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 여행의 만남 4 /  진주와 문화예술인

곧은 충철과 맑은 환경의 도시, 진주

장영우 (문학평론가, 동국대교수)

 

9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곧 맞은 한가위 탓인지 정신을 수습하기 어렵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다소 숨을 돌릴까 싶었는데 느닷없이 몰아닥친 태풍 때문에 예정했던 일정이 또 다시 난마처럼 뒤엉켜 버렸다. 하필이면 진주행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날 제14호 태풍 사오마이가 한반도를 관통한 것이다. 올해 형성된 태풍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사오마이는 엉거주춤하는 자세로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더니 방향을 급선회하여 한반도 중심을 뚫는 심술을 부렸다.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은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세력이 약해진 점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풍이 할퀴고 간 자국은 참혹했다. 태풍이 지난 뒤의 남녘 하늘은 투명하리만치 청명했으나, 강물은 초콜릿 빛깔의 탁류로 굽이치고 있었고 군데군데 흙탕물에 침수된 농경지가 눈에 띄어 가슴이 아리다. 강포(强暴)한 사오마이가 한반도를 할퀸 자국은 그처럼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언제 태풍이 지나갔는가 싶게 진주(晉州)의 하늘은 쾌청하다. 어제 시드니에서 들려온 뜻밖의 낭보도 이 시원스레 맑은 날씨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여자 10m 공기소총 개인부문에서 열여덟 살의 소녀 강초현이 전문가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고 은메달을 획득한 사건은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아직 얼굴의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듯 한 이 청순한 소녀는 시종일관 침착 대담한 태도로 선두를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미국 선수에게 선두를 빼앗기자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우는 모습조차 예쁘기만 한 이 소녀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고 월남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다녔다는 효성이 알려지면서 일약 국민의 스타로 부상하였다. 이 소녀가 진주 강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진주를 찾는 내 뇌리에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예로부터 진주는 강계, 평양과 함께 아름다운 여성이 많기로 유명하다. 흔히 ‘색향(色鄕)'이라 하면 기생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기생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은 결국 예쁜 여성이 발에 채일 듯 했다는 얘기와도 통하지 않겠는가. 시드니 올림픽의 공기소총 은메달리스트 강초현은 진주 여성의 아름다움이 과연 명불허전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사례이다. 어려운 여건에 전혀 굴하지 않고 당당히 세계의 별이  된 진주 강씨의 초현소녀의 기백 또한 충절의 고장 진주의 이름에 값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제 논에 물대기 식의 억지로 볼 게 아니라 진주의 자랑거리가 또 하나 늘어난 셈치고 강초현 소녀를 더욱 아끼고 돌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진주를 관통해 흐르는 남강의 발원지는 지리산 천왕봉이다. 이 남강에는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바람끼에 자진(自盡)한 새댁의 슬픈  사연이 흐르고 있다. 경상민요 좥진주난봉가좦가 바로 그것인데, 이 노래가 1970~80년대 대학생 사이에서 즐겨 불려진 것도 특이하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 진주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 옆눈으로 힐끗보니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간다
꿈에도 그리던 낭군을 본 새댁이 황급히 집에 돌아오니 낭군이란 작자는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나 부르고 있지 않은가. 너무 기가 막힌 이 새댁은 아랫방에 물러 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서 목을 매고 말았다. 조선조 사회의 여성은 남편의 외도에 항거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칠거지악'은 조선조 여성을 꼼짝 못하게 옭아맨 차꼬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의 외도에 저항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민요 속의 여성은 조선조의 대표적 페미니스트라 할 만하다.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고향은 전북 장수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녀 역시 진주 여성의 강인한 기질을 물려받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의암(義巖)'

진주는 고려시대부터 왜구(倭寇)의 침범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이 이곳을 공략하려고 전력을 기울였던 것만으로도 진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1592년 10월 수 만의 왜적이 밀물처럼 침공해 오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왜적을 통쾌히 물리침으로써 파죽지세와 같았던 왜구의 한반도 침공을 일순간이나마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10만 왜적이 재차 침공하여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는데, 당시 순절한 민관군이 7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에 전한다. 왜군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남강에서 술자리를 벌였고, 이때 강제로 끌려나온 논개가 왜장(게야무루 노스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장렬히 순사(殉死), 조선 여성의 매운 절개를 사방에 널리 떨쳤다. 논개가 왜장과 춤을 추다가 순사한 바위는 한 평 남짓한 자그마한 바위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의암(義巖)'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이 바위는 때로는 육지의 암벽 쪽에 다가서기도 하고 때로는 강 속으로 들어가 암벽에서 건너뛰기도 힘들 정도로 멀어지는 까닭에 그 뿌리가 어디에 닿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고 한다. 하여 예전에는 ‘위암(危巖)'이라 불렸던 것을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새롭게 명명한 것이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을  비롯해 곳곳에 전한다. 진주성  내에 위치한 논개 사당에는 다산 정약용의 <진주 의기사기(晉州義妓事記)>를  현대어로 번역해 놓고 있다.
  
