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문학 |
교육 제도와 문학 출판 박철화 (문학평론가)
문학 출판과 독자 문학 출판이 위기라는 소리가 꽤 오래 전부터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해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찾아보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과장 광고로 베스트 셀러 작가를 만들어내는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말고는 다른 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출판업 자체에 40% 가량의 매출 감소가 있다고 한다. 문학 출판은 더할 것이다. 그나마 그 정도의 심각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판타지 소설’을 비롯한 상업주의 문학 서적들의 상대적인 선전(善戰) 때문일 것이다.1)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그래도 자신의 길을 굳건히 걷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좋은 작가들조차 최근에는 스스로의 작업에 대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좥내 생에 하루뿐일 아주 특별한 날좦로 상업주의 문학의 과실(果實)과 오명을 함께 얻은 전경린은 이후 제대로 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몇몇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채영주처럼 무협지를 내고 침묵하거나, 구효서의 예에서 보듯 역사소설로 잠시 외도를 하거나, 몇몇 사람들처럼 아예 글을 접고 방송 대본작가로 나서기도 한다. 서글픈 일이다. 물론 그 작가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거대한 사회 구조의 변화를 작가의 진정성만으로 버티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르의 확산을 꾀하며 새로운 글쓰기 양식을 실험해본다는 차원에서 반드시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무협지이든, 역사소설이든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다만 작가의 선택이 내적인 필연성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그 선택에 다른 문학 외적 의도가 개입되었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출판 위기를 빌미로 작가들로 하여금 내적 필연성 대신 상업적 전략을 갖도록 부추기는 유형 무형의 유혹이다. 그 유혹의 상당 부분은 독자들이 변화하고 있으니 그에 발을 맞추라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일 수 있다. 예전의 독자층은 장년 세대로 편입되며 독서시장에서 떠나고 있고, 새로운 젊은 세대는 감각적 이미지의 영역에 갇혀 좀처럼 능동적 사유를 요하는 문자 세계로 존재 확장을 꾀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상과 오디오 세대라 부를 새로운 독자층은 사실 수동적 즐김에 익숙해져 있어 독자의 적극적 뛰어듦을 요하는 문학적 사유를 불편해하고 있는 것이다.2)그리하여 수동적 즐김을 만족시킬 재미있는 읽을거리로서의 문학이 마치 문학 자체의 본령인 것처럼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좋은 작품이어서 많이 읽히기보다는 많이 팔리는 작품이어서 좋다는 식의 궤변이 버젓이 횡행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출판을 반드시 독자와의 직접적 거래관계에만 놓아둘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물론 이것은 문학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제도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긴밀한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사항이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프랑스의 경우를 중심으로 해서 그 대화를 진전시켜 나가기 위한 한 가지 제안을 해볼 생각이다. 입시와 문학 교육 곧 있으면 대학입시를 위한 수능시험이 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입시 관문을 통과하고자 시험에 응시한다. 한 동안 채점의 공정성과 편의만을 고려한 객관식 문제를 출제하다가, 여러 가지 비교육적 결과에 대한 지적이 있어 나름대로의 변화를 꾀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결과로 논술 시험이 치러지게 되었고, 국어 과목 외에도 문학과 작문이 추가되며 다양해졌다. 청소년기의 정서 함양과 논리적 사고 훈련을 위한 독서의 중요성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과목들조차 다이제스트 출제 문제집이 테두리에 갇히게 되어 독서에 대한 동기 유발의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출제 대상이 되는 상당수의 작품들은 현재 글쓰기를 하고 있거나, 문학 출판을 하고 있는 작가나 출판사와는 무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작품들의 수준은 물론이려니와 고루함으로 인해서 학생들에게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계발시키는 데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고리타분한 것이 문학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까지도 낳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대학 신입생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하나는 지금 현재 문학 제도에 관여하고 있는 작가나 출판사들에게 거의 경제적 수익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십만의 독자와 문학 출판을 연결시킬 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왜 곰팡내 풀풀 나는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작가들만이 문학작품의 생산자인가? 