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장 / 창작공연 활성화 지원작품 '연우무대의 이(爾)'

우리말의 맛, 제유법의 상징성, 놀이성 제대로 보여준 공연

김미혜 (연극평론가)

 

한국연극이 부진한 대표적인 이유는 좋은 희곡의 부재이다. 해마다 최고의 상금이 주어지는 대산 문학상의 경우 희곡부분의 대상 작이 없는 것이 이 현상의 반증이라 하겠다. 그래서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에서는 창작공연 활성화 기금을 마련해 극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극단 연우무대의 47회 정기공연  좥이(爾)좦(김태웅 작·연출)는 바로 이 기금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선 오래 만에 좋은 희곡이 나와 이 기금이 그 본령을 다한 것 같아 매우 고무적이다.

이(爾)라 불리우는 의식있는 광대, 공길

이(爾)는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조선조 연산군 치하 우인(優人)이었던 실존인물 공길이 왕에게서 바로 이 호칭을  들었던 광대이다. 주지하듯 우리 역사에서 천민으로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광대가 이런 칭호를 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허구화된 작품이 "이(爾)"이다. 그러므로 "이(爾)"에서는 폭군으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연산군이 아니라 궁중의 광대 공길이 주인공이다. 작품의 틀거리인 벽사의식(闢邪儀式: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광대들이 귀신 탈을 쓰고 춤을 추는 등의 의식)은 이 작품이 광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     
주인공 공길은 많은 인간관계들의 중심축이다. 연산군에게서는 웃음과 몸(동성애)까지 제공하는 대가로 ‘희락원'의 대봉이라는 종 4품의 벼슬과 사랑을 받고, 장녹수에게서는 질투의 대상이 되고, 끈끈한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져 있는 동료광대 장생과는 서로 다른 인생관으로 대치하고, 다른 광대들과는 상하의 관계에 있다. 이 관계들의 설정으로 컴플렉스 덩어리로 기록되어 있는 연산군의 사도-마조히즘적 폭정과 그로 인한 인조반정, 녹수의 간교함과 현실정치 개입, 광대들의 풍자놀이를 통해 당시 광대들의 실상과 관리들의  부패상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광대 공길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찾기 혹은 작가 김태웅의 정체성 찾기

공길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 관계들은 모두 거의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지만 무엇보다도 장생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의식있는' 광대, 그래서 인조반정의 한 역을 담당하는 장생은 세속적 권력에 취해 있는 공길에게 “난 내 가슴이 벌렁거릴 때만 살아있다고 느껴... 내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살아서 웃고 떠들고, 치받고 얻어맞고, 싸고 갈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도 그걸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공길이 제 자리로, 의식있는 광대로 돌아올 것을 종용한다.  장생의 이 말이야말로 공길이 광대로서,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찾게되는 자극제가 된다. 녹수의 음모로 꾸며진 ‘언문비방서'를 자신이 썼다는 거짓 자백을 하며 공길은 “내가 마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버린 것입니다. 부끄럽고, 차마 고개도 들 수 없는 나를 버린 것입니다. 비단 도포에 빠져 얼빠진 나를 버린 것이옵니다. 이제야 나를 찾은 것입니다. 이제야 이 놈의 가슴이 벌렁거리고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이놈의 허파가 터져 나갈 듯 기쁩니다." 라고 연산군에게 고한다. 이 대목이 이 작품의 절정으로서 광대 공길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찾기가 완성된다. 또한 지나친 해석인지 모르지만 한 예술작품이 궁극적으로는 예술가의 사적(私的)담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철학도로서 연극에 몸바치기로 한 작가 김태웅의 정체성 찾기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처음으로 쓰고 연출한 "파리들의 곡예"(1997)가 서커스의 광대들을 그렸던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공연으로 본 "이(爾)"는 우리말의 맛, 제유법의 상징성, 그리고 놀이성에 그 덕목이 있다. "이(爾)"의 대사들은 우리 배우들의 호흡에 적절하게끔 운율이 있어 그 말 맛이 귀를 즐겁게 한다. 극의 시작 부분에 공길이 연산군에게서 하사받는 비단도포는 의상에 의한 제유로서 세속적 권력을, 이 비단도포를 벗는 것은 그가 정체성을 찾았음을 상징한다. 공길이 도포를 입을 때마다 “이(爾), 니 놈은 본시  여자도 아닌 것이 여자이고/ 때론 앙탈도 부릴까/ 때론 서글퍼 꺽꺽 울기도 하고/ 때론 턱없이 헤헤 웃는구나/ 그것이로? 이(爾), 너는 정히 그것이로?" 하며 연산군의 말을 흉내냄으로써 흉내꾼인 광대의 모습과 정체성을  찾기 위한 자문(自問)으로 기능한다.

우리 전통 연희의 질펀한 놀이성 확인, 연극이란 결국 한바탕 놀이

또한 놀이성은 극 중간중간에 펼쳐지는 광대들의 소학지희(笑謔之戱)로 극대화된다. 광대들의 잡(雜)놀이인 소학지희는 세 번 나오는데 이를 통해 탐관오리의 부패상이 풍자되고 장님들의 양(樣)이 펼쳐진다. 전통과의 접목이  때론 억지 짜 맞추기로 극중에 들어가는 현상도 보이는데 광대를 주인공으로 한 "이(爾)"에서는 극의 절대적 요소이자 주조로 우리 전통 연희의 질펀한 놀이성을 확인시킴과 동시에 벽사의 의식무라는 격식있는 틀거리 속에 연극이란 결국 한바탕 놀이임을 부각시킨다.

배우들의 신체성physicality과 계산된 공연성theatricality이 빛나는 공연

처음으로 대극장을 잘 소화함으로써 자작극을 무대화하는 또 한 연출가의 탄생을 예감하게 한 김태웅은 연산군(김내하)과 공길(오만석)의 캐스팅에서 탁월했다. 배우들의 신체성physicality은 대사 발설 이전 벌써 하나의 기호로 작용하는 법인데 당당하고 꼿꼿한 공길보다 왜소한 연산군의 신체에서 배어나는 외로움과 허무감 및 그것을 위장하려는 큰 몸짓은 이 공연이 성공하는데 큰 몫을 했다. 오만석은 몸짓과 목소리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중성적 이미지를 잘 소화했다. 광대들의 놀이판은 배우들의 곡예적 재주를 적절히 잘 이용함으로써 계산된 것임이 느껴지지 않는 볼거리였다. 다만 장녹수(진경)는 무대 연륜이 짧은 때문인지 긴장감이 끝내 풀어지지 않은데다 때로 오버 액션으로 그 역이 지녀야 할  모성과 여성성보다는 현실개입과 질투감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측면무대만을 활용하고 몇 가지 대·소도구만을 사용하게 한 무대디자인(권용만)은 구중궁궐의 이미지를 나타냄과 동시에 연기공간을 배우들이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철저히 계산된 공연성theatricality을 근간으로 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살을 입힌 "이(爾)"는 근간에 아쉬움을 보이고 있는 우리 연극의 지평을 넓혀 주었으며, 창작극을 고집하면서도 그간 괄목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던 극단 연우무대의 면모를 쇄신한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