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예술인에게 듣는다 / 영화가 유현목

힘이 닿는다면 심오한 철학과 우주를 관통하는 영화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영산 유현목 감독-

만난사람: 장석용(영화평론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길을 찾다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감독은 불후의 명작 「오발탄」을 만든 영상파 유현목 감독이다. 2000년 8월 11일 오후 5시, 명동의 일식집에서 뵌 유현목 감독은 76세(소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년정신을 지니신 정정한 얼굴에 건강한 모습이었다. 줄담배와 맥주를 즐기시는 유감독은 전쟁과 이산의 슬픔, 검열과 열악한 제작환경을 몸소 체험한 영화계의 산 증인이자 남녀노소를 불문한 폭넓은 교제관계에서 영화 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화합과 영화발전을 위해 노력하신 자상함이 배어났다. 특히 그 이면에는 박근자 여사의 내조가 힘이 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장석용 : 날씨도 무더운데 오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건강은 어떠세요?

유현목 : 틀니하느라 치과 치료를 받고 있고, 그외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요.

: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유현목 감독의 영화인생


: 나이가 들어서인지 잠이 없어서인지 밤에 맥주를 대·여섯 병 마십니다. 맥주를 들면서 상념에 잠기면 과거사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릅니다. 밤 2∼3시쯤 취침해서 오후 1시 30분경에 기상하죠. 생활습관을 바꾸어야겠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네요. 그렇게 밤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요즈음 재개발 바람이 불어 살던 집도 허문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습니다.  

: 유감독님의 영화인생은 어떠했는지 회고해 주시죠.

유 : 9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지만 위로는 어릴 때 죽고 5남매만 남게되었지요. 나는 어릴 때 장작불에 빠진 이후로 ‘무서운 것’은 멀리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지요. 사리원에서 덕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39년에 휘문중학에 입학했지요. 이 때는 발명가를 꿈꾸기도 하고, 화가, 바이얼리니스트, 무용가, 건축가등의 다양한 장래희망을 생각하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심취해 희곡작가가 되기로 하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지요. 해방 후, 피에르 슈날 감독의 「죄와 벌」을 열네 번이나 보았어요. 대학 재학시 ‘극예술연구회’를 만들고 김기림 선생의 지도하에 대학 최초로 가난한 어촌을 무대로 한 「해풍」이란 45분짜리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 때는 비디오도 없고 해서 극장에서 영화장면을 외울 정도로 공부했지요.
47년부터 7년 반 동안 조감독을 하다가 55년 「교차로」로 데뷔했습니다. 당시 신문평에는 ‘정열적인 테크니션’이라고 타이틀이 붙어 있더군요. 당시 주 영화장르는 멜로드라마였고, 스토리 텔링 위주의 배우 의존형 영화가 많았지요. 테크닉을 마스터한 다음 주제의식이 강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57년 「잃어버린 청춘」은 데뷔 후 처음으로 영평상·부산일보상·국제영화잡지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었어요. 이어 「오발탄」, 「잉여인간」과 같은 부조리 고발의 사회적 리얼리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지요.
후반에는 「순교자」, 「사람의 아들」에서 보듯 사회 문제를 떠나 인간의 내적세계와 종교를 생각하는 영화를 흥행을 떠나 고집스럽게 만들게 되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95년에 「말미잘」을 만들었습니다.

: 감독님의 대표작과 실망스런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 「잃어버린 청춘」(57)과 「인생차압」(58), 「오발탄」(60), 「아낌없이 주련다」(62), 「김약국의 딸들」(63), 「잉여인간」(64), 「순교자」(65), 「恨」(67), 「카인의 후예」(68), 「분례기」(71), 「불꽃」(75), 「장마」(79), 「사람의 아들」(80)은 아끼는 작품이고, 실망스런 작품이 있다면 「그대와 영원히」(57), 「몽땅 드릴까요」(68), 「악몽」(68), 「말미잘」(95)을 들 수 있죠.

