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국악

국악대학 출범의 역사적 의미

전인평 (중앙대 교수)

 

우리나라에서 국악대학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 획기적 사건이다. 이것은 국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국악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2000년에 발간한 좥새로운 한국음악사좦를 집필하면서 1954년부터 현재까지를 ‘대학국악교육시대'라 명명하였다. 이것은 이해에 처음으로 대학 국악 교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학 국악 교육의 효시는 1954년 장사훈(張師勛, 1916-1992)이 설립한 덕성여자대학의 국악과이다. 이 국악의 대학국악교육 수용은, 국악을 학문의 대상으로 인식을 전환시킨 사건이었다. 그동안 국악하면 연상하던 유흥오락적인 부정적 인식이 국악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대학국악교육 수용은 실로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이제는 전국에 대학 국악교육기관이 30여개로 늘어났고, 국악학의 발전, 창작국악의 출현, 국악종교음악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아시아음악학의 등장과 아시아악단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제 국악대학의 출현은 국악계가 성장하여 서양음악대학과 대등하게 인식되는 사회적 합의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음악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 동안 국악과는 음악대학의 한 과로서 운영하였기 때문에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음악대학은 서양음악을 위한 관현악과·피아노과·성악과·작곡이론과 등을 두고 150여명의 입학 정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음악대학에 한 학과로 국악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음악대학만큼이나 많은 관현악·성악·작곡·이론 등의 전공을 30명에서 40명 정도의 인원으로 나누자니 그 고충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입학 요강에 단 1명을 뽑는 전공도 여럿 있어서 학생들이 선택의 폭이 무척 좁았던 형편이다.  지금부터 대학 국악 교육 수용 이후에 벌어진 한국음악계의 형편을 살펴보겠다. 특히 국악 교육 기관의 변천·창작국악의 출현·국악관현악 운동·국악학의 발전·종교계의 반성과 국악성가 운동·아시아음악학의 대두·국악의 해외 소개와 한국 음악인의 해외 진출 등을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국악대학의 미래와 문제점 등을 조망해 보겠다.

국악과의 효시와 창설

장사훈이 설립한 덕성여대 국악과는 아쉽게도 1959년 폐과하고 말았지만, 대학 국악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이어 이혜구(李惠求)는 1959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하였다. 또한 1960년 임동권(林東權)은 서라벌예술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하였으나 2회의 졸업생을 내고 폐과하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국악과는 그 후 현재까지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여 대학 국악교육과 우리 나라 국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악과가 명문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창설되어 학문의 대상으로 인정받게 되자, 사회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지금까지 ‘국악'하면, 기생(妓生)이나 화류계를 연상하던 당시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서울대학교에 국악과를 창설하는데는 국악학자 이혜구와 작곡가이며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었던 현재명의 공이 컸다.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자, 국악계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우선 국악 연주곡목을 넓히기 위하여 ‘창작국악'이 출현하였고, 이 창작국악을 연주할 국악관현악단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대학에서 국악을 공부한 국악인들은 전통적인 교육 방법으로 공부한 국악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1969년 신국악예술인회(초대 회장:권오성)를 결성하였다. 또한 국악학이 발달하여 국악 관계 서적을 출판하게 되었고, 학술회의·강연회도 개최되었다.  그리고 아시아 음악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해외 민족음악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국악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노력도 전개되어 국악의 해외 공연도 늘어났다.
대학 국악 교육은 1954년 덕성여자대학의 국악과 창설에서 비롯하여,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에, 1964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에, 1972년에는 한양대학교에, 1974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와 추계예술학교에 각각 국악과를 창설하였다.  이후 1981년에는 서울예술전문대학 국악과가 1982년에는 부산대학교·전남대학교·영남대학교에, 1983년에는 중앙대학교에 국악과가 창설되었다. 이후 국악과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1999년 현재 전국 대학 국악과는 30여 개로 늘어났다.
이러한 형편을 중고등 교육기관을 자극하여 중고등학교의 국악교육 기관도 늘어났다. 대표적인 국악 전문 중·고등학교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이다.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은 1919년에 시작한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아악부원 양성소이다. 해방 이후 활동한 성경린·이주환·김천흥·장사훈 등은 양성소 출신이다. 이 양성소는 해방 때까지 6기의 졸업생을 냈고,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가 이 전통을 이어 받았다. 이후 이 양성소는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승격하였고, 1991년에는 중학교 과정을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박귀희·한영숙·박헌봉 등 민속음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1960년에 설립한 국악예술학교는 사립의 고등학교 과정 국악 전문 교육기관으로 많은 민속악의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1971년 고등학교 과정의 설립인가를 받고 1973년에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작국악과 악보의 사용

