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조건의 변화를 일으킬 프로그램 개발을
고길섶
(문화평론가)
21세기 인간 삶의
조건 21세기는 과연
희망의 세기인가? 떠들썩하게 새천년이 어쩌고 저쩌고 하던 1999년말에는
적어도 그래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 시뮬라르크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던가. 다시 일상에서 경험하는 21세기의 하루하루는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의 연속들이기도 하다. 날짜로만 따져서야 분명 21세기임에 틀림없으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현실세계는 과거를 향해 거꾸로 가는 시계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우리가 어디로 거꾸로
가는지도 모르는 암담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즉 초국적자본과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채찍질 대로 가다보면 이미 알려진 대로 ‘20대 80의 사회’라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는 비판적 전문가들의 진단 말이다. ‘20대
80의 사회’라는 말도 이제 제법 많이 알려졌다. 그런데 그것도 완전히
거꾸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100명 중 20명만 일해도 나머지 80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회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거야말로 맑스가 꿈꿨던 공산주의
사회이다. 오전에 잠깐 일하고 오후에 낚시하고 저녁에 문화활동하는…
그러나 ‘20대 80의 사회’라는 것은 그렇게 오해되는 사회가 아니다.
노동인구 100명 중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2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80명은 평생을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매야
한다. 프랑스의 여성작가 비비안느 포레스트는 이를 ‘경제적 공포’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 환상과 기만에 가득찬 현실세계가 우리의
심성을 고약하게 만들지라도 바로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말할 때도 이상향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그려낸 게 결코 아니다. 16세기 당시 영국사회의 모순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꿈꾼 것이다. 사실상 모어가
폭로했던 사회모순들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간 물질문명의
고도화된 발달과 과학기술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비약이 거듭되어
인간의 풍요와 해방이 달성된듯 해 보인다. 물론 그런 부류의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가령 의료분쟁으로 대다수의 환자와
그 가족들이 고통스러워 해도 그것에 전혀 영향받지 않을 그런 사람들
말이다. 모어가 살던 당대는 자본주의 초입의 시기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폭력적으로 진행하던 때였고, 그래서 그는 자본축적용으로 길러지는
양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기이한 세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농민들은
대대적으로 농경지로부터 쫓겨나야 했다. 오늘의 상황도 유사하지 않은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노동자들이 대량 쫓겨나고 있다. 오늘날 역시 자본의
축적논리에 의해서. 그러나 모어의 시대와 오늘날에 있어서 폭력적 구조는
동일할지라도 빈곤의 양상은 현저하게 다르다. 소비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대중들은 한편으로는 풍요를 구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으로 심화되고
있다. 나는 이런 현실을 ‘오른손에 핸드폰 왼손에 깡통’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몸둥아리는 바로 그 두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리는 희망할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희망만 보아서도 안되고 절망만
보아서도 안된다. 우리는 지금 철저하게 두 얼굴을 내밀고 다닌다. 이것이
바로 모어시대와 오늘날의 희망찾기의 차이이자 또한 그 곤란함이다.
우리가 대안적인
공동체 담론을 새로이 생산하면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점이다.
다시 말하여 21세기의 조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21세기의 현실태인 인간의 조건이자 삶의 조건이다.
몇세기 동안 숱한 공동체 운동들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공동체 담론을 생산하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여전히 ‘공동체적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삶이 여전히 위기 속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20대 80의 사회’로
가고 있는 21세기의 조건, 그것은 이전 세기부터 사회병리적으로 진행되어
온 개인주의가 그 어느때보다도 더 심각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이러한 상황을 성찰하지 않은 채 제시되는 공동체론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생태파괴 등 지구적 위기 차원에서 주창되는
인류/지구 공동체론도 결국 현대인의 내부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적, 근본적 요소들에 대한 성찰과 극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21세기의 아픈 조건일지라도 말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인간주체 세넷은
근대사회를 ‘공적 인간의 몰락’이라고 정의한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도시국가들에서 인간집단이 공적 주체로 존재해왔으나 근대사회/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면서부터 공적 인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개인들은 공적 생활을 통한 공동체적 삶을 구성하기보다 개인적 쾌락주의가
극한화되는 나르시시즘 문화에 빠져 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인의
모습은 한나 아렌트가 성찰한 ‘인간의 조건’의 근본적 모습과도 관련된다.