: 6·25당시의 가족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 부모님과 5남매, 모두 7명중에서 아버지와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바로 아랫동생은 피신해 있던 과수원에서 폭사당했고, 둘째 동생은 해주예술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전쟁이 나면서 징집되어 인민군군악대에서 일했다던데 지금은 소식을 알길이 없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가족 즉 누이, 막내동생이 1·4 후퇴 때 월남 했는데,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중앙신학교에 보낼 정도로 신앙심이 강하셨죠.

: 슬하에 자제분이 없으신데 아쉬운 점은 없으신가요?

: 결혼후 4∼5년 지나도 아기가 없어서 병원에 가니까 수술성공률이 반 반이라하길래 수술을 포기했죠. 섭섭한 적은 없어요. 자식이 없어서 오히려 영화에 몰두할 수 있었지요. 영화와 제자·후배들이 아이들인 셈이지요.

: 사모님이 화가이신데 어떤 도움을 받으셨는지요?

: 내 작품은 화면전체가 캔버스니까 우선 미술쪽의 구도잡기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많은 도움이 되었죠.

: 영화 스승이신 이규환 감독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 조감독으로 마지막 꼬리를 뗀 것은 이규환 감독님 밑이었는데, 약주를 즐기셨고, 촬영에 들어가면 술도 끊고 일찍 일어나셔서 묵상하시고, 엄격하게 조감독을 다스리는 편이었지요.

: 감독님 작품에 등장했던 배우로 인상깊은 몇 사람만 말씀해 주시죠.

: 김진규, 최무룡, 문희, 신성일을 들 수 있는데, 김진규씨는 사색형의 철학적 얼굴이고, 최무룡씨는 다양성의 얼굴, 문희씨는 얼굴은 작지만 포토제닉한 얼굴이고 화면전체를 채우는 힘이 있었지요. 신성일씨는 내 작품 「아낌없이 주련다」로 데뷔를 했지요.

: 감독님은 스캔들이 없으신 걸로 유명한데, 비방이라도 있으십니까?

: 배우와 스캔들이 있으면 그 배우를 작품에 안 쓸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영화가 망가지는 것 아닙니까? 많은 전례가 있잖아요.

: 감독님의 조감독 중 생각 나시는 분과 감독님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배우는요?

: 감독으로 이성구, 김호선, 김사겸 등이 있죠. 배우로는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엄앵란,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이 우선 생각나네요.

: 평론가들 중 우선 생각나는 분들은요?

: 임영, 이영일, 변인식, 장석용, 고인이 된 허창, 안병섭 같은 분들이 있죠.

: 검열에 관계된 말씀 좀 해 주시죠.

: 과거에는 10분 이상 잘리는 작품이 많았죠. 그렇게 되면 스토리가 튀게 되죠. 「오발탄」에서는 상이군인이 소외그룹으로 묘사되고, “가자! 가자!”라는 대사가 지향하는 곳이 어디냐가 문제가 되기도 했죠.
65년작 「춘몽」은 외설장면 시비로 기소되었지만 기소유예로 끝이났죠. 당시 시대상황이 그랬고 남한 제도가 나빴던 것이죠.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는 인민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해서 반공법상 문제가 되었죠. 66년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세미나에서 ‘은막의 자유’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나는 이 단체의 회원이었어요. 그런데 박정권은 국시를 반공으로 삼았지요. 군사혁명 1조에 반공이 최우선이었는데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에 옹호 입장이었던 나에게 「춘몽」을 우회적으로 걸어 온 것이죠. 「춘몽」은 여배우가 계단을 내려 백화점의 마네킹 뒤에 숨는 장면이 검열에 문제가 된 것이죠. 내부가 백화점으로, 표현주의적으로 그린 작품이었어요. 표현주의적 세트였죠. 박암이 가운을 밟으면 여배우의 가운이 벗겨지는데 지금으로 치면 격세지감이죠. 나신 장면이 있으면 아예 검열에서 반려될 각오를 해야되는 상황이라서 나중에 자진 삭제했죠. 촬영현장에는 살색나는 스타킹으로 국부를 가리고 촬영했죠. 그러나 담당검사는 이번에는 촬영현장에 몇 명이 있었느냐를 문제삼았죠. 반면 배우 박수정은 검사 앞에서 겁에질려 증인을 섰는데, 국부를 안가렸다라고 대답해서 벌금 3만원이 나왔지요. 상고해서 기소유예가 되었는데 지쳐서 다음 단계는 포기했습니다.
다른 작품은 문제될 것 없었죠. 초기에는 키스 신도 못하게 했어요. 간접묘사를 한 것이지요.
우스꽝스런 예를 들면 세 사람이 옴니버스로 「女·女·女」를 만들었는데 검열당국이 여자를 세 번 쓰면 간통 姦(간)자가 된다고 해서 「女」로 바꿔 검열을 통과하도록 만들었고, 총무과에 있던 사람이 영화과로 오면 검열은 해야겠고 영화를 모르니까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겠죠. 그런 시대였습니다.