창작국악이란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연주해 오는 동안에 다듬어진 전통음악과 달리 개인이 작곡한 음악을 말한다. 대학의 국악과는 이미 설치되어 있는 기존의 음악대학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음악대학 체제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의 음악대학 제도는 해방 이후 미군정때 미국의 주립 대학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음악대학의 전공 실기는 1주일에 한시간씩 실시하게 하였고 한 학기는 16주로 편성되고 일년 동안 32주의 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와 같은 대학교육 방법은 필연적으로 충실한 실기 교육이 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기존의 국악교육은 대개 도제식으로 되어 있어 매일 공부 시간을 갖거나 심지어는 선생과 기거를 함께 하며 공부를 해 왔다. 특히 판소리와 같은 분야의 교육은 춘향가 한 곡의 길이만도 몇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숙련하기 위해서는 도제식 교육이 아니고서는 온전한 교육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와 같은 도제식 교육 방법과 음악대학의 1주 1회 실기 지도와는 학습량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학이 한 학기가 16주라고는 하지만 대학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기 마련이어서, 대체로 한 학기에 12번 정도의 수업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일년이면 두 학기 즉, 24시간이 되고, 이것은 매일 공부하고 있는 학원과 비교해 보면, 매일 공부하는 도제식 교육의 한 달치 수업량밖에는 되지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계산이 개인 연습 시간을 도외시한 산술적인 계산 방법이긴 하지만 학습량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하여 대학에서 사용하게 된것이 바로 악보였다. 악보의 사용은 그 동안의 구전심수(口傳心修) 방법보다는 한결 효과적이었다. 선생 앞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아서 수업 후에도 혼자 연습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음악을 고정시키게 되었다. 전통적인 국악교육은 구전으로 하기 때문에 음악이 고정되기 힘들다. 가르치는 선생은 같은 선율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산조나 판소리 같은 즉흥음악은 변하는 정도가 더 심하다. 선생은 학생에게 하루는 이렇게 다른 날은 저렇게 가르치고, 이것은 초보자에게 굉장한 혼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혼란기를 지나고 나면, 스스로 음악을 골라서 연결시키고, 이음새를 만드는 즉흥 능력이 생긴다. 바로 이 즉흥능력이 전통국악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보를 사용하면서 곧 분위기가 바뀌었다. 학생은 악보를 충실하게 연주하려고 애를 썼고, 선생도 악보를 쓰게 되자 악보에 충실한 학생을 더 우수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학생들은 즉흥 능력을 잃었다. 그러자 새로운 돌파구는 창작국악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과 같은 창작국악이 정착하기까지는 앞에서 언급한 악보의 사용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더구나 나이 많은 명인들의 타계는 국악연주계에 판도를 바꾸었고, 그 자리는 대학을 졸업한 국악인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악계의 연주곡목을 창작국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국악관현악 운동의 번성

이와 같이 창작국악은 국악교육을 대학 제도에 수용하면서 생긴 필연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과거의 창작곡들이 오늘에 와서는 전통곡이 되었듯이 오늘의 창작곡이 미래에서는 전통음악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시대는 후세에 이 시대의 음악을 유산으로 넘겨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점에서 창작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출발한 창작국악은 1939년 김기수(金琪洙)의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이래, 1995년까지 297명의 작곡자가 참여하여, 관현악곡 359곡, 협주곡 130곡, 합주곡 95곡, 실내악곡 482곡, 독주곡 323곡, 성악곡 635곡, 기타 215곡을 작곡하여 모두 2,239곡의 작품이 나왔다.
대학에서 많은 졸업생이 배출되자 이들은 악보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악보를 이용한 음악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연주하는 관현악을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국악관현악 전통은 합주형태로 조선조 이래로 전통적으로 전해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합주에 비하여 국악관현악은 확실히 다르다. 전통 합주는 작곡자가 전해 오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고, 하나의 선율을 각 악기의 형편에 따라 개발한 선율을 연주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국악관현악은 작곡가가 뚜렷하다는 점, 그리고 악보에 각 악기의 연주 선율을 따로 따로 적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신 국악관현악 운동을 전개한 사람은 김기수(金琪洙)이다. 김기수는 1952년 정백혼(精白魂)과 송광복(頌光復)을 작곡하여 새 국악관현악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1965년에는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이 한국국악예술학교 부설 국악관현악단을 모체로 창단되었다. 창립 당시 지휘자는 유기룡이었고, 이후 김희조, 한만영이 지휘를 담당하였다. 특히 1974년 한만영이 지휘자로 취임하자 단원을 대학출신으로 교체하고 새로 관현악곡을 위촉하여 연주하는 등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1999년 현재 전국적으로 공사립 관현악단이 30여 단체로 번성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악보 교육의 산물이라 하겠다. 국립국악원의 조사에 의하면, 1993년 현재 국악연주단체는 국립, 공립, 민간기업, 그리고 민간국악단체 등 무려 680개에 이른다.

