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화된'
기교와 '적당한' 기교
문애령
(무용평론가)
평론이
작품해석과 가치평가를 하는 작업이라는데 대해서 이견은 없다. 평론의
역할이 작품을 설명해서 관객의 미적 경험을 돕는데 있다는 주장도 이론상으로는
타당하다. 무용비평이 순간을 공유하고 사라지는 영상을 담기 때문에
무대 상황의 전개과정을 묘사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특성을 지닌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기준을 잘못 잡으면 관객의 미적
경험을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
비평문과
리뷰의 차이
해석을
하는 기준은 물론 무용에 관한 지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사와
미학의 흐름, 그 미학의 본질, 작가의 계보, 작가의 개성을 해설하다
보면 그 작품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혹은 어떤
작품을 보았을 때 어느 관점에서 가치를 부여해야 이 작품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지를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해석이건
판단이건 무용에 관한 많은 지식이 곧 평론의 기본이 된다.
하지만 많은 지식이 있더라도 어떤 방법론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꿰지못한 구슬에 불과하다. 불행하게도 무용에서의 일반적인
비평기준을 제시한 사람은 없다. 단지 비평문과 리뷰의 차이를
인식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로져 코플랜드와 마르셀 코핸의
편저인 좥무용이란 무엇인가좦에 의하면 미술이나 문학비평이 학자들
중심으로 이뤄진 것과 달리 무용비평은 기자들 중심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수준 높은 비평문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새로운 작품과 친숙해질
준비가 되어있는 특별한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작품의 쟁점을 다룰수
있는 비평문이다. 리뷰는 비록 작품을 묘사하고 가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소비자 가이드' 로서의 기능에 머물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용평에서 사용하는 비평의 기준은 큰 테두리 안에서는 문학의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 규칙적 비평, 사회적 비평, 심리적 비평,
인상적 비평, 의도적 비평, 내재적 비평이라는 원칙들이 그런대로 무용과도
접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는 작품과 비평의 방법론을 대비시켜
평가를 끌어내는 동안에 무용의 독특한 특성을 함께 반영하는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무용의 특성은 말을 하지 않는데 있다. 말을 사용하는
현대의 무용에서도 말의 의미가 춤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므로 언어의
유무는 방법론 자체에 큰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무대에서 어떤 일 벌어졌는지를 우선 묘사해야 한다. 무용은
특히 한 작품을 여러차례에 걸쳐 들여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평론가에게는
순간적인 예민한 능력이 필요하다. 첫째, 동작을 보는 ‘능력있는' 눈이
필요하다. 두번째로 그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본 것을 묘사하는 능력인데 춤을 쓴다는 작업은 애초에 ‘잔인한 역설'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쉽지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무대를 묘사하는 것으로 평론의 몫이 끝날 수는 없는 일이다.
동작을 분석한 내재적 비평을 했거나 기준을 잡지 못해서 단순히 그림
그리듯 말로 무대를 그렸거나 간에 그 작품이 다른 작품과 어떻게 다르고
어떤 기준으로 볼 때 좋으며 좋지 않았는가를 반드시 밝혀야 평문이
완성된다. 고전무용의 경우에는 특별한 동작을 어떻게 연기하는 것인지
그 올바른 기교 수행법을 알아야 하고 버전이 어디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아야 평가를 진행시킬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평론가들이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모르고도 그냥 쓰는
평론가, 심지어는 거짓말을 쓰는 평론가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불신은 깊어진다.
