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 여행의 만남 6 / 목포와 문화예술인

예술과 문화와 인정이 풍부한 곳, 목포

장영우 (문학평론가, 동국대교수)

 

서울-목포를 잇는 국도, 1호선

목포로 가기 위해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두 시간 남짓 달리다가 회덕에서 호남고속도로 길을 바꿔 광산 인터체인지에서 국도로 접어드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런데 국도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던 운전자는 목포를 가리키는 도로표지판을 보고 갑자기 당황하게 된다. 이제까지 13번 도로로 표시되어 있던 국도가 느닷없이 1번 국도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면서 1번이란 표시에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고속도로가 그렇듯이 1번 도로는 당연히 경부선이어야 한다는 선입견 때문일까, 서울-목포를 잇는 국도가 1호선이란 사실이 초행자들에게는 여간 생소한 게 아니다. 엄연한 사실을 가지고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일 자체가 목포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일로 비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정관념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경부고속도로가 1호선이듯이 국도 또한 그러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 점을 확인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지내온 타성에 물들어 버린 것이다.
국도 1호선의 시발지는 서울이 아니라 목포이고, 그 종착지도 서울이 아닌 신의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도로가 뚫리게 된 것은 일본의 조선침략과 무관하지 않은데, 서울-목포를 잇는 도로를 1호선이라 부른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86년 대통령령에 따라 국도 1호선은 목포시에서 신의주까지의 도로로 정해졌는데, 이는 종선(縱線)의 도로는 남쪽을 기점으로 하여 홀수 번호를 부여하고 횡선의 도로는 서쪽을 기점으로 짝수 번호를 부여한다는 기준에 의한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목포와 신의주를 일직선으로 잇는 국도가 1호선이 되었고 목포와 부산을 가로지르는 국도는 2호선이 된 것이다. 어쨌든 이 기준에 따르면 목포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국도의 번호를 매기는 데 있어 가장 유리한 고장일 수밖에 없다.

일제시대와 함께 번화하고 패망과 함께 시든 도시

어스름녘에 목포시내로 접어들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시구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문병란 시인이 절규하듯 토해낸 "목포"였다.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중략…)
 
벌거벗은 빈 산/돌멩이 만지며 풀포기 뽑으며
서쪽 끝에 와서/삐비꽃처럼 목을 뽑아올리다
로빈손 크르소가 되어버린 사람들/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다른 어떤 고장보다 걸출한 예술인을 많이 배출했고 지금도 풋풋하고 넉넉한 인심이 살아 있는 목포를 어째서 이 시인은 인생의 낙오자가 모여 쓴 술잔을 기울이는 곳이라고 표현했을까. ‘목포의 눈물'이 단순한 유행가의 제목으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목포를 상징하는 기호가 되어 버린 사정은 무엇일까. 목포가 타향인 사람들에게 그곳은 눈물과 한의 공간이거나, 고작해야 세발낙지와 홍어 등의 싱싱한 먹거리가 풍성한 곳일 뿐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목포상고와 하의도란 낯선 섬이름이 세인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으나, 목포는 로빈슨 크루소가 살았던 무인도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관심밖에 내던져진 공간이었던 것이다.
목포의 영욕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궤적과 정확하게 반비례한다. 다시 말해 목포가 가장 활기차고 번창했던 것은 일제시대였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목포의 번화(繁華)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고 말았던 것이다. 인천, 부산, 원산에 이어 네 번째로 개항한 목포는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고 많은 문물이 이곳을 거쳐 내륙으로 운송되면서 3대항 6대도시의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이후 이곳을 거치는 문물의 양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6·25 당시에는 미국의 문물이 인천과 부산을 통해 유입되면서 목포는 급격한 쇠락(衰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광주보다 번창했던 목포가 이제는 인근 도시에 비해서도 훨씬 왜소하고 낙후한 고장으로 위축되고 말았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옛말은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목포 시내에는 아직도 일제시대의 적산가옥이 즐비하다. 상점의 간판은 서울과 다를 게 없고 그 내부도 개조되었으나, 2층 목조건물의 외양은 일제시대 그대로다. 유달산에서 내려다 본 목포역 부근은 여느 대도시와 달리 고층건물이 별로 눈에 띄지 않고 2, 3층의 낙후한 건물만 어깨를 부비며 조밀하게 임립(林立)해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내 눈에는 그게 오히려 정겹게 여겨진다. 무미건조한 고층건물이 비온 뒤의 대나무처럼 멋없이 서있는 서울과는 달리 목포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층의 목조·벽돌식 건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논리로 따진다면 적산가옥을 헐어내고 세련된 고층빌딩을 세우는 것이 훨씬 높은 수익을 보장하겠으나, 매사를 장삿속으로 따지는 행위는 너무 야박해 보인다. 더군다나 목포는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예향'이고 바로 그 점을 목포인들은 커다란 자긍심으로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내 소망으로는, 적산가옥을 부수고 새 빌딩을 짓기보다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여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작부의 요란한 화장같은 간판의 색깔과 국적불명의 서체를 고풍(古風)과 현대미가 조화된 것으로 바꾸고 건물의 페인트 색깔도 격조있게 채색할 일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기만 하는 고층빌딩 숲에서 생활하던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사람들이 목포에 와 반세기 전의 건물을 보면서 느끼는 정취도 그럴 듯 하려니와, 그것들을 보며 오욕으로 점철된 과거사를 되돌이켜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가요계의 여왕 이난영, "목포의 눈물"

