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국악 |
국악대학 출범의 역사적 의미 전인평 (중앙대 교수)
우리나라에서
국악대학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
획기적 사건이다. 이것은 국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국악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2000년에 발간한 좥새로운 한국음악사좦를 집필하면서
1954년부터 현재까지를 ‘대학국악교육시대'라 명명하였다. 이것은 이해에
처음으로 대학 국악 교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학
국악 교육의 효시는 1954년 장사훈(張師勛, 1916-1992)이 설립한 덕성여자대학의
국악과이다. 이 국악의 대학국악교육 수용은, 국악을 학문의 대상으로
인식을 전환시킨 사건이었다. 그동안 국악하면 연상하던 유흥오락적인
부정적 인식이 국악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국악과의 효시와 창설 장사훈이
설립한 덕성여대 국악과는 아쉽게도 1959년 폐과하고 말았지만, 대학
국악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이어 이혜구(李惠求)는 1959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하였다. 또한 1960년 임동권(林東權)은 서라벌예술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하였으나 2회의 졸업생을 내고 폐과하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국악과는 그 후 현재까지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여 대학 국악교육과
우리 나라 국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악과가 명문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창설되어 학문의 대상으로 인정받게 되자, 사회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지금까지 ‘국악'하면, 기생(妓生)이나 화류계를 연상하던
당시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서울대학교에 국악과를 창설하는데는
국악학자 이혜구와 작곡가이며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었던
현재명의 공이 컸다. 창작국악과 악보의 사용 창작국악이란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연주해 오는 동안에 다듬어진 전통음악과 달리
개인이 작곡한 음악을 말한다. 대학의 국악과는 이미 설치되어 있는
기존의 음악대학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음악대학 체제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의 음악대학 제도는 해방 이후 미군정때 미국의 주립
대학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음악대학의 전공
실기는 1주일에 한시간씩 실시하게 하였고 한 학기는 16주로 편성되고
일년 동안 32주의 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와 같은 대학교육 방법은 필연적으로
충실한 실기 교육이 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기존의 국악교육은
대개 도제식으로 되어 있어 매일 공부 시간을 갖거나 심지어는 선생과
기거를 함께 하며 공부를 해 왔다. 특히 판소리와 같은 분야의 교육은
춘향가 한 곡의 길이만도 몇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숙련하기
위해서는 도제식 교육이 아니고서는 온전한 교육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국악관현악 운동의 번성 이와
같이 창작국악은 국악교육을 대학 제도에 수용하면서 생긴 필연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과거의 창작곡들이 오늘에 와서는 전통곡이 되었듯이 오늘의
창작곡이 미래에서는 전통음악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시대는 후세에 이 시대의 음악을 유산으로 넘겨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점에서 창작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출발한 창작국악은
1939년 김기수(金琪洙)의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이래, 1995년까지
297명의 작곡자가 참여하여, 관현악곡 359곡, 협주곡 130곡, 합주곡
95곡, 실내악곡 482곡, 독주곡 323곡, 성악곡 635곡, 기타 215곡을 작곡하여
모두 2,239곡의 작품이 나왔다. 국악의 소개와 해외진출 음악
상품의 해외 소개는 아직 미미한 상태이다. 해방 이후 1960년까지는
국악의 해외 소개나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54년 이후 대학 국악과가
늘어나면서 학술 교류도 늘어났고,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이 널리 소개되면서 교류가 한층 늘어났다. 1980년대는 본격적인
국제 교류를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국공립 단체 외에 민간단체,
개인 공연이 활기를 띠었는데,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적극적인
정부 정책에 힘입어 국제 예술제와 음악제 등에 국악인이 참여 연주하였다.
국공립 단체로서 국립국악원은 1980년 9월 유럽 순회 공연을 시작으로
1982년 5월 한미 수교 백주년 기념 미국 순회 공연, 1985년 5월 베를린
참가 및 구주 순회 공연 등 매년 미국·유럽·대만 등에 순회 공연을
하였다. 당시에는 국립국악원 연주단이 유럽 등지를 순회 공연하여 유럽
곳곳에서 국악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989년 5월에는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이
일본 공연을 하였다. 개인 단체 공연은 다음과 같다. 1982년 7월
정농악회는 영국 덜햄대학 동양음악제에서 공연하였고, 1989년 7월에는
7월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일본 공연, 8월에는 국악선교회의 유럽 순회
공연, 11월 김덕수 사물놀이의 창단 10주년 일본 공연 등이 있었다.
특히 사물놀이의 해외 진출은 어느 부분보다도 활발하였다. 앞으로의 전망과 방안 이제
국악계는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들었다 중앙대에서는 2001년에는 우선
65명 입학 정원으로 시작하지만 2002년에는 입학 정원을 120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국악대학에는 기존 국악과에서 전공 체제로 운영하던 것을
학과 체제로 운영할 예정이다. 즉 국악관현악 전공이 국악관현악과로,
작곡·이론 전공은 작곡이론과로 운영할 것이고, 이 외에 창작극음악과와
국악계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던 유아국악교육과를 운영할 예정이다 이것은
국악교육은 유치원부터 시작하여야 하고, 국악적 국민 정서를 함양하려면
유아 시기부터 국악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더불어창작극음악과도 운영할 예정인데, 이것은 우리
국악계의 활로가 한국적뮤지칼의 개발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국악계에서 국악관현악 운동을 이곳 저곳에서 벌이고 있지만, 국악관현악이
자생력을 갖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국악관현악단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소속하고 있는 경우는 문제가 적지만, 현대 사설 국악관현악단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은 관현악이라는 매체가 오늘날 대중과
가까이 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뮤지칼은
훨씬 자생력을 갖을 수 있다. 유럽에서도 오페라가 퇴조하면서 뮤지칼이
뜨고 있다. 많은 뮤지칼이 몇 년씩 장기 공연을 하는 형편을 보아도
앞으로의 시대는 뮤지칼의 시대임을 절감할 수 있다. 한편으로 중앙대학
국악대학에서 이처럼 창작극음악과나 유아국악교육학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미 국악 기악전공은 이미 포화상태에 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악전공은 가급적 최소 인원만 증원할 예정이다.
그리고 국악대학에서는 아시아음악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런던에서 바이올린을 배운 사람이 베를린·파리·로마·헬싱키, 심지어는
우리나라에까지 진출하여 연주회를 하고 학생도 지도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해금을 배운 사람은 평양·북경·도쿄·홍콩의 악단에 진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악인이 너무 지나치게 폐쇄적인 교육을
해 온 결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중국·북한·일본·홍콩은
해금 종류의 기법이 연주법이 어느 정도 통일되어 서로 교류에 별 어려움이
없는 반면 한국에서 공부한 해금 연주자는 이 동아시아 그룹에 끼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21세기의 국악 우리
음악계는 수입 초과국이다. 외국에서 악단을 초빙해 오면, 그들의 항공료·호텔비·식비·대관료
등 모든 것을 부담하고 그들이 떠날 때는 엄청한 금액의 공연료를 지급한다.
그들은 떠나면서 “한국의 청중 수준은 대단히 높습니다"라는 공항
기자회견을 하고 유유히 떠난다. 이에 비하여 우리악단이 외국에 나갈
때는 정 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우리가 항공료·호텔비·식비·대관료까지
부담하고 손님은 초대권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 신문에 평이라도
한 줄 나면 이를 과장해서 국내에 알린다. 우리 음악계가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한국음악인이 한국음악을 하지
않고, 독일음악·이태리 음악·프랑스 음악 등 외국음악만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처럼 외국음악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수입 초과국을
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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