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평론 /  평론의 본질을 말한다  6  무용

비평은 특정의 춤 작품을 예술사의 어느 지점에 위치시키는 수단
비개념적 몸과 객관적 의미 사이의 알력

김채현 (무용평론가)

 

1. 춤비평은 과연 필요한가? 한 분야에 국한하지 말고, 다시 물어 보자. 춤비평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문화예술 현장에서 비평은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가?
흔한 질문이고, 자조(自嘲)스런 자문(自問)이며, 필요한 의문이다. 하기 좋은 말로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런 질문이 잠시 던져지는 수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조스런 투로 이런 자문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자조스런 자문이 심각한 의문을 동반하기가 예사다.
아이엠에프 이후 이 나라에는 구조조정이라는 칼 휘두르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평론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하루 아침에 사라지게 하는 본의 아닌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같아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 무렵 공공 문화예술 기관에서도 책임경영 기관이다, 경영 효율화다 해서 안일한 경영에 일침을 놓겠다는 의지가 만연하였다. 남보기엔, 국민의 혈세나 문예진흥기금 혹은 공익자금에 기대어 경영 효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화예술을 빌미로 현상 유지에 안주한 기관에 대해 그런 일침은 환영할 바였고 지금도 환영할 바라 하겠다. 그 즈음 공공 문화기관의 춤 기획 공연을 보러 갔다. 관례대로라면 공연장 입구에서 담당 기획자가 입장권을 증정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담당 기획자가 보이지 않아 문의하자니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답만 들었다. 일반적으로 대형 공공 문화기관일수록 홍보에 주력하는 전례로 보아 담당 기획자가 오리무중인 것이 의아스러웠으나,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유료 입장하였다. 이런 일이 수차 거듭된 후에 듣자 하니, 경영 수익을 높이기 위해 경영진의 지시로 무료 입장권을 없앴다고 한다. 어디 춤 공연에 대해서만 그랬겠는가. 이전에 담당 기획자가 로비에서 피한 이유는 그렇게 밝혀졌다.
옳거니, 무료 초대권은 없어져야 한다. 우리 공연예술에서 그것을 필요악쯤으로 여기는 풍토는 백번 시정되어야 옳다. 문화 NGO 단체 분과장을 맡은 나로선 어떤 때는 무료 초대권을 수십 장 받은 경험도 있다. 조직을 동원해서 객석 메우기에 협조해 달라는 간접적 요청이 담긴 우편물... 그러나 그런 입장권은 나는 직권으로 폐기처분하였다. 또 다른 사례 하나. 내가 간여하는 기획 공연 역시 올해부터 원성을 무릅쓰고서 무료 초대권 관행을 일소하였다.
관객 동원형의 무료 입장권은 악순환을 부른다. 무료권 특히 초대권으로 미리부터 대접받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는 고약한 심리의 악순환... 그렇게 대접받고 싶어 하는 측일수록 공연예술의 공자도 모르는 측들이 아닐까. 출연진들을 고무하자면 주최 측은 무리를 해서라도 표를 뿌려 관객을 동원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무료 초대 아니면 춤 공연은 관람하지 않는다는 폐단을 가중시킬 뿐이다. 공연 예술의 낮은 자립도는 낮은 예술성이나 낮은 지명도와 연관되기 때문에 관객을 억지로 동원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무엇보다도 프로를 가장해서 관객에게 실망을 안기기 일쑤인 아마추어적 수준에서 기인한다. 그러다 보니 양질의 공연물도 선의의 피해를 입게 되고 프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평론가에게 증정되는 입장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해당 분야의 평론가는 일반 관객과 동일한가, 그렇지 않은가. 쉽게 생각해 보자. 솔직히 말해, 평론가는 몸이 불편해도 일이 있어도 공연 현장에 입회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는 무언의 것이다. 평론가가 평론 행위와 연관해서 정기 급여를 받는 경우는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없다. 스스로의 결심과 해당 분야의 공인이 결합해서 평론가라는 직분 아닌 직분이 주어진다. 일반 관객은 (동원된 관객이 아니라면) 즐기러 가나, 평론가는 (영국 무용미학자 그레이엄 맥피의 말마따나) 간파하러 가는 차이가 있다. 평론가는 자신이 선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준 이하라 판단되는 작품에도 입회해야 하는 고충을 견뎌야 한다. 