국악의 소개와 해외진출

음악 상품의 해외 소개는 아직 미미한 상태이다.  해방 이후 1960년까지는 국악의 해외 소개나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54년 이후 대학 국악과가 늘어나면서 학술 교류도 늘어났고,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이 널리 소개되면서 교류가 한층 늘어났다. 1980년대는 본격적인 국제 교류를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국공립 단체 외에 민간단체, 개인 공연이 활기를 띠었는데,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적극적인 정부 정책에 힘입어 국제 예술제와 음악제 등에 국악인이 참여 연주하였다.  국공립 단체로서 국립국악원은 1980년 9월 유럽 순회 공연을 시작으로 1982년 5월 한미 수교 백주년 기념 미국 순회 공연, 1985년 5월 베를린 참가 및 구주 순회 공연 등 매년 미국·유럽·대만 등에 순회 공연을 하였다. 당시에는 국립국악원 연주단이 유럽 등지를 순회 공연하여 유럽 곳곳에서 국악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989년 5월에는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이 일본 공연을 하였다.  개인 단체 공연은 다음과 같다. 1982년 7월 정농악회는 영국 덜햄대학 동양음악제에서 공연하였고, 1989년 7월에는 7월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일본 공연, 8월에는 국악선교회의 유럽 순회 공연, 11월 김덕수 사물놀이의 창단 10주년 일본 공연 등이 있었다. 특히 사물놀이의 해외 진출은 어느 부분보다도 활발하였다.
또한 1982년 5월 추계예술학교의 일본 공연, 9월의 서울대학교 국악과의 미국 공연이 있었고, 1985년에는 중앙대학교 국악과의 일본 천리대학 공연이 있었다.  개인 공연으로는 1980년 황병기의 핀란드 헬싱키음악제 참가 연주와 1981년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이재숙 가야금 독주회, 황병기의 유럽 순회 가야고 독주회 등이 있었다.  외국 단체 공연으로는 1981년 문예회관에서 열린 제26차 국제민속음악학회International Folk Music Council 총회 및 민속음악축제가 있다. 이 학회의 서울 총회는 창설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되어 세계 각국 학자들이 한국 전통음악을 재인식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학회 참여 인원은 국내학자 40여명과 해외 학자 110여명이었다.  1989년의 핀란드 민속무용단과 호주의 민속악단, 일본 가부키의 서울 공연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류의 폭을 넓혀 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공연뿐만 아니라 강습을 겸한 개인 및 민간단체의 활동이 눈에 띄게 많아졌으며, 일회성 공연에서 벗어나 해마다 개최하는 기획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공연 무대도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동구권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 사회주의권을 포함하여 폭이 넓어졌다. 또한 공연과 강습 이외에도 한국 문화 강연을 곁들인 소규모 공연과 학자의 강연 등 1990년대 이후 부쩍 늘었다.
또한 1980년대부터 일본, 유럽, 미주 지역에서 열었던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은 90년대에는 교육 프로그램을 더하여 강습을 겸한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해외 교민을 상대로 한 국악 강습이 활발해져 1994년에는 세계사물놀이겨루기한마당을 서울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주요 학술 행사를 살펴보면 1992년 7월 하와이에서 개최한 ‘환태평양 한국학 국제학술회의'가, 1994년 11월에는 한국국학학회와 국립국악원 주최의 ‘아시아태평양민족음악학회의 창립총회'가 열려 학술대회 및 전통음악축제가 열렸다. 이 때 아시아 8개국의 학자와 연주인 300여명이 참여 세미나를 통한 각 나라의 음악 문화 비교와 전통음악을 소개하는 음악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앞으로의 전망과 방안

