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을
쓰는 일은 내생에서 휴가를 얻는 일
만난사람
: 이태주 (연극평론가)
낙엽이 날리는 거리,
가을이 소리없이 깊어 가는 날 오후. 나는 소란스런 도시 속에서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예술원을 찾아 회장실에 들어섰다. 극작가 차범석 선생을
만나, 그의 인생과 예술을 얘기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방안은
학자의 연구실 같았다. 그 곳은 또한 창작의 밀실이었다. 책상 위에는
쓰다 멈춘 원고가 놓여있었다.
이태주(이하 이): 희수를
축하드립니다. 희수 기념 제7희곡집 좥통곡의 땅좦 출판기념회가 11월
23일에 있었지요?
차범석(이하 차) : 그렇습니다.
이 : 선생님 첫 성함이 차평균이었죠. 평균치만 되어라, 그런 선친의
뜻이 담긴 것입니까. 그러나 선생님의 77년 인생, 그것은 평균치 이상의
업적을 쌓으신 세월이었습니다.
차 : 평균치 인생이죠.
이 : 선생님의 자서전 좥떠도는 산하좦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파란만장의
세월, 격동의 시대를 뛰어넘고 달린 인생, 선생님 말씀대로 오르막 길,
내리막 길, 막다른 길, 샛길, 정상에 오르는가 싶으면, 다시 내려가는
길, 희로애락,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는 인생이었습니다. 이제 희수를
맞이해서 인생의 어떤 흔적이, 무엇이 남았다고 생각되십니까?
차 : 작품이죠. 7권의 희곡집. 2권의 수필집. 한 권의 논총. 그리고,
3남 2녀, 10명의 손자, 직계 가족 22명입니다.
이 : 선생님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차 : “만남"입니다.
이 : 어떤 처세훈을 지니고 사셨습니까?
차 :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 잘 한 일 보다 잘 못한 일을
확인해야 한다." “예술은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다" 등입니다.
연극은 그의 생에 큰
전환점이었다
극작가 차범석. 1924년
11월 15일, 그는 목포시 북교동 18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차남진,
어머니는 김남오였다. 그는 3남 3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엄친은 일제시대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화려한 사회경력을 지녔던 문중의 종손이었다.
차범석은 천석꾼 집 부농의 아들로서 넉넉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극장 가기를 좋아했던 그는 열 세살때 최승희의 무용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1947년 서울에서 함귀봉 교육무용연구소에 입문해서
무용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후에 이 연구소에서 제작극회 동인인 최창봉, 조동화, 김경옥 등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이 무렵 그는 예술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1932년 목포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38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놀라운
것은 그의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인데 그는 지금도 당시의 담임선생,
극장의 변사, 그 당시 집 전화번호, 광주시절 하숙집 주인, 가정교사,
자기 반 반장 등의 이름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극작가 차범석의 생의
전환점은 1942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2년간 일본 동경에서 재수생활을
했을 때였다. 동경에서 심취했던 연극, 영화관람 때문에 연극에 매료되어
그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그는
병역면제의 특전을 받기위해 광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하고, 졸업
후, 1945년 3월 목포북교초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한다. 그러나 같은해
5월 13일 일본군에 소집당하여 제주도에서 복무 중 8·15 해방을 맞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복교초등학교에 복직하여 희곡작가의 꿈을 품고
습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그는 연희전문 문과학교로 간다.
1947년 9월 학제변경에 따라 문학부 영문과에 편입되고, 재학시에 “연희극예술회"를
조직해서 대학극 활동을 하게 된다. 연희대학교 시절, 그가 만났던 스승들은
대단히 고명하신 분들이었다. 시인 김기림, T.S. Eliot의 난해한 시작품
좥황무지좦를 번역해서 명성을 날렸지만 6·25 동란 중 피살된 이인수,
소설가 염상섭, 소설가 이무영, 희곡론을 강의해서 차범석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극작가 유치진, 당대 명문장으로 문단에 충격을 준 문학평론가
김동석, 좥햄릿좦 명역으로 유명한 영문학자 설정식, 문학평론가 최재서,
셰익스피어학의 권위 권중휘, 영문학자 이호근 등 기라성 같은 명교수들을
한꺼번에 만난 것은 그의 행운이었다.
이 : 젊은 시절 연극
인생의 큰 전환점이 언제 어떻게 왔습니까?
