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 여행의 만남 (3)  /  통영과 문화예술인

남도의 나폴리, 통영

강진호 (문학평론가, 성신여대 교수)

 

한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아들아 잘 가거라 어머니 이OO’ 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인 현수막 뒤로 가냘픈 체구의 할머니가 한복 차림을 하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던 모습. 그 옆으로 언제 다시 볼 지 모를 혈육을 떠나보내는 눈물 젖은 누이, 형제의 얼굴이 고정화면으로 박혀 있다.  
화인처럼 심장에 와 찍히는 그 문구를 뒤로하며, 오십 년 만에 북에서 찾아온 칠순의 아들은 비행기에 오르며 무슨 심정을 가졌을까. 50년 동안의 그리움이 3일 동안의 만남으로 해갈되었을까. 아니면 가슴에 또 다른 피멍이 맺혔을까. 비슷한 시간에 나는 김포공항을 이륙해 3일간 곡성과 눈물의 아우성이 자욱했던 서울 하늘을 뒤로 한 채 거제도를 향하고 있었다. 사천 비행장에 내려 한 시간을 더 달린다. 남도 끄트머리 한려수도의 중심지 통영에서 거제대교를 지나 옥포 조선소와 아름다운 해금강으로 귀에 익은 그 섬에 닿는다.  

2000년 8월 서울의 하늘 아래서 빚어졌던 그 기묘한 만남과 이별의 장면에 ‘이산의 아픔’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은 차라리 진부했다. 그것은 아픔 이상의 어떤 쓰라림이다. 그 착하고 슬픈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갈라놓은 것은 무엇인가. 50년씩이나 갈라져 있던 이들을 또 흩어지게 만드는 그 비인간적인 드라마의 배후에 숨은 거대한 실체, 그 한스러운 이면의 구조. 불쑥불쑥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했던 장면들 뒤로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이런 질문들이다. 21세기, 그 현란한 문명이 만들어낸 광속의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그래서 자신은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무관심했노라고 응답했다는 소위 N세대들이라 할지라도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오는 그 질문들을 피하지 말아야 하리라.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있던 그 자리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 질문과 맞닥뜨렸고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50년의 세월에 묻혀 있던 상처의 원형이었고, 아직도 전쟁과 분단과 이념의 사슬에 옭매여 있는 한 가련한 민족의 상처투성이 알몸이었다.  


박경리, 유치진, 김춘수, 윤이상…   통영의 대표적 자랑거리

50년 전 그 해에 이 땅에는 슬픈 전쟁이 발생했다. 같은 민족으로 평화롭게 동거해왔으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동족이 포화 속에서 죽어가야 했던 비극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잠깐 자전거를 사러 나갔던 아비, 일주일 후에 돌아오겠다던 오빠, 잠깐 할머니 집에 맡겨 놓은 갓난아이들이 오십 년 동안 실종 상태로 놓여 있다가 훗날 백발의 모습으로 가족과 상봉하게 된다는 그 소설 보다 더 소설적인 이야기들은 전쟁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이다. 그 전쟁의 흔적을 생생한 현장음과 함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관은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었다. 사진과 유리관 속의 박제화된 전시물에 익숙해 있던 눈이라면 그곳에서 일종의 문화 충격을 받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에 촬영된 영상들이 유적관 곳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감시초소, 야전병원, 포로들이 생활하던 막사의 내부를 견학 온 초등학생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제 열 한 두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에게 전쟁의 잔해란 체감하기 힘든 세계일 것이기에, 야외전시장  은 전쟁영화의 한 세트장처럼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곳은 마치 독일의  아우슈비츠처럼 꼭 한 번은 자녀 손을 잡고 들려야 할 체험학습의 필수 코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대단한 결심과 적지 않은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는 이념대립의 한 축소판이었다. 포로 송환을 앞두고 반공포  로들과 친공 포로들의 갈등과 반목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와중에 희생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투쟁위원회 조직체계도’, ‘투사 1호’라는 메모지 크기의 선전물, ‘신분보장 증명서’와 같은 유물(?)들이 치열했던 당시의 모습을 씁쓸하게 전해준다. 포로수용소에서 남쪽방향으로 가는 흰 쥐를 따라 그 순간 남쪽을 택했다는 아버지의 남루한 생애를 소설로 옮긴 김소진의 「쥐잡기」와 제 3국의 길을 택했다가 결국 자살하고 마는 최인훈의 「광장」의 이명준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때 제 3국의 길을 선택했다가 결국 남한도 북한에도 돌아오질 못하고 영원한 유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들었다. 고향이 있지만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거제에서 통영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또 한 사람의 유민이 떠올랐다. 그는 고향인 통영을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지만 결국 고향에 발을 딛지 못하고 먼 이국 타향에서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의 이름은 ‘윤이상’이다.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통영의 대표적 자랑거리로 거론되는 예술인들의 목록에서 한 동안 윤이상의 이름이 빠져 있었던 것은 월북한 장남이 사진 속에서 지워져 있는 것처럼 분단의 역사가 보여준 슬픈 명암중 하나일 것이다.  
 

