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영화

2000년 영화계에 남아있는 숙제 - 스크린쿼터. 디지털 영화 -

김경욱 (영화평론가)

 

새 천년의 시작이라고 너나 없이 들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결산할 때가 되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또 다시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2000년 영화계를 되돌아보기로 하자.

국제영화제에서의 한국영화 붐

먼저 임권택 감독의 좥춘향뎐좦이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제53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됨으로써, 마침내 한국영화계의 오랜 숙원을 풀어냈다. 칸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베니스와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한국영화가 초대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유독 칸영화제의 경쟁부문과는 인연이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칸영화제의 감독주간이나 주목할만한 시선 또는 단편영화 부문에 참가하는 영화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경쟁부문으로의 진출만큼은 기대만 무성한 가운데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그래서 칸영화제의 경쟁부문 진입은 감독들이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처럼 지워졌고, 한국영화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처럼 여겨졌다. 아쉽게도 좥춘향뎐좦이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칸영화제의 두터운 장벽을 한꺼풀 벗겨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2000년 칸영화제에는 좥춘향뎐좦 이외에도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좥오, 수정좦, 비평가 주간에 좥해피 엔드좦, 감독주간에 좥박하사탕좦, 단편영화 부문에 좥우산좦이 초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57회 베니스영화제의 경쟁부문에는 김기덕 감독의 좥섬좦이 초대되었고, 단편영화 좥자화상좦과 좥내 사랑 십자 드라이버좦가 상영되었다. 좀더 규모가 작은 국제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의 수상이 잇따랐는데, 좥춘향뎐좦은 하와이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장문일 감독은 좥행복한 장의사좦로 카이로 국제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지난 11월 5일에 막을 내린 도쿄 국제영화제에서는 좥오, 수정좦이 심사위원 특별상과 특별언급상을 동시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쿄 국제 판타스틱 부문에서 상영된 좥유령좦 좥주유소 습격사건좦 좥텔미 썸딩좦 등에 관객이 몰리면서 일본에서의 한국영화 붐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만하임-하이델베르그 국제영화제에서는 특별 프로그램으로 ‘한국영화 아카데미 특별전'을 열었으며, 런던 국제영화제에서는 좥박하사탕좦 좥오! 수정좦 좥플란더스의 개좦 좥반칙왕좦 좥주유소 습격사건좦 등 이례적으로 한국 영화를 다섯 편이나 상영하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영화의 잇따른 흥행 돌풍

2000년은 한국영화의 수출 또한 활발한 한 해였다. 좥인정사정 볼 것 없다좦와 좥춘향뎐좦이 미국에서 개봉되었고, 지난 10월에 열린 밀라노 필름 마켓에서는 좥해피 엔드좦 좥섬좦 좥미인좦 좥청춘좦 등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 개봉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좥쉬리좦는 앞으로 러시아를 비롯해서 독일, 프랑스, 스페인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한국영화는 2000년 세계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로 떠올랐고, 그러한 뜨거운 관심은 2001년에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해 좥쉬리좦가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 흥행의 마지노 선은 좥서편제좦가 1993년에 세웠던 기록(서울에서 1백3만5천7백41명)이었다. 그 후 관객 1백만 명(이후 관객수는 서울 기준) 돌파는 어떤 한국 영화도 쉽게 깨기 어려운 한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99년 2월 13일에 개봉된 좥쉬리좦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가볍게 1백만명의 관객을 넘어섰고 할리우드 영화 좥타이타닉좦이 세운 역대 흥행 1위의 기록인 1백97만명까지 돌파해냈다. 결국 좥쉬리좦는 2백44만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막을 내렸고, 덕분에 1999년 한국영화의 관객점유율은 35퍼센트를 넘어서게 되었다.
좥쉬리좦의 흥행 결과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너무나 어마어마한 기록이었기에 돌파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지난 9월 9일에 개봉된 박찬욱 감독의 좥공동경비구역 JSA좦는 1년만에 그 불가능성을 어느 정도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버렸다. 서울시내 43개 상영관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개봉 첫날 9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나흘 동안에는 32만명(전국에서는 6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나흘간의 흥행 기록은 좥쉬리좦를 앞지르는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흥행 신기록 영화에 대한 기대가 조심스럽게 형성되었다. 개봉 48일째가 되던 지난 10월 26일, 좥공동경비구역 JSA좦는 2백1만명(전국에서는 4백73만명)의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서울 관객 2백만명 돌파기록을 세웠는데, 그것은 좥쉬리좦가 56일만에 세웠던 기록을 8일 앞당긴 것이었다.
좥공동경비구역 JSA좦에 앞서서 상반기에 개봉된 좥반칙왕좦과 좥비천무좦 같은 영화가 각각 81만 명과 7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영화는 2000년에도 흥행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연구실의 자료에 따르면 2000년 한국영화의 최종적인 점유율은 1999년에는 다소 미치지 못해도 30퍼센트는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블록버스터 영화 신드롬