차 : 1949년 10월 한국연극학회 주최 제1회 전국남녀 대학연극경연대회가
됩니다. 그 때, 본인이 좥오이디푸스 왕좦을 번역해서 연출했어요. 이
공연이 우수상(단체상)과 연출상, 연기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심사위원은
유치진, 오영진, 이광래 선생이었죠. 물론 허집 선생의 지도, 무대미술가
김정환 선생의 도움이 컸어요. 의상을 이불보로 만든 일을 잊을 수 없어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최창봉, 김경옥, 조동화, 김지숙, 조성하, 박현숙
등을 만나게 되면서 대학극회가 탄생했습니다. 이들과의 만남은 나의
연극 인생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 숙명대 학생이었던 이인선을 만난 것도 이 시기가 되지요?
차 : 그렇습니다. 정치가 이재학의 따님이셨죠.
이 : 그 여인과 나눈 오랜 세월에 걸친 우정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차 : 나의 작품 좥환상여행좦은 그녀와의 관계를 다룬 것입니다. 간염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때, 병원 침상에서 의사로부터 야단맞으면서 쓴 작품입니다.
이 :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차 : 학업(4학년)을 중단하고 목포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후 5년간 목포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이 시기가 나의 희곡창작습작시절이 됩니다.
변함없이 지켜온 그의
신념과 문학관
이 : 목포중 시대에는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차 : 그 당시 교사로는 영문학자 이가형, 사학자 양병우, 언어학자 김방한
등이 기억나고, 학생으로는 차인석, 최종수, 최인훈, 천승세, 김은국,
최영철, 강대진, 김성옥 등이 있었어요.
1951년 그는 처녀작 "별은
밤마다"(2막)을 발표하고, 이 무대에 배우 김길호가 등장한다.
그리고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된다.
다음 해, 그는 조선일보에 재도전해서 작품 "귀향"이 당선된
그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의 또 다른 대전환점이 온 것이다. 당시
심사는 유치진과 오영진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동랑 유치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인간과 예술 양면에서 그의 영향을 받는다. 그의 "떠도는
산하"에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인용해 보자.
“동랑 유치진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인 1947년이었다.
그 때 선생께서는 국문과에 희곡론을 강의하시기 위해 한 학기 동안
나오셨다. 나는 영문과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장차 극작을 공부하겠다는
목표가 서 있는 데다가 학교 연극부를 이끌어 나가던 처지에 있었던
까닭으로 희곡론을 선택과목으로 수강신청했었다. (중략) 전문적인 교수가
아닌, 극작가이자 연출가로서는 누가 뭐라해도 당대의 제 1인자이고
보면 그분에 대한 동경심과 외경심은 거의 무조건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극작에 관한 이론서적이 출판된 것도 없고, 고작해야
일어 서적을 읽었던 나는 선생의 강의가 하나의 금과옥조와도 같았다.
그것은 내가 극작가로서 눈을 뜰 수 있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중략> “극이란 갈등이다."
“연극이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예술이다." “희곡은
우선 문학으로써 정립되어야 하며, 연극은 학교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져야만
민족 연극으로서의 뿌리를 내린다." 이와 같은 말씀은 그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광맥을 짚어 낸 기쁨이기도 하였거니와 먼 훗날까지
변함없이 되풀이되어 온 하나의 신념이자 문학관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1952년, "닭"(1막),
"제4의 벽"(1막), "저주"(1막)을 발표한다. 1953년,
"윤씨 일가"(3막), "잔재"(3막), "달 뜨는
무렵"을 발표한다. 1954년 번역극집 "근대 1막극선"(항도출판사),
"백의"(3막) 공연. 1956년, "풍랑"(2막)공연. 이
해에 그는 김경옥, 최창봉, 오사랑, 조동화, 노희엽, 박양경 등과 함께
“제작극회"를 창단한다. 1958년, "무적"(문학예술),
"불모지"(문학예술), "사등차"(자유문학), "성난기계"(사상계),
"계산기"(현대문학) 등을 발표한다. 같은 해에 "공상도시"를
제작, 극회에서 공연한다. 1958년에는 "희곡 5인선집"(성문각)을
출판하고 1960년, "상주"(목포문학)를 발표한다. 같은 해에
제 1 희곡집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4막)(정신사)이
출판된다. 이 작품은 이듬해에 국립극장제작극회에 의해 초청공연으로
상연된다. "공중비행"이 "사상계"에 발표된다.
이 : 덕성여고 교사직을 그만 두고 방송국으로 가셨지요?
차 : 목포중학 교사시절에 12·12사건이 있었죠. 1955년 12월 12일에
학교부조리를 비판하여 집단행동을 일으켜 학교를 떠나게 된 사건이었죠.
이 일이 있은 후, 1956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박화성 선생의 도움으로
덕성여고에 취직하여 교사가 된다. 그러나 4·19직후 덕성여고를 그만
둔 동기 역시 사회적 불의를 못 참는 성격 때문이었죠.
