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평론  /  평론의 본질을 말한다   5  음악

음악 평론에 대한 담론

서우석 (음악 평론가, 서울대 교수)

 

“음악의 경우, 평론은 무엇일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글은 이에 대해 생각해 보려 는 글이다. 우리는 일간지, 월간지를 통해 음악 평론이라고 하는 글을 접하게 된다. 개인의 독주회였건 초청된 외국 교향악단의 연주였건 간에 우리는 그에 대한 글을 읽고 무엇인가 음악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얻는다. 때로 정확한 평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편견이 개입된 공정하지 못한 글이라고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간혹 정도를 넘어선 평론의 내용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평론이라고 칭해지는 짤막한 하나의 글을 둘러싸고 손해 배상이라는 민사 소송과 명예 훼손이라는 형사 소송이 제기되기도 한다.

평론이란 무엇인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을 바라보며 우리는 평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음악 평론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음악 평론의 성격, 역할, 한계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음악 평론만이 아닌 “평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평론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우리는 시와 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문학 평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평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문학 평론이 가장 편한 논의의 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평론의 활동 역시 다른 어떤 경우보다 문학의 경우가 더 활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음악평론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에 잠시 평론 일반을 문학평론에 기대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평론을 살핀다고 해서 문학평론 자체의 문제로 깊숙이 들어서려는 것은 아니다. 음악의 평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지 않으려는 목적 아래 문학평론에 대해 이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론은 글에 대한 글이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쓰여진 글에 대해 쓰여지는 글이라고 정 의 할 수 있다. 이 정의에서 보자면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쓰여진 글과 쓰여지는 글 두 가지이며 그 둘의 관계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 즉 쓰여진 글은 평론의 대상이고 이에 대해 쓴 글은 평론된 바의 형태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 사이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관찰일 것이다. 문학 평론의 대상은 통상적으로 말하자면 시와 소설이다. 문학평론에는 평론에 대한 평론을 포함시키므로 이미 쓰여진 평론도 평론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평론의 대상
 
먼저 대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대상의 결정이 여러 분야의 평론을 생기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상이 문학 작품일 경우 문학평론이 이루어지고 음악일 경우 음악평론이 이루어진다. 그 대상이 연주일 경우 연주평론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평론의 앞에 붙는 말이 확산되어 이제는 각양 각색의 평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음식평론이라는 말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영화평론가, 무용평론가, 문화평론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분야 역시 독립된 평론으로 성립시키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상의 차이만을 강조함으로서 생소한 평론의 분야가 나타나는 경우로 비디오평론, 음반(레코드)평론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디오 평론은 영화 평론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고 음반 평론은 음악평론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분화의 긍정적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새로운 이름을 가짐으로서 마치 다른 분야의 평론인 듯이 인식되기 쉽다. 이런 세분화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여 불가침을 선언하고 또한 그로 인한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잠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론의 형태

평론의 대상이 이처럼 세분화되어 있지만 그러나 평론의 규범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문학 평론은 글에 대한 글이라는 점에서 그 대상의 독특성을 지닌다. 글에 대한 글인 문학평론은 인쇄된 형태를 취한다. 글의 목적이 읽혀서 그 뜻을 독자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글이 반드시 인쇄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문학평론이 반드시 글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글’ 대신 ‘담론’이라는 말로 바꾸어 문학평론을 글에 대한 담론으로 생각한다면 그 담론의 형태가 인쇄된 것이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한 글이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평론 일반은 그 대상을 인쇄가 아닌 경우와 글이 아닌 경우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평론은 담론에 대한 넓은 의미의 담론이라고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담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평론의 방식이 필자로부터 인쇄 매체를 통해 독자로 정보가 전달되는 단일 방향의 소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사 소통의 한 방식이라고 한다면 평론은 그것이 글이건 말이건 간에 양방향의 소통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게 된다. 다르게 말해 문자가 아닌 구어로서의 평론도 가능하며, 인터넷 통신을 통해 가능해진 양방향의 글 역시 평론의 한 형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평론의 일반적 개념은 단일 방향의 인쇄된 글만이 평론으로 인정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상의 본질, 유전자

