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지킴이   /  국악 알리기에 힘쓰는 사람, 정창관 선생

좋은 음악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김경희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이 편안하다. 그가 일하는 곳이 고급스러운 외국계은행인데다 직위가 부지점장이나 되어 혹시 만나면 빡빡하고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필요없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어디서 저런 넉넉함이 배어 나오는 것일까라는. 그는 그렇게 그가 소장하고 있는 수 천장의 음반만큼이나 넉넉한 사람이다.

만들어진 음악을 수집하여 정리해 주는, 뒷정리하는 사람?

국악연주가가 음악을 만들어낸다면 그는 만들어진 음악을 수집하여 정리해주는 말하자면 뒷정리를 도맡아 해주는 사람이다. ‘87년에 SKC에서 좥국악좦 제1집이 CD로 출반된 이래 지금까지 1400여종의 국악CD가 발행되었지만 그를 통하지 않고는 정확한 개수와 목록을 알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CD로 발행된 국악음반은 단 한 장도 빠짐없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악음반계인지라 발매하는 회사도 많이 없거니와 한번 발매가 된 이후에는 이내 절판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음반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그의 국악CD수집은 시작되었다.
대학시절 그는 6·70년대 학번이 거의 그렇듯이 통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던 학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한일은행에 입사를 한 후에는 고아원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는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 계속해서 팝송을 부르고 듣는다는 것이 어쩐지 나이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서양의 고전음악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에는 모든 열의를 가지고 클래식음악을 들었으며 음반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라이센스로 발매된 고전음악 레파토리는 모두 집에서 들을 수 있을 만큼 2백5천장 에서 3천장 정도의 음반을 모두 소장하게 되었고 실제로 이 음반들을 소중히 매일 들었다. 이때 모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은 160여종이나 되고 비발디의 ‘사계’는 국내에서 발매된 31매를 모두 가지고 있다하니 그의 서양 고전음악 감상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주)성음에서 운영하는 ‘오디오음악클럽’의 이사를 맡아볼 만큼 열렬한 애호가였으며 국내에서 발행되고 있는 서양음악이나 레코드 관련된 잡지 음반평을 기고할 만큼의 감상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카라얀이나 콜린 데이비스, 유진 올만디, 내빌 마리너가 내한을 했을 때 자필 사인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으며, 부산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는 이들의 음악을 듣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음악회를 참가하고 다시 밤기차를 타고 내려갈 만큼의 놀라운 열정으로 서양음악을 사랑했다.
 