: 다방면으로 유능하신 감독이신데, 연출외에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그리고 음악선곡은 어떻게 하시나요?

: 52년 정창화 감독의 시나리오 「최후의  유혹」을 쓴 적은 있는데, 다른 작품은 윤색을 많이 했죠. 또 연출은 기본이고, 8mm 촬영과 편집이지요. 음악은 배경을 말해주면 분위기를 아는 음악 담당이 저와 함께 협의해서 음악을 준비하는 편이죠.

: 영화작가로 불리워지시기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장인으로 불리워지길 좋아하십니까?

: 불리워지기를 좋아하죠.

: 인상깊게 보신 한국감독들의 작품을 말씀해 주시지요.

: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 「갈매기」, 「춘향전」 등 민족과 역사, 고전적 정서와 서정성이 담긴 작품과 김기영 감독의 「십대의 반항」, 임권택 감독의「만다라」,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김수용 감독의 「안개」 등이 있죠.

: 장르별로 어떤 작품에 매력이 있으십니까?

: 젊었을 때는 리얼리즘 계열의 「오발탄」, 「잉여인간」, 나중에는 안정되니까 종교문제를 다룬 「순교자」와 같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영화속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항의하고, 모 기독교 신문은 ‘유현목은 사탄이다’라고까지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전쟁시절, 처참한 폐허에도 성령이 내려오고 있지 않다고 묘사한 것이었죠. 하나님의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저의 가정환경을 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하나님은 없다’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극적 상황이죠. 진정한 테마는 사랑입니다.

: 어느 때가 영화만들기에 편하셨습니까? 그리고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이 대부분 상업성에 치중하는데 이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 주시죠.

: 1980년 「사람의 아들」을 만들기 이전에는 제작비가 열악했습니다. 필름도 아껴야 하고 엑스트라 동원도 제약되었죠. 하지만 지금은 우리 때와 비교해서 정보와 기술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우수합니다. 우리 때는 이승만 정권 말기이지만 극장세를 전면 면제 해주어서 영화인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감독이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던 때였죠. 고로 작가주의적 경향의 작품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 이승만 정권때의 전폭적인 지원이 그립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젊은 감독들의 감각적인 영화가 많이 보입니다. 관객의 대부분이 20대 초반인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긴합니다. 그외 계층에게는 극장에 가는 것이 큰 행사여서 주도관객의 취향에 맞추다 보니 감각적인 영화가 양산된거죠. 액션 물도 많이 나옵디다. 즉 상업성을 앞세우는 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죠. 몇 편 정도는 관심을 둘 영화가 나오기는 하지만 아쉬운 점이 많죠.

: 신인감독들에게 당부하실 말씀과 독립영화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요.

: 신인감독들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젊은 감독들은 작가정신을 가져야 생명이 오래 갑니다. 몇몇 감독들 말고 제작비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드는 감독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디지털 카메라로 소품이라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독립영화 프로덕션에 많은 기대를 합니다. 저예산으로 디지털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 왔으니까 독립영화는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 요사이 남북 교류가 차근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남북간에 영화교류를 어떻게 보십니까?

: 이데올로기 문제가 이상 없으면 상호교류가 될 것 같아요. 합작도 가능할 것 같고요. 북한영화를 테이프로 몇 작품 보았는데 대규모 엑스트라 동원만 빼면 남한에 비해 수준이 10년 정도는 뒤진 것 같아요.