유달산은 목포의 명물이다. 하기야 목포의 명물이 어디 유달산 하나 뿐이겠는가.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목포의 대명사가 된지는 하마 오래이고, 그 노래가사 때문에 널리 알려진 ‘삼학도', 통째로 씹을 때 입안 가득 용트림을 치며 달라붙는 세발낙지 등이 모두 목포의 특산품이다. 유달산만 해도 노적봉, 이난영 노래비, 목포시사(木浦詩社), 유선각, 부동명왕(不動明王) 암각 등 볼거리가 쏠쏠하다. 본명이 옥례인 이난영은 1916년에 태어나 제주도에서 자랐는데 그녀의 재주를 눈여겨보았던 극장주인의 소개로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노래하는 가수)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녀가 ‘가요계의 여왕'이란 칭호를 얻게 된 것은 OK레코드 회사의 이 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 작사가 문일석의 곡 좥목포의 눈물좦을 취입하면서부터였다. 쟁쟁(錚錚)하면서도 간드러질 듯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녀의 노래는 순식간에 대중의 심금을 사로잡았고, 지금도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국민의 애창곡으로 불려지고 있다.

"사의 찬미",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의 사정을 대신 전하는 노래

이난영과 달리 정규 음악학교를 나온 성악가이면서 대중가요도 불렀던 윤심덕 역시 목포와 한 가닥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사범과를 나온 윤심덕은 김우진과의 정사(情死) 때문에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녀는 귀국하자 곧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어 숱한 남성의 애간장을 녹였던 모양이다. 당시 사정을 신문은 다소 비아냥 섞인 어투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그가 타고 나온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의 흐믈거리고 껑충대는 그의 모든 흠절을 넉넉히 감추어 줄 뿐 아니라 그의 목소리에 홀려서 그가 출연하는 음악회마다 침을 줄줄 흘리고 따라 다니는 청년 신사들―그 수를 헤일 수 없다"("조선일보" 1924. 12. 26)
김우진과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진 사건은 조선문화계와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커다란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항간에는 온갖 억측과 야비한 소문이 무성했으나 그들의 비련은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좥도나우강의 잔물결좦을 4박자 리듬으로 편곡하고 직접 가사를 붙여 부른 좥사의 찬미좦만이 두 사람의 맺어질 수 없었던 애절한 사랑의 내력을 편린으로나마 전할 따름이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대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너 찾는 것 괴롬이다
웃는 꽃과 우는 새가/그 운명이 모두 같으니
생의 열중(熱中)인 가련한 인생/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이다