통영, 문화벨트를 만든다면…

5년만에 와 본 통영은 소리 없이 변해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바다, 그리고 크고  작은 목선들이 드나드는 통영항의 풍경이다. 산을 깎고 철골을 박던 남망산(南望山) 중턱의 공사현장은 완공된 문화관의 우람한 모습으로 변모한 채 멀리서도 건물의 윤곽이 환하게 들어왔다.  
남망산 중턱에서 문화관을 옆에 두고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 ‘청마 시비’가 고요히 서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비석에 새겨진 시「깃발」은 여전히 소리 없는 침묵의 깃발을 나부끼며 과객의 걸음을 멈춰 세운다. 바다 쪽 가까이 놓인 ‘통영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대학생들의 탈춤 연습이 한창이다. 북과 장구소리를 들으며 문화관을 에두르고 있는 숲길을 따라 돌자 통영 앞바다가 넘실대며 뒤따라왔다. 통영의 천혜 보물은 무엇보다도 바다이며, 저 바다가 통영을 길러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와 박히는 순간이다. 그것은 어머니와 같은 바다였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의 첫장은 전체가 통영에 대한 이야기다. 박경리, 유치환, 유치진 같은 문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음악가로 꼽히는 윤이상을 낳은 통영의 근원적인 힘이 저 바다에서 나온 것이다. 윤이상은 죽기 전까지 간혹 일본에 들를 기회가 있으면 배를 타고 남해안 근처에 접근하면서까지 고향인 통영 앞바다를 먼발치로나마 보려고 애 쓸 정도로 이곳을 그리워했다.  

“아버지와 저녁 산책길에 들은 남도창, 어머니가 주위 이웃들과 우물가에서 부르던  
민요, 미륵산의 사월초파일 행사, 승려들의 예불소리와 범종소리, 한밤중 그물을 끌어 올리며 부르는 어부들의 노래, 가면극 통영 오광대 그리고 포구의 투명한 잔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  
생전에 윤이상이 했던 이 말들은 통영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함께 그의 삶과 음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북한에 갔다 온 소설가 황석영이 출감한 뒤  쓴 「오래된 정원」(2000, 5)에도 분단의 덫에 치여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음악  가와 소설가의 상봉이 그림자처럼 깔려 있다.  

이 작품은 베를린 망명 시절, 작곡가 윤이상 선생 댁에서 떠올랐던 구상이 기초가 되었다.
그때에는 아직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아마도 그 해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게 말했다. 저것 좀 보아. 어떤 때에는 고향집에 돌아온 것 같아.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문 대신 중국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다. 색색가지의 작은 구슬을 엮어 먼데서 보면 수양버들과 강물과 나룻배가 떠 있는 그림이 비쳤는데 그것이 바람에 잔잔히 흔들릴 때면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은 그렇게 망향의 마음을 드러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곳은 또한 현재 실재하는 남쪽 바다와 통영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 그는 지금과 같은 전쟁의 폭력과 굶주림과 억압의 공포가 없던 태곳적 평화로운 아시아 저편을 그리면서 곡을 썼다고  한다. (「오래된 정원」의 후기에서)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동양에서는 단 한 사람 존재하는  천재작곡가”(일본의 야노 토오루(矢野暢) 교수의 말)라는 윤이상의 존재를, 그리고 그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것을 5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낯선 것이었다. 그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이후 2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는 곤욕 끝에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긴 했으나, 친북,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망명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환대를 받지만 남한에서는 외면되어 귀국마저 거부당했다. 귀국하면 흙 가까이 입을 대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말하리라던 그였지만, 죽은 후에나 고향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부인 이수자 씨가 쓴 「내 남편 윤이상」(창작과비평사, 1998)을 보면, 종가의 3대  종손인 그는 해외생활 38년 동안 돌보지 못한 조상의 묘에 대한 근심이 대단했다고 한  다. 그래서 1994년 당시 대통령에게 쓴 편지에도 “꿈에도 잊지 않던 고향의 앞바다가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향에 가서 선산의 묘 앞에 향을 피우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라고 귀국을 허락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올해 2월 통영항이 내려다보이는 남망산 문화관에서는 윤이상이 작곡한 「관현학을 위한 전설 : 신라」가 울려퍼졌다. 윤이상의 음악이 국내에서 초연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윤이상 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이고 ‘윤이상 음악제’도 지속적으로 열릴 계획이라고 한다. 이미 1994년 9월 통영에서 ‘윤이상 음악제’가 열릴 계획이었으나 좌절되었고, 그때 귀향의 꿈을 풀지 못한 윤이상이 병을 얻어 그 다음 해에 사망했던 것을 돌이켜 본다면 윤이상은 지금 지하에서도 눈물짓고 있을 지 모르겠다.  