“계사년에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기생 의랑(義娘)은  왜장을 유인해 강 가운데 바위에 마주서서 춤추다가 서로 어우려졌을 때 왜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사우(祠宇)로다.”
  
대부분의 도읍이 그렇듯이, 진주도 남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진주의  명물이 남강 주변에 밀집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주의 상징이라 할 촉석루가 진주성 내에 자리한 것을 비롯해, 논개가 순절한 ‘의암'과 그녀를 기리는 사당(祠堂)이 촉석루 밑 남강 가에 있으며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동상, 그리고 진주박물관 등 진주의 문화 유적이 모두 진주성에 집결되어 있다. 더욱이 진주성 바로 앞에는 ‘형평운동 기념탑'이 자리하고 있어, 진주가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조선시대의 ‘백정(白丁)'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왔다. 그들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명주옷을 입는 게 금지되었고, 장례를 치를 때 상여를 쓰지 못했으며 혼례 때도 가마를 탈 수 없었다. 갑오경장 이후 제도적으로는 신분차별이 철폐되어 그들도 민적을 갖게 되었으나, 신분란에 붉은 색 글씨로 ‘도한(屠漢)'이라 기록함으로써 온갖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형평사(衡平社)'는 1923년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백정들이  모여 결성한 인권단체로 강상호(姜相鎬,  1882∼1957) 장지필(張志弼, 1882∼1970년대 중반?) 두 사람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강상호는 원래 양반의 후예로 백정들의 인권을 위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석 재산을 탕진한 선각자였다. 그리고 장지필은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중퇴한 지식인이었으나 백정이란 출신 성분 때문에 취직길이 막히자 강상호와 함께  형평사 운동에 투신하였다. 현재 진주성 앞에 축조된 ‘형평운동 기념탑' 비문에는 형평사운동의 취지가 지나치리 만큼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어 아쉽다.

진주인들의 저항정신이 담긴 굵직한 사건들

형평사 운동이 하필이면 진주에서 발발했을까. 여기에는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발생한 일반인과 백정의 ‘동석(同席) 예배사건'이 기폭제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워낙 진주 사람들의 강한 반골 기질이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조 신종 3년(1200년)의 ‘정방의(鄭方義)의 난', 조선조 철종 13년(1862년)의 ‘진주 민란',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진주의 관민이 합세해 이룩한 ‘진주대첩'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진주인들의 저항정신을 짐작케 해준다. 다시 말해 진주사람의 의식과 피에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는 강인한 저항정신이 유전적 형질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유전적 형질은 태생이 전혀 다른 전북 장수 출신의 기생 논개에게도 영향을 미쳐 왜장 게야무라 노스케(毛谷村之助)를 안고 강물에 몸을 던지게 추동했던 것이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맞추었네!