허영에 빠져서 날뛰는 인생아/너 속혔음을 네가 아느냐
근본 세상은 너에게 허무니/너 죽은 뒤에도 세상은 없도다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일생 저래도 한 세상/돈도 명예도 내 님도 다 싫다

살수록 괴롭고 갈수록 험하니/한갓 바람은 평화한 나의 주검
내가 세상에 이 몸을 감출 때/괴로움도 쓰림도 사라져 버린다

이 가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좥사의 찬미좦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윤심덕과 김우진이 새파란 젊음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이 가사는 전달한다. 무대에서는 ‘프리 마돈나'로 화려한 조명을 받고 무대 아래에서도 뭇남성들의 찬사와 질시를 한 몸에 받으며 인생의 절정기를 보냈던 윤심덕이, 살수록 괴롭고 갈수록 험한 세상살이를 죽음으로 끝내려 했던 애절한 사연이 궁금하지 않은 바 아니지만, 모든 것은 이미 검푸른 바다 밑에 수장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사연의 일단을 되새겨 보는 까닭은 그들을 절망케 했던 생의 절벽이 우리에게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절망케 하는 일이 어찌 사랑문제 하나일 것인가. 시시각각으로 밀려드는 해일과도 같은 장애에 부닥칠 때 윤심덕의 좥사의 찬미좦를 읊조리며 자기위안을 찾는 게 범속한 생활인의 일상 아니겠는가.
예술의 고장 목포를 대표하는 예술인을 한 사람만 꼽으라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주문일 터이다. 문학의 박화성(소설)·김우진(희곡)·김진섭(수필)·차범석(희곡)·김은국(소설)·김현(평론)·김지하(시)·천승세(소설), 한국화의 우뚝한 계보를 형성하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의 소치 허련·미산 허형·남농 허건 및 서양화가 수화 김환기, 그리고 서예의 소전 손재형, 승무의 대가 이매방, 판소리의 조상현·신영희, 가요계의 이난영·남진 등 말 그대로 기라성같은 예인들이 누구도 정상자리를 양보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환기·박화성·허건·차범석 등 목포출신의 예술인들이 예술원회원에 네 명이나 등재된 사실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자부심은 사뭇 하늘을 뚫을 듯하다.

박화성, 조선사회의 변혁을 외친 여성작가

소영 박화성(素影 朴花城, 본명 景順, 1903∼1988)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현실에 밀착하여 조선의 궁핍한 현실과 그러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투쟁하는 인물의 형상화에 관심을 집중한 작가이다. 대부분의 선각자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어린 시절에 신동이란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숙명여고보 시절에는 영친왕 앞에서 풍금을 연주했고 열 다섯의 어린 나이에 교단에 서는 등 천부의 소질이 일찌감치 그 예리한 날과 광채를 빛냈다. 특히 그녀는 일제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지목받은 오라버니(박제민)와 미션계통인 정명여학교의 항일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저항정신을 간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화성은 "추석전야"("조선문단" 1925. 1)로 등단했으나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해 1932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좥하수도 공사("동광" 1932. 5)를 발표한 뒤에야 비로소 작가로서의 성가를 드높이기 시작한다. 초기에 지식인 주인공의 이념적 투쟁을 다룬 소설을 썼던 그녀는 1935년 이후 자신의 창작방법을 반성하며 현실과 이념의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경향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를테면 그녀의 초기작에는 노동 및 소작쟁의를 주도하거나 지원하는 지식인이 단골로 등장하였다면 1935년 이후에는 농촌과 도시의 참혹한 삶의 현장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이 주류를 형성한다. 그녀의 대표적 단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한귀(旱鬼)"에는 지독한 가뭄에 고통 당하는 농촌의 비참한 정경이 극사실적인 묘사와 점층적 구성법에 의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이와 함께 박화성은 여성문제에도 예각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는데, "추석전야"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여성소설로 평가되며 장편 좥비탈좦에는 당시의 왜곡된 여성교육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나타나 있다. 그녀는 현모양처 교육과 서양인에 의한 여성교육이야말로 ‘일선동화(日鮮同和)'를 획책하는 일제의 교육방침에 따른 것이란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였고 그 점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위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고도 창작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던 그녀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 작가이다. 대한민국문화훈장, 제1회 예술원상 등 그녀가 받은 상의 종류와 수효는 그녀가 이룩해 놓은 문학적 성과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극히 부분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목포시 유달산록의 대의동에 <박화성문학기념관>이 소롯이 자리하고 있다. 유달산 노적봉 사잇길로 내려가는 것이 운치를 더해 주는데, 일제시대에 지어진 벽돌식 건물도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보탬이 되는 듯하다. "황구의 비명" "만선"의 작가 천승세, 그리고 평론활동을 했던 천승준, 천승걸 형제가 모두 박화성 여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인 사족이 될 터이다.

