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음악

세계화 시대와 음악의 정체성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제 우리가 세계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주식 시장에서 외국투자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매우 중요한 변수로 읽혀지고 우리나라 국적의 회사가 외국의 기업을 사들이는 일이나 외국 국적의 회사가 우리의 기업을 사들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의 경영투명성을 소리 높이 외치는 것은 우리 정책 입안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외국의 평가기관들인 오늘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관행이나 방식을 고집할 수 없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행과 방식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완전히 고립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완전한 고립으로는 (우리의 삶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하루도 살아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세계의 관행과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수이지 선택사항이 아니다. ‘우리 식대로’를 주장하던 북한 마저 결국 개방으로 돌아서고 있지 않은가? 요컨대 세계화는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흐름이며 한 번 시작하면 완전하게 될 때까지 (즉 투명해질 때까지) 진행하도록 요구하는 힘이다.

돈은 투명한 환경을 좋아한다. 투명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부당한 이익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는 본질적으로 투명하지 않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며 누리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 같을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달라질 수도 있다. 온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도 있지만 산 하나 넘어도 달라지는 것도 있다. 그런데 문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미 그 삶의 조건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를 바꾸라고 말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너는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한다 혹은 그 언어를 사용하면 안된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 음악의 정체성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세계화 시대는 결국 문화의 국경을 약화하는 쪽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자본과 상품과 인력의 흐름은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정보와 통신이 이미 세계화의 길에 들어서 있고 이와 연관이 깊은 문화들이 이를 뒤따르고 있다. 여기서 세계화 시대와 문화 예술 사이의 갈등이 생긴다.
투명해지기를, 즉 같음을 요구하는 힘과 본질적으로 다름을 지향하는 힘 사이에 생기는 갈등이다. 음악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 갈등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 음악의 정체성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정체성을 포기할 것인가? 더욱 주장할 것인가?”  
그런데 정체성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음악에 있어 정체성을 찾는 것은 한국음악의 한국음악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일 터인데 오늘과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그러한 노력이 과연 의미있는 것일까? 이미 어느 정도의 지방색을 가지고 있다면 좋고 없다면 굳이 그것을 만들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정체성에 관한 소극적인 옹호는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채소를 즐겨 먹는 사람도 있고 고기를 주로 먹는 사람도 있다. 그 연유야 어찌 됐던 이렇게 사람마다 다소 다른 조건과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집단적 삶의 방식인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추운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과 더운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삶의 조건으로 인한 다른 습관을 가지고 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수히 많은 다른 조건들과 역사로 인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사는데 이러한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자.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즉 그러한 삶의 다른 방식은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있어야 하거나 보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서서히 바뀌어 지킬 만한 것을 지키는 한 편 새로운 것에 적응할 시간이 충분히 있을 경우는 괜찮지만 우리의 경우처럼 스스로의 의지가 제대로 발휘될 겨를도 없이 바뀌어 갈 때에는 이러한 소극적인 옹호만으로는 불충분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문화적 신분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인 문화적 정체성의 옹호론은 개진되는데 이런 것이다. 세계사의 발전은 제각기 다른 많은 문화들의 충돌과 교섭으로 말미암아 가능하였다. 예를 들어 악기의 발전사를 보면 어느 한 지역에서 고유하게 자라 온 악기들의 역사라기 보다는 수없이 다른 여러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서 발전되어 온 악기들의 역사이다. 서양의 관현악기들이 그렇고 우리나라의 악기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일 다른 여러 지역의 다종 다양한 악기가 없었던들 음악의 소리세계가 오늘날과 같은 다채로움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즉 각 민족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지킨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뿐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긴요하다. 이보다 좀더 나아가서 “종 다양성” 보존의 차원에서 언급할 수도 있다. 지금 세계의 생태주의자 내지 환경주의자들은 생물계의 종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국제적인 협약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들은 우리가 오늘 생태계에서 보는 생물종의 다양한 모습을 가능한 한 그대로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현대 산업 사회가 지구 곳곳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물 종이 엄청난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적응력이 약한 수많은 생물종이 절멸할 것인데 그러한 절멸은 결국 인간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나비가 5000종이 있으나 1000종이 있으나 그 차이를 느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차이를 느낄 때가 되면 그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때일 것이라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심사숙고를 요하게 만든다. 요컨대 역사는 한 번 밖에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생물 종이 그렇다면 노래의 종, 음악의 종, 방언의 종, 건축물의 종, 문화의 종은 어떠한가? 노래와 음악과 방언과 건축은 각각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각각 다른 삶의 모습이 곧 인류의 재산이다. 이 다양한 삶의 모습이 없다면 그리고 이 세계에 온통 같은 삶의 모습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위의 두 옹호론이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가치를 언급하는 것이기는 하나 이미 세계가 하나의 촌으로 여겨질 만큼 좁아진 상황에서는, 즉 문화적으로 이미 수 없는 충돌과 접변을 경험한 상황에서는 다소 설득력을 잃는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다시 이기적인 관심으로 돌아간 옹호론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이제 상품은 단지 그 실용적 질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품이 가진 이미지로 평가된다. 내용적으로는 별 차이 없는 두 개의 물건 중 하나는 브랜드 때문에 고가품이 되고 다른 하나는 헐 값에 팔리는 것이 그 예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문화적인 이미지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그러한 문화적 이미지를 국가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상품은 다른 나라의 제품에 비해 월등한 경쟁력을 가진다. 따라서 무역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문화적 이미지를 높여야 하고 그러는 데에는 남의 문화를 추종하는 것 보다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선전하는 것이 더 좋다.”  