평론가는 어떻게 되는가, 무용은 주로 신문기자들이 담당해왔기 때문에
깊이있는 작품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는 지적처럼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깊이있는 비평문을 발표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대중화된 지면도 없고
전문적인 무용공부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등등 열거할 내용은 많다. 다행히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 무용학 박사들이 외국 유학 후에 무용비평계로
대량 영입된다면 리뷰는 리뷰대로 존재하는 동시에 깊이있고 때로는
새로운 춤에 깃발도 흔들어주는 적극적인 비평문화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큰소리 칠 형편이 못된다. 그렇다고 비평의
부재를 강조할 수만은 없는 일이니 역사적으로 나열된 무용평과 문학적
비평의 방법론을 대비시켜 보면서 뭔가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무용
비평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 왔는지,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평론가가 지녀야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지를 희미하게나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해외의
무용비평
무용에
평이라는 것이 등장한 시기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낭만발레 전성기 때였다.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데오필르 고티에는 자신이 낭만발레의 애호가였고
창조자(대본)였던 때문에 수많은 오페라평 가운데 몇 개의 발레평을
남겨 주었다. 고티에의 평은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인상주의
비평의 특징은 비평가 자신이 그 작품에 심취해서 감동을 받는다는데
있다. 천부적인 능력을 보고 천부적인 평가를 하는 과정이므로 규칙이
적용되지 않으며 때로는 평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다. 대신 이 방법에서는 논리적인 평가를 기대할 수 없다.
고티에는 생생한 장면 묘사와 함께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글로 남겼지만
춤을 묘사하지도 않았고 춤을 대하는 당시의 입장을 밝히지도 않았다.
예를들면 “탈리오니 양은 오크나무 껍질에서 갑자기 나타난 젊고
놀란, 수줍은 양치기 같은 눈으로 인사하는 하얀 존재로 차갑고 어두운
계곡을 연상시킨다." 라는 식이었다. 또한 무용을 ‘다리의 문학'이라고도
했는데 무용보다는 무용가에 대한 묘사가 많았다.
만일 우리가 인상주의적인 방법으로 평을 쓴다면 평론가 자신이 예술적인
감성에서 탁월함을 인정받도록 해야한다. 아무말이나 할 수 있다고 해서
무대 밖의 사생활을 평문에 넣거나 육체적인 매력을 성희롱에 가깝게
묘사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비평가 자신이 그 작품에 대해 열렬한 감동을 받은 경우에만 그 평문이
정당화 된다는 점이다.
고티에 다음으로 비평문을 남긴 사람은 앙드레 레벵송이다. 이사도라
던컨이 20세기 초 러시아에 등장한 사실부터 혁명이후 파리에서의
활동을 서술하면서 특정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니지만 그녀가 추구하는
춤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히려고 했다. ‘파리지엥'에 연재된 이 글로
그는 몇 안되는 ‘학자 기자'로 부각됐는데 이사도라 던컨의 반
발레적인 측면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아름다움'에 신뢰를 보냈다. 동시에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던컨이 고대적인 취향을 지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했다. 그보다는 차리리 전-라파엘 미술가들의 취향이 보인다고
했다. 앙드레 레벵송의 지적에 동조하는 현대의 평론가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의 분석이 정확했음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레벵송이 시도한 글은 한 무용가의 전기를 기술하면서 춤의 특성을 밝히는
과정이므로 사회적쪾심리적 방법을 적용한 맥락비평으로 어렵게나마
짝지을 수 있겠다. 그가 다룬 시기는 이사도라 던컨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일대기를 정리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전문적인 평가를
끌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작가론' 이라는 말로 수용하고
있다. 맥락비평은 작품이 발생하게된 상황들, 작품이 사회에 미치는
효과를 원인과 결과론 적으로 이해하는 특징이 있다. 레벵송은 이사도라
던컨의 새로운 무용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미학적 측면도 강조했기
때문에 맥락주의의 허점으로 지적되는 예술의 고유한 ‘특성 무시'에서도
벗어난 균형감을 보였다.
우리 무용 평론가들이 맥락비평 방법 중 마르크스의 사회적 비평을 적극
수용한 경우는 해방 직후였다. 한국 최초의 평론가로 알려진 문철민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관능 자극을 위한 완롱물적 유미주의 무용과
방황하는 소뿌르조아적 초조의 소산인 표현파 무용의 시해를 비료하고
새로이 우리가 이룩할 무용-그것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민족대중의 투쟁을
위하야 그 사기를 고무하기 위하야 존재하며 그 위로를 위하야 존재하며
또한 마침내 취하고야 말 압박없고 자유스러운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의 찬가에서 존재해야 할 것이다. 좥레-닌좦도 일찍이 혁명적 대중에게
비속적 오락을 주기에는 그들 혁명의 대중은 너무나 위대하고 귀하다라고
말하였다." 라는 내용이었다.
