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미술

살아있는 축제로서의 전시 문화 - 최근 미술전시 문화의 현상과 과제

오세권 (미술평론가)

 

  IMF 관리체제 이후 미술계에는 많은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매일같이 소개되는 전시는 미술문화계의 활성화에 있어 좋은 현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들에 조심성으로 접근해야할 점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글은 근래 이루어지고 있는 중.대형 전시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과 과제에 대하여 논하여 보고자 한다.

중.대형 전시의 성행과 과제
근년 들어서부터 국내에서는 중.대형 미술전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는 전시들을 보면 광주비엔날레, 미디어시티 2000, 부산국제비엔날레, 세계 도자기 엑스포 2001년 등이 열였고, 또 열릴 예정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에는 접두어로 '국제'라는 용어를 붙인다. '국제 00 미술제'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규모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전시에 비하여 작지만 중형의 전시들도 이어졌다.
미술문화계에서 '세계적' 이거나 '국제적' 이라는 명확한 용어 개념이 서있지 않지만, 규모면에서 중.대형행사이고 보니 자연히 전시를 진행하는 경비의 액수가 만만하지 않게 수천 만원에서 수백 억원에 달한다. 물론 그러한 전시에는 전시장 공사부터 시작해야하는 전시가 있어, 전시 건물 공사비만 하여도 엄청난 예산이 들어간다.
왜 이러한 전시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 오늘날 문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여유로움 일까 ? 이와 같은 정부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면서 시민의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또한 미술인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정부측에 감사할 일이다. 그 동안 제대로 지원 받지 못하던 미술문화에 대한 지원이 일부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지원들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이러한 중.대형 전시를 보면서 느껴지는 몇 가지 우려는 지울 수 없다.
첫째, 많은 예산을 너무 쉽게 사용하여 버리는 점이다. 우리는 중.대형 전시를 위하여 수천 만원에서 수백억원을 소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게 어디서 나오는 돈인가 ? 모두 우리 시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어서 나온 돈이다. 물론 관람료, 광고, 찬조금 등의 수익사업으로 흑자를 내었다고 말하지만, 그 또한 시민들의 손에서 나오는 돈이다. 문제는 그 많은 돈을 투자하여 우리 미술문화내의 경쟁력과 나아가 미술문화에 대한 시민의식이 성숙해 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막연히 경제적 타산성에서 흑자만 세웠다고 성공한 전시문화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뒷면에는 국내. 외 유명작가들을 불러 놓고 자신들끼리 잔치하고 끝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얼마전 대형 미술전시 행사와 유사한 1999년의 '하남환경박람회'가 기획단계부터 무모한 사업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더니만 '박람회추진위원회' 관계자가의 억대 횡령뿐만 아니라, 온갖 추문 속에서 적자폐막 됨으로서 결국 시민들의 돈으로 그 적자를 매꾸어야 하는 점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그에 대한 책임공방이 있었다. 이는 행사를 주최한 측이 그렇게 무모한 사업을 깊이 있게 검토조차도 없이 추진한 결과였던 것이다. 결국 하남시장이 일방적으로 설립한 민간단체인 '환경진흥회'의 채무 121억 8600만원(한겨레 2000,10,12일자)을 시민들의 세금으로 매꾸어야 할 처지에서 시민들이 직접 나서 납세자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시장의 개인적인 야망에 시민들의 돈을 멋대로 하는 것에 대한 소송이 이었던 것이다.
미술문화에서도 '하남환경박람회'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영화사업의 대형 흥행작 같은 전시를 펼쳐놓고, 그곳에 수십 수백억을 투자하고는 나중에 시민들에게 외면 당하고 별 효과 없이 예산만 낭비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 그러한 일들에서 나타날 시민들의 반발과 미술문화에 대한 무관심은 누가 책임지겠는가 ? 중.대형 전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심도 있는 논의와 진행에 있어 전문성으로 예산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신중성과 절약성이 필요하다.   