작품에 대해 쓰여지는 글, 다시 말해 평론은 대상에 대한 모든 견해를 피력할 수 있을 것 이다. 소설이라면 줄거리 구성의 견고성, 이야기 진행의 타당성, 묘사의 세부적인 기술 등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 작가가 왜 그러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분석적 견해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용이라면 안무의 방식과 구조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무용수의 기술과 장면의 처리 방법 그리고 심하게는 그 무용수의 체격이 그 역에는 맞지 않다는 가혹한 평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무용 뿐 아니라 음악, 연극,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평론은 자신의 앞에서 전개되었던 담론의 구체적이고 구조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다. 즉 모든 가능한 담론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시각 중에 자신이 보고 있는 또는 듣고 있는 담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 역시 평론의 관심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문학평론을 하고 있을 경우 문학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와 견해 가 필요할 것이고 음악인 경우 음악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와 견해가 필요할 것이다.
문학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시나 소설은 결국 무엇인가? 인쇄된 시/소설은 우리의 눈앞 에 머물며, 그것을 읽고 있는 우리의 머리 속에 살아있는 세계를 전개해 준다. 이런 점에서 우리 눈앞의 시쪾소설은 생명체에 은유될 수 있다. 글이 아닌 구어로 전달되는 전설이나 민 담 역시 우리의 귀를 통해 들어온 의미들이 모여 상상적 세계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생명적 대상으로 은유될 수 있다. 우리의 눈앞에서 머물며 읽히고 있는 시쪾소설이 살아 있는 개체 라고 한다면 그 개체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더 나아가 그 개체의 유전자는 무엇 일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생물적 개체는 어떤 삶을 살았건 상관없이 죽는다. 그리고 자식을 남겼을 경우 자식은 자 신의 유전자의 일부 또는 전부를 물려받아 보존한다. 그리고 다시 그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 해 자식은 또 새끼를 낳는다. 생명체는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개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 이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살고 있는 주인은 유전자이다. 살아 있는 개체 는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생존기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정당성 이 증명된 ‘개체는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생존 기계’라는 정의는 개체에 대한 지금까지 우리의 생각을 역전시켜 버렸다.

개체는 유전자의 집이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포함하는 예술적 담론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담론에 대한 담론을 해석해 보자. 예술 작품의 경우 개체는 개개의 작품이다. 생물의 경 우 개체가 영원히 사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예술적 대상은 영원히 사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과 조각은 대상이 물질로 되어 있어 그 개체는 영원히 존속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복제가 없던 시대의 미술 작품은 하나 하나의 개체가 지구상의 유일한 개체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인쇄된 시쪾소설 역시 영원히 사는 개체다. 그러나 그림과 조각과는 달리 많은 사본이 존재한다. 정확한 악보로 인쇄되어 있는 교향곡 역시 영원히 사는 개체다. 그러나 교향곡의 경우 시쪾소설과는 다른 점을 지닌다. 악보는 연주됨으로서 생생한 담론으로 바뀌지만 연주는 생물적 개체처럼 연주가 끝나는 순간 죽는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영원히 살려는 의지에 실릴 수 있다. 일회의 삶으로 죽어야 했던 연주가 CD에 수록됨으로서 영원히 살아 남게 되기 때문이다. 연극 역시 음악과 같다. 인쇄된 대본은 죽지 않지만 공연은 죽는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진 연극은 영원히 산다. 이 역시 영원한 삶, 또는 자기 복제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리라. 이처럼 매체와 전달 방법의 발달로 예술 작품이라는 개체가 살아가고 있는 방법은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해 버렸다. 모든 예술이 죽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도왔다. 그래서 죽음의 필연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예술이 매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행위예술, 설치미술, 헤프닝이 목소리를 높 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더 생명체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혼자서 죽어가는 얼음 조각이야말로 개체의 죽음을 우리의 눈앞에서 실현하는 가장 완전한 유전자의 집일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술 작품의 경우 개체가 죽지 않는 경우가 있고 죽는 경우 가 있다. 둘 다 유전자를 남길 것이다. 죽는 경우부터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생명체처럼 느린 진화가 가능하다. 비슷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고 그것 역시 작품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민요는 계속해서 노래된다. 악보가 있더라도 개체마다 연주로서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 교향곡 역시 계속해서 연주된다. 개체로서 탄생하는 것이다.