그것은 평론가의 미덕이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기분 좋은, 질적으로 나은 작품을 접하는 만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평론가가 관객의 일원이긴 해도, 이처럼 평론가와 일반 관객은 엄연히 다르다. 따라서 평론가에게 증정되는 입장권은 무료 초대권도 뇌물도 아니다. 일테면 그것은 평론가에게 사생활을 마다하고 작품을 간파하러 와야 한다는 일방적 통지서와 유사하다. 평론가에게 증정되는 입장권을 무료 초대권과 동일시하고서는 유료 입장권을 하나라도 더 늘리고 경영 수지를 한푼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평론가용 증정권마저 깡그리 없앤 일부 기관의 경영 방침은 평론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다만 평론가로 공인하지 않겠다면, 그런 증정 행위는 과공비례(過恭非禮)에 해당할 듯싶고, 해당 기관의 조치에 공감한다. 해외 공연장에서 매표구와 나란히 '프레스' 데스크가 공식적으로 있는 것을 흔하게 목격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신분을 밝히거나 주최측의 사전 배려로 증정권을 받은 적도 많았다. 언론과 평론 분야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2. 춤은 찰나의 덧없는 예술이다. 악보, 대본에 비하여 무보(舞譜)는 정밀하지 않아서 그것으로써 춤의 실체를 보존하기는 매우 어렵다. 근래에 캠코더가 춤 보존 수단으로 조금씩 활용되는 추세에 있긴 해도, 이로써 실체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춤이 찰나의 예술인 이유는, 춤의 근본 매체인 움직임이 몸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육신과 정신이 동시에 합세해서 빚어내는 몸의 변화무쌍함은 무생물인 악기, 개념어인 대사와는 비교를 불허한다. 몸통, 사지, 머리의 기본 자세들을 결합하면 적어도 16억 가지의 움직임이 가능한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약간의 시간 변화를 상정하고 정신적 의도의 개입을 허용하면 가능하되 기록되어야 할 움직임은 사실상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처럼 몸의 찬란한 가능성은 표준화된 무용 어휘를 안출하는 데 방해가 되고 무보가 보편화되기 어려운 상황을 유발한다.
악보나 대본이 있어도 음악 평론과 연극 평론은 존재한다. 이는 평론의 기능이 작품의 실체 보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춤 기록 수단이 미흡하던 시절 평론은 춤 기록의 한 방편으로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런 관행은 얼마간 남아 있다.  
기록 즉 읽어내기는 비평의 시발점에 불과하다. 읽어내기는 지각 활동을 전제로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읽어내기는 개념을 수반하고, 읽어낸 개념들은 문자 개념으로 정착될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에게 춤을 소개하는 수단으로서 사진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움직임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설령 영상물이 유효한 수단이라 해도 영상물의 기록에는 해석과 평가는 물론 의미의 개념적 파악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단순 소개에 불과하다.
몸은 인공물도, 살코기 덩어리도 아니다. 인공물처럼 약속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생물처럼 정신이 부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 몸이다. 정지한 몸보다 움직이는 몸은 더욱 그렇다. 이는 몸의 언어가 일부 몸짓을 제외하면 매우 복잡미묘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예술 장르 가운데 춤의 특이성은 몸의 특이성과 결부되어 있다. 고전발레, 궁중무, 신앙무에서와 같이 춤이 부분적으로나마 공인된 상징 체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비개념적인 몸의 속성이 몸짓에 반영되어 춤 언어에서 개념적으로 비명료성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것이 춤의 비합리성, 비개념성, 애매모호성을 강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몸의 행위를 개념적 언어로 전화시킨 것이 춤 비평이다. 이 과정에서 개념적 언어를 설정하기에 난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개념적 언어는 인공물인 반면에 몸은 인공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념적 언어로 전화시키기 어려운 것을 춤의 취약점으로 매도할 수는 없으고, 오히려 춤을 개념으로 손쉽게 전화시키지 못하는 한계가 일반 언어, 개념어에 깔려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그래서 춤은 존재 이유를 갖는다. 심하게 말해, 춤을 개념적 언어로 전화시키려는 춤 비평은 어쩔 수 없는 욕구 즉 언어화하고 명료하게 소통해 보려는 일종의 과욕에 따른 행위로 비칠 만하다.

