는 삼류문사나 하찮은 아첨꾼으로 조용히 등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잡지의 서평은 불가피한 요소로 되었고, 비평의 영향력은 분명한 것이 되었다. 갈수록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비평의 선전적인 역할은 의미심장하게 자각되었다. 비평이 정부나 각 계급의 중요한 선전장치로 되면서 비평가들은 점점 더 중요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정부와 대중을 매개하는, 현대적인 용어들로 바꾸자면 미학적 가치와 사업적 가치를 중개하는 독점적인 창구가 되었다. 결국 연설과 담화에 그들의 주제와 판단을 강요하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지도하는 위치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의붓자식에게 서광이 비치고 출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는 비평이 이같이 확고한 힘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을 더 극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른바 ‘매수된 비평’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소속돼 있으면서 더 장기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해야만 할 집단을 전혀 대변하지 않은 채, 오히려 짧은 시간 동안에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고,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의 목표들을 대변하게 되었다.”(위의 책 105쪽)
비평가들은 이내 출판업자나 신문사의 하수인의 기능을 도맡게 되었다. “회사에 소속되어 인습적인 관념들을 수호하고 기존체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어떤 확실한 보장을 주는 쪽에 빌붙어 사는 기생적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점차 사고의 나태함이나 보수주의적 경향에 동의하는 경향이 짙어졌으며 진보의 전열에 서기는커녕, 진보를 가로막는 적으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없었다면 일개 소문이나 망상에 그쳤을 사상들의 선동자였고, 여론의 흐름의 진정한 근원이었다.
“마라, 데물랭, 뒤세느 할아버지라는 저 위대하고 추악한 (정치)평론가들은 모두 자신의 공중을 가지고 있었다. (…)옆에서 술잔을 따라 올리는 저 유해한 자들은­이들은죽은 다음 찬양을 받으면서 팡테옹 사원으로 운반되었다­공중에게 공허하고 난폭한 말의 유독성 알코올을 매일 퍼부었다.” (G. Tarde, 「L’opinion et la Foule」 Alcan, Paris, 1910. p.10)
그 출생부터 비평의 임무는 어떤 사상을 소통시키는 것, 즉 선동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선동하는가 하는 문제는 핵심이 아니다. 그들이 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 편을 들건, 보다 근대로 들어와 회사를 위해 짖건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비평이 어느 한 쪽에 위세를 실어주고 다른 쪽을 끊임없이 찬미자로 만드는 소통의 방식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 거기에 비평가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보태고, 웅변술로 무장하고 개인의 이미지로 장식한다 하더라도, 비평은 결국 선동과 학습에 관여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선동의 최종 목적은 지도자의 힘을, 현재 유통되는 신념을, 현행의 체계를, 자기의 생활비를 대고, 성공을 지원하는 자의 힘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증대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세대를 이어 변함없이 지속되는 시원적 속성을 위해 비엔날레라는 장치를 둘러싼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오늘날에도 비평은 광주비엔날레를  열호하면서 대중들을 광주 비엔날레의 지원자로 만드는 데 충실하다. 그같은 일이 촌스럽다고 점잖게 나무라는, 보다 세련된 국제 감각 운운하는 사람들도 매한가지다. 그들은 고작 보다 상위라고 간주되는 힘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본토 비엔날레의 우생학을 침을 튀기면서 선전하면서, 자신의 강연의 참여자들을 서구 비엔날레의 열렬한 팬클럽으로  전환시켜 나간다. 현명한 처사다. 이제 주인은 다국적 기업으로 바뀌었으니까!
결국 제만의 성취라는 것도 무엇이었던가? 도큐멘타와 그가 초청한 작자들에게 물신의 위세를 실어주는 한편, 다른 쪽으로는 그의 독일 지지자들을­점차로 국외로 확산된­그같은 세계질서(?)의 (히틀러에 대한 열광만큼은 아닐지라도)열광적인 찬미자로 만들었던 것이 아니던가? 결국 제만은 재능을 인정받아, 지구가 좁다고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날라 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 같은 선동이 관세조차 지불하지 않고, 우리 같은 제 3국에서 대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은 단지 모든 집의 지붕 위에 꽂혀 있는 안테나들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여기에서 제 3국 비평가들의 혁혁한 기여를 간과할 수 없다. 비평이 부지런히 제만을 찬미하고 재생산해내면서 위세를 실어주고, 전문가 지망생들을 그의 추종자로 만드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때 상위 위세가 하위의 위세를 칭찬하거나 격려함으로써 각 위계간의 소통질서를 공고히 한다.
