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문예 2  /  프랑스 거석문화

세계 거석문화의 고장 카르냑을 찾아서

임효재 (서울대 고고미술사 교수)

 

구라파에서도 거석문화의 중심지로 너무 유명한 블란서의 조그만 도시인 카르냑(carnac)시를 들어서는 발길은 왜 그런지 무겁기만하다. 파리 시에서도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진 곳이지만, 백여년 전부터 여기 남겨진 문화유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여 그 하나하나를 소중히 관리 보존하여 세계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던 우리로서는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 싶다. 실상, 우리 나라도 그 곳 못지 않게 아시아에 있어서 거석문화의 중심지인지라 이를 잘 보존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제 우리 고인돌군을 「유네스코가 정하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정식 등재하기 위한 예비등록절차를 마친 상태여서, 이제 어깨를 올리고 이곳 여러 인사들과 만날 수 있는 뒷심이 생긴 것 같다. 카르냑이 있는 브레따뉴(Bratagnue)지방은 프랑스의 서쪽 끝에 대서양 쪽으로 돌출한 반도인데, 고인돌(Dolmen)이나 선돌(menchir)과 같은 거석문화의 그 어원자체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지방의 고유 언어인 Breton어에서 연유할 정도로 이 지방에는 많은 거석물이 있는 곳이다. 고인돌, 선돌, 이외에도 석상(cairn)이라든가, 선돌을 한줄 또는 여러줄로 길게 열 지운 입석열(Alignment)도 밀집 분포되어 있다. 그러면 먼저, 구라파에서 거석문화의 왕국, 카르냑의 면모를 살펴 보기 전에 도대체 거석 기념물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어떤 종류가 있는 것인가?  


구조적 성격에 따른 분류
 
거석 문화란 자연석 또는 일부만을 가공한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선사시대의 건조물로 앞서 말한 무덤으로 사용한 것도 있지만 제사 등 의식적 행위와 관련된 것도 포함한다.
선돌은 길쭉한 돌덩이 한 개를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도 분포되어 있다. 이것의 기원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남근 신앙과 관련되어지고 있다.
열석은 선돌을 한줄, 또는 여러 줄로 열 지워 세워 놓은 유적으로 서유럽에서 하지나 동지등 특정시기의 일출과 관련된 태양숭배사상과 관련된 유적으로 보고 있다.
둘림돌은 선돌을 둥근 고리모양으로 둘러 세운 유적으로 제당의 기능을 갖춘 곳으로 여겨지며 서유럽에서는 열석의 한쪽 끝에 이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고인돌은 여러 개의 넓적한 돌을 세워 주로 네모난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 돌을 씌워 돌 방을 마련한 것이 가장 전형적인 구조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구덩일 파고 깬돌을 쌓거나 구덩속에 그대로 시신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다른 유적들은 주로 자연숭배나 제사등과 관련된 것들이지만 이 고인돌은 대개 매장시설로 확인되고 있다.

이 거석 유적들이 언제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꾸준한 연구가 이루어 졌는데, 1955년 처음으로 방사능을 이용한 과학적 연대측정법에 의해 그 절대연대가 측정됨으로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할석으로 축조된 길이 70m 규모의 11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거석 무덤은 기원전 5000년으로 측정되었고, 1973년 거석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의 연대가 기원전 5,040년~4,390년으로 측정되어 프랑스 서쪽 브레타뉴 지방에서는 기원전 5,000년~4,500년경부터 거석문화가 시작되었음을 밝혀내게 되었다. 카르냑 시내를 1킬로미터정도 벗어난 북쪽에는 넓은 범위에 걸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입석들이다.

작은 것은 60cm에서 큰 것은 사람 키의 두배가 넘는 4m 크기의 것이 수천개나 일정한 열을 이룬 채 서 있으니 과연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이 menec이라고 불리는 입석열로 그 길이가 1,167m나 되고 보니, 끝이 보이질 않는다. 모두 1,099개나 되는 입석이 모두 11열을 이루고 길게 뻗어 있는 것이다. 이열석의 동단에는 240m 가량 공지로 되어 열석이 중단되다가 다시 시작되는 곳이 Kermario열석, 이 제2열석도 서쪽의 Menec열석과 같은 선돌 1,029개가 10열로 세워진 연장 1,120m의 동서로 긴 열석이었다. 이 열석의 서단부에도 원래 Menec에서와 같은 환상열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열석의 서단부 남쪽에 짧은 연도가 달린 고인돌이 보인다. 입구가 동남쪽을 향한 이 고인돌은 화강암의 대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연도에만 덮개돌이 남아있다. 이 Kermario열석의 동단에 이르러 다시 400m가량 열석이 중단되다가 다시 제3의 Kerlescan열석이 시작된다.