김진섭, 깊이있는 문체의 아름다움 느끼게 한 수필가

청천 김진섭(聽川 金晉燮, 1903∼?). 고등학교 시절 그의 수필을 읽으며 감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기품있는 문체란 게 무엇인가를 막연하나마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변연(便娟) 백설이 경쾌한 윤무(輪舞)를 가지고 공중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때, 이 순치(馴致)할 수 없는 고공(高空) 무용이 원거리에 뻗친 과감한 분란(紛亂)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한 심사를 가지게까지 하는데, 대체 이들 흰 생명들은 이렇게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이는 자유의 도취 속에 부유(浮遊)함을 말함 인가? 혹은 그는 우리의 참여하기 어려운 열락(悅樂)에 탐닉하고 있음을 말함인가? 백설 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 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 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 "

"백설부(白雪賦)"의 한 구절이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겐 외계인의 암호와 같은 문장이겠으나 당시 나는 그 유장한 문장의 호흡과 다소 과하게 섞어 쓴 한문어투에 꽤나 매료되었던 것이다. 뿐이랴, 우리는 김진섭의 수필뿐만 아니라 국어교과서에 실린 글들은 거의 모두를 외워야 했다. 당시로서는 길고 난삽한 문장을 외우는 일이 고통 그 자체였으나,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명문장을 외우는 것처럼 좋은 문학수업이 없다는 옛말의 진리성을 깊이 신봉하는 자이다.
목포 유달산록의 옛 남교동 135번지에서 출생한 김진섭은 1930년대와 40년대를 대표하는 수필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1950년 납북되어 지금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그는 1921년 열여덟의 나이에 도일(渡日)하여 일본 법정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는였데, 이 시기에 손우성·이하윤·정인섭·이선근 등과 의기투합하여 <해외문학연구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좥해외문학좦을 발간한다. 부인과 아들 형제도 모두 세상을 뜬 지금 그를 기리는 표지석만이 목포시 용해동의 향토문화관 잔디밭에 처연히 서있을 따름이다.