비평은 비평을 지속적으로 배신하고 절망에 빠뜨려 왔다. 비평은 이후에 인위적으로 추가된 의미들로 스스로를 포장하면서 자신의 출생을 거의 의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문해봐야 할 일이다. 우리로 불쑥 면류관을 씌워주도록 권장해 온, 그토록 믿음직스러운 지성의 정오가 어느 한 때 그럴듯하게 스스로의 건강을 입증한 적이 있던가? 권력과 회사의 하수인이라는 신분을 통쾌하게 자학해 본 일이 있던가? 정식으로 짖어본 적은? 언젠가 플로베르는 “명예가 명예를 더럽힌다.(Les honneurs deshonorent)”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비평은 비평을 함정에 빠트린다. 카트린 미이예가 ‘미술을 착복하는 미술’을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평의 자위행위, 혹은 비평과 미술의 반사놀이

아놀드 하우저를 따르자면, 비평의 역할은 작품의 내면에 숨어있는 것을 파헤치는 것이다. 작가조차 다 알지 못하는 작품의 은밀한 진실을 발굴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같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적어도 불필요하다) 작가들이  자신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 스스로가 비평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작가들은 자신이 어느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비평적’으로 대응하거나 비평적’으로 즐긴다. 가명을 썼던  르 각(J. Le Gac)이나 유명한 가방 브랜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덧붙인 디디에 베이(D. Bay), 작가의 역할을 자신의 사진으로 대체했던 필립 카잘(P. Cazal)같은 프랑스의  젊은 세대 작가들은 자신들이 단지 어릿광대라는 사실을, 혹은 배우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언젠가 버나드 쇼가 자신의 해석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베르그송에게 한 말, “친구여! 나는 자네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네를 잘 이해하고 있네” 따위의 권위는 이제 가능하지 않다. 작품에는 작가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이를테면 비평의 통찰적 전제 자체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무대와 배우의 비유는 그런대로 통찰력의 결과일 것이다. 이제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진정한 ‘작품의 배후’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비평은 더 이상 작품이라는 구성물을 이루고 있는 내적 의미구조의 연관들이나 형식요소들을 밝혀낼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그 배후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40년대의 신비평(New Criticism)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술작품의 구조를 완전히 작가나 관객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그것의 시도는 한낱 관념의 허구일 뿐이다.)
어떻든 오해가 없어야 할 일이다. 다다이즘에서 팝아트까지, 현대미술이 사회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가 예술을 수용하는 폭이 넓어진 것이다. 그리고, “규칙을 많이 인정할수록 규칙위반은 없어지는 것이다.”(카트린 미이예, 「프랑스현대미술」 염명순역, 시각과 언어, 1993, 362쪽)
그 결과 중의 하나가 앞서 말한 바 있는, 자주 자유와 혼돈되는 갈등의 전면적인 해소다. 그러므로 예술의 성취를 자축하기 이전에, 사회의 공적인 허용의 규칙을 잘 관찰해야 할 일이다.    
하우저는 또 비평의 역할이 예술가의 창작물이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다. 이제 많은 경우 본질은 예술가의 창작물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아니라, 거꾸로 창작물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연구하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황금기 동안, 미술은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텍스트를 요구한다는 것은 이미지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과 동일한 문맥이다. 비평은 미술이 이전에는  불필요했던 강력한 신화로 무장할 필요가 커질수록 더 분명하게 요구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비평은 미술의 신화를 위해 고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화에 종사하는 비평이라니! 비평은 이렇듯 정신을 버리고 신앙으로, 인식을 등지고 믿음으로의 이행과 관련이 깊다. 이것이 비평의 현재고 실존이다. 즉, 오늘날 비평의 실존적 공리는 “결코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항상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인 것이다. 비평은 자기보존을 위해 사고가 아니라 사고의 금지를,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포기를 종용하고 있다. 프로이드를 따르자면, 그것은 정확하게 종교의 정의이다. (S.Freud, 「New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 p.171)
이렇게 해서 전대미문의 역설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해야겠다. ‘비평의 신화’가 아니라, ‘신화를 위한 비평’ 이 양산되는 것이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콩쿠르 형제(E.L.A.de Concourt, J.A.A.de Concourt)의 확신 이후로, 비평은 점차 미술의 자상한 교사 역할을 도맡아 왔다. 현대미술은 스승의 가르침은 완벽하게 완성했다. 스스로가 스승으로 둔갑한 것이다. 미술이 비평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혼란을 느끼는 쪽은 스승이다. 지도는 지속되어야 하는가? 관계는 재설정되어야 하는가?