이 열석의 서쪽에는 환상열석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며, 도중에 열석이 중단된 200m를 포함시키면 전체의 길이는 880m로서 모두 594개의 선돌이 13열로 배열된 것이다. 이상의 제1.2.3열석의 총연장은 4km에 이르고, 현재 주원변에 넘어져 있는 선돌까지 모두 포함하여 보면 모두 3,000여개에 달하는 거대한 열석군이었다. 이것을 왜 당시 사람들이 만들었는가에 대하여는 그 확실한 것을 알수 없지만,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 또는 하지나 동지와 연관된 제사행사와 연관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수백미터가면, 2개의 고인돌이 장축을 서로 직각으로 하고 있는 고인돌이 보인다. 2개 모두가 대판석 여러개  를 지석으로 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소위 ‘터널’식 고인돌이었다. 서쪽의 것은 20도 가량 편동한 남북으로 긴 길이 9m 폭 2.5미터의 고인돌로서 지석 상부에 4매의 덮개돌이 얹혀 있었으나 덮개돌들이 서로 연접되지 않고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이런 터널식 고인돌은 카르냑으로 오기 전에 그 규모상 대단히 큰 ‘선녀의 바위’(La Roche Aux Fees)라고 불리우는 고인돌을 방문하였을 때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이것은 불란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것인데, 사진에서 보듯이 40톤 이상의 거석 6개를 포함하여 모두 42개의 대판석과 괴석(塊石)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방부에 따로 전실이 마련된 이 거석물은 지금끼지의 조사결과 다른 종류의 것과는 달리 매장시설이 아닌 하나의 기념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더더욱 유명한 것은 이것과 관련되어 한 청년과 선녀와의 애절한 전설이 깃들어 있는 것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고인돌 협회 회장인 유인학 박사를 위시하여 정희경, 이경재 등 전 국회의원을 포함한 우리 조사단 23명 전원이 그 내부로 들어가 둘러 보아도 충분할 정도로 그 규모가 큰 것이었다. 카르냑 마을 동단에 위치한 St. Michel이라고 불리우는 유적은 그 지름이 20m, 높이 12m의 봉토분으로 흙과 돌을 사용하여 혼축된 것으로서 봉토 아래부분에 여러 개의 묘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쪽으로 뚫린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석벽으로 구축된 통로좌우에 모두 19개의 묘실이 있고 동편 구석에 3개의 고인돌이 위치해 있었다. 고인돌 못미처에서 다시 남북 양쪽으로 길게 뚫린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 남북통로의 주변에는 묘실의 시설이 없었는데 관광객들은 그 중 남쪽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 봉토분은 이미 1862년에 첫 조사가 있었고 그뒤 1900년부터 1906년까지 7년동안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 조사를 통해 중앙의 고인돌 내부에서는 화장을 시킨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들과 함께, 모두 39개의 석부(石斧), 그리고 진주목걸이 한 개가 출토되었다. 현재 이 봉토 바로 위에는 조그만 현대식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이처럼 초기에 해당되는 매장 형태는 단지 돌로만 쌓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목재와 돌을 이용하여 매장시설을 축조하고 그 위에 흙을 동그랗게 쌓아올린 봉분을 씌우는 전통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나라 신라시대의 석실 고분과도 흡사한 점이 있어 그것을 거석기념물로 보아야 하느냐에 대한 동양과 서양학자간의 커다란 견해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든, 구라파에서는 이런 단계를 거친 후 점차 커다란 거석만으로 구조물을 만든 고인돌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런 고인돌은 구라파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대서양 연안을 따라 남으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북으로는 북부독일, 발틱해까지 농경의 파급과 함께 퍼져 나가면서 새로이 출연하는 공동체 사회의 심벌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거석무덤은 그 나름대로 시대 변천에 따른 발전 단계를 보이고 있다. 1단계는 기원전 5,000년~4,500년경에 시작되며 St.Hichel의 열처럼 주로 할석으로 구성된 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평면의 봉분안에 단실을 만들거나 또는 다실을 마련한 것인데 방이 있는 고인돌의 기원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단계는 고인돌 형태로, 덮개돌이 여러 개 얹혀있는 소위 터널모양의 고인돌인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는 없는 다인(多人)을 매장하는 이곳 특유의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나라 북방식 고인돌 형태와 유사한 것도 다수 발견되어 서로의 연관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 나라 고인돌은 단지 1기만 있는 경우도 있으나, 그런 예는 드물고 대개는 10여개 때로는 수백 개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후보로 등재한 전남 고창 상갑리 예처럼 산자락을 따라 약 2.5km의 거리에 500여기가 한데 모여 한반도 최대의 고인돌 무리를 이루는 곳도 있다.