국악과의 인연

’87년 어느 날 그 동안 서양음악만을 들었으니 우리 음악인 판소리를 한번 들어볼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 항상 음반을 구입하던 종로3가의 신나라레코드점을 들르게 되었다. “수천 장의 음반 중에 국악음반은 10장이 없었다. 더구나 내가 찾는 판소리 레코드는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심한 자성과 함께 국악으로의 귀향이 시작되었다. 중고 국악음반을 사기를 시작으로 닥치는 대로 국악을 듣고 국악관련 책을 읽고 국악연주회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다녔다.”
일반 음반사 뿐 아니라 청계천의 중고음반점을 돌아도 한 점의 판소리 음반을 구할 수 없었을 때 그는 “남의 음악을 지금까지 좋아했는데 우리 음악은 들을 수도 없어” 몹시 놀랐고 이 충격이 그가 국악을 사랑하게된 계기가 된다. 국악음반을 구할 수 없다는데 놀란 그는 청계천을 돌면서 국악과 관련된 음반은 SP이건 LP이건 간에 모두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음반을 모으는 과정에 유성기음반을 수집하고 있던 휘경여중의 교사인 배연형씨나 한소리회의 양정환씨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그 당시 서양음악계에서도 유성기판이나 예전의 음반을 복각하는 작업이 활발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도 유성기음반을 복각하면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88년 4월 19일 동숭동 인켈 오디오월드 음악실에 모여 국악복각판을 만들기로 결의를 한다. 처음에는 복각판을 만들어봐야 일반인들에게 판매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신들이 만들어 그냥 소장하기로 했다가, 그가 “신 악우회”라는 레코드 클럽의 회원으로 있었던 신나라레코드사에 국악음반복각을 건의해보았다. 모든 음원을 제공할테니 한번 만들어보라는 이 건의는 받아드려지기는 했지만 발매를 하되 판매가 되지 않을 경우 모두 본인들이 인수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게 된다. 그 당시는 “국악음반시장에 제작자는 판매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제작을 꺼리고 국악애호가들은 국악음반이 없어 구입을 하지 못하는 악순환 속에 빠져 있었다”고 할만큼 국악음반을 만들어내는 곳이 없었고 판매 역시 부진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저 국악음반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개당 200원씩의 인세를 받고 무턱대고 계약을 맺었던 최초의 복각음반인 좥판소리 5명창좦으로 5천5백에 대한 인세인 110만원이라는 돈을 받았을 때 그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그 당시 국악음반은 1000여장도 판매가 되지 않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불같은 국악사랑은 신나라레코드가 이후 계속 국악음반을 발매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좥이화중선좦(1989)을 발매한 성음, 좥동편제 판소리좦(1994)를 발매한 서울음반과 현재까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지구레코드 등 국내 굴지의 음반회사에서도 역시 유성기판을 복각한 음반을 만들어내게 되어 국악음반 발매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 뒤에 그는 ’94년 그 동안 서양음악음반의 소개를 해왔던 좥음악동아좦를 찾아가 그때까지 전혀 없었던 국악음반평을 써보겠노라고 제안을 했었고 좥음악동아좦측은 그가 그 동안 보여주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을 함으로써 그로 인해 처음으로 국악음반평이 음악잡지에 실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국악음반을 보급하고 국악애호인층을 두텁게 하려는 의도에서 음향자료는 모두 지원을 할 테니 부록으로 CD를 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다. 그의 제의는 원고마감 이틀 전에 받아들여져 음악 선곡을 비롯하여 선곡된 음악에 대한 글을 이틀 밤을 세워 작성 하였고, 그렇게 만들어져 나온 것이 좥판소리 눈대목좦이었다. 이후‘95년에는 좥레코드음악좦에서 글을 쓰면서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한 좥생활국악대전집좦을 발췌, 한 장의 CD를 발간하도록 하였다. 좥월간음악좦에서는 좥산조좦만을 가지고 CD 한 장을 만들도록 하면서 그를 통해 부록으로 발매된 국악음반이 총 세 장에 이르게 된다.  

국악 전문가와 애호가 조화롭게 어룰린 한국 음반 연구회 조직

‘한국고음반연구회’ 그를 소개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모임이 바로 한국고음반연구회이다. 한국고음반연구회는 ’88년 신나라레코드와 함께 국악음반 발매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을 때 대구의 유성기음반수집가였던 이중훈교수가 개인 세 사람보다는 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좋겠다며, 국악관련 유성기음반의 권위자였던 문화재전문위원 이보형선생을 소개했다고 한다. 1989년 3월 1일 이중훈교수가 서울에 올라오는 기회에 세 사람은 이보형선생을 찾아갔고, 그 동안 학문적으로 고음반을 연구할 기회가 없어 안타까워하며 연구회를 만들고 싶었던 이보형선생은 흔쾌히 회장직을 수락하여 한국고음반연구회가 이날 조직된다. 이후 고음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알음알음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이보형선생께 수학하던 대학 국악과의 석·박사과정의 학생들도 참여하여 지금은 총 15명의 회원을 가진 번듯한 연구회로 성장을 하였다. 이 연구회는 회원수가 얼마 안되다 보니 회원들간의 유대관계나 책임감이 무척 강한데다, 국악전문가와 국악애호가가 조화롭게 어울려 다른 어떤 연구회보다 운영이나 활동면에서 뛰어나다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고음반연구회에서는 학술지인 좥한국음반학좦과 복원시킨 음향자료의 발간, 고음반에 녹음된 음악의 복원연주회와 학술회의 개최, 고음반 관련 자료 전시회 개최 등 다른 연구회에서 절대 흉내낼 수 없는 많은 활동과 행사를 그 적은 인원과 자원으로 치루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음반학이라는 학술지가 발간되는 것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할 뿐 아니라 음반학이라는 용어도 우리가 최초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연구회의 의미를 평가한다.
 