이 : 그런 의분, 참지 못하는 마음이 예술가를 만든다고 괴테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차 : MBC에서 연예과장, CM과장, 제작부장, 편성부국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이 : 이 시기에 창작활동이 왕성했지요?
차 : 1962년에 좥태양을 향하여좦(4막)와 좥산불좦(5막)을 국립극단에서
공연했습니다.
이 : 좥산불좦은 선생님의 대표작이시죠. 좥별은 밤마다좦의 후편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국립극단에서 대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차 : 4·19 이후 2년 동안 모습을 볼 수 없던 연출가 이진순이 연출을
맡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어요. 백성희, 나옥주, 이순, 진랑, 정애란,
등 기성배우와 백수련, 노경자, 김금지, 박성대 등 신인 배우들이 열연했습니다.
이 : 1966년에 해외에 가셨지요?
차 : 국제 펜클럽 뉴욕대회에 한국대표로 갔었습니다. 나로서는 첫 해외여행이었죠.
이 : 1967년에는 "적과 흑"(스탕달 원작)을 각색하여 산하에서
공연됩니다. 그리고 연극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신 것이?
차 : 1968년, 내 나이 44세 때입니다.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해랑
선생 강요에 못이겨 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해에 "장미의 성"(4막)이
산하에서 공연됩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될 무렵 분가를 선언하고 서울로 이사와서 경제적으로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무렵의 생활에 대해서 그는 좥떠도는
산하좦에 이렇게 쓰고 있다. 차범석의 성격이 잘 들어 나는 부분이어서
흥미롭다.
“부잣집 둘째 아들이
분가하는 날. 짐이라고는 리어커 하나로 두 번 져 나르면 족했다. 그리고
우선 먹을 양식으로 석유통으로 쌀, 보리, 한 통씩과 냄비, 솥, 수저
그리고 몇 개의 그릇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나는 즐거웠다. 닳고 헤어져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일본식 다다미방과 잇대어있는 한 평 반 정도의
온돌방에 마주앉은 우리식구는 후련한 기분이었다. 자유롭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배가 불렀다. 부모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려고
마음만 먹었던들 나에게 돌아올 재산은 있었을 것이다. 집도, 곡식가마니도,
세간도 실어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나는 부모님
앞에 손 내미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차려 준 밥상도 마다하는 나의
졸장부같은 좁은 소견머리는 내가 생각해도 겁 많고 어리석고 자기 권리
행사도 못하는 얼간이었다. 나를 교육시켜주고 결혼시켜 준 그것으로
족하다고 나는 억지를 썼다. 그것은 나의 반항이자 무언의 역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식을 차별대우하는 고루한 의식에 대한 항거이자 항변이었다.
나는 그 시절부터 마음 속 깊숙이 묻어온 불씨가 있었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산다." 나는 그렇게 시작한 생활의식에서인지 그 후에도
사회생활 하면서도 가진 자나 권력을 차지한 자들에게 단 한번도 찾아
나서거나 아첨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동향, 동창, 동성동본을 저마다
찾아나서며 입신 출세에 혈안이 되는 속물들에게 나는 언제나 냉소를
퍼부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터에서 아내는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이 : 여배우 강효실에게 연정을 느끼셨다는데 어떤 관계였습니까?
차 : 강효실은 대단히 재능이 있는 여배우였습니다. 그런데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그녀와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진부한 관계가 아니라, 극작가와 여배우의
연극적 관계였습니다. 나는 그녀를 위해 희곡을 썼습니다. 그녀의 이국적인
용모, 서구적 분위기를 살려 작품 좥열대어좦를 썼어요.
좥열대어좦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 선생님이나 강효실, 두 분 다 술을 좋아하셔서 좋은 술 많이 드셨겠습니다.
차 : 안마셨다면 거짓말이고…. 지금도 그래요. 아내는 건강 걱정을
많이 하지요. 나에게는 술을 마시되, 철칙이 있습니다. 술자리에서는
절대로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는다. 술자리는 철저하게 유쾌하고 즐거워야
한다. 만약에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술을 하자고 하면 사양을 한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소주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터놓고 노는 게 나의
술 철학입니다. 연극하다 보면 인간관계와 주위와의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그 응어리를 술로 푸는 것입니다. 나의 술은 캄캄한 어둠을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이 : 그 당시 어떤 연극을 하려고 했습니까?
차 : 돈 벌기 위한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연극이 예술 운동이 되고,
사회참여를 통한 의식개혁에 도움이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원로극작가
이 : 과거에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라 생각됩니까?