서북지방의 황해도의 연탄과 황주 일대도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기의 남방식을 포함하여 모두 850기의 고인돌 무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우리나라 고인돌은 외형적인 구조에 따라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의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되고 있다. 우선 북방식 고인돌은 강화도 부근의 고인돌처럼 4매의 넓적한 판돌을 지상에 세워서 평면이 네모난 돌 방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는 돌방보다 넓은 덮개들이 엊히게 된다. 따라서 구조의 대부분이 지상에 드러나게 되고 매장은 지상에 이루어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돌 방의 둘레에 돌무지와 같은 보강 시설이 더해진 것도 있다. 한편, 남방식 고인돌에서는 사진에서 보이는 고창의 예처럼 북방식과는 달리 땅을 파고 여기에 매장 시설을 만들기 때문에 그 위에 얹힌 덮개돌은, 매장부 둘레의 돌무지나 몇 개의 받침돌에 의해 얹혀 덮개들의 무게가 지탱된다. 따라서 땅위에 나타나는 것은 특별한 가공이 이루어지지 않은 두터운 덮개돌과 일부 받침돌뿐이기 때문에 북방식에 비해 매우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서는 북방식 고인돌이, 그리고 남쪽에는 남방식 고인돌이 분포되는 특징이 있다. 지금 까지 한반도에서도 발견된 고인돌은 전남 지방에서만 2만여기가 넘는다. 전북에서도 도합 1,80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1,200여기가 고창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북한지역에 있어서 평양을 중심으로한 평남과 황해 일대에서 1,000여기를 포함한 도합 1만여기가 확인되었으니 남북한 합하면 3만5천개나 된다.

우리주변을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요령성을 중심으로한 옛만주지역에 400여기, 그리고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거리상 가까운 서북 큐슈지역 191곳에서 600여기가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 지역중 인도반도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지석묘들도 200여기 미만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아시아에 있어서 한국은 동양에서 고인돌 왕국이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자랑할 만한 것이고 특히 전남에서만 2만여기가 밀집 발견된 것은 단일 면적에서의 밀집도는 세계적으로 가장 조밀한 것이다.

주민 5,000여명도 안되는 카르냑이지만 구석구석 둘러보아도 그 어디에나 조상이 남긴 유산에 대해 소홀히 다룬 곳은 찾아 볼 수 가 없다. 고인돌 집중보존구역과도 뚝 떨어져 있는 단지 한 개 밖에 없는 고인돌이 있어도 그것을 위하여 그 고인돌 주변의 나무들을 깨끗이 정리하여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그 앞에는 고인돌 설명을 위한 안내 간판을 세워놓고 있다. 또한 이를 보러오는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주차장을 따로 만들어 놓는 등 참으로 감탄의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애정이 무려 100년전부터 시작하였으니 카르냑 거석 기념물의 보존 상태는 가히 짐작이 가리라. 중앙 정부 역시 이 주변 일대를 국가 땅으로 매입한 뒤 그 넓은 지역에 대한 철저한 보존활용 방안을 장기에 걸쳐 마련하고 있다. 물론 거석기념물의 철저한 보존을 위해, 일반의 출입을 막기 위한 시설을 하여 놓았지만, 그것을 밖에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주변을 따라 도로를 자전거, 자동차로도 견학을 가능케 하였다. 아울러 관련시설 견학을 위해 순회 소형 관광차도 수시로 다니고 있다. 여기서 빼 놓을수 없는 것이 바로 옆에 있는 카르냑 선사박물관이다.

이 지역 문화와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게끔 전시하여 놓았고, 이 지역 고인돌 뿐만 아니라 세계 고인돌은 어떠한 양상이고 어떻게 발전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카르냑 거석기념물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훤히 알 수 있게끔 쉽게 설명하고 있다. 까르냑의 주민이 약 5,000명 정도인데 여름 휴가철에만 카르냑을 찾아오는 관광객의 수가 50만 명이 넘으니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는 관광수입만으로도 떵떵거리고 사는 카르냑 주민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요란하기만 하다.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서 좋은 환경을 구비하여 놓는 것도 좋은 지혜중에 하나인듯 카르냑에는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거석 기념물 중심의 영화관 즉, 아이맥스 관이 따로 만들어져 있어 큰 스크린에 입체적으로 보이는 거석 기념물, 또는 고인돌에 관한 것만을 전문으로 상영하는 극장이 있다. 이밖에 편리한 숙박 시설이나, 깨끗하고 값싼 카페, 해안을 낀 여러가지 휴양시설은 너무나 완벽하여 전세계에서 이곳 카르냑을 찾아오는 이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그러면 아시아에 있어서도 그 밀집 분포 면에서 단연 1위라고 자랑하고 있는 한국은 과연 어떤 실태에 있는가? 요사이에도 하루 밤사이에 논밭에 있던 고인돌이 불도저로 없어지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이제 이들을 옮겨 부셔서 구들장 돌이나 담장돌로 쓰는 무지는 방지해야 한다. 고인돌은 한번 파손되면 그 원형을 되찾기 어렵다. 더구나 이 거석 기념물이 우리 한민족 역사 흐름에 하나의 혁명적인 대전환을 이룬 상황에서 등장한 존재이고 보면, 민족의 웅비를 반영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에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다.

오는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지정을 받기 위한 최종 회의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릴 예정이다. 금년 크리스마스 케롤이 흘러 나올때에 때 맞추어 우리 고인돌 거석 문화의 세계 유산 지정 결정의  낭보가 흘러 나올것이 기대된다. 비단 우리민족만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전인류가 공유하는 세계 문화유산인 고인돌 문화. 이들을 잘 보존하고 정비해서 블란서 카르냑이나 영국의 스톤헨지처럼 역사 학습장으로는 물론 국가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