음악제가 열리던 그 날, 통영시장은 통영음악제를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음악제로키우고 통영을 짤즈부르크에 비길만한 세계적인 음악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한다. 짤  즈부르크에 비길만한 세계적인 음악도시? 이 얼마나 큰 포부인가?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계적인 도시가 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통영은 스스로 예향의 도시라  는 자부심이 크지만 그에 걸맞는 내적 요건들을 갖추었다고 보기엔 미흡한 점이 많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변변한 ‘문화 지도’ 하나 없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어항으로서의 통영, 관광도시로서의 통영과 예향(藝鄕)으로서의 통영은 팔과 다리의 치수가 각각 다르고 색깔마저 제각각인 옷을 걸친 것처럼 서로 통합되지 못하고 부조화된 모습으로 겉도는 느낌이다.  

통영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멸치회, 해저 터널, 통영 오광대. 이순신, 한산대첩… 남  해안 별신굿? 예술 쪽으로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곳 출신 예술인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따뜻하고 경치 좋은 남해안의 물과 뭍을 천혜의 자원으로 갖고 있고 크고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기에 여름이면 이곳에 섬관광을 하러 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여객선 터미널엔 주변 섬으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유람선이 하루 3~4회 간격으로 뜬다. ‘도남 관광단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규모의 육·해상 종합리조트라고 선전하는 ‘마리나 리조트’와 같은 휴양시설들은 해양관광 휴양도시로서의 통영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관광도시로서의 통영은 그러니까 부속된 섬들을 홍보하는데 더 주력을 해 온 셈이다.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들어오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통영 ‘관광 지도’는 특이점만을 표시해 놓은 요도(要圖)와 다를 바 없어서 막상 길을 나서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가령 통영시가 추천해 놓은 1일 코스, 즉 <남망산 시민문화회관 - 조각공원 - 문화마당 - 세병관 - 향토역사관 - 충렬사 - 해저터널 - 착량묘 - 달아공원 - 도남관광지>의 순으로 따라간다 해도 그것이 외지인이 오랜 시간을 달려와 변변한 안내판 없이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거리인지는 의심스럽다.  

남망산 문화관에서 바로 보이는 세병관(洗兵館)에서 충렬사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최근에 지어진 ‘청마 문학관’ 사이의 도로는 문화거리로 지정되어 그것을 지도로 나타낸다면 길찾기가 좀 더 쉽지 않을까. 가령, ‘문화 벨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린 벨트’처럼 문화 유적지를 끈으로 연결하듯이 묶어서 개발하고 홍보한다면 그 자체가 좋은 상품이 될 것이 분명하다. 문화 벨트의 지도가 안내표지판 처럼 시외버스터미널이나 버스정류장에 세워지거나, 여행사 팜프릿에 첨부되어 있다면 통영은 한층 가까운 공간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세병관은 지금 큰 공사 중이어서 폐쇄되어 있었다. 1998년에 시작되어 2007년에나  끝나는 대공사로 옛 통제영지를 대대적으로 복원하는, 공사비만 수 백억 원이 들어가 는 대공사이다. 세병관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것이 향토역사문화관이고 이곳에서 내려가 사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돌아 몇 분 걸으면 충렬사와 만나게 된다. 바로 전날 그 길을 따라 이 지역의 대표적 문화행사인 한산대첩기념제전의 군점 행렬이 지나갔다고 했다. 전날 와서 그 장관을 직접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방문색들의 자작시 등 흔적을 남길 수 있게 한다면…
 