미술의 비평화는 비평의 위치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렇게 되면 미학은 할 일이 생기겠지만, 비평은 실업자가 될 것이다. 생각도 없이 ‘메타비평’ 운운하지 말길 바란다. 비평이 메타의 단검을 빼는 순간, 미술이 ‘메­메타’라는 도끼를 들고나올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층위의 상실에 있고, 기존관계의 탈의미화에 있다. 텍스트 대 텍스트, 담론 대 담론의 동 족 교류에서 붓과 펜, 이미지와 텍스트라는 미술비평의 전제가 소멸되는 것이다. 비평은 기껏 작품의 내부로 들어가서 자신의 구조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작품의 내부를 휘저어 봤자, 세련된 문필가의 잉크냄새만 맡게 될 것이다. 확인이나 정리는 가능하지만, 해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상황 진단에는 결과의 예측도 포함된다. 비평의 핵심으로 파고든 예술작품의 내부를 다시 파고드는 비평은 끝없는 자기애로만 축소되는 한낱 자위행위로 끝날 확률이 높다. 각자가 거울을 들고 서로를 비춰대며 노는 자폐적인 반사게임 같은 것으로 그같은 놀이는 이제까지 보호 아래 진행되면서 자기 상실에 등을 돌려 왔다. 비평의 순환과 재순환은 국외자들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추방시키는 조건들만을 양산해 왔다. 그 결과로 오로지 극단적인 권태의 모습만을 재현해내고 있는 지금, 비평의 앞날은 예술의 그것만큼이나 오리무중에 빠져있다.
이제 비평은 미술이 비평이 아니었던 시대의 비평과 달라져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변화는 자명하게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을 내다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당분간 비평의 임무는 예술의 배후를 꿰뚫어 보는 일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그 배후가 이제 작품의 내부가 아니라, 무대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위계질서, 비평의 실존조건

하우저는 비평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만큼 작가에게도 미치는가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우저가 볼 수 없었던 근래의 30여년 동안 비평이 미술을 교육하고 훈계하는 모습은 더욱 심화되어 왔다. 그렇더라도 비평이 미술을 문하생으로 규정해나가는 과정은 눈에 잘 띠지 않는다. 그것은 그 과정이 멀리 돌아오는 하나의 순환을 거치기 때문인데,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과정이 그것이다. 이 때 저널은 거대한 공명상자로서 비평의 확산을 결정적으로 돕는다.
이미지의 역사가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2세기 전부터 확인되어 온 사실은 수백만 개의 혀를 움직이는데는 붓보다 펜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이었다. 거기에다 다양한 영상매체들과의 불가피한 경쟁은 현대의 미술을 거의 질식할 지경으로 내몰아 왔다.
여기서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사실로) 현대미술이 자신의 대중(public)을 갖기에는 너무 특수화되어 왔다는 점은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사실, 현대미술만큼 최선을 다해 대중적 노이로제를 의식했던 예도 없겠지만, 또 현대미술만큼 그것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데 실패한 예도 없을 것이다. 이런 흐름은 대부분의 경우 비평의 계략이라 할만한 것들에 의해 가속화되어 왔다. 비평은 미술에 자신만이 유일한 치료제인 독을 주입시킴으로써, 혹은 사후의 지속적인 투여를 부추기는 자신의 호르몬을 투여함으로써 그렇게 해왔다. 따라서 미술이 스스로를 비평화할수록. 자체의 불구를 심화시키고, 한결 더 비평에 목말라하는 상황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미술은 자신의 활동에 대한 대답과 반응을 필요로 하지만, 이제 그렇게 반응할 줄 아는 대중의 교육은 비평의 소관이었던 것이다. 미술의 언어가 더 이상 대중을 사로잡을 강력한 수단이 못될수록, 상대적으로 비평의 위세에 방점이 찍혀 온 것이다.   