교과서는 그나마 며칠 전에 타계한 황순원 선생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혀 현대적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최인훈의 좥광장좦, 이청준의 좥당신들의 천국좦, 박완서의 좥휘청거리는 오후좦, 이문구의 좥관촌수필좦은 물론이려니와 황석영의 좥무기의 그늘좦, 이문열의 좥영웅시대좦, 복거일의 좥비명을 찾아서좦, 윤대녕의 좥은어낚시통신좦, 김영하의 좥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좦 등도 얼마든지 입시를 위한 독서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미래의 잠재적 문학 독자를 잃게된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문학을 낡은 것으로 받아들인 학생들이 앞으로도 더욱 가속화될 영상문화의 시대에 문자의 세계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특별한 제도적 강제 장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그들은 우선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는 문학적 독서에 전혀 익숙하지 못하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그들에게 장편소설 분량의 읽기는 대단히 부담스럽다. 단편 위주의 다이제스트 독서로 인해 사유의 호흡이 짧아진 것이다. 그것은 대학에서 교양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거의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상이다. 물론 여기서 훈련이 반드시 강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제 식민지 치하의 현실과 작품을 연결시켜 가는 문학 교육에 대해 학생들이 흥미로워할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 지금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문학 텍스트를 연결시키는 것이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에 훨씬 유리하다. 지금·여기에서 자신들의 생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풍경을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차원에서 문학이 당대적 현실만을 문제 삼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으나,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의 이론을 만들지 못한다면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줄여나가는 방법이기도 하고. 프랑스의 문학 교육과 출판 프랑스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문학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의 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답하건대 사실이다. 게다가 영상문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문학 출판이 활성화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적어도 문학에 관한 한 프랑스는 세계 최고의 출판 대국이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입시 제도가 문학교육과 출판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중등교육에서 문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다른 학생들까지도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상당한 종류의 문학 텍스트가 정해져 있다. 그저 우리처럼 교과서에 단편적으로 실린 글만 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작품들을 다 읽지 못하는 한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의무감에서라도 읽어야만 최소한의 답을 쓸 수 있게 고안된 문제를 출제하기 때문이다. 16세기 몽테뉴의 수필, 17세기 몰리에르의 희곡, 18세기 볼테르의 논설, 19세기 빅토르 위고의 시, 20세기 셍텍쥐페리의 소설 등등은 암송하듯이 읽혀지고, 자기 나름의 분석과 해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되는 작가들은 이들 외에도 수십을 헤아린다. 물론 그 이전에 수많은 작가들의 문장을 정확하게 받아쓸 정도가 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프랑스의 작문 교육의 출발은 좋은 문장을 정확하게 받아 적는 ‘딕떼’라는 훈련으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단련된 학생들의 문장은 그래서 상당히 정확하며, 자기 나름의 글쓰기 능력을 가진 학생들의 독서 수준은 우리들의 예상을 상당 부분 뛰어넘는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며, 동시에 타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잘 표현할 수도 없다. 어떤 면에서 프랑스의 학생들은 당장의 베스트셀러를 읽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전 텍스트의 독서와 자기 표현에 자신들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중·고등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편집되고, 주석이 달린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책들은 우리나라에서처럼 이름도 알기 어려운 학원 강사들에 의해 얄팍하면서도 교묘하게 편집된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야심만만한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저 입시를 위해 일회용으로 읽고 치우는 책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한 섬세한 배려이자 출발이 되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자크 루소의 좥에밀좦 같은 책의 경우, 청소년을 위한 것과 대학생들을 위한 것, 그리고 연구자들을 위한 정본(定本)이 따로 만들어져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가 이름쯤은 들어보았을 상당수의 텍스트에 공통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 전문 출판사들은 독자의 수준에 따라 여러 판본의 텍스트를 출간하며, 그 출간은 입시 제도의 힘을 빌어 많은 경우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일종의 피이드-백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좥이방인좦의 경우 갈리마르 출판사에 해마다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안겨준다. 그러니 프랑스의 문학 전문 출판사들은 기를 쓰고 좋은 작품을 발굴하는 일에 매달린다. 이를 위하여 당대 최고의 작가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투고 작품 검토를 위한 ‘편집 위원회’가 예외 없이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이름이 낯설지 않은 미쉘 투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 르 클레지오 등은 현역으로 이런 직책을 맡고 있으며, 작고한 싸르트르, 알베르 카뮈,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모두들 이 직무를 수행한 사람들이다. 