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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시대의 문학과 장르의 확산 박철화 (문학평론가)
장르는 변화한다 시대가 변화하는 것처럼 문학도 변한다. 문학이 변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텐데, 그 가운데 가장 극명한 것은 장르가 변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대를 살아가는 미소한 개인들로서는 그러한 변화를 감각적으로 인지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긴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학의 장르는 크게 변천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점은 이 부문에서 선구적 업적을 내놓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호라티우스의 경우를 보면 쉽게 증명된다. 그들의 장르 구분과 오늘날의 문학 장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지 않은가. 비극과 서사시의 구분은, 다시 희곡과 서사시 그리고 서정시로 바뀐다. 19세기에 들어서는 그것들을 시, 소설, 희곡으로 분류할 것이고, 조금 더 현대적인 오늘날에는 거기에 비평을 추가한다. 희곡 하나만 보더라도 운문으로 쓰여지다가 이제는 산문으로 쓰여지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장르는 변화한다. 그것이 변화하는 이유는
문학의 장르라는 것이 제도이기 때문이다. “장르는 각각의 시대 내부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면 그 체계도
변하는 것이다. 과거의 입시제도가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듯이, 조선시대의
과거제도가 오늘날의 고시 제도와 다르듯이, 문학의 장르도 하나의 제도로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제도는 행위주체들로
하여금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주체의 행위에 의해 존재근거를 획득하며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르네 웰렉이 「문학의 이론」에서 인용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현존하는
제도들을 통해 작업할 수 있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새로운 제도들을
창조할 수 있고, 혹은 가능한 한 정치나 의식들에 참여하지 않은 채로
새로운 제도들에 편승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제도들에 합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 나서 그것들을 개조할 수도 있다.”1) 따라서 장르란 선험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칼 비에토르 같은 독일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 장르가 역사적으로 변천해 가는 과정에는 아무런 궁극적 목표도 없다. 장르는 어떤 완벽한 상태에 이르러 고정되려 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혁신되어 가는 현재적 과정 속에 있다. 한 장르의 역사는, 그 시작을 시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마침도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것일 터이다.”2)따라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장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어떤 장르가 새롭게 등장해 있을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불과 한 세기 안팎의 현대문학사를 갖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런 장르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스스로 현대문학사 속에서 장르라는 제도의 개조와 변천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 소설, 희곡, 비평이라는 서양의 장르 구분은 우리에게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지나치게 서구화된 틀에 담겨 있는 우리의 현대문학은 장르의 상대적인 역사성을 인식할만한 계기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적어도 한국 현대문학의 장르 구분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경직되어 있다.
80년대의 장르 확산 운동 현존하는 대학교의 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의 과목 구성표를 보면 쉽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문학이라는
개념의 형이상학이 서양의 문학 장르 구분을 통해 배타적으로 대학제도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수기, 르포, 낙서, 노동가요의 가사 등이 노동자 계급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주요한 문학 장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노해와 백무산 같은 노동시인들의 등장으로 화려한 개화를 보았던 그 주장은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뒤돌아보면 문학제도로서의 장르 자체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 주장의 진의는 지금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으나, 그 주장 자체가 문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 외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현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장르 이론은 조동일의 4분법이 제시된 이후 그 틀에 묶이어, 그 틀의 안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이뤄졌으나, 그 밖의 틀에서는, 그 틀의 장점뿐만이 아니라 단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장르 해체론은 문학 실천론의 입장에서 제시된 것인데, 그것의 수용과 영향은 아직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 제시 자체가 사회·정치적 움직임의 뒤를 긴밀하게 뒤쫓고 있다.”4) 그리하여 문학 외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80년대의 장르 확산 이론은 관심의 바깥으로 밀려나버렸고, 그 논의를 뒷받침해줄 작품들 또한 더 이상 생산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모든 제도는
변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면에서 80년대의 장르 확산론이 실패한 데에는, 사회·정치적
상황의 급격한 변화가 우선적인 이유로 지적되어야 하나, 동시에 문학
제도의 완고함을 깨트릴 만한 미학적 파괴력이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는 대단히 감동적이지만 이미 충분히 ‘시’적이었으며,
다른 노동자 문인들의 글은 그에 못지 않게 충분히 감동적이었으나 지나치게
덜 ‘문학’적이었다. 기존의 문학에 포섭되거나 거부되었지, 그 경계를
허물을 ‘합법적 기이함 etrangete legitime’의 ‘잘 숙고된 반항 indocilite
bien reflechie’이 없었던 것이다.5) 기이함이 합법적인 것이 되지
못하면 제도 속으로 파고들 수 없다. 동시에 합법성의 기이하지 못하면
제도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도의 보수성을 견디고 부술 수 있으려면,
맹목적인 거부가 아니라 제도의 빈자리에 대한 철저한 통찰, 가장 지혜로운
반항의 힘을 새로움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혁명,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문학 제도가 보수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용의 문제라기보다는 담화로서의 형식적 차원에대한 지적이다. 문학의 가장 커다란 힘인 유연성을 생각할 때, 문학에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문학이 ‘언어의 기능’에 의거한 담화라고 할 때, 제도의 입장에서 수용과 거부를 분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담화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들의 ‘지배특성’인 것이다. 이 지배특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의 미학적 관습이 장르라는 문학 제도에 개재되는데, 그 관습은 새로운 아름다움과의 힘겨루기를 통해 스스로를 검증한다. 판단주체 개개인의 총체적인 체험에 비추어 관습의 정당성이 평가되는 것이다. 크로체는 그의 「미학Estetica」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모든 진정한 걸작은 기존 장르의 법칙을 위반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비평가들의 정신에 동요를 던져 그들로 하여금 그 장르를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6) 그런 점에서 80년대 장르 확산 논의의 전거(典據)가 된 글들은 형식적인 면에서 언어의 파괴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기존 장르에 대한 우리 인식의 관습을 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미적인 차원에서도 친숙함과 안락함을 지향하는 우리의 관습을 해체할 만큼 형식적 새로움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낯설게 하기’의 정당화에 실패한 것이다. 전달해야 할 내용에 치중하다가 스스로 형식의 보수성에 갇히거나 막혀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80년대 장르 해체론의 실패는 문학에서의 혁명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보여주는 한 증거이다.
문학의 변천에 대해 고찰할 수 있어야 물론 문학이 언어로 구성되는 담화라고 해서 반드시 언어학적 기능으로만 그것의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회적 변화라고 광범위하게 표현하는 언어 외적 요소도 그 변화에 상보적인 요소로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운문으로 쓰여지던 희곡이 산문으로도 쓰여지기 시작한 것, 빅토르 위고의 희곡 「크롬웰 서문」을 둘러싸고 벌어진 낭만주의자들과 고전주의자들 사이의 논란, 알프레드 자리의 「위비 왕」에 대해 보인 부르주아 관객들의 분노, 「오감도」로 대변되는 이상의 아방-가르드 문학에 대한 당시의 반응 등이 반드시 언어적 기능에 대한 이의제기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가 변화하면 문학도
변하지만, 문학의 변화를 지연시킴으로써 사회의 변화를 거부하며 기존의
가치관을 지키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언어의 층위와 사회의 층위를
통합적으로 살피면서 문학의 변천에 대해 고찰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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