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베세토연극제 참가작, 여성의 무대예술 월극
강춘애
(동국대 연극학과 강사)
1994년에
창립되어 매년 한중일 삼국이 돌아가며 개최하는 베세토(BeSeTo) 연극제는
올해로 제7회를 맞았다. 이번 베세토 연극제는 제3회
아시아·유럽 정상회의를 경축하는 ASEM경축공연으로
우리의 고전 춘향전을 중국·일본·한국이 각각 월극·가부키·창극
형식으로 10월 19일에서 22일까지 국립극장 대무대에 동시에 올렸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아시아의 연극
유산인 가무희가 각자의 독특한 전통양식으로 공연되어졌다는
사실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번에 사랑 부분을
공연하게 된 중국측의 월극은 국내 최초로 소개된 공연양식이다. 중국에서는
전통극을 희곡(戱曲)이라고 하며, 근대극은 화극(話劇)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중국의 전통극은 주로 경극이 알려져 있으나, 중국에는
각 지방마다 다른 명칭의 지방극이 300여종이나 된다. 그 중 근현대에
출현하여 성숙한 새로운 극종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고대희곡의
종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경극, 그리고 월극이다. 월극은 20세기 초에
강남일대에서 탄생하여 이미 9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중국희곡사상
여배우만으로 구성된 유일한 극종이다. 그러므로 월극의 가장 큰 특징은
남성의 역할을 여자배우가 연기하는 또다른 매력에 있다.
월극은 경극보다 곡조가 감미롭고 부드럽기 때문에, 소리와 감정이 매우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연극협회는 서정성을 표현하기에는
월극의 형식이 가장 적절하다는 이유에서 3국의 합동 공연작 <춘향전>을
월극으로 선정하였고, 춘향전의 [사랑] 부분을 중국이 연출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춘향전>은 1954년 상해월극단에 의해 최초로 공연되었다.
46년 전에 중국에서 공연된 <춘향전>은 북한의 국립고전예술극원의
연출대본(중어번역본)을 각색한 번역극으로 우리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장하였다. 그 뒤로 절강성의 소백화월극단(小百花越劇團)에서
양샤오칭(楊小靑)의 연출로 다시 공연되었다. 놀랍게도 1954년에 공연된
<춘향전>은 지금 VCD로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미
시중에는 많은 월극작품이 VCD로 제작, 판매되고 있다. 이는 중국에서
월극이 그만큼 열성적인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시아에서 여성배우로만 구성된 가무극 형식은 중국의 월극을
비롯하여. 홍콩·싱카폴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또한 명나라 말기에 대만으로
이주한 민남인( 南人)들의 민간 가무를 기초로 만들어진 대만의 꺼지아시(歌仔戱),
우리나라의 여성국극, 그리고 1914년부터 공연을 시작한 일본의
다카라즈카(寶塚) 가무극단 등이 대표적인 여성가무극단이다. 다카라즈카는
1999년 11월 6일에서 9일까지 상해국제예술제에 참가했는데, 일본의
팬 2천여명을 몰고 왔고 또 중국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팬 천여명이
몰려와서 3천 여석이 매진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래서 이틀간
연장 공연을 해야만 했다. 소백화월극단의 <서상기> 역시 공연이
끝나자마자, 관객들은 무대 앞으로 몰려가 환호성을 지르며 떠나갈 줄
몰랐다. 이 극단의 대표이면서 최연소로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인 마오웨이타오(茅威濤,
현 37세)가 서상기의 남주인공 장선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상해시
부시장은 무대 위에서 그녀와 악수를 하면서 "상해무대는
영원히 소백화극단을 위해 존재할 것입니다" 라고 치사하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계속 아우성을 쳤다. 극성스런 여성 팬은 무대