물론 프랑스 출판 담당자들에게도 베스트셀러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마다 공쿠르상을 위시한 문학상이 발표될 시기가 되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수상 후보작에 대한 홍보를 한다. 그래서 때때로 잡음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그 홍보란 문학적인 면에 관한 것이지, 상업적 측면을 고려한 음험한 것이 아니다. 교육과 입시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 대중들의 독서 수준은 문학적으로 올바른 것이 곧 상업적으로도 올바를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 영예와 상업적 성공을 뒤섞지 않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 둘의 행복한 결합을 가능케 하는 멋진 역설이 되었다. 그 둘을 뒤섞음으로써 결국 문학과 상업을 다 죽이게된 우리로서 뼈아프게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어쨌든 이렇게 교육과 입시 그리고 출판의 긴밀한 얽힘은 프랑스 대학 입시인 ‘바칼로레아’의 철학 시험에서 그 상징적 면모를 보여준다. 다양한 문학 텍스트에서 선택된 지문을 읽고 주어진 문제에 대해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야 하는 이 논술 시험에서 쪽집게 과외 따위는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애초에 쓰기가 불가능한 문제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 그것은 철학 혹은 문학만의 과제가 아니라는 점을 프랑스의 입시 제도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모든 인간이 풍요로운 생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이자 의무이다. 적어도 어느 지점에서 교육은 입시를 통해서라도 군국주의적 강제를 띠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가 오히려 앞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처럼 자유방임에 내맡겨져 문화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정책 당국자들이 반드시 유념해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과외 따위를 방지하려는 괴이한 목적으로 입시 제도가 짜여지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프랑스에서 좋은 텍스트에 대한 독서의 동기 유발은 대학 입시 제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문학과 관련하여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사자격시험capes이고 다른하나는 교수자격시험agre-gation이다. 앞의 것은 보통 석사 학위를 가진 학생들이 응시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석사학위 이상, 흔히 박사과정 졸업생들이 응시한다. 이들 시험은 대단히 큰 국가적 행사이며, 상당수 젊은이들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이 시험은 독자 대중과 출판 시장에 상당한 파장을 미치게 된다. 우선 이 시험이 공고되면서 전공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 필수적인 문학과 관련하여 몇 명의 작가와 작품이 그리고 핵심 주제가 주어진다. 그러면 해당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존의 주석본과 연구서들이 서점에 진열되며, 이 과정에서 수험생이 될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학생들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도 연구서는 차치하고라도 텍스트만큼은 읽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굳이 출판사가 나서서 돈을 들여가며 과장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언론을 통해 과연 어떤 작가가 국민 작가이며, 어느 작품이 국민 문학의 범주에 드는 것인지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와 출판사는 그저 좋은 작품을 쓰고, 출간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보상을 얻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비슷한 인구를 갖고서도 프랑스가 문학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독서열과 출판 수준을 유지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교육 제도의 개혁과 문학 출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의 문학출판이 어려움을 겪는 한 가지 이유는 교육과 입시 제도와 유기적인 고리를 맺지 못함으로써 시장에서 상당수의 독자들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당장 시험을 치르기 위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면 그 과정에서 파생된 자연스런 동기 유발에 의한 것이든 지속적인 독서 시장을 유지하는 데에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이 문제는 문학인이나 출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 정책 당국자나 행정 책임자 그리고 언론 주체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 점을 전제하고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선 대학 입시를 위해 중등과정에서 읽어야 할 문학도서의 목록을 선정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의 짧은 현대문학의 역사를 감안해서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작가들보다는, 오히려 지금 현장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고 대중들에게 읽히고 있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처럼 급속하게 변화를 겪은 사회에서 철자 맞춤법까지 다른 곰팡내 나는 근대 문학 작품이 젊은 학생들의 지적 흥미를 끌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상이나 김유정, 염상섭이나 이광수의 어떤 작품, 김소월과 정지용, 이육사와 한용운, 백석과 이용악 등등 몇 명의 특출한 시인들을 제외하고 나는 우리의 근대문학에 대해 관심이 없다. 