이제 국악계는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들었다 중앙대에서는 2001년에는 우선 65명 입학 정원으로 시작하지만 2002년에는 입학 정원을 120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국악대학에는 기존 국악과에서 전공 체제로 운영하던 것을 학과 체제로 운영할 예정이다. 즉 국악관현악 전공이 국악관현악과로, 작곡·이론 전공은 작곡이론과로 운영할 것이고, 이 외에 창작극음악과와 국악계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던 유아국악교육과를 운영할 예정이다 이것은 국악교육은 유치원부터 시작하여야 하고, 국악적 국민 정서를 함양하려면 유아 시기부터 국악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더불어창작극음악과도 운영할 예정인데, 이것은 우리 국악계의 활로가 한국적뮤지칼의 개발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국악계에서 국악관현악 운동을 이곳 저곳에서 벌이고 있지만, 국악관현악이 자생력을 갖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국악관현악단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소속하고 있는 경우는 문제가 적지만, 현대 사설 국악관현악단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은 관현악이라는 매체가 오늘날 대중과 가까이 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뮤지칼은 훨씬 자생력을 갖을 수 있다. 유럽에서도 오페라가 퇴조하면서 뮤지칼이 뜨고 있다. 많은 뮤지칼이 몇 년씩 장기 공연을 하는 형편을 보아도 앞으로의 시대는 뮤지칼의 시대임을 절감할 수 있다. 한편으로 중앙대학 국악대학에서 이처럼 창작극음악과나 유아국악교육학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미 국악 기악전공은 이미 포화상태에 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악전공은 가급적 최소 인원만 증원할 예정이다. 그리고 국악대학에서는 아시아음악연구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런던에서 바이올린을 배운 사람이 베를린·파리·로마·헬싱키, 심지어는 우리나라에까지 진출하여 연주회를 하고 학생도 지도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해금을 배운 사람은 평양·북경·도쿄·홍콩의 악단에 진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악인이 너무 지나치게 폐쇄적인 교육을 해 온 결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중국·북한·일본·홍콩은 해금 종류의 기법이 연주법이 어느 정도 통일되어 서로 교류에 별 어려움이 없는 반면 한국에서 공부한 해금 연주자는 이 동아시아 그룹에 끼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러한 시대를 음악계에서는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는가? 서로 의사 소통이 가능하도록 통로를 만들고, 공동의 음악문화창달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국악대학에서는 중국·일본·인도 등의 음악가를 객원 교수로 초빙 학생을 지도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러한 시도는 국악의 국제화에 큰 기여를 하리라 생각한다. 국악대학에서 아시아음악 특히 동북아시아 음악을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대학 국악 교육계는 전에 보지 못하던 치열한 경쟁 체제가 전개될 전망이다. 지난해만 해도 이미 지방의 몇 대학 국악과에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이러한 형편은 앞으로 더욱 증폭될 형편이다. 즉 이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언젠가는 몇 대학이 통폐합되거나 문을 닫는 형편이 전개될 것이다. 이제 각 대학 국악과는 앞으로 살아남기 위하여 교육에 차별화, 특성화 등에 더욱 고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외에 한편으로는 국악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오히려 낙관적인 전망도 가능하다. 과거 농경시대는 ‘부귀다남(富貴多男)'의 시대였다. 즉 땅은 어디에나 널려있기 때문에 노동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땅을일구어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곧 아들이 많으면 부귀를 잡을 수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기계문명을 가장 먼저 일으킨 나라가 세상을 주도하였었다.

21세기의 국악

우리 음악계는 수입 초과국이다. 외국에서 악단을 초빙해 오면, 그들의 항공료·호텔비·식비·대관료 등 모든 것을 부담하고 그들이 떠날 때는 엄청한 금액의 공연료를 지급한다. 그들은 떠나면서 “한국의 청중 수준은 대단히 높습니다"라는 공항 기자회견을 하고 유유히 떠난다. 이에 비하여 우리악단이 외국에 나갈 때는 정 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우리가 항공료·호텔비·식비·대관료까지 부담하고 손님은 초대권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 신문에 평이라도 한 줄 나면 이를 과장해서 국내에 알린다. 우리 음악계가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한국음악인이 한국음악을 하지 않고, 독일음악·이태리 음악·프랑스 음악 등 외국음악만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처럼 외국음악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수입 초과국을 면할 수 없다.
우리 음악계는 하루 빨리 하루 빨리 우리 고유 상표로 내세울 만한 음악 문화를 창출해 내야 한다. 그리고 수입초과상태를 하루 빨리 면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누가 해야 하는가? 맨 먼저 앞설 사람이 바로 음악인 자신이다. 이제 바야흐로 대학 국악 교육계는 제2의 시대를 맞고 있다. 1954년 고 장사훈 박사가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정립한 대학 국악교육이 밑거름이 되어 이제 ‘국악 대학 설립'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앞으로 이 국악대학의 성공과 실패는 한국음악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시금석이 될 것이다. 과거에 1954년 국악과를 창설하자 계속 국악과가 늘어났던 것처럼, 국악대학은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생겨나야 한다. 그리고 서양음악대학에서 사랑방을 겨우치키던 한국음악은 기존의 음악대학이 독립하여 나란히 병립 발전하여야 한다. 이 일에 가장 앞서야하고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국악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출범하는 국악대학의 성패는 국악의 장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국악대학의 성패는 중앙대학교 국악대학만의 일이 아니라 국악계의 진로와 밀접한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악대학이 성공할 수 있도록 온 국악계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소이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