위로 올라가 마오웨이 타오를 껴안고 울기도 했다. 극장을 빠져나올
때 출입구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관객들로 웅성거렸다. 월극에서
여성이 남자역할을 하는 뉴 샤오셩(女小生)이나 또는 가부키에서 남성이
여성역할을 하는 온나카다(女型)는 각기 월극과 가부키의 최대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가부키는 처음에 여성에
의해 시작된 이즈모노 오쿠니에 의해 추어진 춤에서 비롯된 오쿠니가부키(1603-1629)였으나,
이후에 미소년인 와가슈가부키(若衆歌舞伎)로 다시 1653년에 성인으로
구성된 야로가부키(野郞歌舞伎)로 변모하여 현재 전출연진이 모두
남자배우로 되었다. 이와 정반대로 월극의 초창기는 전부 남자배우로
출발하였다. 1906년 월극은 소규모의 민속 형식으로 절강성 동부의
소흥에서 탄생하였다. 1917년 상해로 진출, 그 초기는 전부 남자배우였기
때문에 속칭 '남자반(男班)'이라고 불렀고, 대도시의 관중 취향에 맞게
월극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소흥지방 고유의 다양한 곡조를 흡수하였고,
현악기와 다른 악기들을 반주에 첨가시켜 박자의 범위를 확대했으며,
또 경극의 무용적 동작을 흡수했다. 1923년 예술가 김영수(金榮水)가
소흥의 승현에 소녀들을 위한 양성소를 설립하여 최초로 여반(女班)이
만들어졌다. 두샹화(屠杏花)가 女小生(젊은 남자 역의 여배우)을
처음으로 연기했다. 그 당시 유명한 월극배우는 거의 상해로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월극은 남녀 혼용배우로 구성되었으나 1928년부터 남성배우는
도태되었다. 그리고 여배우가 월극의 무대를 독점하면서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30년대 중반부터 여성월극단은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女小生의 존재였다. 젊은 女小生 역의 배우들은 늘어났고,
상대역인 小旦(젊은 여자 역)으로 유명한 배우도 탄생하였다.
월극극단들은 女小生 위주의 극단과 小旦이 중심인 극단으로 구분되었다.
그만큼 연극은 배우예술로서 뛰어난 연기력을 갖고 있는 배우에
의해 극단의 성패가 좌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여성 전용의
월극단으로 전환된 이후부터 레파토리는 낭만적인 사랑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자연히 전투장면이나 기예적 동작인 잡기는 차츰 사라져
갔다. 1939년에서 1941년까지는 월극의 유명한 여배우가 희곡작품, 또는
소설 및 화극을 각색하여 시대를 반영한 월극을 다투어 공연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현실생활을 반영한 월극의 내용으로 관객에게
접근하였고 또 관객을 끌어들였다. 1939년 7월 22일 조우의
<뇌우(雷雨)>를 월극으로 공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전통적 양식을
깨고, 조명·음향·무대장치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1936년
상해에서 데뷔한 위엔쉐펀(袁雪芬)은 월극배우로 가장 유명하였다. 1942년
그녀는 신월극(新越劇)으로 일대개혁을 시도하였다. 즉 곤극의 음악과
무용 그리고 현대극(화극)의 연기법을 수용하여 기존의 전통극
작품을 새롭게 정리하고 재창조하는 한편, 화극을 월극형식으로 개작한
새로운 레파토리 개발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녀 자신의 독특한
창법을 개발했는데 "곡조는 선율이 질박하고 박자에 변화가 많으며,
감정은 진솔하고 깊이가 있다. 온화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감미롭고
부드러워 소리와 감정이 모두 풍부하다"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매란방의 영향을 받아 머리장식과 의상, 화장법 등 극중인물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시켰고, 부드러운 색조를 강조했다. 희곡작품에 월극의
서정미와 낭만적인 형식을 부여한 셈이다. 1946년 티엔한(田漢)은 "앞으로
平劇(경극의 옛 이름)과 화극으로 '三分天下'할 수 있는 것이
월극이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월극은 지방극과 화극 간의 교류와
종합성을 보여주었다.