이번에 처음 가 본 ‘청마 문학관’은 금년 6월에 개관하였는데, 문화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애정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선 그 규모와 내부의 짜임새 등에서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관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21세기형 기념관이라 할 만한 ‘청마 문학관’에서도 이어졌다. 작고한 시인의 존재는 그와 다른 시대를 사는 후손들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그 시공(時空)의 거리는 사실 간단히 메워질 수도 있다. 가령 분단 역사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이산가족의 상봉도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관의 의미도 무의미한 영상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한 편의 시구에 감응하는 정서가 있다면 시인은 비록 죽었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시는 여전히 육신을 지니고 생명을 지속해나간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 시대의 문학과 상봉하는 것이고 이런 만남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한국의 시인들 중 문학 기념관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문학관은 개관을 한 지 얼마 안되었으나 입구에 비치된 방명록에는 이미 서울 압구 정동, 영등포, 그리고 경북 대구…등지에서 온 타지인들의 방문 흔적이 꽤 보였다. 청 마 유치환에 대해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들어서서 한 바퀴 돌면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될 정도로 시인의 생애와 문학세계가 판넬과 시청각 자료를 통해 잘 정리되어 있는데, 구석 책장에는 이어령이 쓴 유치환 연구 논문 등 관련 논문까지 두루 갖추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도서관처럼 정보검색 시스템을 갖추어 놓아 모니터를 보고 원하는 항목을 누르면 내용을 출력해서 가져갈 수 있다.

시인이 생전에 소장했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유리관 쪽으로 다가가니, 김춘수, 문 덕수, 조지훈 등으로부터 받은 편지들이 빛이 바랜 종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지가 언뜻 눈에 들어온다. “유치환님, 그 동안 바쁘셨지요. 경주로 가신 얘기 들 었습니다…” 유치환이 경주고등학교 시절 윤이상으로부터 받은 육필 편지였다. 입구에 두 종류의 판넬 액자가 전시되고 있었는데 하나는 시 「깃발」, 「그리움」과 시인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청마 시화(詩畵)였고, 하나는 ‘충무시민의 노래’ 악보와 윤이상의 얼굴을 넣은 악보화(樂譜畵)였다. 올해 이곳에서 치러진 ‘제1회 청마문학상’ 시상과 ‘윤이상 음악제’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문화원이나 읍, 면, 동사무소 등에 신청하면 배달까지 해 준다고 한다. 두 명의 우뚝한 예술인들에 대한 자긍심과 예향으로 발돋움하려는 시 당국의 노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문학관 위쪽에는 생가가 있다. 그런데 현재 유치환의 생가는 두 곳이다. 두 개의 생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내력은 좀 복잡하다. 5년 전에 왔을 때 거제도 둔덕면에 생가를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번에 거제도 포로수용 소에서 통영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들러보니, 노란 수세미 꽃이 넝쿨을 올린 돌담 너머 초가 내부는 아직 텅 비어 있으나, 완전하게 복원된 상태였다. 그런데 통영으로 오니 둔덕면 생가보다 더욱 정갈하게 복원된 또 하나의 생가가 있는 것이다.

연보를 보면,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시 태평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통영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두 살 때부터이고 태어난 곳은 ‘거제도 둔덕면 방  하리’라고 한다. 부친 유준수는 그 방하리 유생으로 통영의 밀양 박씨가의 규수와 결혼하면서 통영에 건너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 하지만 기념관의 관리인은 그런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둔덕면은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곳일 뿐 실제 태어난 곳은 바로 ‘통영시 태평동’이라는 것. 일찍이 청마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으나 이 역시 태생지를 명쾌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로 내려 나의 父祖의 살으신 곳.
작은 골안 다가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골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 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왔던가  
- 「거제도 둔덕골」에서 -  
 
어찌 보면 거제도에도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작품을 썼던 곳에  도 기념관이 세워졌으니 시인으로서 복에 겨운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시인을 두고 마치 소유권 다툼을 벌이듯 두 지역이 오랫동안 줄다리기하는 것이 결코 아름답지는 않았다.  
통영은 시, 소설, 시조, 음악, 수필, 희곡, 평론, 회화, 조각, 공예, 무형문화재,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에 비해 거제 쪽은 상대적으로 단출하다고 할 수 있는데, 지역 이기주의를 떠난 문화적 상호 연계는 불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다. 생가 쟁탈전(?)이 상업주의적 타산을 염두에 둔 이기주의가 아니고 시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의 다른 표현이라면, 타협의 길은 의외로 쉽게 열릴 수 있지 않을까. 본적지를 중시하는 정서를 존중한다면 거제도의 생가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고, 이미 훌륭한 문학사적이자 기념관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통영의 생가 또한 그 나름의 의미를 살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상호배제가 아닌 존중과 상호협조의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통영의 생가는 청마의 부친 유준수가 경영하던 유약국의 분위기를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원래 유생이었던 부친은 재미 삼아 한의학을 공부하다가 나중엔 정식 한의 과정을 거쳐 ‘유약국(柳藥局)’을 차리면서 통영에 뿌리를 내렸다. 청마는 어린 시절 주로 통영의 외가에서 자랐는데 그때는 명이 길라고 외조모가 지어준 ‘돌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청마의 시비만도 전국 11기, 개인 시비로 청마만큼 많은 시비를 가진 시인도 드문데, 고향에서는 생가를 두 개나 가진 시인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가 가 본 생가들은 대부분 유적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닌 채 마치 고향마을에 선 나무 한 그루처럼 고요히 과객들을 맞아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통영생가의 경우는 관리사무소와 문학관을 갖추어서 기념공원에 가까운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다. 만약 이런 형태라면 기존의 생가들처럼 정태적인 구조가 아니라 동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민속관 들여다보듯 생가 내부를 한 번 둘러보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허전한 방문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어느 식당에 들어갔을 때 벽 한 쪽 전면이 방문객들의 낙서와 축하 메시지로 도배된 것을 보았다. 평범한 식당이었으나 그 벽이 그 식당만의 독톡한 아우라aura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도 방문객들의 자작시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대문이나 마당 한 구석에 마련된다면 어떨까. 분위기는 많이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시인의 모형을 만들어 시인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마루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번호를 누르면 시 한편을 들을 수 있다,  