둘째, 작가와 작품은 없고 전시 기획자만 요란한 점이다. 중.대형 전시를 보면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와 작품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큰 기획 속에 작가와 작품은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주체는 없고 오히려 부대행사에 더 치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실상 본 전시를  위한 비용보다도 전시를 보조해주는 일반 부대비용이 더 많이 들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올해 열렸던 '광주비엔날레' 에서의 내역을 보면 총예산 약 80억이 소요되었는데, 본 전시와 특별전을 합쳐 전시 예산은 28억밖에 되지 소요되지 않았다.(명확한 예산 확인을 위하여 비엔날레 측에 예산내역을 부탁하였으나 공개하기를 꺼려하였다. 이 수치는 당시 비엔날레 예산에 관계하던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들은 수치이기에 명확하지 않을 수 도 있다.) 나머지 약 50억원이 축제, 일반행사, 공연, 광고, ... 등 부대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작품전시와 작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문화적인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획 전체의 운영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 전시 기획자의 기교만 요란하고 실제적 주체인 작가와 작품에는 등한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근래의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일부에서는 앞으로는 '전시기획자의 시대' 가 될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누가 전시 기획자가 되던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된다. 미술행사에서는 단연 작가와 작품이 우선되어야지 부대 행사가 중요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작가와 작품은 있으나 없는 것과 같고, 전시기획자들이 전체적인 기획만을 요란하게 펼쳐 놓는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전시는 아닐 것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전체적인 전시기획 모두가 같이 돋보일 수 있는 전시문화가 필요한 것이다.
셋째, 미술계 내의 헤게모니 행사가 되어 가는 점이다. 중.대형 미술행사 뒤에는 항상 뒷소리가 따르고 있음을 경험하곤 한다. 어느 누가 ? 어떻게 ? 언제부터 그 행사를 추진하였는데, 그 결실을 맺었다느니, 누구의 입김이 작용하였다느니, ... 등등, 모든 전시가 그러하지는 않지만 중.대형 미술행사를 위해 많은 로비가 물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들어왔다.
왜 ? 중.대형 미술행사를 기획하려고 하며, 그러한 행사를 하기 위하여 로비를 하여야 하는 것일까 ?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하였던 정부의 문화 민주주의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몇 사람들의 로비에 의하여 이루어진 전시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이들은 왜 로비를 하여 중.대형 전시를 유치하려고 하는가 ? 라고 물음을 던져 보면 그것은 미술계 내의 헤게모니를 잡아보자는 일부 미술인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다. 라는 답변이 들려온다.
중.대형 전시가 행사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더 높여 보자는 일부 사람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라면 그 행사의 진행은 뻔한 일이다. 전시를 자신의 로비로 인하여 유치하였으니, 전체적인 전시기획과 거기에 따른 모든 행사나 일정에 참견하려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한 사람의 취향에 기울어진 행사로 흐르고 말 것이다. 우리는 몇 사람의 로비에 의한 중.대형 전시행사를 원하지 않는다. 시민들의 참여 속에서 정부가 진정 국민을 위한 문화 민주주의를 펼칠 때 이루어지는 중.대형전시를 원하는 것이다.   
넷째, 전시가 흥미 위주로 가고 있는 점이다. 근래 들어 중.대형전시 가운데 일부분의 전시들은 실내에서 전시되기를 거부한다. 실내 또는 미술관내에서 전시를 하면 시민들과 동떨어져 직접적인 교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리로, 지하로, 시장으로 뛰쳐나온다. 그런데 그러한 전시들이 전시에 치중하는 것 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공연이나 부대 행사에 더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시기획들의 끝은 역시 '재미있다'는 것과 '튄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조건 시민들의 참여와 호응만 있다면 잘된 전시인가 ?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근래 들어 또하나 중.대형전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순수한 미술 전시가 아니라, 풍물 전시를 한 부분에 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1940-80년대까지의 생활용품을 모아 놓은 풍물 전시와 미술 전시를 곁들여 보는 것이다. 물론 순수 미술행사는 일반 시민들이 어려워 접근을 못하니 풍물 전시를 끼워 오락적인 흥미를 주자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에는 미술 전시를 오락 흥미 위주의 전시로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무턱대고 계획성 없이 생활 속에 파고드는 전시 그리고 재미만을 강조하는 전시는 일회적 오락으로 흐르기 쉽다. 이러한 점들은 전시가 흥미 위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에 진지한 기획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상업성 오락 이벤트로 이루어지는 전시회들의 성행