월극 개혁에 있어서 위엔쉐펀과 야오쉐이위엔(姚水娟)의 견해 차이는
컸다. 야오쉐이위엔은 '경극화'로 월극의 연기 수준을 높이려고 한 반면에,
원설분은 '화극화' 내지는 신흥예술로 반발하였다. 1947년 위엔쉐펀은
노신의 소설 <축복(祝福)>을 각색한 <상림수(祥林嫂)>로
크게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월극무대 사상 처음으로 농촌여인을
형상화하여 여성에 대한 잔혹한 압박을 폭로했다. 이 작품은 월극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월극계는 물론 지방연극에
주목하게 만들었고 특히, 주은래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48년
상해 계명영화사는 월극을 영화화하여 더욱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월극은 지방극으로서 화극과 교류를 가졌지만 화극화 되지 않았다. 월극은
스스로의 새로운 표현방식 속에서 중국희곡을 전제로 파생된 지역성
띤 문화예술로서 오월(吳越)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전통의
희곡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건국 초기 이미 '희곡현대희'라는
명칭이 나타났다. 1980년 8개 극단연합(월극단을 포함하여)과 상해예술연구소가
참가하여, 희곡현대희를 창작·연출·연구하는 전문인들의 모임인
'희곡현대희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중국에서 전통극은 끊임 없이 재창조를
거듭했고, 연극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감지할 수
있다. 80년대는 대량의 전통극 공연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현대연극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 당시 현대연극의 지속적 발전의 대안으로 제기되었던
것이 30여 년의 경험을 갖고 있는 희곡현대희의 창작이었다. 80년대
초 월극의 고향 절강성 전지역에서 월극 학생을 대규모로 모집하여
교육시켰고, '小百花'라는 제목으로 경연을 벌여 40명의 우수한 배우를
엄선했다. 이때의
젊은 배우들이 주축이 되어 현재 항주에 위치한 '절강소백화월극단'이
성립된 것이다. 항주는 송대 남희의 발상지로 지난 800년 동안 많은
극작가·연극이론가·공연예술가를 탄생시킨 곳이다. '절강소백화월극단'은
1983년 9월 초창기 공연작품 <오녀배수(五女拜壽)>를 시작으로,
1989년 <육유와 당완(陸游 唐婉)>으로 전환기를 맞아, 성숙기에
들어서면서 <서상기(西廂記)>·<한정(寒情)>·통속 희극(喜劇)
<홍사착(紅絲錯)>과 남희 가운데 우수한 <琵琶記> 등에
이르기까지 근 17년 동안 역사극과 고전명작을 새로 각색하여, 현대무대와
조화를 이룬 창작예술로 관중을 사로잡았다.현재 절강성에는 86개의
직업극단이 있는데, 그 가운데 36개가 전문적인 월극단이다. 만약 여기에
아마추어 월극단까지 포함시키면 300여개 극단에 이른다. 현재 규모가
가장 큰 월극단은 절강성 소백화월극단과 상해월극단이다.
이번에 내한한 소백화월극단은 정식 단원이 80여명이며 임시직원까지
포함하면 100여명이다. 배우들은 결혼 이전에는 문화청에서 배분해준
극단내의 숙소에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결혼한 배우
및 직원은 극단 건물 안에 지어진 소형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한 울타리
안에 직원, 배우 그리고 연주자를 포함한 스텝진들이 살고 있다.
극단 자체 내에 중극장이 있고 연주실 및 연습실이 구비되어 있다. 한
극단이 의상, 무대미술, 조명, 작가, 작곡자 및 연주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부러운 현상이다. 경우에 따라 외부 스텝진을 초청하기도
하는데, 이번 춘향전 공연의 무대미술을 담당한 북경 중앙연극대학의
황하이웨이(黃海威) 교수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월극 춘향전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단원이 5월부터 6월말까지 1개월간 극단 내에 강좌를
개설하여, 한국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배우들은 평소 오전 8시 30분부터 기초훈련을
쌓고 있다. 직업극단의 면모를 가춘 소백화월극단은 수차례의 국외공연에서도
호평과 찬사를 받고 있다. 이외에 절강성 항주에는 월극 민간직업극단이
아주 많다. 新六·聯右·天然·金龍·民藝월극단 등이 대표적이다.
필자는 1999년 10월 항주의 황룡월극단이 黃龍洞공원 안에 있는 누각형
건축의 전통무대에서 공연하는 월극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하루에 4개의 소형작품을 공연하고 있었는데, 무대 왼쪽에
있는 안내 팻말에 공연 프로그램 안내와 황룡월극단을 소개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공연은 오후 1시 45분부터 시작해서 5시 전에 끝났다.
필자가 당도했을 때 관중들은 대부분 노인들로 무대 앞에 긴 의자를
늘어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막의 왕자(沙漠王子)>를
감상하고 있었다. 공원 안에 옛 무대가 있고 전용극단에 의해
무료공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노인들이 마냥 사랑이야기에
넋을 잃고 즐거워하는 표정에서 평화로움을 느꼈다. 또한 희노애락에
깊숙히 침투되어 온 중국연극문화는 중국인들의 생활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원 또는 광장형
공연이 가능한 사원, 사당, 궁궐 등의 月臺 위 또는 누각에서 평소에
우리의 음악이 연주되고 소리꾼의 창과 가무가 공연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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