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 여행의 만남 4 / 진주와 문화예술인 |
곧은 충철과 맑은 환경의 도시, 진주 장영우 (문학평론가, 동국대교수)
9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곧 맞은 한가위 탓인지 정신을 수습하기 어렵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다소 숨을 돌릴까 싶었는데 느닷없이 몰아닥친 태풍 때문에 예정했던 일정이 또 다시 난마처럼 뒤엉켜 버렸다. 하필이면 진주행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날 제14호 태풍 사오마이가 한반도를 관통한 것이다. 올해 형성된 태풍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사오마이는 엉거주춤하는 자세로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더니 방향을 급선회하여 한반도 중심을 뚫는 심술을 부렸다.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은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세력이 약해진 점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풍이 할퀴고 간 자국은 참혹했다. 태풍이 지난 뒤의 남녘 하늘은 투명하리만치 청명했으나, 강물은 초콜릿 빛깔의 탁류로 굽이치고 있었고 군데군데 흙탕물에 침수된 농경지가 눈에 띄어 가슴이 아리다. 강포(强暴)한 사오마이가 한반도를 할퀸 자국은 그처럼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언제 태풍이 지나갔는가
싶게 진주(晉州)의 하늘은 쾌청하다. 어제 시드니에서 들려온 뜻밖의
낭보도 이 시원스레 맑은 날씨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여자 10m 공기소총
개인부문에서 열여덟 살의 소녀 강초현이 전문가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고 은메달을 획득한 사건은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아직
얼굴의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듯 한 이 청순한 소녀는 시종일관
침착 대담한 태도로 선두를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미국 선수에게 선두를
빼앗기자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우는 모습조차 예쁘기만 한 이 소녀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고 월남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다녔다는 효성이 알려지면서 일약 국민의 스타로 부상하였다.
이 소녀가 진주 강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진주를 찾는 내 뇌리에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예로부터 진주는 강계,
평양과 함께 아름다운 여성이 많기로 유명하다. 흔히 ‘색향(色鄕)'이라
하면 기생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기생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은 결국 예쁜 여성이 발에 채일 듯 했다는 얘기와도 통하지 않겠는가.
시드니 올림픽의 공기소총 은메달리스트 강초현은 진주 여성의 아름다움이
과연 명불허전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사례이다. 어려운 여건에
전혀 굴하지 않고 당당히 세계의 별이 된 진주 강씨의 초현소녀의
기백 또한 충절의 고장 진주의 이름에 값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제
논에 물대기 식의 억지로 볼 게 아니라 진주의 자랑거리가 또 하나 늘어난
셈치고 강초현 소녀를 더욱 아끼고 돌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진주를 관통해 흐르는
남강의 발원지는 지리산 천왕봉이다. 이 남강에는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바람끼에 자진(自盡)한 새댁의 슬픈 사연이 흐르고 있다. 경상민요
좥진주난봉가좦가 바로 그것인데, 이 노래가 1970~80년대 대학생 사이에서
즐겨 불려진 것도 특이하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 진주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 옆눈으로 힐끗보니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간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의암(義巖)' 진주는 고려시대부터
왜구(倭寇)의 침범이 빈번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이
이곳을 공략하려고 전력을 기울였던 것만으로도 진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1592년 10월 수 만의 왜적이 밀물처럼 침공해 오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왜적을 통쾌히
물리침으로써 파죽지세와 같았던 왜구의 한반도 침공을 일순간이나마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10만 왜적이 재차 침공하여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는데, 당시 순절한 민관군이 7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에 전한다. 왜군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남강에서 술자리를 벌였고,
이때 강제로 끌려나온 논개가 왜장(게야무루 노스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장렬히 순사(殉死), 조선 여성의 매운 절개를 사방에 널리 떨쳤다. 논개가
왜장과 춤을 추다가 순사한 바위는 한 평 남짓한 자그마한 바위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의암(義巖)'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이
바위는 때로는 육지의 암벽 쪽에 다가서기도 하고 때로는 강 속으로
들어가 암벽에서 건너뛰기도 힘들 정도로 멀어지는 까닭에 그 뿌리가
어디에 닿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고 한다. 하여 예전에는 ‘위암(危巖)'이라
불렸던 것을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새롭게 명명한 것이다. 진주인들의 저항정신이 담긴 굵직한 사건들 형평사 운동이 하필이면 진주에서 발발했을까. 여기에는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발생한 일반인과 백정의 ‘동석(同席) 예배사건'이 기폭제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워낙 진주 사람들의 강한 반골 기질이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조 신종 3년(1200년)의 ‘정방의(鄭方義)의 난', 조선조 철종 13년(1862년)의 ‘진주 민란',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진주의 관민이 합세해 이룩한 ‘진주대첩'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진주인들의 저항정신을 짐작케 해준다. 다시 말해 진주사람의 의식과 피에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는 강인한 저항정신이 유전적 형질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유전적 형질은 태생이 전혀 다른 전북 장수 출신의 기생 논개에게도 영향을 미쳐 왜장 게야무라 노스케(毛谷村之助)를 안고 강물에 몸을 던지게 추동했던 것이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흐르는 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태풍이 지나간 뒤의 남강은
변영로가 읊었던 것처럼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물결”이 아니라
탁류로 굽이치고 있었으나 논개의 충절과 그녀를 기리는 진주시민들의
정신은 여전히 맑게 이어지고 있었다. 의암 바로 옆의 바위덩어리에
앉아 바쁘게 붓을 놀리는 세 여학생의 화판에서 논개는 건강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주시에서 개발한 논개 캐릭터를 보는
순간 왠지 거부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요즘 캐릭터 개발 사업은
각 지방자치단체나 일반 사업체에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이다.
