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무용

무용, 무엇을 말할 것인가? - 2000년 무용계 관찰기

한혜리 (무용평론가)

 

19세기 낭만주의 발레의 유령들이 전 세계를 휩쓴 후 새로운 예술사상하에 출현한 현대무용contemporary dance이 볼거리, 과장, 묘기를 삭제하고 역동적 이미지만을 남기는 추상화 작업에 몰두하여 눈을 자극하기보다는 머리를 자극하려는 노력을 계속한지 이제 한 세기가 지나갔다. 우수에 찬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기대하는 관객의 취향을 외면하고 보는 무용에서 생각하는 무용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면서, 무용의 신체는 인식의 대상에서 인식의 주체로 그 자리를 옮겨 앉게 되었다.
자신의 이념을 가장 진실하게 표현하는 무용이 철학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무용은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명료화하는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한국의 현대 무용은 우리에게 어떤 대화를 시도했던가?

기술자체가 지닌 효용성이 아닌 기술을 통해 성취한 예술성의 효용성을 보자

금년 3월에 개관한 엘지 아트센터가 기획한 개관기념축제 프로그램에 무용으로는 부퍼탈 탄츠테아터Wuppertal Tantztheater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좥카네이션Carnation좦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전에 공연시간도 단축시킨 상태인데다 작품의 구도와 움직임의 동선으로 역동성을 느끼기에는 무대구조가 적합하지 않았고, 출연 무용수가 너무 많았다는 느낌을 공연 내내 지울 수 없었던 걸로 보아 무대의 크기도 작품에 비해 협소했던 모양이다. 무대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작품 선정에 대한 유감이 적지 않았던 때문인지 기대한 감흥에 미치지 못한 공연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82년에 만들어진 작품의 외적 줄거리에서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어떤 체계에서 무용은 시대의 문화와 정서를 초월하여 관객과의 소통이 원활 해지는 것일까?이 의문에 대한 답은 5월 25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국제현대무용제에 출품된 작품들(두껍아, 두껍아 / 그해 겨울)을 보면 찾아낼 수 있다.
조금씩 어긋나게 비추어지는 영상에 시선을 빼앗기고 줄거리의 진행이 단절되면 미숙하고 불완전한 기술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미숙과 불완전은 당연히 기준치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완벽한 기술로 예술성의 상승을 가져온 작품이 준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기억하게 만든다.
피나와 같은 기획 프로그램으로 4월 27일 공연한 오르페에서 캐나다 극단의 홀로그램사용은 조명과 무대미술 그리고 연기자의 움직임이 한 치의 오차없이 펼쳐짐으로서 결론에 다가가는 사건의 진행이 완벽한 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새로운 방법론으로 예술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장르를 관객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금 어긋난 조명이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상을 빗나가 보이게 하고, 잘못된 위치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가 영상과 융합되어 보이지 않을 때, 관객은 과학정신 없이 기술 습득에 실패한 서툰 매체조작자로서의 무용인을 동정하게 된다.
영혼과 상관없이 신체를 움직이는 무용수의 춤은 눈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 의지 변화에 관여할 수는 없다.
예술정신 없는 신체조작으로서의 춤과 과학정신 없이 숙련된 기술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물며 그 기술조차 완벽하지 못할 때 시각적 즐거움마저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커스의 묘기와 무용에 있어 묘기에 가까운 동작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무용의 그것은 관객이 묘기라고 인식되지 않게 안무가 유도하기 때문이고, 이것의 성공여부는 관객에게 완벽한 움직임의 구사에 대한 불안감을 주느냐 아니냐로 확인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술이 단지 기술로 작품에 부유할 때 그것은 기계 매체의 기능 전시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체가 시각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하락하는 것에 반발한 무용인들이 대중(?)의 취향을 애써 외면한 채 누구를 위한 공연이냐는 비난을 감수하고 고독한 투쟁을 해 온지 1세기를 넘기면서 이제 새로운 표현 매체의 이해와 숙련에 기준을 둔 무용의 저급한 가치판단을 무시해야 할 시기를 맞이한 것 같다.
피나의 작품 언급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으나 결국 카네이션이 시간(시대)과 공간(거리)을 넘어서 감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무용이 당연히 주어야 할 감동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신체가 인식의 주체라는 것이다. 말로 전달할 수 있고 문자나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춤 출 필요가 없다. 무용은 신체로 인지하고 신체의 움직임으로 가장 진실에 근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만을 작품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피나는 그 규칙을 지키고 있고 우리는 그 코드로 피나의 작품을 읽기 때문에 그 작품이 나타내는 이념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모든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내용을 형성하는 이념과 사상의 고급함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경기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도 잘하고 잘하지 못한 것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떠나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 무용이 움직임으로 진실에 근접할 수 없다면 존재 이유도 가치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민족문화 유산의 이름표 , 무용

