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 4 / 해외무대를 빛내는 한국의 미술가들 |
일방통행식 관계가 아닌, 상호교류를 통한 미술활동이 중요하다 박용숙 (미술평론가, 동덕여대 교수)
미술가는 아니지만, 원효대사(元曉大師)는 불법을 구하기위해 중국으로 들어가다가 저 유명한 ‘해골바가지’의 경험을 통해 외유를 포기하고 신라로 되돌아와서는 중국인의 불경줜佛經)보다도 더 위대한 경전좥금강삼매경좦을 저술한 바 있다. 진리는 먼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자신에게 있다는 교훈을 남겨준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이 다름아닌 그림이나 조각과 같이 기술을 배우는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타자와의 상호영향속에서 새로운 양식은 생겨난다 동쪾서양 미술사를 보면, 미술도 하나의 생명체와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타자와의 상호 영향속에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말은 화가나 조각가, 혹은 건축가 등이 직접 선진국의 미술을 시찰하거나 그 현장에서 기술적인 것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문자그대로 미술의 속성은 눈으로 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손으로 만들거나 그리는 기술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을 전수해야 했던 원효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예컨대 중국의 유명한 화가 장승요(張僧繇)가 신라로 건너와 중생사(衆生寺)에다 관음상을 그림으로써 신라 불화양식에 영향을 미쳤다던가, 혹은 고구려의 담징(曇徵), 백제의 아좌태자(阿左太子)가 일본에 건너가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림으로써 일본 불교미술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도 그 좋은 예가 된다. 그러나 조선조말의 추사(秋史)가 중국으로 들어가 청대(淸代)의 저명한 묵객(墨客)들과 교류 후 만들어진 추사체(秋史)의 경우는 어느쪽이 어느쪽에게 직접적으로 기술(예술)을 전수했던 일방통행식 관계가 아니라, 상호 교류를 통해 서로의 입장이나 사상을 비교하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이른바 미술교류에 있어서 대등한 교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해외유학이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한국 미술은 이와같은 건강한 의미의 교류와 그 기반이 무너지고 일방적으로
우리쪽이 구도의 길을 떠나는 소위 미술가의 엑소도스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의
개화기에 고휘동, 김관호, 나혜석, 김복진과 같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20세기가 막 시작되자마자, 일본으로 몰려가 일본이 그들 나름으로 소화한
서양미술을 배워오게 된다. 그러나 더러는 잘못 이해되고 그래서 설익은
서구의 현대미술이 이땅에 심어져서 한층 더 괴이하게 왜곡되어 버린
우리의 현대미술은 다시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세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다시한번 미술가의 엑소도스가 시작된다. 일본에 의해 잘못
배워 서구의 현대미술을 직접 현장에 가서 배워 온다는 명분 때문에
그 엑소도스는 기대해도 좋을만한 것이었고 따라서 50년대 이후에는
많은 미술가들이 기회만 된다면 방문이나 시찰, 혹은 유학의 명목으로
파리나 뉴욕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범위도
넓어져서 독일, 이탈리아, 영국, 일본 등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동기야 어쨌건, 아예 그 나라에 주저앉아 그곳에서 작품생활을 하는
고독한 한국인 작가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개중에는 백남준과 같이
세계적인 작가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오늘날
외국에서 그 나라의 국적이나 시민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모국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국내의 미술계나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가들을 살펴 보면, 우선 미국에는 백남준, 곽훈을 비롯해서 강익중,
조숙진 과 같은 젊은 화가들, 그리고 이우환, 곽인식, 곽독준과 같은
화가들이 있으며, 프랑스에는 이미 작고했지만 이응로를 비롯하여 김창렬,
김기린이 있다. 또 독일에는 이영향Lee Hang Ka, 강진모와 같은 화가들이
최근 국내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국적의 미술가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백남준은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에서 예술학을 공부하고, 곧이어 독일의 뒤셀돌프에서 당시 첨단공학의 하나였던 비디오 기술을 배우면서 그곳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는 캔버스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미술이 첨단과학과 손을 잡으며 새로운 메시지를 창출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그 시기에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그의 시도는 적중했다. TV와 비디오에 대해 완벽하게 소화했던 그는 뉴욕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음악가였던 죤쪾케이지와의 ‘해프닝’을 연출하면서 약관의 나이로 일약 세계의 주목을 끈다. 그의 죤케이지와의 ‘해프닝’이벤트는 그로서는 ‘비디오쪾아트’라는 혁명적인 양식의 발명을 예고하는 서막이었고 곧이어 그의 비디오쪾아트작품은 전위예술가라는 이름과 함께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 그의 비디오쪾아트는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하는 매체혁신으로 단지 그림그리기가 손작업(아나로그)에서 자동기술(디지탈)로 바뀌게되어 다소 소극적인 것이었으나 점차 비디오의 기능이 강화되고 텔레비젼 자체가 설치 작업의 한 표현매체로 전용됨으로써 명실공히 비디오쪾아트는 20세기미술의 혁명이라는 적극적인 평가를 받게되면서 텃세가 높았던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백남준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더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 한 일이다. 단지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그가 뉴욕에 버티고 있음으로해서, 한국의 유학생이나 그곳에서 활동하는 젊은 한국인 국적의 미술가들에게 더없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우환의 활동,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량역할 담당 백남준 못지않게 세계화단에서는