흐르는 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좥논개좦

태풍이 지나간 뒤의 남강은 변영로가 읊었던 것처럼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물결”이 아니라 탁류로 굽이치고 있었으나 논개의 충절과 그녀를 기리는 진주시민들의 정신은 여전히 맑게 이어지고 있었다. 의암 바로 옆의 바위덩어리에 앉아 바쁘게 붓을 놀리는 세 여학생의 화판에서 논개는 건강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주시에서 개발한 논개 캐릭터를 보는 순간 왠지 거부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요즘 캐릭터 개발 사업은 각 지방자치단체나 일반  사업체에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이다. 미키 마우스, 도널드 덕, 피카츄 등의 캐릭터는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널리 사랑받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면서 캐릭터 상품으로 개발되어 성공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따라서 우리도 다양한 캐릭터를 개발해 자국민은 물론이고 외국 관광객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논개의  캐릭터를 보면서 그녀를 한국여성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고 더군다나 그 캐릭터에서 의기(義妓) 이미지를 발견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보기에 논개의 캐릭터는 한국여성도 서양여성도 아닌, 디즈니랜드에서 개발한 동양여성의 특징만이 강조된 듯하여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다. 이런 불만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의 영정에서도 그다지 감소되지 않는다. 이당의 논개 영정은 지나치게 고전적 여성의  이미지만 강조되어 논개의 성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생 신분의 논개로서는 초상(肖像)을 남기기 어려웠을 당시 사정을 감안하면 이당의 고초가 어떠했으리라는 점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이왕 논개의 영정이나 캐릭터를 제작할 바에는  그녀의 이미지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촉석루(矗石樓)는 진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누각으로 그곳 주민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다. 원래 이 누각은 고려조 고종28년(1241년)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가 창건하여 여러 차례 중수, 재건한 건물로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불에 타 1618년 중건하였고,  1950년 6·25때 파손된 것을 1960년 중건해 오늘에 전한다. 그러니까 촉석루는 외세의 침입과 민족상잔의 비극적 역사를 몸 전체로 감당하면서 묵묵히 버텨왔던  것이다. 촉석루는 누구나 올라가 더위를 피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다.  누에는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남장대(南將臺)'라 쓰인 편액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약간 삐딱하게 쓰여진 듯 하면서도 절제된 기교가 조화를 이룬 ‘영남제일형승'의 파격이 미소를 짓게 했고, 웅혼한 기운이 가슴에 확 와닿는 ‘남장대'의 서체 모두가 일품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누각의 사면에는 시인묵객의 시서(詩書)가 즐비하지만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는 진주시민들은 촉석루에 올라  땀을 들이면서도 결코 난잡하지 않아  오히려 낯선 느낌마저 안겨준다. 이곳에서는 예의 귀가 따가울 정도의 시끄러운 경상도 사투리조차 이상스럽게도 나직하고 구수한 억양으로 귀에 와 닿는다.

진주성은 단아하게 복원되어 있다.  중창 또는 복원된 문화재의 대다수가 시멘트로 뒤발해 천박한 느낌만 주는데 진주성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잘 꾸며진 정원을 연상케 한다. 지금의 모습이 원래의 진주성과 똑같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싸구려 분과 시뻘건 연지로 덕지덕지 분장한 노류장화의 천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리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잔디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일까.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잘 정돈된 잔디밭에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진주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토록 아름답게 자란 잔디밭에서 뛰놀거나 한가히 드러누워 책을 보는 사람, 또는 은밀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제는 이와 같은 구시대적 금제는 버려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마구 드나들면 잔디가 상하리라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나, 언제까지 잔디를 사람과 떼어놓은 채 전시만 할 것인가. 그렇잖아도 마음껏 뛰놀 공간이 부족한 도시의 아이들에게 넘어져도 크게 다칠 염려가 없는 잔디를 개방하면 작히 좋으랴.

전문 역사 박물관-진주박물관

진주박물관은 진주성의 끄트머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야외 공연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서구 양식을 모방한 것  같다. 그럼에도 박래향(舶來香)이 지독하지 않아 큰 반감은 일지 않는다. 서구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정서에 맞게 변형시키면 그것이 결국 우리 문화로 정착되지 않겠는가. 진주박물관은 그 외모부터 현대적 조형미와 전통적 곡선미가 잘 조화된 느낌을 주는데다가 내부 공간 처리도 무척 세련되게 고안, 배치되어 관람객들을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끈다. 이 박물관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만 전시된, 이른바 전문 역사 박물관이다. 여기에는 흔히 조총(鳥銃)이라 불리는 화승총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무기, 갑옷, 전적, 서화, 도자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이 인상적이었는데, 이곳에 전시된 충무공의 영정은 우리에게 낯익은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충무공의 모습은 무장답지 않게 대단히 인자한 얼굴이었으나, 이곳의 충무공은 짙은 한 일자 눈썹 밑의 눈초리가 사납게 하늘로 치켜 올라갔으며 콧수염도 여덟 팔자로 강렬하게 뻗쳐 있는 등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이 그림은 진영(眞影)이라기보다 충무공의 무인적 기질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조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이 초상화는 매우 졸렬한 필치로 그려진 것이어서 우수꽝스러운 느낌이다.
2층 전시실의 한 구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초상과 임종시(臨終詩)가 진열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이슬과 내리고 이슬과 함께 사라지는 내일인가
오사카의 일도 꿈속의 또 꿈이런가
  