표현파 무용을 비료로 삼아 투쟁하는 민중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존재로서의
무용이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은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강조하는
예술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세계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이러한 철학이
한때 유행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삼을 것이 없지만 그가 유일한
평론가인 동시에 무용사회의 건설에서 권력을 갈망했던 인물이었기에
무용계에 끼친 영향력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레벵송 다음에 등장한 인물은 1920년대에 미국의 무용공연 기록을 남긴
칼 반 베슈튼이다. 직업 때문에 시작된 그의 평은 곧 그를 대표적인
평론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안나 파블로바를 전-포킨 시대와 연결된
고전발레의 마지막 인물로 조명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아직 미국이
발레의 불모지였던 상황이라 파블로바의 위대함을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내용을 풀어서 잡지에 소개하는 오늘날의
무용가 탐방기사와 비슷한 때문에 평론으로 다루기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반 베슈튼 이후로 평론가들은 무용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존 마틴이 뉴욕타임즈에 글을 쓴 1927년부터 1962년까지는 모던댄스의
전성시기와 기간이 같았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무용형태를 대중에게
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빌리지
보이스에 1960년대 중반에 평을 쓴 질 존스톤이 포스트-모던 댄스를
옹호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발레쪽에서는 무용평의 특징인 예리한 관찰력을
평가받은 에드윈 덴비가 조오지 발란신의 작품을 평하면서 신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묘사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사지를 힘있게 펼친 발레리나는
파트너에 의해 들어올려졌고 그 반복적인 동작은 아치형을 이루며 점점
더 높아졌다.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그녀를 천천히 내렸다. 여러분은
그녀의 몸이 천천히 내려오는 것, 발과 다리가 아래쪽을 향하는 것,
그녀가 발끝으로 완전히 몸무게를 지탱하는 것을 본다." 라는 서술을
하면서 특별히 음악에 화답하는 감정을 잘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평론가들이 무용에 대한 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무용가를
깊이있게 이해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말이기도 하다. 존 마틴이나 에드윈
덴비는 안무가의 ‘미적의도'에 관심을 둔 의도주의 비평과 연관 지을
수 있겠다. 여기서는 비평가의 관심이 ‘이 작품은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가' 라는 문제로 모아진다. 1933년에 출판된 존 마틴의 좥현대무용좦에서
그는 “내적 충동의 표현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 무용은 예전에 존재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라고 현대무용을
설명하고 있다. 평론가가 곧 해석자이며 가치부여자가 된 경우였다.
에드윈 댄비의 평문을 보면서 혹자는 그가 내재적 비평을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신비평
혹은 객관적 비평으로 불리는 내재적 비평법을 무용에 대입하면 평론은
움직임의 선이나 모양을 묘사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덴비의 경우는
분명한 의도주의 비평이다. 발란신의 신고전주의 발레의 미적 의도가
바로 ‘음악처럼 움직이는, 의미없이 화려한 기교의 나열' 이기 때문이다.
발란신의 작품을 평하면서 그의 움직임을 묘사하지 않는다면 무대의
상황을 그려낼 아무런 방법이 없다. 묘사가 곧 평가일 수 있고 좀 더
들어가면 어떤 동작이 어떻게 구성, 나열됐는지를 밝히는 자체가 좋은
비평문이 될 것이다. 발란신의 발레와 내재적 비평법이 우연히 일치한
셈이지만 이 방법을 다른 작품에 같이 적용시켰다가는 낭패를 볼 것이다.
1967년부터 빌리지 보이스에 평을 쓰고있는 데보라 조위트는 이러한
의도주의적 관점의 폭을 한층 넓힌 경우로 보인다. 한때 무용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발레와 현대무용 그리고 포스트 모던무용 모두에게 호의적이다.