연극도 그렇다. 시가 낭독으로 존재한다면 시 역시 그럴 것이다. 즉 낭독, 연주, 공연일 경우 개체는 죽지만 그것의 유전자는 연주자와 감상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며 그 남아 있던 유 전자는 다음번 태어나는 개체를 생존 기계로 삼아 살아갈 것이다. 예술 작품의 개체가 죽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인쇄된 소설과 악보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경우 새로운 개체의 탄생은 새로운 종(種)이라고 불릴 만큼 놀라운 진화를 겪은 것이어야 한다. 시가 낭독으로 존재할 경우 진화의 속도는 매우 늦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넓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낭독을 통해 진화되는 이들 개체를 추적하기 어려울 것이다. 즉 평론은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구비문학 연구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마치 세계 여러 곳에 퍼져 자신의 후손을 만들고 있는 동물의 한 종에 대한 전체적인 진화적 파악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시가 인쇄되어 배포될 경우 그 추적은 가능해진다. 인쇄된 시의 경우 비슷한 시, 다시 말해 아류와 표절은 후손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소설 역시 그렇다. 시와 소설의 경우 놀라운 진화를 겪은 신종의 개체가 탄생되어야만 우리는 그 번식을 인정하게 된다. 놀라운 신종이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비슷한 개체들이 범람하 게 될 경우 우리는 시와 소설이 죽었다고 말하게 된다. 한 종의 존속이 끝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문학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말은 이미 느린 진화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놀라운 진화가 일 어날 수 없는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죽을 수 없는 개체들이 도서관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 역시 그러하다. 인쇄된 악보로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 태어나는 개체는 놀라운 진화의 산물이 아닌 경우 우리가 그 탄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20세기 중반에 작곡가들은 시대를 단절해버리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시도했다. 무조성 음악 또는 12음 음열음악이 그 시도였다. 그러나 이 신종 출현의 실패로 서구 음악은 음악의 유전자가 소멸된 것으로까지 이야기되고 있다.

음악의 평론

음악의 평론은 그 대상을 이중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나는 죽지 않는 개체로서의 대상과 연주가 끝나는 순간 죽어버리는 개체로서의 대상이다. 전자가 베토벤의 교향곡 악보라면 후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연주되는 교향곡의 소리다. 악보가 없는 음악의 경우 전자의 대상은 없을 것이다. 인도의 예술 음악이 그렇다. 가까운 곳에서 예를 찾아본다면 한국의 판소리가 그렇고 산조가 그렇다. 흔히 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평은 연주 평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작품 평이어야 하는가”하고 묻는 말에 이 두 대상에 대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음악에 대한 담론으로서의 음악 평론은 둘 모두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논의했던 바의 지식을 원용할 수 있다. 작품에 대한 평론은 죽지 않는 개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독자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평론의 내용을 추적하고 확인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개체로 존재하는 악보는 그 설계에 따라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 연주의 입장에 서 보자면 유전자적 설계도다. 한 악보에 대한 수천 번 또는 수만 번 연주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유전자의 번식은 단성 생식에 의한 번식이다. 똑같은 유전적 설계라는 한계 안에서 가능한 변형 또는 완전한 개체화를 요구하는 유전 질서가 바로 서구 음악의 연주자에게 주어진 임무다. 쉽게 말하자면 악보에 있는 그대로 연주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연주를 뛰어넘는 또는 가장 완벽한 개체를 구현해야 하는 또 다른 연주를 실천해야 하는 것 이다.

작곡된 음악 즉, 악보에 대한 음악 평론이 평론으로서 가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문학 평론에서 보았듯이 쓰여진 것에 대한 쓰여지는 글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쓰여진 것은 글이 아니라 악보일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음악 평론이, 가장 견고한 의미의 음악 평론일 것이다. 19세기에 신문과 잡지를 통해 시작된 서구의 음악 평론은 이런 의미에서의 평론이다. 20세기에 이르면, 학문적 성격을 띤 이러한 글은 음악의 이론적 지평에서 볼 경우, 음악학의 한 분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연주에 대한 평은 그러한 의미에서 평론이 아니다. 사라져 없어지는 것에 대해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한계 안에서의 평론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낭독됨으로서 존재하는 시의 경우처럼 추적과 확인이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글일 경우 그에 대해 쓰여진 글이 지니는 객관성에 이의가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제 오후 7시에 탄생하여 20분간 생명을 유지한 후 사라져 버린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 쓰여진 글로서의 평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연 그 글이 그 삶에 대한 담론이고 그 삶에 대한 추모일 수 있을까? 그 담론은 음악의 삶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그 삶을 구현했던 협연자나 지휘자의 명예를 위한 담론이 아닐까? 예술의 전당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 모차르트의 협주곡의 삶은 그곳에 참석한 천여 명의 귀를 통로로 삼아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삶이다. 20분간 천여 명의 마음속에 살고 간 한 생명체에 대한 인쇄된 담론 즉, 글은 어떻게 자신의 실체가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변명할 수 있을까? 인쇄된 연주평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오만하다. 연주가 담론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글이 아닌 이야기로서의 담론은 겸손한 담론일 수 있다. 친구들과 만나서 어제의 연주가 어떠했다는 이야기를 나눌 경우 그것은 겸손한 평론이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는 인쇄된 글로서의 평론은 그런 겸손을 가질 수가 없다. 영원히 사는 신이 20분간 살았던 개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신들의 윤리를 벗어난 일이다.