일본을 천하통일하고 중국대륙까지 지배하려던 엄청난 야욕을 가졌던 도요토미도 죽음 앞에서 무상(無常)함을 깨닫게 된 것일까. 이 시는 인간의 한 평생이 한 방울의 이슬이나 화창한 봄날 꾼 한 바탕의 꿈처럼 속절없다는 지독한 허무의식을 주조로 하고 있다. 일본인에게는 그가 난세의 영웅으로 기억될 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그의 관상은 영락없이 궁상맞고 간특한 소인배의 얼굴을 닮았다. 도요토미의 젊은 시절 별명이 ‘원숭이'였다고 하니 내 인상(印象)이 단순한 민족적 감정의 발로는 아닐 터이다. 당시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이 정립(鼎立)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도요토미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으나 그의 사후 일본을 통일한 이는 도쿠가와였다. 이 세 사람의 관계를 후인들은 대단히 상징적인 시구로 압축해 놓고 있다.  
  
“오다가 쌀을 지어 하시바(도요토미의 옛 姓)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 힘 안들이고 먹은 것은 도쿠가와(織田がつき羽紫がこねし,天下餠, 骨を折らずに食うのは德川).”
  
오다와 도요토미는 결국 죽 쑤어 개 준 꼴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본 걸까. 그들의 헛된 노력 속에는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7년간의 고초가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다.  진주성을 둘러보는 것으로써 진주시의 문화재 기행은 반 이상 마친 셈이다. 물론 이 밖에도 곰곰이 살펴야 할 문화유산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진주를 상징하는 유형 무형의 문화는 거의 대부분 진주성 내에 모여 있어 적은 시간을 할애하고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게 진주성이다.

‘진주 비빔밥'과 ‘진주 냉면'이 있다는 말을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다. 진주 기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해 준 진주교대의 송희복 교수가 ‘진주 비빔밥'을 먹자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억센 경상도 방언을 잘못 들었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천수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은 ‘전주' 것이 아니라 ‘진주' 비빔밥이었다. ‘진주 비빔밥'에 고명으로 얹힌 채소와 고추장은 ‘전주' 것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했고 밥의 양도 걱정스러울 만큼 적다. 하지만 푸짐하고 넉넉한 소고기 육회와 참기름으로 비벼진 ‘진주 비빔밥'은 색다른 맛을 자아낸다. 육회와 참기름의 양에 비해 고추장이 적게 들어가서인지 다소 텁텁한 맛이 느껴졌지만, 굳이 고추장을 더 청하지 않는 게 좋다. 지방 고유의 음식을 제대로 맛보려면 제 입맛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진주 비빔밥'에 육회가 얹혀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거대한 우시장이 열리고 소싸움이 성행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다. 진주에서 대학을 나오고 모교 교수로 재직 중인 송교수도 ‘진주 냉면'은 맛보지 못했다고 한다. 옛 문헌이나 노인분들의 전언에 따르면, 냉면은 평양과 진주 것을 최고로 쳤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즐겨 먹는 함흥냉면은 1·4 후퇴 때 부산 피난민들이 고향 음식을 만들어 팔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이호철의 좥소시민좦에는 국수를 먹던 사람들의 미각이 냉면 맛에 길들여져 가는 대목이 나온다.

서울의 인사동은 고미술과 골동품 거리로  유명하다. 그런데 진주에도 이와  유사한 곳이 있다. 아니,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서울 인사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거리 이름이나 업종 모두가 똑같다. 이곳이 골동품거리로 정착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부터라고  하지만, 이 업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곳은 정부에서 ‘새 즈믄(千) 거리'로 지정하여 진주시민의 자긍심을 살려 주었다.

남강을 따라 10여 분을 달리면 진양호가 보인다. 이곳에는 진주가 자랑하는 대중가요의 황제 남인수와 작곡의 귀재 이재호를 기리는 노래비가 서 있다. 남인수(본명 姜文秀, 1918∼1962)는 좥애수의 소야곡좦, 좥가거라 삼팔선좦, 좥이별의 부산 정거장좦, 좥낙화유수좦 등 주옥같은 가요를 불러 우리 대중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명가수이며 이재호는 좥귀국선좦, 좥단장의 미아리 고개좦, 좥나그네 설움좦, 좥번지 없는 주막좦을 작곡한 한국 대중음악의 귀재로 통한다. 사실 우리나라 국민치고 이들의 대표곡을 한 번이라도 안 불러본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이들은 전국민의 사랑을 받아 왔다. 하지만, 많은 진주시민들이 남인수는 알아도 이재호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어 의외였다. 심지어 송교수조차 이재호 노래비가 진양호에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있겠는가. 진주시가 마련한 인터넷 사이트에도 이들과 관련한 정보는 지극히 소략한  형편이고, 대중가요 관련 사이트에서도 이재호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환경도시 진주! 대중문화의 중심지 진주!