메세나활동

기업체에서 문화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며 늘 기업메세나활동을 강조하던 그가 지난 ’98년 겨울 갑자기 국악연구실에 찾아와서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HSBC에서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차원의 한국의 교육관련 사업으로 1억의 예산을 지원하기로 계획이 수립되었다며, 이왕이면 국악교육쪽으로 지원 받을 수 있도록 해보자는 제의를 해왔었다. 우리 연구실에서는 그 동안 아이디어는 있었으나 예산이 없어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의 사업계획들을 그에게 전해주었고 그는 그 가운데 “우수 국악교육 연구 공모제”라는 국악교수-학습지도안 컨테스트 사업에 3천만원을 지원할 수 있게되었노라고 연락이 왔다. HSBC 한국본부의 지원으로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한 “우수 국악교육 연구 공모제”는 전 국악계와 음악교육계에 알려졌으며 많은 교사 및 관심있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 개최되었으며 이 행사를 통해 발굴된 교안과 연구논문들은 전국으로 배포되어 실제 학교 국악교육 현장에서 이용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지원에 대해서도 늘 한발 물러서서 그것은 은행에서 지원을 한 것이며 본인은 그냥 그런 사업이 있음을 알려주었을 뿐이라며 겸손해한다. 그러나 우리 국악원의 입장에서는 정 부지점장이 아니었다면 결코 지원 받을 수 없었던 지원금이었기에 HSBC의 어느 관계자보다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국악원에의 지원 뿐 아니라 올해 장학금 지급자 30명의 학생 가운데 이화여대 국악과 학생 1명이 장학금을 수여 받게 된 것도 그의 숨은 공로일 것이다. 그는 늘 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 앞에 일을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나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늘 뒤에 있기를 강조하듯이 그는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만 있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다.  

명인발굴작업

그렇지만 그가 발벗고 나서는 사업이 있다. 바로 숨어있는 명인들을 찾아내서 음반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 일은 평소에 이보형선생이 예인들이 나이가 들어 돌아가시면 “저 사람 음악을 음반으로 남겼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내가 내 이름을 걸고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하게되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예인임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 그동안 음반 한번 제대로 내본 적이 없는 분들로 돌아가시고 나면 그만 영영 없어져버릴 음악을 연주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고 첫 번째 대상이 진주의 명인 강순영이었다. 강순영명인은 가야금을 비롯하여 판소리와 단가 등 소리에까지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진정한 예인이나 너무 가난하여 그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분이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1천매 한정반을 만든 그는 지난 ’94년 국악의 해에 사용되었다가 묻혀버린 엠블럼을 문화관광부로부터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매년 국악의 해’라는 글귀를 넣었으며 그간 친분이 있었던 중앙박물관 김원복미술부장의 도움으로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표지로 삼았다. 2집에 수록된 조순애명인도 안타까운 처지는 마찬가지지만, 특히 3집에 수록된 김영택명인은 돌아가시기 10일전에 음반을 가지고 찾아뵈었을 때 헤드폰을 쓰고 자신의 음악을 들으면서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신의 음반을 들으셨다고 하니 음반 하나가 그분에게는 평생의 회한을 씻어주는 의미있는 것이 된 셈이다.
 
국악사랑

처음에는 국악음반분야가 너무 불모지인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국악에 대한 애정이 생겼던 것이지만, 이동백명창의 좥새타령좦을 들으면서 그는 진정한 국악의 멋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음반이 구해지는 대로 또 음악회를 수없이 다니면서 그는 서양음악 연주회장에서 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편안했고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오페라보다 사설이 그대로 이해되는 판소리가 좋았다. 특히 세종문화회관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 서양의 어떤 음악보다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박수를 치고 있었고 모든 음악이 끝난 다음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한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전음악을 듣고 연주회를 보았지만 어느 음악도 눈물을 흐르게는 못 했지만 판소리 심청가 한바탕을 듣고 있노라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가 쑥스러워 옆 사람의 눈치를 볼”만큼 국악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었다.
 이렇게 좋은 음악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그는 바란다. “제가 하는 모든 작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듣고 기쁨을 느끼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도 필요한 분에게는 언제든지 개방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는 그가 발매하는 음반에도 ‘여기에 수록된 자료들은 영업외의 목적이라면 녹음하여 사용하여도 좋습니다’라고 밝힌 것과 함께 그가 벌이고 있는 모든 작업이 국악의 보급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가 최근 개설한 국악음반에 대한 홈페이지 www.kukakcd.pe.kr 에 가면 좋은 음악을 나누고 싶은 그의 마음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다.
국악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국악알리기에 힘을 쓰는 그를 단지 국악애호가라는 호칭으로만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