미키 마우스, 도널드 덕, 피카츄 등의 캐릭터는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널리 사랑받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면서 캐릭터 상품으로
개발되어 성공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따라서 우리도 다양한 캐릭터를
개발해 자국민은 물론이고 외국 관광객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논개의 캐릭터를 보면서 그녀를
한국여성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고 더군다나
그 캐릭터에서 의기(義妓) 이미지를 발견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보기에 논개의 캐릭터는 한국여성도 서양여성도 아닌, 디즈니랜드에서
개발한 동양여성의 특징만이 강조된 듯하여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다.
이런 불만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의 영정에서도 그다지 감소되지
않는다. 이당의 논개 영정은 지나치게 고전적 여성의 이미지만
강조되어 논개의 성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생 신분의
논개로서는 초상(肖像)을 남기기 어려웠을 당시 사정을 감안하면 이당의
고초가 어떠했으리라는 점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이왕 논개의 영정이나 캐릭터를 제작할 바에는 그녀의 이미지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촉석루(矗石樓)는 진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누각으로 그곳 주민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다. 원래
이 누각은 고려조 고종28년(1241년)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가 창건하여
여러 차례 중수, 재건한 건물로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불에 타
1618년 중건하였고, 1950년 6·25때 파손된 것을 1960년 중건해
오늘에 전한다. 그러니까 촉석루는 외세의 침입과 민족상잔의 비극적
역사를 몸 전체로 감당하면서 묵묵히 버텨왔던 것이다. 촉석루는
누구나 올라가 더위를 피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다. 누에는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남장대(南將臺)'라 쓰인 편액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약간 삐딱하게 쓰여진 듯 하면서도 절제된 기교가
조화를 이룬 ‘영남제일형승'의 파격이 미소를 짓게 했고, 웅혼한 기운이
가슴에 확 와닿는 ‘남장대'의 서체 모두가 일품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누각의 사면에는 시인묵객의 시서(詩書)가 즐비하지만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는 진주시민들은 촉석루에 올라 땀을
들이면서도 결코 난잡하지 않아 오히려 낯선 느낌마저 안겨준다.
이곳에서는 예의 귀가 따가울 정도의 시끄러운 경상도 사투리조차 이상스럽게도
나직하고 구수한 억양으로 귀에 와 닿는다. 진주성은 단아하게 복원되어 있다. 중창 또는 복원된 문화재의 대다수가 시멘트로 뒤발해 천박한 느낌만 주는데 진주성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잘 꾸며진 정원을 연상케 한다. 지금의 모습이 원래의 진주성과 똑같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싸구려 분과 시뻘건 연지로 덕지덕지 분장한 노류장화의 천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리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잔디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일까.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잘 정돈된 잔디밭에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진주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토록 아름답게 자란 잔디밭에서 뛰놀거나 한가히 드러누워 책을 보는 사람, 또는 은밀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제는 이와 같은 구시대적 금제는 버려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마구 드나들면 잔디가 상하리라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나, 언제까지 잔디를 사람과 떼어놓은 채 전시만 할 것인가. 그렇잖아도 마음껏 뛰놀 공간이 부족한 도시의 아이들에게 넘어져도 크게 다칠 염려가 없는 잔디를 개방하면 작히 좋으랴. 전문 역사 박물관-진주박물관 진주박물관은 진주성의
끄트머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야외 공연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서구 양식을 모방한 것 같다. 그럼에도
박래향(舶來香)이 지독하지 않아 큰 반감은 일지 않는다. 서구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정서에 맞게 변형시키면 그것이 결국 우리 문화로
정착되지 않겠는가. 진주박물관은 그 외모부터 현대적 조형미와 전통적
곡선미가 잘 조화된 느낌을 주는데다가 내부 공간 처리도 무척 세련되게
고안, 배치되어 관람객들을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끈다. 이 박물관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만 전시된, 이른바 전문 역사 박물관이다. 여기에는
흔히 조총(鳥銃)이라 불리는 화승총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무기, 갑옷, 전적, 서화, 도자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이 인상적이었는데, 이곳에 전시된
충무공의 영정은 우리에게 낯익은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충무공의 모습은 무장답지 않게 대단히
인자한 얼굴이었으나, 이곳의 충무공은 짙은 한 일자 눈썹 밑의 눈초리가
사납게 하늘로 치켜 올라갔으며 콧수염도 여덟 팔자로 강렬하게 뻗쳐
있는 등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이 그림은 진영(眞影)이라기보다
충무공의 무인적 기질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조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이 초상화는 매우 졸렬한
필치로 그려진 것이어서 우수꽝스러운 느낌이다. 이슬과 내리고 이슬과
함께 사라지는 내일인가 ‘진주 비빔밥'과 ‘진주
냉면'이 있다는 말을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다. 진주 기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해 준 진주교대의 송희복 교수가 ‘진주 비빔밥'을 먹자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억센 경상도 방언을 잘못 들었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천수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은 ‘전주' 것이 아니라 ‘진주' 비빔밥이었다.