김현, 4·19세대 혹은 한글세대 비평가

향토문학관에는 김진섭의 문학 표지(標識)와 함께 평론가 김현의 문학비가 있다. 그 규모에 있어서 김현의 문학비는 김진섭의 그것에 비견하는 일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크고 운치가 있다. 후손이나 제자를 둔 이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김현(본명 김광남, 1942∼1990)은 전남 진도에서 출생하여 목포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한지 한 달이 지날 무렵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4·19를 목격하면서 ‘자유'의 의미를 가슴에 새긴다. 그가 훗날 자신을 일컬어 ‘4·19세대 비평가' 혹은 ‘한글세대 비평가'라 자처한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된다. 실제로 그는 어느 글에선가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 있었다. 나는 거의 언제나 4·19 세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 아니 자유로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해온 정신적 투사 또는 수도승의 모습을 닮아 있는가. 1962년 "나르시시 詩論"으로 데뷔한 그는 최하림·김치수·김승옥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발간하였고, 1970년 김병익·김치수 등과 계간지"문학과 지성"을 창간함으로써 한국문학의 한 날개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문학비평가로서의 김현의 명성과 영향력은 한마디로 지대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직접적 인연을 맺은 제자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의 글을 해타(咳唾)삼아 문장수련을 쌓은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은 스승의 문체를 아예 ‘김현체'라 부른다.
선생님은 당대의 문체를 이루셨다. 그 문체는 수사학이 아니라 성찰에서 나온 문체이다. 그것을 나는 ‘김현체'라고 불렀다. 김현체는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식의 양주동의 험악한 국한문 혼용체의 현학 취미, 현란한 비유와 은유로 치장된 이어령식의 겉멋에 비하면 ‘한글로 생각하기 시작한' 세대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제 스승을 높이기 위해 당대의 대가를 흠잡은 게 눈에 거슬리지만, 제자의 스승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존경이 담긴 글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김현만큼 동시대 문학인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은 평론가도 찾기 힘들다.

김우진, 인습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은 작가

김우진의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水山)이다. 수산(水山)이란 호는 현대 작가인 한수산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언젠가 한수산씨의 이름에 얽힌 일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수산'이란 이름이 하도 쉽고 흔해서 국민학교 담임이 “네 부모님은 퍽 무식한 모양이구나"고 비아냥거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조부께서는 이름있는 한학자셨다고 한다. 김우진은 두 개의 호 가운데 ‘수산(水山)'을 더 즐겨 쓰지 않았나 싶다. 이런 추측은 그가 윤심덕과 함께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에 승선하면서 자기 이름을 ‘김수산'으로 기재했던 점에서 유추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40여편의 시와 5편의 창작희곡을 쓰고 <토월회>를 통해 본격적인 극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한국 근대희곡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해 유민영 교수는 “희곡사상 인습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장 절박하게 부르짖은 작가"로, 김윤식 교수는 “서구 극문학을 가장 본격적으로 배운 작가로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예술적 처리로 극복하려고 애쓴 작가"라 높이 평가한다.

차범석, 희곡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임을 실천한 리얼리스트

차범석은 1924년 목포시 북교동에서 태어난 현대 한국의 대표적 희곡작가이다. 그는 최근까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서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발전과 진흥에 혼신의 정열을 기울였다. 해방 후 대학시절부터 연극활동에 몰입했던 차범석은 목포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다가 1955년 좥조선일보좦 신춘문예에 좥밀주(密酒))좦가 가작으로 뽑히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선다. 가작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듬해 좥귀향좦으로 좥조선일보좦 신춘문예의 문을 재차 두드려 당당히 당선된다. 이를 기회로 상경한 차범석은 놀라운 창작열을 불태우는 한편 좥제작극회좦 좥산하좦 등의 극단을 창설함으로써 전후의 황폐한 연극계를 소생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목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주변의 궁핍함에 일찍부터 시선을 돌려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의 소박한 인정과 삶의 의욕을 즐겨 작품의 제재나 주제로 다루었다. 유치진의 영향을 받은 그는 좥무엇을 쓸 것인가좦라는 글을 통해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현실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해 온 리얼리스트이다. 이 때문에 “스트린드베리에서 시작된 보다 깊은 혼의 모색이 차범석의 작품에는 없다(이근삼)"의 애정어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급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양상을 진지하고 다각적으로 해부한 그의 작품세계는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을 연상시킨다. 그는 대중극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여 1980년에는 MBC TV의 좥전원일기좦를 집필하기도 했다. 앞서말한 것처럼 차범석은 예술원상(1982)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1991), 서울시 문화상(1997) 등 굵직한 상을 수상하였다.