3. 비록 과욕의 소산일지라도 비평은 작품과 관객 또는 작품과 사회 또는 작가와 타인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필수적이다. 왜 필수적인가. 예술 언어를 개념어로 전화시켜야 이를 토대로 예술을 해석 분석 평가하는 과정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춤 비평가는 독자에게 춤을 인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춤 작품과 작가를 그 이외의 주체(관객, 사회)와 연결시켜야 한다면,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춤이 의미를 갖는다는 전제가 작용한다. 해석을 통해 의미가 파악되어야 분석 평가가 가능할 테지만, 이들 과정이 일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사후의 재참조가 어렵고 사후에라도 참조가 가능한 인공적 기록에 의해서는 많게든 적게든 실감이 떨어지는 춤에서 현장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을 수밖에 없다.
예술 일반과 마찬가지로 의미는 춤이 다른 주체와의 관계에서 존재할 만한 이유가 된다. 아이들의 춤은 의미의 심도가 얕다. 실기 경연 대회의 춤도 그렇다. 이미 레퍼토리로 전해 오는 춤은 대부분의 의미가 밝혀져 있는 터다. 예컨대 전통 또는 기존 레퍼토리를 재현하는 춤은 말 그대로 밝혀져 있는 의미를 재현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전통 레퍼토리를 해석하는 춤이라면 의미의 발굴을 겨냥하므로 또 다른 차원에서 비평 대상이 된다. 아무튼 아이들의 춤, 실기 경연 대회의 춤, 사교춤, 전통 또는 기존 레퍼토리 재현춤 들이 비평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이유는 의미의 심도가 얕거나 이미 아는 의미가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춤들의 의미는 그 실기 역량을 중심으로 의미가 거론된다.
예술 비평에서 의미를 간파해내는 행위는 작품의 줄거리나 플롯을 추출해내는 차원 이상의 것이다. 우선 의미를 간파해내려면 춤의 흐름을 확정해내야 하므로 춤을 면전에서 대하는 지각 과정이 필수적이다. 지각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적인 활동이며, 미리 정해진 순서가 없다. 비평에 규칙이 없다는 말은 예술에 규칙이 없다는 말의 반영이자 현장성의 소산이다. 미학자 리차드 월하임은 춤 비평을 지각 결과를 곱씹듯이 풀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과연 그럴까. 누구나 지각할 줄 아니까, 현장의 지각 결과를 풀어내는 것과 비평을 등치시키는 발상이 예술 평등주의를 충족시킬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각 결과를 풀어내는 것이 비평의 시발점일 수는 있지만 비평의 전부는 아니다. 비평은 지각 결과를 다시 종합하여 개념으로 정리하는 행위이며, 개념 없는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상비평은 대체로 지각 결과를 풀어내는 단계를 맴돈다.
그러면 지각하면서 무엇을 간파해내야 하는가. 다시 말해 개념적 언어가 춤을 대체하지는 못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으므로 개념적 언어로 전화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춤을 지각할 때 무엇을 간파해내는가. 개념적 언어는 어차피 춤의 부분적 진실밖에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은 부분적 진실 가운데 의미의 파악, 해석, 분석, 평가와 관련되는 대표적인 것, 주도적인 것, 즉 특징적인 양상을 간파하고 전달해야 한다.

4. 이런 간파될 만한, 혹은 간파되어야 할 특징적 양상은 두어 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 먼저 작품 내적인 주도적 양상이 그 하나며, 또 다른 하나는 독창적인 양상으로서 무엇보다 여타 춤 작품과 비교해서 독창적으로 여겨지는 양상이다. 내적인 주도적 양상이든 독창적 양상이든 그것은 해당 춤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들 양상을 가려내는 작업을 비평가는 이미 춤을 대면하면서부터 시작하며, 그러므로 비평가의 지각 활동에는 사실상 해석과 평가의 활동이 아울러 내포되어 있다.