올해에도 중.대형 전시들이 이어졌다. 국립현대 미술관 분원인 덕수궁 미술관의「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전」호암미술관의「백남준의 세계전」, 조선일보 미술관과 갤러리 현대의「운보 김기창 미수전」, 일민 미술관의「광화문 139번지: 신문과 미술 1920-2000전」,  예술의 전당의 「신화, 그 영원한 생명의 노래전」, 63빌딩 특별전시관의「피카소와 게르니카」, ...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중.대형 전시들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전시도 있고, 민간인 회사 등에서 수익사업으로 주최하는 경우도 있어 대부분 유료인데, 그 가운데 미술사적인 가치가 있는가 하면, 일회성 오락 이벤트로 상업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미술사적 고찰의 전시보다는 오락 이벤트적 상업성을 띤 전시 행사가 활성화 된 것은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전에는 큰 전시 행사가 있어도 이벤트화 되지 않고 미술사학적인 가치가 있는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90년대 중반기가 되면서 부터는 상업 오락이벤트 회사나 기획 회사에서 미술관련 행사를 주관하여 상업화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눈요기를 위한 중.대형 전시들이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미술관련 상업적 오락 이벤트 전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학생들의 방학 시즌에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야 많은 학생들을 관람객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주최측의 상업적 전략이 깔려있는 것이다. 두 번째, 전시 내용 가운데 관객참여를 유도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곧 부대 이벤트를 같이 곁들여 단순히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행사를 만들거나, 관람객을 위한 새로운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셋째, 진품은 몇 개 되지 않고 대부분 복사물이나 비슷하게 꾸며놓은 가짜 작품으로 전시장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넷째, 전국을 순회 전시하면서 관람객을 불러들여 상업성의 목적을 이룬다. 다섯째, 실내 인테리어를 어둡게 하거나, 화려하게 꾸며, 작품을 진품인지 가짜인지 구별 못하게 하여 모조 작품과 관련된 자신들의 잘못된 부분을 숨기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대형 상업 이벤트성 전시에는 대부분 언론매체들이 주관, 주최, 후원 또는 협찬 회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행사의 광고 부분을 언론사들이 맡아 자연스럽게 광고를 해줌으로써 전시의 광고 효과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전시들이 긍적적인 면들도 있다. 그 동안 활성화되어 있지 못한 미술 전시문화를 대형화 시켜 일반 관람자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행정적 도움이 채 미치지 못하는 미술분야의 전시를 기획 회사들의 노력으로 전시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반 시민들도 다양한 미술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미술문화가 일반 시민과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들 마련하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비록 오락적인 상업 이벤트성이 짙지만, 우리 미술문화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들로 말미암아 미술문화의 형성에 있어 나름의 문제성이 발생할 수 도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미술 전시 문화를 오락으로 받아들인다던 지, 미술 전시문화를 상업성으로 인식하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를 지난 여름에 열린 「피카소와 게르니카전」에서 살펴보자.
피카소는 우리 국민들에게 세계 최고의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최고 작가의 진품을 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이 실제 외국 유명 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자주 없는 환경 속에서 피카소와 같은 최고 작가의 진품이라는 의미는 많은 관람객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사실 피카소의 작품이 왜 좋은지에 대해서 일반 관람객들 대부분은 모르고 있다. 단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선생님이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삐뚤어진 입, 괴상망측하게 왜곡된 얼굴에서 나타나는 이미지가 비록 무섭고 괴기하지만 당대 최고 작가가 나타낸 표현이기에 맹목적으로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카소 작품에서 나타나는 미술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오직 동시대 최고의 작가라는 인식 하나만으로 그 작품세계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전시장은 모두 네 개의 주제관으로 나누어져 꾸며져 있었다. 제 1관은 피카소의 생애관, 제 2관은 게르니카관, 제 3관은 피카소의 영상관, 제 4관은 볼라드관으로 되어 있었다.