 

우리의 국가적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는 어떤 것인가?

그런데 위의 논리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문화적 정체성이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문화적 이미지를 높이는 수단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만일 어떤 문화적 정체성이 한 나라의 문화적 이미지를 높이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용 없는 것이 된다. 오직 세계에 내놓아서 손색이 없을 문화 만이 간직할 만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국가적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이 다시 떠오른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어떤 것이 그러한 것인가? 민요인가? 판소리인가? 정명훈인가? 안익태의<코리아 판타지>인가? HOT인가? 이미자인가? 그것은 구체적인 음악인가 아니면 음악의 정신 예를 들어 신명, 살풀이, 예악 같은 것인가? 나는 여기서 우리의 국가적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가 그 중 어떤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필자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그에 관한 생각을 피력하는 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러한 문화가 가지고 있어야 할 조건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나는 이 조건에 독창성과 완결성, 그리고 그 당시의 삶에 얼마나 자리잡고 있는가를 묻는 현실성을 언급하고 싶다.  
이것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조건 중에 이 셋은 반드시 들어가리라고 믿는다. 동양의 문화로서 나는 중국의 당시(唐詩)나 일본의 노오, 조선조의 종묘제례 같은 것은 이러한 조건들을 구비한 것이거나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킨 문화적 가치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판소리나 산조 역시 그 당시에는 그러한 조건이 충족된 결과라고 본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하는 음악들이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음악이 지금 우리 시대에 있는가? 종묘제례악과 정명훈이 나름대로 우리나라의 문화적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 위의 세 조건 중에서 한 가지 씩을 결하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나는 특히 세 번째의 조건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에서 앞의

두가지를 충족하는 것은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음악정신 중의 하나인 신명은 충분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으며 예컨대 사물놀이에서 구체화 되듯이 완결성도 가지고  있으나 그 신명의 원리가 우리 삶에 어느 정도나 뿌리를 내리고 오늘 우리 시대의 예술정신으로 자리잡아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그렇다라는 대답을 하기 어렵게 한다. 우리에게는 이 외에도 자연과의 조화를 찾는 정신, 선비정신, 정성의 문화, 살풀이의 미학 등 많은 가능성들이 있다. 그러나 역시 대답을 유보하게 만드는 것은 오늘 우리가 얼마나 이 문화적 가치들을 우리 것으로 하며 살고 있는가, 얼마나 그 가치들을 구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점에 선뜻  대답할 만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실용주의적 편리함을 추구하고 명분에 있어서는 서양의 합리주의에 기대며 멋을 부릴 때는 우리의 전통정신을 이용하는 식이 되어서는 이 시대의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중심인 미국을 볼 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정신과 그 정신의 문화적 구현물인 헐리우드 영화나 대중음악까지 하나의 일관된 원리가 관통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일상은 쉽게 예술적 단계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일 터이다.

세계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지금 결국 우리 문화의 살 길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더욱 문화적으로 만드는 것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문화적 유산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음악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세계에 국가적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를, 음악을 선뜻 내놓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문화를, 음악을 향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