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예 / 2 제12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 |
이론과 실제가 함께하는 카이로 국제실험 연극제 이태주 (연극평론가)
카이로 가는 길은 멀었다.
싱가포르 에어 라인 비행기는 8월 30일 17시간만에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카이로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뜨거운 햇볕에 숨이막혔다. 공항
주변에는 기관총을 든 병사들의 삼엄한 경계가 위협적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테러의 위협은 곳곳에 있어서 큰 건물이나, 호텔, 극장에
들어가려면 어김없이 검색대를 통과해야했다. 거리에는 한국산 중고차가
사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자동차 물결과 사람들의 행렬이 뒤범벅이 되고
있는 거리는 자동차 매연 때문에 공해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가로에는
10월에 피라미드 앞에서 공연될 좥아이다좦를 알리는 광고판이 즐비했다.
아랍인 남녀들의 독특한 복장과 길거리에 붙은 아랍 문자들의 기이한
형상들, 그리고 뜨거운 햇살과 건조한 공기는 아프리카에 온 현실을
실감케 했다. 주 카이로 한국대사관에서 보낸 차로 숙소인 카이로 쉐라톤
호텔에 도착했다. 이 행사가 이집트 문화부 행사이기 때문에 이하브
문화부 담당관이 우리를 영접했다. 이번 연극제에는 전 세계 46개국에서 68편의 연극이 참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편이 참가했는데, 연출가 한태숙이 보낸 좥레이디 맥베스좦는 출연 여배우 사정으로 도중 하차하고, 대신 수원의 극단 좥성좦이 작품 좥한중록좦으로 참가해서 호평을 받았다. 아쉬웠던 것은 이 작품이 비경연으로 참가한 사실이다. 한 나라에서 한 편만이 경연으로 참가하는데, 좥레이디 맥베스좦가 경연으로 추천되었기 때문에 수원의 좥성좦은 비경연이 된 것이다. 좥레이디 맥베스좦가 못 가게되었으니 좥한중록좦을 경연으로 해 달라는 요청을 중간에 했지만 때가 늦어 일이 불가능했다. 실험연극 그 심원한 철학적 의문 9월 1일,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에서 개회식이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 극장 건물은 초현대식으로
잘 지은 건물이었다. 구 오페라 하우스는 불타서 없어지고, 이 건물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새로 지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무대에 거대한 트로이의
목마 같은 백마가 나타나서 목마에서 무용수들이 나와 춤을 추고나면
사회자가 나타나서 개회선언을 하는 이벤트로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이 연극제는 경연과 비경연으로 구분된다. 참가국들이 작품을 조직위원회에
보내면, 조직위원회가 위촉한 예비심사위원회가 작품에 관한 자료를
보고 경연과 비경연으로 구분한다. 금년에는 예비심사위원이 세사람이었다.
위원장은 한국 연극인들에게는 친숙한 영국의 연극평론가 죤 엘썸이었다.
그는 현재 국제연극평론가 협회의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우리들의 목적은 국제
심사위원회가 심사할 수 있도록 실험연극 작품을 고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험연극’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지극히 심원한
철학적인 의문입니다. 어떤 한 나라에서 실험적인 연극은 다른 나라에서는
낡은 연극이 되기도 합니다. 페미니스트 연극은 다른 나라 사회에서는
과격한 도전을 받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선전극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처럼 권태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탐구하는’연극을
찾아보았습니다. 이미 알려진 기성적인 한계를 과감히 부수는 연극을
찾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연극의 형식이 되기도 합니다. 아니면
전통적인 형식을 새롭고 참신한 방법으로 발전시키는 연극이 되기도
합니다. 연극의 이해를 막는 장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장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비디오로 보는 문제라든가 그 비디오의 질적인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데 보다 많은
도움을 주는 연극과 그렇지 못한 연극을 구분 짖는 일은 가능했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습니다. 한 나라에서
한편의 연극을 고르자. 전 세계 실험연극의 광범위한 상황을 보여주는
연극을 고르자.” 이번 연극제에서 심사를
맡은 인사들은 다음과 같았다. 카이로 연극제의 또 다른
특징은 이론과 실제가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연과 함께 심포지엄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금년의 심포지엄 주제는‘21세기 연극의 주요
실험극 조류’였다. 이 주제를 다시 세 가지 토픽으로 세분화했다. 첫째
토픽은‘20세기 공연의 텍스트 구조의 다양한 형식’이었으며, 두 번째
토픽은 ‘20세기 공연예술 형성에 기여한 연출 유파의 방법론’이었다.
세번째 토픽은 ‘연기술 발전에 기여한 연극 실험실, 스튜디오,
워크의 다양한 형식’이었다. 주 제별로 각국의 저명 연극학자와 평론가들이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한국을 대표해서 평론가 양혜숙은 세번째
토픽에서 주제 논문을 발표했다. 심포지엄 개회사에서 아마드 조직위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카이로 연극제는‘연극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요, 변화를 갈구하는 예술적 상상력의 발로요, 경직과 획일성을
탈피하려는 연극적 다양성 추구의 결과’였다. 이 연극제가 실험연극제인
만큼 충격과 놀라움의 장(場)이 되어야한다는 것도 그가 강조하는 점이었다.