아렌트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이 폴리스와
가정이라는 뚜렷이 구별되는 두 실체로서 존재하였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양자의 경계선이 급격히 해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근대에서 이 두 영역은
마치 정지하지 않는 삶의 과정 자체의 흐름 속에 놓인 파도처럼
끊임없이 서로 뒤섞인다.”(「인간의 조건」). 그러나 이러한 해체는
유연한 해체라기보다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을 왜곡시키며 새로운 방식으로
이분화하고 경직화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가령 페미니스트들이
전통적으로 지적해 왔듯이, 남성들은 공공영역(사회)의 주체이고 여성들은
사적영역(가정)의 주체들로 이분법적으로 공/사 분리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우습게도 공공영역화해야 할 것들은
사적 도구화하고 개인적 정체성으로 보호하고 자율화해야
할 것들은 공적 도구화하는 전도된 현실에 부딪치고 있다. 이처럼
공공영역들이 부당하게 사적영역화(1)실지로는 공공영역임에도 사적영역으로
규정됨으로써 나타나는 사회적 무관심화와 (2)공식적으로 지정된 공공영역의
항목들을 개인이 챙겨먹는 사적 소유화의 두 가지 길로 일어난다됨으로써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조건을 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공공영역은 공공성을 수행하는 장소 정도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단순히 영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공영역은 사적영역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실적 구성체이며, 인간의 존재방식 및 공동체적 조건을 담지하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공동체 건설 문제는 결국 공공영역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와 직접적 관련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담론의 생산자들은
공공영역의 문제와 크게 연결시키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공영역이란
정당 등 정치적 공공영역이나 언론 등의 의사소통적 공공영역에 제한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적 삶의 연대고리가 형성되는 모든 표면들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공동체론에서 공공영역/사적영역의 문제를 배제한
측면도 있다. 그것은 공공영역/사적영역의 구분이야말로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공동체를 전근대적 이미지로 귀속시키는 보수적 발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는 이러한 시각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공공영역/사적영역은 공동체의 저해요소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현실적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주의적 공동체의
실패는 바로 이런 구분법을 부르주아적이라 하여 사적영역을 지워낸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공/사 분리는 부르주아적 가치체계의
산물이자 그 구성요소임에 틀림없으나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함으로써
이 사안을 대안적 공동체론에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공동체론에 공공영역/사적영역의
문제를 새로운 가로지르기로 접목시키는 데 있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그 개념들의 새로운 전환이다.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은 서로 대립되기
위해서 구별되는 범주라기보다 실천과 의미의 차이들이 생성되는 방식에
따른 구별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개인들은 항상 이미 사적 주체이면서도
공적 주체이다. 사적 주체 영역에서는 공동체적 맥락으로 환산되지 않는
고유한 개인적 서사가 활동하고, 공적 주체 영역에서는 사적 주체성의
능동적 결합에 의한 사회적 연대가 생성된다. 공동체는 바로 이 양자의
혼합적 구성체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개개인들이 바로 공동체의
사회적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사적 영역의 차원을
배제함으로써가 아니라 적극 포용함으로써 형성되는 공공의 사회구성체로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의 대안적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공동체 정신’으로
무장시키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하여 초월된 힘으로서의 공동체적 ‘정신’이라는
목표에 개개구성원들이 동일시되게끔 부과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개개인들의 신체욕망언어들을 공동체주체들의 직접적인
자기과정으로 구성하게끔 해야 한다. 사적영역은 나르시시즘화되는
장소가 아니라 공동체의 창발성을 자율적으로 생성해내는 장소로
전화되고, 또한 공공영역은 개개인들의 주체성이 형성되는 사회적, 문화적
조건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적영역이 사생활의 보호단위로 기능하면서도 공공성의 정의가
배합되어야 한다. 가령 가정에서 보면 아내폭력이나 아동학대 등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가정은 사적영역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어서 가족구성원들의
인권이 말살되어도 대개 ‘집안일’로 규정해버리고 공공적 차원에서
대응하는 데 무심해왔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공동체도 인간적 삶의 관계들이
실현되는 공공영역적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인식이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택문제나 전기 등 도시공공서비스의 공급 문제와도
연계된 차원에서 사고해야 한다. 공동체란 개념에서 이런 것들이 육체적으로
사고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관념적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결국은
구성원들의 신체적욕망적공간적 형식들은 무시된 채 ‘공동체 정신’으로
재무장할 것 만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가정과 같은 영역의 사례는 공공영역으로
정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사적영역화됨으로써 공동체적
흐름이 파괴가정폭력이나 공공서비스의 공급을 사적 능력으로의 전가
등됨을 잘 보여준다. 또 반대로 공식적인 공공영역들대학, 사찰,
정당, 행정, 언론 등이 사적 이해관계로 치부됨으로써 공동체적 흐름이
현저하게 파괴되어 왔다. 이런 역사적 현실들에서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근대를 통해 상실된 것은 공동체 정신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공동체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장치들의 배치라는 점이다. 가령
정부기구들과 같은 공공영역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관료기계로 군림해 왔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공동체적 흐름을 방해한
장치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공동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그 무엇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활동적 삶을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체제와 관계들을 공동체적
맥락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사회적 실천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지금에 있어서 신자유주의가 주도하고 있는
‘구조조정’과 ‘개혁’이야말로 우리의 공동체, 혹은 지구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주범임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정치경제 비판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지구적
공동체 혹은 인간적 삶의 조건과 관련된 비판의 대상이어야 한다. 세넷이
근대사회의 입구를 공적 인간의 몰락이라고 묘사하였는데,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그 깊숙한 오늘에 있어서는 차라리 사적 인간 혹은 인간
자체의 몰락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는 문화적
코드들이 세계적으로 균일해야 한다는 논리에 기초하여 인간활동의 총체
자체를 초국적자본과 금융자본의 코드 안에 영토화되도록 명령한다.