예를들면 마사 그레이엄이 동작의 근원을 인디언 춤이나 이집트 장식,
그리고 캄보니아의 무릎걸음 등 다양한 원형에 두고 있다는 절충주의를
강조하며 안무의 ‘언어'를 분석적으로 특화시켰다. 즉 무용의 장르간에
우열을 두지 않고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법론을 택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발레 리뷰'의 발행인이며 ‘뉴요커'에 평을 쓴 아를렌느 크로스는
자신의 취향을 명확히 드러낸 경우였다. 발란신의 작품을 선호한 그녀는
포스트 모던 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포스트 모던 그룹에서 이탈한
트와일라 타프에게 만은 유독 열광적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녀가
생각하는 무용의 기본 형태는 ‘전문화 된 기교'를 잃지 않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용비평
우리의
경우도 평론가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낸 경우와 작가의 미적 의도를 존중하는
경우가 있었다. 현대로 오면서 후자 쪽이 우세한 반면에 해방기로 갈수록
전자 쪽이 강했다. 문철민은 40년대 말의 한국춤 창작방식이 혼란을
면치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각의 집점을 발끝에서부터 발뒷굽으로
옮기고 상체의 힘의 초점을 셋째 손가락으로부터 둘째 손가락으로 옮기고서
어깨와 엉덩이만 흔든다고 서양무용이 변하여 조선무용이 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라고 했다. 또한 “현재 몇 사람의 현대무용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조선향토무용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조선향토무용이란 것은 사실상
조선무용도 아니고 서양무용도 아니요, 동시에 양자의 화합물도 아닌
야릇한 물건이라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인 듯, 그는 향토무용을 계승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고전무용 속에 흐르는 난희와 비애와 기타 모든 것을 가슴속에 받아들여
그것을 보다 높은 세계로 이끌어 갈만한 감성과 지성을 소유해야 하고
동시에 옛것과 새것을 분해시켜 보다 높은 좥신테제좦를 빚어낼 만한
무용적인 신체를 준비해야 하고 적당한 기교를 창조해야 한다."
만일 독자가 무용가라면 이 요구를 어떻게 실현시키겠는가, ‘적당한
기교'를 창조해야 한다는 문구는 향토무용을 계승한다는 취지와도 맞지
않지만 그 표현 자체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를 생각할 때 후대의
평론가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었다.
외국의 평문과 우리 평론가의 글을 마주 대놓고 보면 분명 집히는
것이 있다. 문철민의 평에서 “그들이 무대 위에서 ‘그로테스크’하게
앉았다 일어나는 것 혹은 금니를 드러내고 호색스럽게 미소하는 것을
대중이 이해하지 않았기로소니 이 대중에게 무슨 죄가 있었드란 말인가"라는
야유조의 문장을 발견한 것은 큰 충격이었다. 비평가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무용가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밥먹듯 했던 문철민이 과연 그럴만큼 무용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고 많은 무용을 접했던가, 만에 하나 그렇더라도 그의 권위적인
태도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옛날 비평문을 읽으면서 종종‘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속담을 떠올린 경우가 있었다. 비평가는 우리가 지금까지
나열해 본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의 단점을 무마시키는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존재이지 무용가들을 호되게 나무라는 권력을 부여받은
사람이 아니다.
1947년 11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좥습작의 의미-신인무용가 송범군에게
주는 글좦에서 문철민은 현재의 원로인 송범을 평가했다. 이 역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예가 될 것이다. “신인이 데뷰할 때 흔히 있듯이
자기도 잘 모르는 초현실적(?)괴작으로 관객을 기만하려 않고 좥습작좦이라는
겸손한 제목으로 좥테크닉 시스템좦만을 보여준 송군의 태도는 그윽히
호감을 가질만 하였다. 군의 균형얻은 육체와 좥아크로바틱좦하게 잘
움직이는 기교는 가히 전도를 촉망케 한다.... 무식한 해설자는 이 작품을
가르쳐 좥던칸좦, 좥비그만좦, 좥그레임좦 등의 좥테크닉좦을 모아 작품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으나 좥비그만좦 및 좥그레임좦
계통의 좥테크닉 시스템좦은 현재 모연구소 한군데서만 실천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명확히 송군의 테크닉과는 다른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생각해 봤다. 과연 그때 이렇게 당당히 선포할만한 그레이엄
기교가 있었는지를, 그리고 글쓴이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문철민은 평론 이외의 활동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방직후 무용예술협회의
서기장을 맡았고 이론부의 수석위원도 겸했다. 또한 함귀봉이 경영하던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이론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조동화. 김경옥.