또는 생가에 대한 간단한 설명 또는 시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생가 마당 한 편에 서서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면서 발길을 돌린다.  

 

항구라는 지리적 특성 활용해서 ‘한국의 나폴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탈바꿈해야…

돌아볼 곳은 많으나 시간이 여의치 않았기에 바다나 더 보아 둘 욕심으로 화물부두와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통영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진 항구를 앞에 둔 해안도로를 걸어가니 인도와 차도의 구분 없이 어수선하게 주차된 차량들이 통행을 가로막는다.  
바닷가 하면 떠오르는 종려나무와 이국적 정취를 기대하진 않더라도 해풍과 파도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의자 몇 개라도 바닷가에 놓아 둘 법하건만 어디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는 없다. 폭염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종려나무를 띄엄띄엄 심어 놓긴 했으나 햇빛을 가려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오히려 왜소하고 빈약한 모습이 보는 이를 안쓰럽게까지 만들었다. 차라리 해송이라든가 동백을 심었더라면 그렇듯 서글픈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닷가를 따라서 빙  둘러 선 동백이나 해송 거리를 조성한다면 더위를 식히고 바다냄새에 취해서 통영에 대한 사랑이 절로 생기지 않을까. 명성에 비해서 통영의 거리는 사실 너무 황량했다.

통영이 ‘한국의 나포리’라는 이름에 걸맞는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항구라는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정리와 단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느 도시처럼 통영 거리를 멋없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항구 주변의 건물을 도배하다시피 한 난삽한 간판들이다. ‘바다마트, 양식마트, 가라오케, 하버클럽, 엔젤식당…’ 이산가족 상봉차 방남(訪南) 했던 북한 국어학자 류열이 “남한의 한글은 엉망진창”이라고 개탄했다더니 내 입에서도 그런 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이 되었다. 국적불명의 조합어들이 판치는 거리의 간판들은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항로를 따라 가다보면 ‘덕양 활어, 금강 활어’와 같은 수산물 판매점들이 도열해 있고, 이곳의 명물, ‘충무할매 김밥집’들이 군집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김밥집들 중 한 간판을 보자. 간판 좌우에 사람의 사진, 김밥 사진이 동그랗게 화보사진 처럼 들어가 있는데, 그 가운데 ‘원조 할머니 김밥의 명가, 60년 전통의 소문난 원조 김밥, 999 명소의 집, 여의도 광장 참가 업소‘라는 글씨가 다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간판 위에 작은 간판 하나를 덧붙여 달았는데 이 작은 간판에도 ‘원조’라는 빨간 글씨 밑에 가게 주인 사진이 주민등록사진처럼 붙었다. 옆으로 이어진 김밥집들의 풍경도 대체로 비슷하다. 마치 최대한 큰 글씨, 그것도 빨간색 활자로 하지 않으면 손님이 끊길 것처럼 생각한 것인지 저마다 빨간 색의 ‘원조김밥’ 간판을 달았고, 벽에 부착된 간판만으로 모자라서 보조 간판을 저마다 똑같이 달았다. 건물 하나가 온통 조악한 화보처럼 간판들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다. 제 멋대로 무조건 큰 소리로만 연주하는 바람에 최악의 불협화음을 내고만 합주단처럼, 글자들의 스테레오 앞에 선 느낌이 든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미륵도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사소한 것들을 정비해서 통영의 이미지를 개선해 나가는 게 더 중요하 지 않을까.  

짤즈부르크에 비길만한 세계적인 음악도시로서의 통영은 이런 작은 개선들이 있고 난 후에야 가능할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