제1관의 피카소 생애관에서는 피카소의 출생에서부터 죽을 때(1881-1973) 까지 일대기의 행적을 사진과 그림판 그리고 디자인된 화보로써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피카소의 생애를 한 눈에 쉽게 알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제 2관 게르니카 관에서는 게르니카와 관계된 드로잉 판화와 복사된 게르니카가 원본 크기로 자리 잡고 있는데 주최측에서 주장하는 "디지털 페인팅 제작기법으로 원작과 똑같이 재현하여 소개한다" 라는 내용과는 달리 원작에 비하여 선명도와 질감에서 한참 거리가 있는 작품으로 보였다. 곧 진품 게르니카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과 구성의 아름다움, 면의 분할이 선명도와 질감의 차이에서 오는 가벼움으로 인하여 감동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게르니카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42점의 밑그림 드로잉 판화가 있어 게르니카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제 3관은 피카소의 영상관으로 피카소의 생애를 영상으로 볼 수 있게 꾸며졌다. 끊임없는 작품 제작과 작품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집념이 담긴 그의 작품과 작품 제작의 뒷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제 4관에서는 볼라드(Suite Vollard)라는 화상이 피카소에게 의뢰한 100여점의 드로잉 판화 작품들을 전시하였는데,  1930년부터 1937년 사이에 피카소가 제작한 작품들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문화 상품관을 만들었는데, 피카소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아트 상품과 피카소의 인물사진, 아트포스터, 카탈로그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또 일반 관람객이나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오락 프로그램인 그림 찾기, 피카소 그림 그리기, 드로잉 색칠하기, 퀴즈 등 여러 가지 체험 현장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가 행사인 체험 현장에서는 주최측의 많은 오락적 고려가 있어 시민들에게 나름의 재미를 주었다고 생각되었다. 프린트되어 있는 피카소의 밑그림 위에 어린이들이 다양하게 색칠하여 새로운 느낌이 들게 만들거나 피카소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 얼굴 모습의 모델과 어린이들의 기념촬영, 게르니카 작품에서 나타나는 숨은 그림 찾기 등의 오락성은 관람자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작품의 박제화가 아니라 작품의 대중화를 통하여 시민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전시를 보면서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좀더 성실한 전시를 꾸며서 보여줄 수 없을까 ? 입장료를 6,000원(성인)이나 받으면서, 인쇄 출력물로된 게르니카와 드로잉 판화를 보여 주려고 그렇게 과대광고를 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이와 같은 이벤트 회사들의 실속없는 미술관련 오락성 행사가 이어진다면, 일반 시민들이 전체 미술문화를 부정하기 쉽다. 미술전시는 그저 인쇄를 해서 모조품을 걸어 놓고, 오락성을 더하여 재미있게 꾸미면 된다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전시를 보면서 우리 나라에서도 다양한 미술 전시가 있어 시민들의 문화 욕구를 채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피카소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여 작품을 감상하건, 아니면 맹목적으로 왔건 간에 많은 시민들이 전시장을 찾았다고 하는 자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특히 오늘과 같이 일회적 행사가 난무하고 상업적 오락행사들이 많은 가운데 미술행사를 찾는 시민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좋은 미술 전람회 들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문화 충족으로서 볼 권리를 상업성으로 흐리지 않고 깨끗하게 진행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피카소와 게르니카」전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종의 상업적 오락 이벤트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전시였다. 전시장 내에 피카소의 특별한 작품 하나 없이 시민들의 기대감에 변죽만 올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미화된 피카소의 작품, 그것도 진품이 아닌 프린트화된 게르니카와 또 그와 연관된 판화 작품을 가져놓고, 오락 이벤트 행사로 몰고가는 전시는 무더운 여름날 마음을 더욱 무덥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는 지난여름에 열린「피카소와 게르니카」전을 예로 들었지만 근래 들어 이와 유사한 전시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벤트 회사 등에서 주최하는 오락성 미술 전시문화와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는 학술전시나 기획전시 문화를 분리시켜, 학생이나 시민들이 진지하게 미술전시 문화를 받아드릴 수 있는 교육 체계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이상과 같이 근래 들어 나타나는 전시 문화에 대한 양상과 과제에 대하여 논의하여 보았다. 우리가 전시를 통하여 원하는 것은 미술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눈을 가져 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시기획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미술문화인과 시민들이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전시 축제이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러한 바램에서 전문 전시기획자들이 참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전시에서는 기획가들의 자만심이 흘러나온다. 전시의 진지함보다는 기획자 자신의 취미와 흥미 그리고 재미로 일관하고 있는 점도 보인다. 또한 거창하게 전시를 보여주겠다는 욕심이 앞서 겉치레만 번듯한 화장술로 바뀌어 버린 전시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기획 전시가 오락 흥미 위주의 전시문화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는 것이다.
지금 미술문화계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들 한다. 작가들은 작품이 팔리지 않아 어려워하고, 화랑들에서도 작품은 팔리지 않는데, 정부에서 세금만 부가하려 한다고 아우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형 전시는 늘어만 간다. 우리는 이러한 전시 문화를 통하여 미술문화의 생산력과 경쟁력을 향상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온갖 기교와 헤게모니가 잠재해 있는 그러한 전시문화가 아니라, 우리 미술인이나 시민들에게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러한 생산적인 문화를 엮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