12년 동안 계속되면서
세계적인 연극교류의 장으로 발돋움한 이 연극제는 그 자신이
유명한 화가인 이집트 문화부 장관 파루크 후스니의 탁월한 발상과
후원, 그리고 연극학자 파우지 파아미 아마드 조직위원장의 치밀하고
열정적인 실천력 의 결실이었다. 물론 이 실험적인 연극제를 전세계
저명 연극인들이 열성적으로 도왔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심사위원들도
첫 해인 1989년에는 아랍권 연극 인사 들 뿐이었는데, 1991년부터는
전 세계에서 초청되었다. 해마다 연극제에는 명예로운 세계적인 연극인들이
특별 초청되는데, 이들 중에는 피터 브루크, 예르지 그로 토우스키,
마팅 예쓸린, 유젠느 이오네스코, 알폰소 사사트르, 페르난도 아라발,
엘렌 스튜어트, 아우거스트 보알, 로버트 브루스틴, 프란체스카
베네디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금년에는 한국에서 극작가 박조열이
초청을 받아 영광을 누렸다. 작년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했던
연출가 김정옥(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이 금년도 심사위원, 주제발표자,
연극 공로자 등을 조직위원회에 추천해서 결정된 것이다. 연극 공로자가
되면 제반 행사에 공식 초청되고, 인터뷰에 응하고, 특별강연을 수락해야한다.
금년 강연의 주제는 각국의 연극지원 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참가단체는 또한
하물 운송비도 부담해야 한다. 공연장은 카이로 시내가 되며, 조직위원회는
공연에 적합한 극장 공간을 제공하도록 돕는다. 카이로 시내의 극장
공간은 다양했다. 극장의 시설은 모든 곳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공연관계 촬영과 기록은 사무국의 권한인데, 단 이 기록물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다. 경연의 경우 한 나라에서
하나의 단체만이 참가할 수 있다. 공연단체가 비디오를 포함한 제반
공연자료를 제출하면 예심위원회가 경연작품을 선정한다. 경연에 탈락하면
비경연 작품으로 참가할 수 있다. 참가 신청 마감은 매년 5월 15일이다.
한국의 경우, 이 연극제에 참가를 희망하면 주 카이로 한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대사관은
이 일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금년은 심경보 대사 내외와, 아랍
문화권의 제반 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지닌 문병준 서기관의 헌신적인
노력이 한국 극단의 현지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금년도 경연작품에 대한 심사위원회의 평가를 중심으로 공연 성과에 대해서 언 급하려고 한다. 개회식이 끝나고 폴란드 연극좥동좦Dong이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폴란드의 씨어터 시네마 Theatre-Cinema극단의 작품으로 작가와 연출가는 즈비그뉴 슘스키 Zbignew Szumski였다. 이 작품은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리어 Edward Lear의 작품과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그림에서 그 영감과 소재를 얻은 작품이었다. 무대는 사람과 그림이 그려진 막이 차지하고 있었다. 무대 장면은 시장 바닥이었다. 극은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인 표현기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찻잔이 걸어다니고, 의자가 사람처럼 움직이고, 계란이 날라 다닌다. 흐르는 별은 여인의 의상을 걸치고 있다. 날개 달린 물고기, 거대한 새들, 인간의 장기들이 그림으로 제시되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인간들의 상황이 희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연극이었다. 기발한 극적 상상력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었다. 문제는 단조롭고 지루한 템포였다. 그리고 너무 길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획일화되어 있어서 극의 변화가 없었다. 9월2일 공연된 이집트의좥벌거벗은 임금님좦을 연출한 아메드 할라와 Ahmed Halawa의 무대설정이 재미있었다. 객석 한 가운데 길게 또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 끝머리에 악사석을 설정하고 있었다. 민속음악, 민속무용,
인형, 그림자극 등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았지만 너무 잡다해져서 극의
중심을 잃고 있었다. 오락성이 풍부한 풍자극이 관객들의 웃음을 자주
유발했지만 예술적인 격조가 모자란 작품이었다. 배우들은 주로 연극학과
학생들이었다. 의상은 실험적인 효과가 있었고, 생음악 연주가 좋았으며,
무대와 관객과의 호흡의 일치가 호감을 산 공연이었다. 같은 날 밤 9시.