물론 우리나라 현대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이우환은 6쪾25 사변 중에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중, 일본으로 밀항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대학 문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에도 작품활동에 전심하였으며
69년에는‘사물에서 존재로’라는 논문으로 ‘평론상’을 받아 미술
비평가로서도 주목을 받으며 활약하게 된다. 그의 미술 비평은 70년대의
일본화단에서 후기모더니즘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무시못할 이론적
토양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당대 일본의 젊은 화가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물론 이우환의 활동은 일본화단에서만이 아니고
70년대에 일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전위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국내 미술과도 긴밀한 유대관계가 있다. 70년대 급진적인 미술의
기수였던 박서보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A쪾G그룹은 사실상 이우환의
협력이 있으므로해서 그 활동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음양 사상으로 주목받는 독일의 리한카, 그리고 강진모 미국이나 프랑스 다음으로
눈길이 가는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은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현대미술의 대명사였던 전위미술을 박해하거나 속박하던 곳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유럽에서도 그러하지만 우리나라 미술학도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던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분위기는 전후에도 어느정도
남아 있어서 백남준이 미국으로 도망가다시피했던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음악쪽에서는 윤이상과 같은 음악가가 그곳에서
전위음악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지만, 그것은 독일이 전통적으로 미술보다는
음악에서 단연 프랑스나 기타 유럽국가를 능가하는 문화적인 전통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현재 독일에는 앞에서
소개한 백남준, 이우환, 김창렬, 김기린과 같은 잘 알려진 거물급 화가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 와서 국내에 알려지고 있는 유능한 젊은
화가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리한카(본명 이영향)나 강진모와 같은
화가가 대표적이다. 캘리포니아 지역 미술에 기여하는 곽훈 물론 이만한 화가들을 모두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들은 그 수에 있어서 단연 으뜸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곽훈(郭薰)은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진 화가로 새삼 소개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는 심심치 않게 국내의 유수한 화랑의 초대를 받아 자주 모국을 드나들고 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졸업후 그곳에 머물면서 피나는 노력끝에 드디어 미국 서부지역 화단의 일원으로써 캘리포니아 지역 미술에 기여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곳 지역 미술관의 여기저기 소장되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국내의 화랑가에서 왜, 그가 인기가 있는 화가인가를 알게 만드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밖에 맨하탄에서 활동하는 미술인들 물론 맨하탄으로 눈을 돌리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화가들이 있다. 우리나라 6,70년대의 해프닝쪾이벤터로 국내에서 화제를 일으킨바 있는 정찬승은 뉴욕으로 건너가 이미 그곳에서 고인이 되었지만, 강익중이나 조숙진과 같은 화가는 그 뒤를 잇는 능력있는 화가들로 정평이 나있다. 강익중은 97년 드디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대상을 받는등, 이미 국내외적으로 주목받는 화가로 성장하고 있으며 조숙진 역시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며 당당히 뉴욕의 주목받는 젊은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90년대초에 뉴욕으로 건너가 그곳 프래트미술대학원을 마친후 그곳에 눌러앉았는데 어려운 생활조건과 싸우며 작품활동에 열중한 나머지 여러 초대전에 초청되며 크고작은 상을 비롯해서 98년에는 뉴욕 맨하탄에 있는 소크라테스 조각공원에 자신의 작품(설치)을 설치하는 영광을 얻기도 한다. 이 외에도 많은 우리나라 화가들이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등지에서도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들은 비록 한국을 대표하는 공인은 아닐지라도 미술활동을 통하여 한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그 나라에 심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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