차라리 그 시간이면 고은이나 정현종을, 김원일이나 조세희를 읽겠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문학사적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물론 정말 고전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누락시키지 말아야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지금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을 독자들의 관심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이 목록이 떠맡을 수 있어야 한다. 다음 하나는 교원 임용시험에서 문학 부문을 필수적으로 강화하는 일이다. 문학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 가장 소중한 통로이다. 이것은 각자의 전공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일 것이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확한 표현이란 교육자에게 가장 우선적인 자질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원 임용시험에서 몇 개의 텍스트를 제시하고 과제를 부여한다면 시험 당사자만이 아니라, 평소에 문학에 관심을 쏟던 독자들은 물론이고, 문학에 등을 돌리고 있던 독자들까지도 문학 안으로 이끌어오게 될 효과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출판사들로 하여금 양서(良書) 출판에 전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문학의 항구적인 이벤트로 만들 수만 있다면 교육의 질적 고양만이 아니라 문학 창작과 출판의 활성화에도 엄청난 도움이 될 이 제도에 대한 당사들의 관심 환기가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 다음으로는 아직 우리에게 없는 것이긴 하지만 프랑스에서처럼 교수 자격시험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한 교육을 받은 연구자들이란 각 분야의 전문가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최고 지성인들이다. 반드시 대학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는 좀 더 보편적인 교양으로서의 지적인 토대가 필요할 것이다. 문학과 역사(과학사를 포함하는) 그리고 철학 등이 그러한 토대의 실질적인 내용이며, 거기에 각 분야의 전공을 추가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행 교수 임용에는 그런 지적 소양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인간이란 존재와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문학적 사유가 필수적인 것임을 감안하면, 프랑스의 예를 참조하여 교수 자격시험 제도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문학은 전체에 관한 통찰이며, 지성인이란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지적 능력의 소유자여야 한다. 따라서 지성인일수록 더 깊이 있는 문학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부수적으로 상당수의 대학 교원 임용에 끼어드는 이런저런 잡음의 해소와, 고등연구인력의 효율적인 관리라는 망외의 효과도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제도의 힘을 바탕으로 인문학 출판이 보다 더 활성화된다면, 개인의 출세를 위해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고시 열풍과 그에 관련된 출판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적 사유의 훈련을 통해 얻어질 존재의 균형 잡힌 발전은 교육이라는 국가 정책의 제일 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도 교수 자격시험은 필요하다. 문학 출판의 미래 영상문화의 폭발적인 성장은 세계적 흐름이며, 그것은 되돌려질 수 없는 문명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문학적 사유의 위축은 우선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느끼며 나누는 가운데 성숙해지는 사회적 동물임을 감안한다면, 문학을 통한 자아와 세계의 통찰은 정보통신 혁명과 생명공학의 시대에도 더욱 필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문학이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문학출판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원칙을 존중하면서도, 독서에 대한 최소한의 동기 유발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절실하다. 이런 일에 다른 많은 구제는 그대로 두면서 문학에 대해서만큼은 자유방임이 아니라 말살에 가까운 정책과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지금이 의아스럽다. 지금부터라도 학생과 학부모, 교육 담당자와 연구자, 행정 책임자와 정치인 모두가 나서서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한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문학은 숨이다. 숨을 쉬지 않고서는 누구도 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각주 1) 판타지 소설은 그것 자체로는 상업 문학이라 할 수 없으나, 최근 몇몇 출판사에서 ‘판타지'라는 이름을 내걸고 출간된 작품들은 대부분 그 문학성을 인정하기 쉽지 않다. 흥미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넓게 보아 상업주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구분은 명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업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 사이의 구별은 의외로 간단하다. 프랑스 화가 피에르 술라주에 따르면, 둘 다 목표는 이미 알고 있으나, 이미 잘 알려진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상업 예술이며, 자신도 잘 모르는 길을 찾으며 가는 것은 비(非)상업 예술이다. 2) 물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화 향수를 능동적·적극적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들의 적극적 능동성은 많은 경우 자본의 상업적 전략에 얽혀 있다. 그들의 개성 혹은 취향이라 내세워지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자본이 가장 애착을 들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의 취향은 따라서 자본과 언론의 부추김을 받은 사이비 개성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대에게 있어 자신의 개성이나 취향에 대한 성찰의 노력이 특별히 보이지 않는 점이 그 증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