차 : 극단 좥산하좦의 해산입니다.
이 : 해산하게 된 원인과 과정은 무엇입니까?.
차 : 70년대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프로듀서 시스템'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극단은 동인제 극단이었고 우리 극단 산하도 그랬습니다.
그 무렵 연극계에서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선풍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질 상업극이 연극인의 호기심을 끈 것은 돈이었습니다. 내가
내세운 슬로건은 연극의 대중화였습니다. 그 당시 연극들은 대부분 열악한
기획, 미숙한 기술, 빈약한 재정, 불충분한 연습으로 관객의 눈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상업주의 연극은 몇 사람의 유명 배우만 있고 나머지는
대다수가 들러리거나 병풍이어서 종합예술의 앙상블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상업주의 연극이 연극계를 흔들자 돈이 되는 연극을 해야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고, 텔리비젼 탤런트 지망생이 폭증하는 결과가
생겼습니다.
이 : 그것이 원인이었군요. 그런데 산하는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차 : 연출가로서 기반을 닦은 표재순이 방송국 PD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현대극장의 창단동인이 되었습니다. 여배우 천선녀의 뒤를
이어 조영일도 미국으로 가고, 여배우 김희준은 결혼하자 무대를 떠났고,
주상현은 이민을 갔습니다. 중견 배우 오현경은 배역 때문에 생긴 불만으로
떠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나와 호흡이 맞았던 기획자 김유성이 사업차
홍콩으로 가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이 : 시대 상황 때문에 공연을 제작하는 일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차 : 특히 방송국 때문이었습니다. 협조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좥적과
흑좦 연습 때는 중요한 배역을 맡았던 홍계일이 동아방송의 외부출연
금지라는 사칙 때문에 출연불가능이 되었습니다. 막이 오르기 열흘 전이었습니다.
좥부활좦 때는 주역인 박근형이 공연 첫날 방송국 일 때문에 못 나왔습니다.
그날 낮공연은 중단되었습니다. 1973년 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때
일입니다. 나는 극장 근처 대포집에서 연거퍼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울고있었습니다.
그후 "사로메", "유령","키브츠의 처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오판", "종"
등 심혈을 기울였지만 "사로메"와 "옛날 옛적에..."를
제외하고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극단운영이 점점더 어려워지고
있을 때, 영화제작회사 태창의 김태수 사장의 도움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좥제인 에어좦 공연의 막을 올렸지만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이런 시련의
시기에 나는 MBC의 농촌드라마 "전원일기"를 48편을 썼어요.
첫 방송이 1980년 10월 22일 나갔습니다.
이 : 방송국 일 일년 하시고 다시 산하로 돌아오셨지요.
차 : 그랬습니다. 1981년 나는 아일랜드 극작가 숀 오케이시의 좥쥬노와
공작좦을 무대에 올렸지만 객석은 텅 비었습니다. 참패였습니다. 좥산불좦을
다시 공연했지요. 그러나 옛 산하의 동인들이 모이지 않아서 공연은
다시 실패였습니다. 1983년 3월 25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산하 제
52회 공연인 최인훈작, 최석천 연출 좥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좦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1976년 초연 후의 재공연이었습니다.
이것이 산하의 고별 공연이 되었습니다. 산하 20년의 막이 내렸습니다.
나는 쫑파티에서 늘 부르던 애창곡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그날만은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얼마동안 나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집안에서 잔디를 가꾸면서 소일했습니다.
1983년 차범석은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교수로 부임하고,
부임 일년만에 학장직을 맡게 된다. 1980년 초에 군사독재정권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생들의
시위 속에서 이 나라 교육의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청주대학에서
어느 날 겪었던 학생들의 난동은 그를 괴롭혔다. 그는 학원의 민주화가
일부 학생들의 폭력과 파괴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실의 속에서 학장직을 내놓았다.
1986년 봄, "88서울예술단" 초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87년
창단 공연으로 오태석의 작품 "새불"(이기하 연출)을 무대에
올렸다.
작곡에 김영재(국악), 강준일(양악), 안무에 최현, 미술에 이만익, 의상에
이병복, 조명에 유덕형, 무대감독에는 유경환이 맡았다. 그러나 이 공연은
혹평을 받았다. 차범석은 분하고 슬펐다. 그는 서울예술단에 사표를
내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은 차범석을 잊지 않았다.
80년대에 그에게 안겨진 수많은 영예로운 상이 그것을 입증했다.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동랑 유치진연극상, 이해랑연극상, 성옥예술상, 금호예술상,
서울시 문화상 그것은 그가 문화예술계에서 겪은 인고의 세월을 위로하는
꽃다발이었다. 그의 공적을 인정한 것은 상만이 아니었다. 1981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2000년에는 예술원 회장이 되었다. 회장 이전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직과 광주비엔날레이사장을 맡고 문화예술진흥사업에 헌신했다.