시민들의 노동3권, 사회보장권, 환경권, 생존권, 인권 등의 사회적 권리들을
자본의 독점논리에 종속시킨다. 이를 이냐시오 라모네는 ‘전체주의적
지구촌체제’라고 명명한다. 공동체는 바로 현실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조건에 기초한다. 우리가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것도 결국은
현실에서의 인간의 존재조건을 새롭게 모색해보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을 단순히 공/사 구분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인간의 존재조건을 생성하는 영역들로 재사고할
필요가 있다.
차이와 연대를 지향하는 공생체로
우리가 공동체를 상상할 때 새롭게 전제해야 할 또
하나는 공동체가 결코 동질성/동일성으로 의미화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공동체를, 구성원들을 동질성/동일성의 논리로
결속시키는 사회체로 정의해 왔다. 그러나 아렌트가 “공동세계가 모두에게
공동의 집합장소를 제공할지라도,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의 위치는 상이하다.
두 대상의 위치가 다르듯이 한 사람의 위치와 다른 사람의 위치는 일치할
수 없다. 타자에 의해 보여지고 들려진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적 삶의 의미이다.”(앞의
책)고 지적하는 바와 같이, 앞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공동체는 이질성들의
접속과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다양성의 문화구성체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상은 단지 상상적인 상태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내보여진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맥락과 궤를 같이하는 새로운 공동체 사례를 들어 볼 수 있다. 그것은
멕시코에서 신자유주의와 몇 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공동체 ‘사빠띠스따’이다.
그들은 정치경제적 저항만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에 기초한
자신들의 새로운 공동체운동도 하고 있다.
“미국 대륙의 인디언
나라들과 인디언 주민 사이에서, 민족적 정체성, 문화적 독특성, 언어적
정치적 자율성의 긍정은 정복, 식민주의, 대량학살을 통해 그들에게
부과되어졌던 서구문화와 자본주의 조직의 여러 형식들에 대한 광범한
비판 속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과 인간공동체들
및 그밖의 다른 자연과 맺는 관계 양자를 포함하는 갱신되고 재창조된
실천들의 폭넓은 다양성의 긍정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치아빠스 인디언들의
투쟁은 그들의 착취에 대항하고, 그들이 전통적으로 취급되어 온 경멸에
대항하며, 비밀암살단들, 경찰, 멕시코군에 의한 억압의 만행에 대항하고,
그들의 토지와 자원의 약탈에 대항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투쟁들은
또한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 그들 나름의 문화, 종교 등등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 시간, 자원들을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파이의 더 큰 조각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매우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항상 그들을
노예화시켜 왔고, 그들의 생활방식들, 즉 그들이 자기가치화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그들 나름의 존재방식들을 발명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긍정적 자율성을 파괴하려고 했던 사회적 체계로부터의 실질적인
자율성을 위해 싸우고 있다(이것은 갈등이 없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다).”(해리
클리버, 「사빠띠스따」)
. 공동체란 요컨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만드는 집합적인 구성체이며, 거기에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미적 차이와 이질성들이 공존하며 자율성을
확대해나가는 삶의 환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현실적인
밑그림이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는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동일성이나 계급주의적, 인종주의적 동질성에 기초하는 게 아니라, 계급,
성, 세대, 인종, 종교, 지역, 감수성, 가치관 등에 있어서 공공영역/사적영역에
걸쳐 다양한 활동의 장을 생성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집합적 구성효과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소위 ‘대안적’ 공동체는 더 이상 농촌의
삶이나 자연환경만을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사람들의 주된
활동 장소와 격리된 곳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 현장들에서
즉 도시공간에서의 새로운 인간적 조건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끔 프로그램화하는
것이 요구된다. 차이는 사람들의 이질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체 흐름에 있어서 새로운 차이들크게는 삶의 방식 및 인간의 조건의
생성을 의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차이의 개념이 공동체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면, ‘공동체’라는 말은 이제 ‘공생체’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도 생각해볼 만 하다. 공생체 개념은 차이들과 문화생태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연대를 버리자는 발상은 아니다. 연대의 개념도 이제 ‘한마음’(대동단결)에서가
아니라 ‘다른 마음들’(다성주의)의 생태적 연결의 개념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가령 연대란, 아렌트가 지적하듯, “공동세계의 조건에서 실재성을
보증하는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본성’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언제나 같은 대상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같은 책)에서 함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와
연대에 따라 정의되는 공생체 개념은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공생체를 파괴하는 악마들남근주의적 미시파시즘에서부터 신자유주의와
같은 전지구적 악마에 이르기까지은 거부한다는 연대적 대응을 조건화한다.
우리를 절망시켜 온 것이 그 악마들이라면, 이제 우리는 차이와
연대에서 새로운 공생체적 희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공생체는
새로운 인간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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