‘진주 비빔밥'에 고명으로 얹힌 채소와 고추장은 ‘전주' 것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했고 밥의 양도 걱정스러울 만큼 적다. 하지만 푸짐하고
넉넉한 소고기 육회와 참기름으로 비벼진 ‘진주 비빔밥'은 색다른 맛을
자아낸다. 육회와 참기름의 양에 비해 고추장이 적게 들어가서인지 다소
텁텁한 맛이 느껴졌지만, 굳이 고추장을 더 청하지 않는 게 좋다. 지방
고유의 음식을 제대로 맛보려면 제 입맛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진주
비빔밥'에 육회가 얹혀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거대한
우시장이 열리고 소싸움이 성행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다. 진주에서
대학을 나오고 모교 교수로 재직 중인 송교수도 ‘진주 냉면'은 맛보지
못했다고 한다. 옛 문헌이나 노인분들의 전언에 따르면, 냉면은 평양과
진주 것을 최고로 쳤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즐겨 먹는 함흥냉면은
1·4 후퇴 때 부산 피난민들이 고향 음식을 만들어 팔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이호철의 좥소시민좦에는 국수를 먹던 사람들의
미각이 냉면 맛에 길들여져 가는 대목이 나온다. 서울의 인사동은 고미술과
골동품 거리로 유명하다. 그런데 진주에도 이와 유사한
곳이 있다. 아니,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서울 인사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거리 이름이나 업종 모두가 똑같다. 이곳이 골동품거리로
정착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부터라고 하지만, 이 업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곳은
정부에서 ‘새 즈믄(千) 거리'로 지정하여 진주시민의 자긍심을 살려
주었다. 남강을 따라 10여 분을 달리면 진양호가 보인다. 이곳에는 진주가 자랑하는 대중가요의 황제 남인수와 작곡의 귀재 이재호를 기리는 노래비가 서 있다. 남인수(본명 姜文秀, 1918∼1962)는 좥애수의 소야곡좦, 좥가거라 삼팔선좦, 좥이별의 부산 정거장좦, 좥낙화유수좦 등 주옥같은 가요를 불러 우리 대중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명가수이며 이재호는 좥귀국선좦, 좥단장의 미아리 고개좦, 좥나그네 설움좦, 좥번지 없는 주막좦을 작곡한 한국 대중음악의 귀재로 통한다. 사실 우리나라 국민치고 이들의 대표곡을 한 번이라도 안 불러본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이들은 전국민의 사랑을 받아 왔다. 하지만, 많은 진주시민들이 남인수는 알아도 이재호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어 의외였다. 심지어 송교수조차 이재호 노래비가 진양호에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있겠는가. 진주시가 마련한 인터넷 사이트에도 이들과 관련한 정보는 지극히 소략한 형편이고, 대중가요 관련 사이트에서도 이재호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환경도시 진주! 대중문화의 중심지 진주! 진주시에서 남인수, 이재호
이름으로 전국적 규모의 가요대회를 주최하면 어떨까. 오랜 시간의 예선과
공정한 심사를 거쳐 신인가수를 선발한 뒤 진주시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대형스타로 키워내는 사업말이다. 진주에는 대중 스타들이 적지 않다.
남인수, 이재호가 그렇고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친숙한
좥아기공룡 둘리좦의 김수정(만화가)과 좥청춘불패좦의 강철수(만화가)도
진주인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예전처럼 확연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요즘, 이들을 적절히
활용해 진주를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부각시키는 방안을 모색했으면 한다. 여독을 달래기 위해 들른 술집에서 느닷없는 탄성이 터져 알아보니 올림픽 축구에서 이천수 선수가 한 골을 넣었단다. 이래저래 진주에서의 하루는 무척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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