歌·舞·樂의 새로운 연희형식을 내세우고 서울예술단이 99년 좥향가좦에 이어두 번째로 좥靑山別曲좦을 6월 11일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했다. 판매 프로그램은 물론, 안무자가 관객에게 나누어주는 대본은 하루 독서량으로도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구성 요소로 본다면 서양의 뮤지컬과 다를 것이 없는데 차이점을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닌 이유는 뮤지컬이 오페라와 발레의 대중적인 요소에 맞게 극을 삽입한 것과 달리 樂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樂이 歌와 舞를 이끌고 갈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면, 오페라의 장르와 더 근접하게 볼 수도 있다.
기존의 장르 더욱이 서구의 예술 장르와 비교하는 것이 시대 착오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존재에 대한 인식은 무엇과의 다름이 기초가 되는 것이고 그것에 선행되는 것은 비교 집단의 선정일 것이므로 피할 수 없는 작업일 것이다. 어쨌든 문자를 통한 홍보와 작품 설명의 내용으로 보아 제작의 의도는 다분히 민족 문화에 바탕을 둔 대중적 연희 재창조에 있다고 판단이 서면 뮤지컬의 역할을 전제로 판단해 볼 수 있다.
화려한 볼거리로서의 의상과 악사들의 출연 그리고 무대 배경이나 미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춤은 간혹 누가 누가 잘하나 방식의 묘기적 춤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 고급화된 마당놀이(?)로도 보여진다. 그러나 표현 매체의 차용이 자유스러운 현대의 예술 창작에서 가·무·악의 혼합 방식과 역할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로 비추어진다.
허나, 민족문화의 계승과 변형 혹은 변용의 측면에서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이 분명하다. 연희의 구성 요소(가·무·악?)와 의상 그리고 리듬이나 선율이 그리고 춤이 민족 전통 양식에 바탕을 두고 변형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민족 연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민족 설화나 신화, 문학이 소재가 되었다고 해서 민족정서가 표현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오늘의 정서로 그리고 현대의 사상적 기틀에서 전통을 얼마나 생생하고 가치있게 되살아나게 하느냐가 전통의 옳바른 계승이며 바람직한 변용이고 변형일 것이다.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제 자리에서 기다리며 손짓하는 전통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민족문화가 빛날 수 있는 곳은 인류문화 안에서이다. 오늘을 얘기하지 않는 예술작품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는 전체를 모르는 특수성은 무의미하고 또, 파괴적일 수 있다는 미요시 마사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을 함께 살고 있는 인류 공통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민족문화나 정서의 고립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만을 낳게 될 것을 예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전통이란 지키려는 고집 보다는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아량에서 더 빛을 발하고 뿌리를 단단히 내린다. 지금,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제 자리에서 기다리며 손짓하는 전통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가·무·악의 연희 형식은 인류가 대동소이한 역사적 전개를 경험하면서 공통으로 가지게 된 예술 장르이다. 우리 민족문화만이 배출한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한다. 비슷한 형식과 형태에서 민족 문화가 살아 있다는 것은 민족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고 이는 창작인의 정서 즉, 세계관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것이 오늘날 예술의 장에서는 독창성으로 언급되어지고 이러한 연유에서 유럽의 여러나라는 출생과 성장지가 다른 창작인을 앞다투어 유치(?)하여 자신들의 국적으로 문화적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선전할 수 있는 법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예 중의 하나인 조셉 나지Josef Nadj는 올해 국제연극제에 초청되어 좥보이첵좦을 10월 7일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그가 입은 의상이나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무대 장치들 그리고 상황과 신분에 따라 정형화하여 보여주는 표정과 움직임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인류 문화의 읽기 코드로 그리고 좁게는 무용의 읽기 코드를 적용하여 이해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이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모든 것에서 한 순간도 관객은 헝가리 문화를 느끼지 않는 순간이 없다. 그것이 헝가리 문화라는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관객은 작품이 전개되는 시간 내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고 그 무엇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
의상으로 신분과 인물의 성격을 표현한 몇 안되는 무용가 중의 한사람으로도 무용사에 남을 것이고 또, 움직임의 원리와 에너지의 표출 방향을 전환시킨 창작인으로도 업적을 인정받겠지만 그가 작품으로 표현한 이념을 구성하는 정서가 그의 성장에 영향을 준 민족정서임도 함께 기록된다면 그보다 멋진 전통의 계승은 다시 없을 것이다.
세계적 추세나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권력이나 유일 사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한국의 발레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조금 성급하게 표현한다면 발레 무용수 수출국 중의 하나로 언급될 정도로 발레에 맹진하는 어린 무용가들이 많다. 그들이 어디에 가 있던 그리고 일관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예술지원 정책에 적응하지 못해 자국을 떠난 한국의 젊거나 혹은 소외된 창작인이 어디에서 활동하던 그들이 민족문화의 멋진 계승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원금을 거의 독식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금액에 연연하여 초청되고 제공되는 무대마다 같은 작품을 거침없이 공연하는 단체와 무용가들에게는 역사는 그들의 작품이 레파토리 작품으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만을 평가해서 기록할 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재정적 지원 환경을 함께 기록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해두고 싶다.
작품에 대한 책임은 창작인 혼자의 몫일 뿐 어떤 이유도 합리화되지 못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 변화의 급격함이 초래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갈등이 쟁점으로 떠오르지도 못할 만큼 당연시되고 있는 오늘 서로 다른 크기로 느끼고 있는 혼란에 대해 귀 기울여 주고 답안을 찾도록 격려하는 시대의 동반자로 무용이 존재하려면 듣기 좋고, 보기 좋게 포장된 유창한 언변보다는 어떤 해결을 그리고 무슨 답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의논할 수 있는 내용 있는 대화의 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