: 우리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세계영화감독의 레벨에서 볼 때 연출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술쪽은 많이 향상되었는데 주제성을 살리고 문제의식이 뚜렷한 작품이 드물다는 것이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 신상옥, 김기영 감독과 더불어 당대 제일가는 감독이셨는데 사람들이 라이벌 관계라고 말하면 기분이 어떠십니까?

: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지요. 서로들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선의의 경쟁을 한 것이지요.

: 그동안 아주 많은 상을 타셨는데, 어떤 상이 가장 보람이 있었습니까?

: 「순교자」는 내가 제작 감독한 작품입니다. 촬영 등 모든 분야의 영화인들이 도와 주셨기에 이 때가 제일 즐거웠습니다. 오픈세트도 크게 짓고 열심히 만든 작품이었어요.

: 「거짓말」이 베니스에 나갔습니다. 공윤에도 계셨는데 포르노에 대한 느낌을 말씀해 주세요.

: 정제된 포르노는 관계가 없을 것 같고,창작품은 자르면 안되니까 등급이 보류되는데, 그래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영화가 품격을 갖추었으면 합니다. 지나친 잔학성이나 액션물 등이 영화예술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다행히 등급외 전용관이 생긴다니 반갑습니다.

: 영화자료가 많은신데 정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이사를 가게 되면 본격적으로 정리해야겠죠. 스틸도 많이 있고, 내가 쓴 글들도 다 보관되어 있죠. 상태도 양호하니까, 테이프로 만들어서 보관도 할 겁니다. 창고에 있는 자료들을 모아 집사람은 기념관을 만들자고 하는데, 돈이 많이 드니까 선뜻 엄두가 나지 않네요.

: 연애담을 말씀 좀 해 주시죠

: 서른셋에 결혼 했는데, 멀리서 훔쳐보니까 얼굴도 예쁘고 손수 만든 핸드백이 인상적이었어요. 캔버스에 받친 천을 가지고 카바를 하고 스케치 북과 붓을 꼽고 다니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지요. 알고 보니까 장인 어른이 박성삼이란 목공예 대가였고 서울대 미대생이었어요. 다행이 기록보는 이경자씨(편집기사)가 학교동창이 되어서 잘 연결되었지요.

: 영화를 만드시다가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 도봉산 바위나 추운 겨울 야외에서 촬영할 때는 영화계를 떠나고 싶었어요. 그런 고생을 수없이 겪어서 인내심이 생겼지요. 자동차 사고가 나서 골반이 깨어진 적이 있는데, 제작자가 돈이 없어서 조그만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20일 동안 고통스럽게 누워 있다보니 또 인내심이 생긴 것 같아요. 차사고 덕택으로 인생을 다시 보게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 과거에 친한 친지는 어떤 분이신가요?

: 변인식씨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 아직 살아계셨으면 하는 감독은 어떤 분이신가요?

: 김기영, 이강천 등입니다.

: 영화학회를 창설하셨는데 당시의 분위기를 말씀해 주시죠.

: 다른 분야에는 학회가 있는데 아쉬웠죠. 아카데믹한 분위기 속에서 이론가들이 모여 결속을 통해 영화이론의 정보를 제공하고 서적도 만들어서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죠. 지금 남산 한양녹음실 옆에 사무실이 있었죠.

: 소형영화작가협회를 창설하셨죠?

: 8mm를 몇 편 보고 느낀 점이 많았죠. 대상을 일반으로 하고, 대중에 대한 기성영화인의 책임감과 영화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초창기에 기성영화인들이 다수 참가했는데, 변인식, 하길종, 박상호, 정일성 등이 모였고, 연기자는 없었습니다.

: 동국대 봉직시를 회상 해 주시죠.

: 1976년에 나는 학위가 없지만, 이선근  총장이 휘문 선배(?)여서 엉뚱한 제의를 합디다. 학교에 후진을 양성하라해서 조교수, 부교수, 예술대학장, 명예교수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힘이 닿는 한 동국대학교에는 나갈 작정입니다.

: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유현목 감독 회고전과 박근자 여사 그림 전시회를 열었는데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 주최측에 우선 감사하고, 젊은이들에게 회고전을 통해 원로 유현목을 재인식하게 해줌으로써 우리 영화사를 읽게 해준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처까지 전시회 기회를 주셔서 고마울 따름이죠. 잊혀져 가는 원로 감독을 부활시켜준 계기가 되었죠.  