좥쉬리좦와 좥공동경비구역 JSA좦가 잇따라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한국영화계에는 ‘블록버스터 영화' 신드롬이 열풍처럼 번져가는 현상이 생겨났다.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부어 대규모의 관객을 동원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유행에 따라 제작비에만 몇 십억 이상 투입되는 한국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실제와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보도를 통해 알려진 제작비를 살펴보면, 좥비천무좦 40억, 좥공동경비구역 JSA좦 30억, 좥싸이렌좦 40억, 좥단적비연수좦 40억, 좥리베라 메좦 45억에 이른다.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에서 “제작자로부터 좥공동경비구역 JSA좦의 손익분기점이 서울 관객 51만명이라는 얘기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좥키노좦 2000년 9월호 p.184)는 말에 미루어보면, 그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자한 영화사들이 손해를 보지 않는 관객 수가 서울에서만 적어도 50만 명 선을 훨씬 넘어야 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영화들의 흥행 결과가 아직 완료되지는 않은 시점이지만, 흥행이 부진하다는 기사(좥동아닷컴좦 2000년 10월 30일)가 났던 좥싸이렌좦의 경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만한 관객을 동원했을지 의문이 든다. 여기서 문제는 블록버스터 영화에 태생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도박성이다. 흥행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에 힘입어 극장을 대량으로 선점하고 그에 상응하는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하면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으나, 실패할 경우에는 그만큼 제작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2000년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가 큰 몫을 했다. 최근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기사를 보면 ‘저 영화는 몇 개의 스크린에서 개봉 됐는데 이 영화는 그 보다 많은 스크린을 확보했다'는 등의 내용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많은 스크린을 갖고 있는 극장에서 장사가 될만한 몇 편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틀고, 할리우드 직배 영화와 더불어 큰 배급사의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하다 보니, 작은 영화들은 점점 더 관객들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게 되고 극장문화는 편중화로 나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까지 대체로 30만명 가까이 유지돼 오던 서울 주말 평균 관객수가 올 들어 최저 18만명 선까지 떨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극장들이 수익금을 제작사에게 지급하는 기일도 자꾸 늦춰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극장 쪽에도 돈이 안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의 영화란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나 이를 판매하는 사람이나, 또 이를 유통시키는 사람이나, 무엇보다 이를 사는 사람이나 모두들 손해를 보고 있는 상황 (FILM 2.0)'이라는 것이다. 한국영화 제작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유행처럼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에 뛰어드는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박의 꿈이 깨지고 실패의 악몽에 따르는 위험부담은 단순히 하나의 영화사의 운명만이 걸린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한국 영화산업 전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보기에 매우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지난 4월에 열린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디지털과의 만남이 2000년의 화두임을 표방하면서 ‘디지털 3인3색' 부분을 마련하고, 박광수, 김윤태, 장위엔 감독이 연출한 디지털 영화 세 편을 상영했다.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임상수 감독의 디지털 장편영화 좥눈물좦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영화제 기간 동안 부산영상위원회가 주최한 ‘디지털EZ' 행사에서는 디지털 세미나와 디지털 영화의 시사 그리고 장비전시회가 열렸다. 지난 11월 16일부터 19일에는 디지털 영화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 ‘레스페스트2000 서울'이 개최되었다. 이와 같이 2000년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가장 새로운 관심거리는 미래의 영화 ‘디지털'이다. 많은 감독들이 디지털 영화를 실재로 준비하고 있거나 관심을 갖고 있으며, 감독을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제작비가 저렴하고 작업이 용이한 디지털 영화는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대안영화로서 디지털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한국영화가 고전적인 필름영화 시대에는 세계영화의 최전선에서 다소 뒤쳐졌을지 모르지만 현재 도래하고 있는 디지털영화 시대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선도해나갈 수 있다'며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 기대만큼 2000년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디지털영화를 앞으로 영화인들이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스크린 쿼터를 둘러싼 논란

전반적으로 기쁨과 희망의 햇살이 비친 2000년 한국영화계가 그럼에도 여전히 걷어내지 못한 그늘은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즉, 스크린 쿼터를 둘러싼 논란이다. 한미투자협정체결을 앞두고 한국정부와 미국이 스크린 쿼터 일수(현 영화진흥법 제 28조에 따르면 극장은 연간 상영일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146일 동안 한국영화를 상영해야 한다)를 비밀리에 축소하기로 합의했다는 주장이 영화계에서 제기되면서 수면에 잠복하고 있던 스크린쿼터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르게 된 것이다.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측의 자료에 따르면,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7월초에 미국과 스크린쿼터 축소에 합의했다'고 했다가 다음 날 번복했고, 7월말에는 영화인들에게 직접 ‘스크린쿼터 축소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스크린 쿼터 지키기 운동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상황 속에서 지난 11월 17일 문화관광부는 장관이 20일 범위에서 감경해줄 수 있는 의무상영일수를 2000년에는 10일만 감경하겠다는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우려하는 분위기를 다소 가라앉혔다. 그러나 서울시극장협회를 비롯한 극장측에서 즉각 반발을 표명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의지'대로 밀고 나갈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예년에도 정부가 10일을 감경한다고 발표했다가 극장 쪽의 민원이 쏟아지자 20일로 후퇴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정부가 이리저리 말을 바꾸지 말고 한국영화를 위한 정책을 소신 있게 밀고 나감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기를 바라마지 않고 있다.
이제 한국영화계는 2000년에 거둔 긍정적인 성과를 안고 희망찬 새해를 맞고 있다. 새해에는 2000년에 거둔 성과를 토대로 내실을 튼튼하게 다지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