「대중심리학, La psychologie des Foules」의 저자 르 봉(G. Le Bon)을 따르면, 미술이 거의 포기하고 있는 일, 즉 대중을 열광시키는 일은 비평으로서는 쉬운 일이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나폴레옹의 신조였다. 르 봉은 펜을 쥔 비평가의 손가락에게는 그들을 신앙이나 사상을 위해 자살하게 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아니며, 펜이 수만 군중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예는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신의 무덤을 파헤치기 위해 거대한 십자군을 모병할 수도 있었고, 조국의 대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빵과 무기도 없이 그들을 데려간 적도 있다.” (Gustave Le Bon, 「La psychologie des Foules」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63, p.15)
이런 일이 미술비평에서도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 독자 대중은 최면술사의 진찰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듯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하고, 또 믿게 할 수 있는 온순한 자동인형집단이 된다.” (「대중의 시대」 앞의 책, 308쪽)
잠시, 비평의 위와 아래를 살펴보자.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골목대장인 비평의 머리 위에 동네 깡패들이 있음을 주지했다. 대개 고용주거나 소속된 기관인, 대학일 수도 신문이나 잡지일 수도 있는, 생활비나 강단 같은 가시적인 보상을 약속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다면, 비평의 발 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비평의 생산물을 소비하는데 익숙한 대중이­군중(Foule)이 아닌 대중(public)­있다. 비평의 지시를 잘 수행하고, 그것을 따를 준비를 마친 자들로, 비평가들의 위세를 확증하고 그들의 자만심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무리들 말이다.  
위와 아래를 분명히 자각하면서, 비평 자체가 이미 명백한 위계질서를 전제로 한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이라는 점을 환기해야 할 것이다. 담화(conversation)가 아니라 소통(communication)의 방식이라는 사실, 즉 담화는 자유와 평등이 그 조건이지만 각각의 소통에는 골목대장들이 있다는 점. 그같은 위계 안에서 작품해석의 독점이 쉽게 성취됐고, 독점이 대중을 손쉽게 다룰 수 있도록 한 순환. 르 봉은 “통계학자와 전문가가 대중을 대신해 소위 말하는 객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담화는 그 원천부터 상실된다”고 말한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를 만들어낸다. 그는 언론술을 완전히 습득한 자, 즉 평론가이다.” (위의 책, 330쪽)
비평은 독점과 이에 따른 위계질서가 그 전제가 되는 소통의 수단이다. 프리드리히 실레겔(F. v. Schlegel)은 ‘진정한 관객은 확장된 작가’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비평은 말하고 대중은 받아먹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로 더 이상 고대미술을 보는 기분으로 현대미술을 볼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비평은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발굴해내지만, 그 결과는 단지  인증하는 과정의 촉진일 뿐이다. 그 인증의 어떤 부분도 논쟁을 일으키거나 저항에 부딪히는 일은 없다. 이러한 일이 지속되면, 결국 장(場) 자체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결론을 대신해 자신을 죄인으로 고발하는 오이디프스를 향해 티레시아스가 한 말을 떠올려보자.
“나를 비난하며 자신은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이야말로 놀랍게도 죄인이다. 당신이 추적하는 자는 바로 당신이다.”
관객들이 비평의 면전에 이렇게 받아치는 순간이 도무지 도래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즉 담화의 역사가 일고의 여지없이 끝나버린 게 확실하다면, 비평의 미래도, 비평이 된 미술의 미래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비평은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선동일 뿐이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들 사이의 한낱 우쭐거리는 치고 되받기 안으로 지속적으로 갇히면서 서서히 자신의 숨통을 조여나갈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이미 끝난 것처럼, 미술비평도 그렇다고 보드리야르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는 마르탱 바레(M. Barre) 에게는 동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Martin Barre, 「Le Peintre de B.C. 2000, Art Press no 96」1985. 10)
선동에서 시작해서 수명이 다한 신화를 떠받들고 있으며, 여전히 관객들의 편에 섰다고 착각 하면서 쉽게 수치심을 상실하곤 하는, 지금 우리가 짧게 언급한 비평이 그 자명한 한 근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