: 영화계에도 이분화되는 경향이 많아지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떠십니까?

: 그 원인은 제도권에서 너무 안주한 측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어서 그런거죠. 정당에도 여야가 있듯 선의의 경쟁으로 좋은 성과가 있어야겠습니다.

: 문화당국은 어떤 지원을 우선적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제작지원이 우선 중요하고, 그 다음 복지문제죠. 문광부에서 좀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해요. 생각보다 가난한 영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 일본에서는 연세드신 감독의 작품도 많이 나오는데 앞으로 만드시고 싶은 영화를 말씀해 주시죠.

: 심리주의적이고 종교와 탐미적이며 우주를 관통하는 영화가 되겠지요.

: 바람직한 영화제는 어떤 점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대종상·청룡상 등의 큰 영화제들이  스캔들 없이 공정성이 담보되는 영화제로 발돋움 할때 좋은 영화제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 콘티작업은 어떻게 하십니까?

: 콘티는 치밀하게 짭니다. 헌팅도 많이  하는 편이고요. 골목도 여러 골목이 있듯 작품에 맞는 장소를 찾아 철저히 다니는 편이지요. 그래야만 영상적 화면의 기본이 되지요.

: 「말미잘」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 나를 과대 평가해서 그런 결과가 파생한 것 같고, 비교적 서정적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과거 작품의 성격과 비교해서 많이 차이가 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대종상영화제에서 명예로운 감독상을, 평론가협회에서는 최우수감독상을 주지 않았습니까?

: 촬영장 에피소드 하나 말씀해 주시죠.

: 「恨」에서 한탄강 라스트 신 때였어요, 비가 많이와서 개천에 물이 불었고, 안개가 잔뜩 낀 날이었어요. 촬영을해야 하는데, 건너갈 수가 없어서 난감해 할때였어요. 초등학생들이 오길래, 여기다 돌을 던져라 그랬더니 던지더라구요. 그래서 무사히 건널 수 있었죠.

: 시네마테크 운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 동서영화동우회나 시네클럽이 큰 역할을 했듯 작가와 이론가 양성을 위해 절대 필요하고 영화인구와 제작인구가 많아지면 질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요? 문화학교 서울이나 영상작가협회도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평론의 기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개인적 친분에 사로잡힌 글이나 단순히 스토리만 얘기하는 평론은 의미가 없고, 영화의 바람직한 틀을 잡아주고 미학적 접근과 역사의 기록자로서 학문적 가치를 높이는 평론이 바람직한 평론이라고 생각합니다.

: 국제 교류관계는 어떻게 발전하리고 생각하십니까?

: 우리나라 영화의 흥행가치와 폭이 넓어지고 합작등 교류도 활발해지리라 생각됩니다. 낙관합니다.

: 촬영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 나는 그림 위주로 영화를 우선 생각합니다. 묘사에 있어 포토제닉한 장면을 만들려고 애씁니다. 영화속의 상징성 등에 의미를 많이 부여합니다. 어떤 감독은 배우 연기 지도에 치중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고목이 있으면 좋겠다고 고목을 세우기도 했는데, 우리때 얘기지 지금은 제작여건이 아주 좋아졌지요.

: 영화등급심의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나까?

: 연소자는 비판능력이 없으니까, 전문가들이 정지작업을 해줄 필요가 있지요.

: 당대 영화사에 나오시는 분은 거의 만나셨지요?

: 이규환, 안종화, 윤봉춘 감독 등 거의 다 만나보았죠.

: 앞으로 한국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 젊은 세대의 가능성을 믿기에 우리영화의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유감독님의 작품과 가장 적게 관객이 든 영화는 어떤 작품인가요?

: 최다관객동원은 「恨」이라는 작품이었는데, 400만 서울 인구에 극장 하나로 17만을 모았으며, 「말미잘」은 흥행실적이 형편없었죠.

: 명절때는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 제자들이 많이 찾아오니까, 제주도로 피난 갑니다.

: 장시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