김지하, 자유와 민주주의 상징

1941년 목포시 대안동에서 출생한 김지하의 본명은 영일(英一)이고, 좥토지좦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그의 빙모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1954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원주로 이주하여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서울의 중동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면서 학업보다는 민중의 수난사에 더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데 시작(詩作)에 손을 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김지하란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담시 좥오적(五賊)좦을 발표한 뒤이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다 /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 볼기가 확
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이렇게 시작된 좥오적좦이 발표되자 박정희 정권은 이 작품이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한 것"이란 죄명으로 김지하를 감옥에 처넣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김지하란 무명의 청년시인은 일약 세계적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후 김지하의 반평생은 투쟁과 투옥으로 점철된 악몽의 터널이었으나 1975년에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 상> 특별상 수상자로 결정되는 등 명예가 뒤따르기도 하였다. 당시 <로터스 상> 심사위원들은 “김지하는 현재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라는 뜻을 담은 석방요청서를 박정희 정권에게 발송하기도 했다. 김지하가 오랜 도피와 투옥생활에서 해방된 것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의 일이다. 한때 ‘김지하 현상'이라 할만큼 젊은 대학생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나 생명을 중시하자는 그의 사상이 잘못 이해되어 격렬한 비판에 부닥치기도 했다. 최근 그는 <율려운동>과 <신인간운동>의 보급 전파에 진력하고 있는데, 그 사상의 요체를 황지우는 ‘줏대 홍익인간' 또는 ‘우주적 사색을 감당하는 신인간'이란 말로 간명히 요약하고 있다.

목포의 대표적 문화공간 남농기념관의 역사와 의미
이로동 부근에는 문화관과 기념관이 밀집해 있다. 웅장하게 신축된 문화예술회관이 바닷가에 인접해 있으며 그 옆에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자리하고 있고 건너편에는 남농기념관, 향토문화관, 자연사문화박물관, 도예엑스포전시관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목포가 과연 예술의 도시임을 웅변하고 있다. 남농기념관은 한국 남종화의 대가 남농 허건(1907∼1987)이조부(소치 허건)와 부친(미산 허형)의 작품 및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한 목포의 대표적 문화공간이다. 남농의 조부 소치 선생은 일찍이 초의선사와 추사선생에게 사사하여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불렸다. 미산 허형(許瀅)은 소치 선생의 넷째 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나 목포로 이주한 까닭에 목포 최초의 화가로 사랑받고 있다. 원래 소치 선생은 장남 은(殷)의 재능을 높이 사 넷째 아들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뒤늦게 형(瀅)의 뛰어난 재질을 발견한 뒤 미산(米山)이란 호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장남은 대미산, 사남은 소미산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미산(米山)'하면 허형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소치는 넷째 아들에게 ‘작대기 산수(山水)'를 그리라고 가르쳤으나 미산은 궁핍한 살림 탓에 잘 팔리는 세필 산수밖에 그릴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이문열의 좥금시조좦의 석담과 고죽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서예에서 무엇보다 ‘도(道)'를 중시했던 스승 석담과 ‘예(藝)'를 강조했던 사제간의 대립은 전통적 예술관과 서구의 영향을 받은 근대인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평생 스승을 거부했던 고죽이 죽음을 앞두고 ‘금시조'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행위로 보인다. 어쨌든 소치와 미산 두 부자의 관계도 석담·고죽의 그것처럼 애증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남농 허건은 미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게 그림을 배워 제9회 선전(鮮展)부터 23회까지 연속 입선하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그는 한말 3대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무정 정만조 선생을 진도에서 만나 ‘남농'이란 호를 받았다. 유달산 자락에 있는 ‘목포시사(木浦詩社)'는 국권 상실의 비탄과 쇠퇴한 유교의 기풍을 진작하기 위해 무정을 비롯한 104인의 출연으로 건립한 건축물이다. 남농 미술관에는 소치·미산·남농의 작품과 이른바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 일컬어지는 문중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는 옛말을 실감케 한다. 비록 회화에 문외한일지라도 이들 4대의 그림이 각각 어떤 특징과 차이를 보이는가를 나름대로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큰 재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향토문화관 1층에는 남농이 기증한 수석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형상과 문양은 조물주의 신비한 솜씨와 자연의 오묘한 조화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수석 하나하나가 그대로 자연의 모습을 닮아 있어 스쳐 지나가며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 공간이 허락한다면 좀더 넓은 곳에 드문드문 작품을 전시해 한 점의 수석 앞에서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게 마련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밖에도 향토문화관에는 세계 각국의 화폐와 동전, 산호, 패류(貝類) 등이 전시되어 있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목포 문화재와 바다관련물품 등을 전시한 곳, 해양유물전시관