모든 춤은 기본적으로 내적 주도적 양상을 갖게 마련이다. 내적 주도적 양상이 누락된 춤은 기본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춤이 된다. 내적 주도적 양상은 춤꾼, 주제, 장치, 그리고 그것들의 배치가 총화적으로 어울려 이루기 때문에 비평에서는 이런 다층위에 걸친 언급이 필요하다. 내적 주도적 양상을 제대로 개념화하는 것은 춤 비평가의 몫이며, 이로써 독자는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이때 개념화된 의미가 상식을 뛰어넘지 못할 경우, 춤은 기분전환용의 소일거리 이상일 수 없다.
내적 주도적 양상은 있으되 독창적 양상을 갖지 못한 춤은 비평 대상으로서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다. 그러므로 내적 주도적 양상에 초점을 맞춘 비평을 절대적 비평이라 부를 수 있다면, 독창적 양상에 초점을 맞춘 비평은 상대적 비평이라 부를 만하다. 어느 레퍼토리가 독창적 양상에서 뛰어나 상대적 비평의 대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더라도 초연 이후 반복될 뿐이라면 절대적 비평의 대상으로 바뀌면서 형식적인 측면이 우선 관심사가 된다. 그리고 절대적 비평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상대적 비평은 독창적 양상이라 여겨지는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전개된다.
특히 상대적 비평의 관점에서 보자면, 춤 비평 역시 시대에 따른 인습적인 것이며 그레이엄 맥피의 지적을 빌지 않아도 강조점이 달라질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으로서, 강조점이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음악에서의 소리처럼 몸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만큼은 그 항목에서 빠뜨려질 수 없다고 생각된다. 사실이지 무용단과 춤꾼에 대한 정보, 작품의 성립 과정처럼 현장에서 직접 간파되지 않는 주변 지식들도 의미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춤의 미적 특질은 근본적으로 춤사위, 몸짓, 스텝 등으로 지칭되는 기본 매체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며, 예술적 가치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기본 매체를 검토하지 않는 상대적 비평은 매우 허약해질 위험을 안게 된다.
춤의 의미 파악에 있어 애매한 점은 안무자의 의도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무보, 대본, 개념 어느 편에서도 만족스런 사전 정보가 주어지 않는 춤 작품에서 내적 주도적 양상을 간파해내는 데 있어 안무자의 작품 해설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일례로 안무자가 춤꾼 출연진에게 개요만 전달하고 춤꾼이 자기 역할에 대해 감성적 해석을 내리며 동작을 개발하고 훈련과 출연에 임한 경우(그런 것을 부분적으로 해석적 춤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웬만한 실수가 일어나도 비평가 관객조차 그 실수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일이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이런 해석적 춤과 관련된 실수가 외부에 정보로 노출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하지만 그 실수는 춤의 의미에 이바지할 수도 있고 의미를 훼손시킬 수도 있다. 이런 때문에 안무자의 의도와 춤의 결과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평가의 잣대는 비평가가 쥐게 된다.

5.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항상 우리가 아니라 나이다'고 하였다. 이를 받아 춤 비평가 월터 소렐은 비평이 지적인 접근과 감정의 확인 둘 다를 요구한다고 지적하였고 아를렌 크로체는 비평을 매우 개인적인 행위로 인정하였다. 반면에 에이 브이 코튼은 평론가의 주된 기능을 객관적 분석에 두는 편이었고, 춤 해석들에 대해 여러 가지의 인식적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도 있다. 더욱이 작품의 의미와 특성을 흔히 설득력있는 화려한 진술로써 재창조하는 입장도 가능하다. 다만 재창조하는 입장은 사실이 아니거나 거짓일 수 있다는 주의를 듣고 있다.
위의 어느 입장에서 파악된 의미이든 간에 그것이 공유할 만한 가치를 지녔는지 판별될 필요가 있다. 박이문의 미학적 설명을 쫓아 그 판별 기준을 일단 셋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춤사위나 소재, 주제와 같은 춤의 내적 속성소라는 기준, 어느 춤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라는 기준, 그리고 미적 체험처럼 어느 춤이 가질 기능이라는 기준은 사실상 만족스런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장식적 기능, 교육적 기능, 카타르시스 같은 심리적 기능에서 기준을 찾아보겠지만, 그것들 각각이 또는 그것들 전부가 춤 가치의 보편적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최종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춤 작품이 스스로 독창적인 세계를 내장하여 관객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비평의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이는 내재적인 주도적 양상과 독창적인 양상 사이에 형성되는 협력의 정도가 춤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다는 뜻이다.