정병호 등이 이 학교 출신들로 한국평론계의 계보를 연결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엄밀히 따지면 문철민은 무용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진보적인
지도자였다. 경향신문 1946년 10월 8일자에 실린 좥새로운 연예계의
방향좦이라는 글에서 그는 무용을 광대의 짓으로 생각하는 인습을 타파하고
이해와 원조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무용에 체조나 음악과 동등
이상의 시간을 배할 것. 무용학교를 설립하고 그 졸업생에게는 교원면허증을
교부할 것. 무용극장을 줄 것. 해외에서 무용이론가를 초빙할 것. 조선무용가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알선 할 것. 무용협회에 권력을 부여할 것 등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예술대학 무용과가 개강 준비중에 있다고 밝히고
있어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달리하는데 앞장서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발기자였던 무용협회의 중심과업 중에는 ‘광대의 조선무용을
예술무용으로 승화시키자'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무용가들이
모두 신무용 계열의 창작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던 이론적 배경으로
보여 특별히 관심을 끈다. 광대와 예술가를 구분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인
상황도 이해해야겠지만 현대무용을 수용한 이론가답게 광대와 예술가를
동일선상에서 설명할 수는 없었는지가 아쉽다. 그 결과 오늘날의 한국무용이
탄생된 것인데 창작을 중시했던 이면에서 전통무용은 죽어지낼 수 밖에
없었고 잘해야 신무용에 동기를 부여하는 정도였다. 46년의 무용협회
창단공연 프로그램에서처럼 “뿌리도 없는 의붓자식"이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쌓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신무용의 전개가 평론가들에게
환영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더욱 혼란스럽다.
프티파식
고전발레와 포스토모던 무용
문제의
출발은 창작춤의 모형정립에 평론가들이 관여했다는데 있었다. 평론가의
제시를 담아 무용가들이 춤을 만든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민속무용을 무대화한 유일한 나라라는 칭찬을 받게된 출발점
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평론가는 항상 불만을 표시해 왔는데
대부분 국적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국적이 분명한 전통춤은
어째서 수용하지 않았는지, 창작을 하면서 반드시 국적을 중요시하라고
하는데 가짜 민속품을 만들어 내라는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행진했던 그 시절의 목표가 오늘날에도
그리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무용가들 스스로가
규칙에 의한 비평가들이다. 평론가들이 안무에 참여했듯이 무용가들
역시 누군가에게 평론가로서 존재한다. 어떤 규칙을 기준 삼아서 작품을
평가하는 규칙에 의한 비평에 따르면 장르의 구분이 명확해 진다. 예를들어
그랑 빠드 되가 들어있지 않으면 프티파식 고전발레가 아니다, 춤에
표현이 담겨 있으면 포스트 모던 무용이 아니다와 같은 미적인 사항은
작품을 판단하는데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떤가, 토슈즈를 벗으면 발레가 아니다, 이때는 발레보다는
낭만 혹은 고전발레라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왜냐하면 1832년
이전의 발레와 디아길레프 러시아 발레의 몇몇 작품들에서는 토슈즈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복을 잘 차려입어야 한국무용인가, 그러면
각 장르의 전통 레퍼토리를 해야 미학의 올바른 실천이다. 그 춤이 생겨날
당시의 미학을 존중하면서 현대의 창작을 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규칙적 비평의 한계가 바로 창조력의 저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무용가들 스스로가 족쇄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해방기 무용평론가의 흔적을 살핀 이유는 그의 특성이 오늘날의 평론가들에게
전해졌는가를 찾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평을 쓸때는 사정없이 때리고
무용을 앞세워서 사회적 지위를 얻고 그 권력을 주도할 것이며 무용가들에게
창작에 대한 방법을 가르치는 멋진 사람이 해방기의 평론가였다. 평론가라는
이름을 앞세워 행해졌다는 너절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왜 아직까지도
문철민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영어의 ‘criticism'이라는 단어는 ‘판단하다'라는
의미인 그리스어 ‘krinei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평론가들은 작품
이전에 먼저 객관적인 자기판단의 눈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위에 해석과 가치판단을 종합해서 예술작품을 조명하는 것이 무용 평론의
희망이라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