흘러간 사랑과 미움의 세월이 “동전의 앞뒤가 아니라 앞도 뒤도 아닌
하나였다."는 것을 나이 70이 되어 깨닫게 된 그는 “과거는 언제나
그립고 추억은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몇 가지
생활신조를 갖고 있다. “절망이나 좌절은 하지 않는다."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 “박수를 받을 때 퇴장해야 한다"
“인생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더 중요하다." “무엇인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가야한다," “물욕과 출세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 마음에 드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차 : "밀주", "산불", "새야 새야 파랑새야","꿈
하늘"좦입니다.
이 : 한국 연극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차 : 연극 교육문제, 아이덴티티 문제, 전통의 문제, 통일문화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차 : 문예진흥원의 독립과 자율성 보장, 사후지원과 사후 평가제도의
도입입니다.
이 : 희곡창작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차 : 무엇을 쓸 것인가, 주제 선택이 중요합니다. 구상을 오래 하지요.
"산불"은 10년을 구상해서 1개월만에 써냈습니다. 대사를
먼저 생각하고, 혼자서 중얼 중얼 읊조린 다음 써나가면서 동시에 무대를
머리 속에서 그려봅니다.
이 : 하루일과 속에서 특히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차 : 술 한 잔 마시는 시간이죠.
이 : 예술원에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차 : 지방문화 발전을 위해 사랑방 강연회를 더 넓게 해 보고싶습니다.
이 : 건강 비결은 무엇입니까?
차 : 소식(小食)에다 생선과 야채 위주로 골고루 먹는 밸런스 식사입니다.
그리고 많이 걷습니다.
이 : 무용을 좋아하시는데, 특히 좋아하는 무용가는 누구입니까?
차 : 이매방, 최현, 안신희입니다.
이 : 현재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계십니까?
차 : 동백림 사건에 희생된 어느 남자 얘기입니다. 실제 이야깁니다.
휴가조차 잊은 그의 연극인생
이 : 미래의 젊은 극작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차 : 고전 명작을 많이 읽어야 한다. 비평의식을 가져라, 인간적으로
성숙해져라. 무대기능을 터득하라. 끊임없이 쓰고, 가능하면 공연이
되도록 힘써라 등 수많은 극작가들이 너 나 없이 알고 있는 아주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중요합니다.
이 : 여행을 좋아하시죠. 매년 외국 나들이하시는데, 앞으로 가고 싶은
곳이 어디십니까?
차 : 아프리카입니다.
이 : 은퇴하시면 무엇을 할 예정이신가요?
차 : 고향에 내려가서 후진양성에 힘쓰겠습니다.
평론가 유민영은 그의 좥차범석론좦에서 쓰고 있다.
“차범석의 작품세계는 리얼리즘을 표현수단으로 삼기에 적합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서민들의 가난한 삶, 섬사람들의 애환, 6.25 전쟁의 상처,
문명화의 여파로 생긴 인간성 상실과 소외된 인간의 비극, 애욕과 갈등,
정치의 허위, 위선, 비리, 구시대와 신시대 삶의 충돌과 전통적인 것의
몰락 등 다양한 주제, 그리고 사랑의 주제 등이 그의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차범석 자신은 그의 저서 좥동시대의 연극인식좦 속에 실린
평론에서 말하고 있다. “리얼리즘 연극이란 우리가 직면하고 있거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을 대상으로 하여, 그 현실을 인식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표현하는 3단계적 형상 과정을 밟고 있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헨릭 입센은 그의 70회 생일 날에 말했다. “나는
신바람 나지만, 진이 빠지는 희곡창작 생활에서 한 번도 휴가를 얻은
적이 없다." 유진 오닐은 말했다. “희곡을 쓰는 일은 내 생활에서
휴가를 얻는 일이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휴가가 필요 없다." 두
사람 모두 한 평생 죽으라고 희곡 쓰기에 몰두해서 세계적인 명작을
남긴 극작가들이다. 극작가 차범석도 연극에 미쳐 휴가를 잊은 인생을
살았다. 35년간 사귄 희수를 맞는 친구를 향해 영화감독 김수용은 며칠
전 필자와 합석한 술자리에서 적절하고도 간결하게 차범석 평을 했다.
“그는 경량이다. 그는 정신이 맑다. 그는 속된 욕심을 버린다."
숨이 넘어갈 듯 나를 침묵시킨 명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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