오페라 하우스에서 루마니아의 다이아극단 D'aia Theatre Company이
좥밤의 여행자 Night Traveller좦를 공연했다. 무대 설정이 아주 흥미로운
연극이었다. 소극장에서, 객석을 기차 객석처럼 양쪽으로 갈라놓고,
가운데를 무대로 설정했다. 끝머리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서 차창을
만들고, 그 스크린을 통해 달리는 열차의 바깥 풍경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작중 인물이 기차 객석에 앉아 있고, 객석 의자 밑에서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이오네스코류의 부조리한 공포희극이었다. 극의 구조는 에피소드의
나열이었다. 노래가 삽입되고, 연기가 박진감이 있었다. 이 연극은 심사위원회에서
호평을 받은 공연이다. 특히 연기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같은 날 밤 10시 30분,
오페라 하우스 야외무대에서 그리스의 디아드로미극단Diadromi이좥오레스테이아좦를
공연했다. 나는 첫 번째 심사위원회
석상에서 자신의 심사방침을 명백히 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심사를 했기 때문에, 서양 일변도의 연극미학이 지배하는
이 연극제에서 서양보다는 아시아 연극의 전통이 지니고 있는 공연의
원리를 충분히 고려해서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분석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때, 상당수의 심사위원들은 나의 입장에 찬의를 표시했다.
그래서 유일하게 아시아 연극으로 이 연극제 경연에 진출한 이 공연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우선 이 연극의 양식미에
대해서 역사적인 해설을 했다. 그들의 감상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고,
나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절제된 연기, 압축된 상징적
동작, 감각적이며 암시적 동작을 떠받쳐주는 음악의 효율성, 대소도구와
무대미술, 의상의 아름다움, 비언어적 동작과 사실적 대사의 이분화,
전 통과 현대의 조화, 그 실험의 성과 등에 관해서 긴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은 일본 연극에 대해서 미술적 효과만은
인정하면서도 연극의 총체적 성과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부정적이었다.
9월5일 8시 알-탈리아 극장에서 공연된 독일의 야코부스 극단의
부조리 연극공연, 불가리아 스튜디오 4×C 극단 Theatre Studio 4xC의
좥파우스트 메피스토좦의 무용극 등은 심사위원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9월 6일의 요르단과 U.A.E의 공연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날 밤 10시에 알코미 Al-Quawmy 극장에서 공연된 120분 짜리 이탈리아의
좥갈매기좦(체홉 원작, 지아칼로 난니 연출, 마누엘라 쿠스터만 주연)공연은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공연은 금년 5월 키에브에서 성황리에
공연되었고, 카이로 공연이 끝나면, 9월 15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10월
19일 뉴욕 라마마 E.T.C. 별관에서 해외공연을 할 예정으로 있었다.
나의 충격은 무엇이었는가. 체홉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하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체홉의 작품은 대사가 많아서 요즘에는 지루하다. 그것도
다분히 내면심리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연극을 실내악 감상하듯이, 그리고 명상하듯, 기도하듯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연출가 지아칼로 난니의 무대는 달랐다. 그의 연극은 루치오
바티스티Lucio Battisti의 음악으로 시작 되었다. 무대 위에 미리 나와
있었던 배우들은 전원 운동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 다. 그리고 나서
배우 전원이 무대 전면으로 나가 한 줄로 서서 검은 실크 천을
걸친다. 배우 한 사람이 이들에게 흰장미 한 송이씩을 주면 첫
대사가 읊조려진다. 선생 : 왜 당신은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있는가? 9월7일의 홀랜드의 연극,
사우디 아라비아의 연극은 관심을 끌지 못했고, 같은날 10시 30분, 팔레스타인
국립극단이 공연한 좥사물 The Thing좦은 탁월한 연기술과 음악과 동작에서
보여준 전위적인 연출로 심사위원들의 열띤 토론을 유발했다. 9월8일
레바논의 베이루트 극단이 공연한 좥다도해좦는 기발한 무대장치,
우수한 연기술, 실험적 의상과 분장, 주인공 여배우의 열연 등으로 찬사를
받고, 우수 작품의 후보작으로 급부상 되었다. 같은 날 있었던 터어키
앙카라 국립극단의 공연은 최악의 무대였다. 9월 9일의 쿠웨이트 공연도
묵살되었고, 이라크 국립연기집단이 공연한 좥천국은 늦게 문을 연다좦는
호평이었다. 9월 10일의 시리아 공연은 무대미술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9월 10일, 카이로 쉐라톤
호텔에서 최종 심사가 있었다. 작품상은 이집트와 그리스가 경합을 벌이다가
이집트의 좥일이 일어나는 곳좦이 차지했다. 폴란드, 레바논, 팔레스타인,
일본 등도 거론되었다. 연출상은 레바논, 그리스, 일본,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탈리아 등이 거론되다가 그리스로 결론이 났다. 남자 연기상은 루마니아의
좥밤의 여행자좦에 출연한 배우와 레바논의 좥다도해좦연극에 출연한
배우 두 사람이 경합하다가 좥밤의 여행자좦에 출연한 배우로 결정 나고,
여자 연기상은 좥다도해좦의 작품에서 여자 주인공 역을 맡았던 여배우가
차지했다. 루마니아, 이탈리아(쿠스터만), 일본, 독일 등의 연극에
출연했던 여배우들도 추천되었다. 무대미술상은 폴란드, 일본, 이탈리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이 거론되다가 시리아로 결정되었다. 이번 연극제에서 아랍권의 연극을 접할 수 있었던 것과 세계실험연극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없이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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