주지하듯 예술 작품을 둘러싼 의미, 해석은 단 하나만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비개념적 언어의 예술일수록 의미와 해석이 복수로 될 가능성은 불어난다. 춤의 이런 원초적 한계점과는 별도로, 지리멸렬하고 혼란스러워서 구구한 억측을 자아내는 춤과는 별도로 훌륭한 춤은 작품에 따라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길게 보면 다양한 해석을 부른다. 일차적으로 훌륭한 춤은 깊이있는 춤이다. 깊이가 덜해도 독창성이 뛰어난 춤도 가능할 테지만, 이런 춤은 내적 주도적 양상이 탄탄하지 않은 춤이기 쉽다. 복수의 의미와 해석 사이에 어느 정도의 우열은 상정할 수 있다.
맥피는 제대로된 춤 비평을 특정 작품을 이해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 정의한다. '몇 년 사이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춤'이라는 식의 비평적 언사는 해당 춤의 외적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그것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이 비평이 실패를 딛고 일으서려면 작품의 내적 요소에 대한 서술을 얼마간의 근거 정보로서 제시해야 한다. 비평가의 반응이 작품의 내적 요소를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그런 결과 마지막으로 외적 상황과 결부시키는 언사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라 하겠지만, 어느 작품에나 적용될 수 있는 비개성적인 보편적 언사만으로는 작품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평가의 지적, 개념적 능력이 관심을 모은다. 비평은 개별 춤 이해를 돕는 활동인 동시에 해당 춤을 전체 무용계의 관행 내에서 자리를 매김해 주는 활동이다. 비평문이 백과사전의 한 페이지가 아닌 이상 무용사, 관행, 춤 기법 등 일반적 춤 지식을 나열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비평문에서 일반 지식은 어디까지나 지적, 개념적 접근을 가능케 하는 도구일 뿐이다.
비평가의 능력은 지적 개념적 접근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춤에서 사실과 가치 평가적 진술 사이의 경계가 엄정하지 않다는 말은 지적 개념적 접근에서 객관성의 논란이 야기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비평문에서 결정적 오독을 제외하고 진위를 확정하기가 애매한 경우도 왕왕 일어난다. 그런 경우는 춤의 찰나성과 몸의 비개념성 때문에 더 자주 발생하게 된다. 비평가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주 추론을 동원한다. 과도한 해석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관주의적 비평이 사실적이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 비평에서 진리는 비평가에게서 인상을 일으키는 작품의 효과와 연관된다. 주관주의 비평이 춤의 전체 구조를 흡입해 들이는 능력이 있다면 해당 춤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그 춤을 다시 되돌아 보게 하는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인상 비평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주관주의 비평은 지적인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이점이 있다. 다만, 인상 비평이나 주관주의 비평에서는 춤보다 비평가를 더 드러내는 과도함이 끼여들 여지가 크다.
비평은 특정의 춤 작품을 예술사의 어느 지점에 위치시키는 수단 가운데 가장 강력한 매체로 꼽힌다. 그러므로 춤의 내적, 독창적 양상 중에서 비평과 연관된 양상을 시대의 흐름에 적실하게 지적하는 비평은 춤을 주류 예술사와 연계시키는 고리가 된다. 이는 춤이 능동적이지 못한 종속적 예술이다는 인식이 만연했던 시대에는 생각치도 못했던 점이다. 주류 예술사의 흐름에 따라 춤에서의 강조점뿐만 아니라 안무자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변경될 수 있는 이상으로 비평에 의해 달리 유도될 수 있다. 비평을 춤 작품을 개별적으로 이해시키는 활동으로 보는 소극적인 태도로부터 춤 사조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태도까지 어느 지점이 절대적 우위를 갖는지 논단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주류 예술이 아니면 춤의 대사회적 파급 효과도 그만큼 떨어진다는 점에 착안해보면, 춤이 주류 예술사와 거리가 있을수록 이를 환기해서 타개하도록 하는 것은 비평가의 몫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