해양유물전시관은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한 문화재를 비롯하여 바다와 관련된 물품 등을 전시한 곳으로 아이들에게 퍽 인기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바다가 내다보이는 곳에 휴게실을 마련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현대적 건축의 조형미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바다가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절로 한 잔의 뜨거운 차가 생각날 정도였다. 내가 그곳에 들렀을 때는 일요일인데도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와 광장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그 정경도 무척 한가롭고 아름다웠던 데다가 이 아이들의 관람태도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인솔교사의 당부가 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아이들은 결코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다니지 않으면서 차분히 전시물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반성해야 할 사람은 어른들 아닐까. 어딜 가나 방자할 정도로 활개를 치고 다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들은 단체 관광객들이다.
이로동 부근의 문화관, 기념관만 둘러보는 데도 한나절의 시간이 오히려 부족하다. 좀더 차분히 전시물을 완상하면서 세속의 진잡(塵雜)을 씻고자 한다면 아예 하루 품을 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서둘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다소 한심스럽게 여겨진다. 어째서 나이가 먹을수록 더 바빠지기만 하는 것일까. 모든 게 욕심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 자책하면서 갓바위를 주마간산격으로 훔쳐보고 하당쪽으로 향한다. 하당 지역은 아파트 단지 공사로 무척 어수선하고 분주하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위성도시 또는 신도시가 들어서듯 목포에도 신도시가 들어서는 것일까. 이곳은 젊은층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라 들었으나, 모처럼 목포를 찾은 이들에겐 되레 어색하기만 하다. 이젠 어딜가나 지방색을 느끼게 하는 곳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목포의 자랑거리를 지키는 것

아직 소개해야 할 것들이 많으나 이젠 그만해야겠다. 내게 주어진 지면을 이미 초과한 데다가 하루 이틀 정도의 여행으로 목포를 자세히 소개하기에는 내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다보니 정작 목포의 따뜻한 인심과 풍성한 먹거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말았다. 수산시장이나 포구의 좌판에 앉아 세발낙지를 씹으며 목포 아낙네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도 들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 지방의 토속적 분위기른 그런 곳에서나 제대로 맛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목포는 지금 변하고 있다. 이난영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삼학도가 뭍의 한 자락으로 편입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하당 지역은 신도시 개발로 한층 분주하다. 인천과 목포를 잇는 서해 고속도로도 곧 완성될 것이며 무안 국제공항과 대불산업단지 등 목포 인근에는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사업이 역동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사실 목포는 환태평양 시대를 맞아 매우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을 구비한 항구도시이다. 따라서 서해고속도로가 완공되고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와의 무역 거래가 보다 활발해지면 목포항은 예전의 영화를 되찾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태만으로도 목포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 문화도시이다.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이들과 고향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목포의 자랑거리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목포에서만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목포사람들이 제일 잘 알 터이므로, 그것을 세련되게 보존하는 방향으로 목포를 개발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