진주시에서 남인수, 이재호 이름으로 전국적 규모의 가요대회를 주최하면 어떨까. 오랜 시간의 예선과 공정한 심사를 거쳐 신인가수를 선발한 뒤 진주시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대형스타로 키워내는 사업말이다. 진주에는 대중 스타들이 적지 않다. 남인수, 이재호가 그렇고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친숙한 좥아기공룡 둘리좦의 김수정(만화가)과 좥청춘불패좦의 강철수(만화가)도 진주인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예전처럼 확연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요즘, 이들을 적절히 활용해 진주를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부각시키는 방안을 모색했으면 한다.
진주에 대중 스타만 있는 건 아니다. 좥지리산좦의 작가 이병주, 좥낙화좦의 시인 이형기, 평론가 정태용, 좥꽃씨좦의 시인 최계락, 경상대 국문과 교수 강희근 등은 진주를 대표하는 현대 문인들이다. 이형기의 좥낙화좦는 중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애송되는 작품이지만, 그의 걸출한 시재(詩才)는 이미 열일곱 살의 나이에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뾰족이 드러났다.
  
오늘 /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 보다.
노을도 갈앉는 / 저녁 하늘에 / 눈 먼 우화(寓話)는 끝났더라.
한색 보라로 칠을 하고 / 길 아닌 천리(千里)를 /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 꽃잎 지거라. / 꽃잎 지거라.
산 너머 산 너머서 네가 오듯 / 오늘 /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 보다.
                                -이형기, 좥비오는 날좦
  
이 시의 작가를 열일곱 살의 동안 소년으로 생각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국시사의 우뚝한 봉우리 하나를 차지했던 이 시인의 노년이 병마에 고통을 받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아까부터 유심히 보았던 것이지만, 진주성에서도 그러더니 진양호에 와서도 송교수는 눈에 띄는 비닐 봉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렇다고 진주성과 진양호에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담았던 비닐 봉지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주성과 진양호에서 딱 한 번씩 송교수는 스스럼없이 그 일을 했던 것이다. 내가 다소 의외란 듯이 쳐다보자 그는 예의 황소같은 웃음을 지으며, “마, 내가 사는 곳인데 좀 더 깨끗한 거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하며 쑥쓰러워 한다. 그리고 보니 진주는 공기가 무척 맑고 거리 또한 깨끗했다. 송교수 말로는 진주시내에 공장이 없기 때문이라는데, 진주의 관광자원은 바로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친다. 환경도시 진주! 대중문화의 중심지 진주!  맑고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힘들면서 빛이 별로 안 난다. 단지 관광 수입만 따진다면 진양호에 대규모 위락단지를 조성하는 게 훨씬 많은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는 힘든 사업이다. 생태계는 망가뜨리기는 쉬워도 다시 복원하려면 그 몇 배의 노력과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진주를 깨끗한 환경 도시로 선전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요구되며 그 효과가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하면 환경도시 진주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투자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사업은 진주인들이 후손들에게도 자랑할 만한 업적 아니겠는가. 이와 함께 진주를 남인수와 이재호의 뒤를 잇는 대중가요 스타의 산실로 거듭나게 하는 대형 이벤트도 기획 볼 만하다. 부산이 세계 영화제를 주최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끈 것처럼 진주에서 신인가요제 같은 것을 개최하여 대형가수로 키워내는 사업을 벌이면 그 수확이 결코 적지 않을 터이다.
서울에서 첫 비행기로 진주에 도착해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송교수는 하루를 온전히 내게 할애하고도 더 많은 곳을 안내하지 못해 여간 미안해하지 않는다.

여독을 달래기 위해 들른 술집에서 느닷없는 탄성이 터져 알아보니 올림픽 축구에서 이천수 선수가 한 골을 넣었단다. 이래저래 진주에서의 하루는 무척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