뉴스로서의 평론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어제 열 사람이 둘러앉아 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왔다고 하 자. 어제 들었던 노래에 대해 칭찬이건 비난이건 또는 정확한 평가이건 아니건 간에 그에 대한 담론이 마을 신문에 인쇄되어 온 마을에 알려졌다고 하자. 이 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마을에는 백 명이 살고 있는데 어제의 일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열 사람밖에 없다. 어제 그곳에 참석하지 않았던 90명에게 그 글이 갖는 가치는 평론이 아니라 뉴스일 것이다. 평론은 대상에 대한 담론이기 때문에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담론일 것이다.

뉴스의 경우 어제의 일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시간에 태어났 던 노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마음속에서 일어난 삶이 90명에게 전해지는 뉴스로 전 락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일이다. 따라서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연주에 대한 이야기가 글로 쓰여져 인쇄되어 수만 명 또는 수십만 명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타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쇄된 연주평은 근원적으로 부도덕한 행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문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 소문이 되는 것이다. 조금 부드럽게 말하자면 인쇄된 연주평은 부도덕성을 잉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연주평이 갖는 근원적 부도덕성은 사라져 흔적이 없어져 버린 것에 대한 글이라는 점과 그 글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글이 읽힌다는 두 가지 점에서 발견된다. 전자는 대상에 대한 글의 관계이고 후자는 글 자신이 대상이 되는 관계이다. 즉 음악 평론은 자신이 다루는 대상과 자신이 대상이 되는 관계 모두에서 허점을 지니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적인 음악 평론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음악 평론은 무엇일까? 인쇄된 글로서의 평론과 말로서의 평론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인쇄된 평론의 대상은 악보로서 존재하는 음악이어야 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실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음반이 인쇄되는 평론의 대상일 수가 있다. 음반은 듣는 기계의 수단을 통해야만 우리에게 전해지는 기록이지만 악보처럼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장소 한 시간 내에 존재한 후 사라지는 연주에 대한 평론은 아마도 구어 즉, 이야기로 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으로 보인다. 라디오가 적합한 매체일 것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그런 방송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한국의 FM 방송에서도 그런 경우를 볼 수 있 다. 단지 그것이 연주에 대한 평론으로서 일반인에게 인정되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어제 있 었던 연주에 대한 평이 방송으로 이루어질 경우 어제의 연주를 녹음으로 들려줄 수 있을 것 이다. 물론 본인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될 경우 라디오를 통해 어제의 연주가 녹 음으로 전해진다면. 연주평은 대상을 체험한 사람을 보다 많이 얻게 될 것이다. 몰론 방송 으로 전달될 경우, 어제 연주회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그 분위기가 없다는 사실 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 청취자들이 녹음으로 듣고 그들의 마음속 에 성립시킨 음악은 어제 태어나 얼마간 살다간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복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하게 비유하자면, 그것은 내가 바닷가에 앉아 들었던 파도 소리가 아니고 그 파도 소리의 녹음을 다시 듣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일간지도 어제 있었던 연주회에 대한 평을 싣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평론의 부재라고 염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생각으로는 일간지에 연주회의 평문이 실린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라디오에서 어제의 연주가 어떠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평론의 스타일이 일반화될 수 있을 까? 평론이 대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때에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매료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에 방송에서 그러한 평론의 담론이 진행될 때 관심을 가지고 귀기울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조간 신문 한 모퉁이에 실린 소문이나 다름없는 평문을 읽고 점심 시간에 만난 친구에게 어제의 연주 에 대한 소문을 말하는 것을 더 즐길 것이다.
현실이 점점 더 진지한 담론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생각에서 보자면 진지한 음악에 머물 던 음악의 유전자는 위대한 작품, 다시 말해 죽지 않는 무수한 개체를 뒤에 남긴 채 그곳을 떠나 대중 음악으로 자신의 집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음악의 유전자는 소리로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마음속의 무엇이다. 시의 유전자가 ‘중얼거림’이라고 한다면 음악의 유전자는 ‘흥얼거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