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지킴이 / 장인 증곡 천재동 |
바가지에 해학과 풍자를 입히는 장인 증곡 천재동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
울산 방어진에 일본 구파연극단이
왔다. 가부끼(歌舞伎)도 왔고 서커스, 마술단도 왔다. 영화도 개봉되어
여러 명의 남녀 배우들이 개봉 인사차 들렀다. 울산 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 들어 이들을 환영하며 열광했다. 그 숲에는 등에
업혀 구경 나온 네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혼자 영화와 연극을 보러 다니게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리라.
부산문화를 지키는 부산문화 말뚝이 천재동옹은 1915년 울산
방어진에서 태어났다. 방어진은 육지에서 바다로 돌출된 반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어진의 한 쪽은 동해에 면해 있고 다른 한 쪽은
울산만과 면해 있다. 현재의 방어진에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조선소가
위치 해 있어 한국 기간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1910년대 방어진은
일본인들이 북적대던 어항이었다. 일본인들은 살 곳을 마련하면
그 다음, 극장을 세우고 연극과 영화를 올린다. 활황의 포경기지 방어진도
예외가 되지 않아 숱한 일본의 연행예술이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어린
천재동은 그 숱한 공연물들을 보고 감격하며 자랐다. 어린시절 집에 서사(書士)가
한 분 있었는데 그의 등에 업혀 연극·영화구경을 다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조루리, 가부끼 등 일본 전통극 공연도 많았다. 동보,
신꼬, 봉절관 등의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주인공들이 개봉에 맞춰 인사를
오기도 했는데 그들의 무대인사는 영화이상으로 관심의 대상이었다.
연극작업과도 인연맺어 1939년 그는 도일한다.
미술을 배우려는 생각에서였다. 동경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는
1941년에 귀국하여 연극작업을 하였다. 이 때의 연극작업은 후일 그의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1944년에 다시 도일하여 가와바다회학교(川端繪學校)의
야간부 소묘과 조교를 하며 당시 입학이 극히 어렵던 가와바다회학교
특설 인체과(人體科)에 들어가 그림공부를 했다. 탈은 해방되면서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해방되면서 처음에는 아동극을 만들었다. 울산 방어진의
초·중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연극공연도 하고 방어진 토박이 양조복,
최용규와 함께 3인전 전시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그의 연극·미술활동은
울산 예술활동의 불씨가 되었다. 당시 천옹이 그린 작품 중에 남아있는
것은 단 한 편. 울산시 중구 성남동 동광병원 벽에 붙어 있는 ‘모정’이라는
10호크기의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각본·연출로 되어 있는 연극활동으로는
당시 사회의 흐름을 반영한 작품이 몇 개 있는데 대표적으로 ‘박제인간’이있다.
왜색척결의지를 주제로 한 것인데 후일 ‘쓰리보이’라는 예명으로 유명해진
연예인 ‘신선삼’이 주인공이었다. 일제 강점기간 동안 일인들이 우리를
박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를 마음대로 부려먹었다. 해방이 되어
박제가 살아나 새 삶을 산다는 내용으로 된 작품이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흥분과 재미를 예술품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 천옹은 손끝의 감각에
전율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흥분과 ‘재미’를 예술혼으로 바꾸어
온 인물이다. 그래서 손으로 직접 만지는 예술을 즐겨 다뤄 왔다.
토우를 빚고 탈을 제작해 온 연유가 바로 손끝의 전율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토우전시회를 이미 50년대에 개최했다.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배꼽을 드러낸 아이, 오줌싸는 아이, 키를 쓴 채 소금을 얻으러
가는 아이,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는 아이 등등 수많은 토우를 제작하여
이미 50년대에 전시회를 한 것이다.
동래야류와의 만남 동래야류와의 첫 만남은
1965년 10월 자신의 탈작품을 보아 전시회를 열던 부산시 공보관에서
이뤄졌다. 부산에 자리를 잡고,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토우를 만들고,
연극을 만들면서 그 연극에 탈을 쓴 인물도 등장시키면서도 부산지방에
탈놀이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국내최초로 탈전시회를 할 때까지도 동래야류라는
탈놀이가 부산에 있었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탈전시회를 하고 있던
1965년 10월 28일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돌아온 동래야류
회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말뚝이는 다른 탈보다
크다. 말뚝이와 대립하는 양반탈이 어른 손바닥만한 반면, 말뚝이는
탈 둘레만 1m가 넘는 큰 탈이다. 동래탈은 공연이 끝나면 고사를 치르고
태운다. 때문에 매년 탈제작을 하며 그해 어떤 바가지가 나오느냐에
따라 말뚝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주로 둥글고 큰 박을 이용해 말뚝이를
만들지만 간혹 길쭉한 말뚝이가 나오기도 한다. 박은 한 트럭분 이상을
준비해서 먼저 말뚝이탈 재료를 선별하고 다음 탈 재료를 찾는다. 선생님은 현재 부산진구 초읍동에 사신다. 선생님댁은 분홍색칠을 한 깔끔한 이층양옥이다. 이층은 탈작업실이고 일층은 토우와 그림 작업실이다. 그곳에는 천재동선생님과 56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탈제작을 이어가는 장남 천영태선생이 살고 있다. 집안에는 말뚝이를 비롯한 많은 동래야류탈과 창작탈, 그리고 토우들이 전시되어 있다. 천재동선생님은 말뚝이를 닮으셨고 부인과 장남은 많은 토우 중에서 그냥 밖으로 걸어나온 듯 친근하고 다정스럽다. 함께 있으면 닮는다고 했던가. 40년동안 탈과 토우 숲에서 살다보니 서로 닮아가는 모양이다. 선생님은 요즘도 작업을 계속하신다. 많은 탈, 토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변함없이 우리의 민족예술·전통예술을 지켜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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