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同志로서의 무용
한
혜 리 (무용평론가)
2000년에
들어서면서 무용계에서는 초대권 안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경영인에게는 관객의 문화적 수준을 신뢰해야만 하는 위험부담이
있었겠지만 이번 기획으로 운영에 승부를 걸겠다는 예술경영의
원칙이 무용에도 적용되기를 무용인 모두는 희망했었다. 또한 무용 관계인들의
측면에서는 그 결과가 진정한 창작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대중이
외면하는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
대중이
외면하는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원칙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외면이 어떤 의미의 외면이냐 하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또, 반대로 어떤 의미의 호응이었느냐 하는 것 역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문화 상품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책이나 음반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나 연극, 음악회나 무용을 포함한 공연을 감상할
수도 있다. 또 비디오를 대여할 수도 있으며 놀이공원이나 패스트 푸드
음식점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문화상품권의 용도를 측정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이렇게 문화의 폭이 넓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왜 무용공연을 선택했으며 그 공연에서 그들이 갖는 기대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궁금증에 앞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무용관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종류의 무용이 존재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고 그 다음이, 그 다양한 종류의 무용 중 이 시대의 진실한 예술로서
임무를 다 하고 있는 무용은 얼마나 존재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기분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감상할 ‘아름다운' 무용작품이 필요한
날이 있고, 삶이 힘들 때 잠시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꿈같이 즐겁고 ‘아름다운' 무용 작품이 보고 싶은 때도 있으며 때로는
갈등과 혼란속에서 선택을 의논할 진실한 친구를 만나 얘기 나누고 싶을
때 ‘아름다운' 대화의 상대로 무용작품을 선택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럴 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이 꼭 무용이어야 할 필요는
없고, 또 꼭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혹은, 그 심리적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장르의 예술을 선택하는 자신만의
규칙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갖고 싶은 날, 인간 불평등에 대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계급간의
갈등과 사회체제의 부도덕함에 대해 신중하게 대화를 시도하는 예술작품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용에서 연말이나 연시에 「백조의 호수좦나 「호도깎이 인형좦 「잠자는
숲속의 미녀좦 아니면 발란쉰이나 지리 킬리안류의 작품들이 무대에
많이 오르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일은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어하고 앞으로의 일은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에 앞서 희망을 더 많이 갖고 싶어한다.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생기고
예기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터미네이터를 보고 람보를
보고 혹은 넘버 쓰리나 반칙왕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사회가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것에 대해 누군가와
토론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즉, 같은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
그 해소와 해결 방법을 다르게 찾아보는 경우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작품이 항상 개운치 못한 표피적이고 순간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보기를 그리고 듣기를 시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무용은 대중무용을 만들지 못했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다.
서양의 궁중무용이 오늘의 볼륨댄스를 만들어 한국인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것에 반해 우리의 궁중무용은 한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 채 국악원 예악당에서만 공연되고 있을 뿐이며
현대인에게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존의 임무 수행으로서 일종의 숙제와
과제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무대무용에 있어서도 예술무용에만 그 개발 노력을 기울여 왔을 뿐 오락무용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예술로서 무용의
발전을 위해 정진해 온 한국의 무용계가 내놓은 작품들이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무용은 어떤 대화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위로가 되는 친구로 아니면 휴식을 주는 친구로 아니면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 과연 존재하는가.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유료관객의 확보라는 것은 관객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무용공연을
찾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더러는 성공적인 유료관객 확보율을
보여주는 기사를 보기도 했고 또, 더러는 완전히 실패한 공연의 실례를
매스컴을 통해 접하기도 했다. 물론 신문이나 TV의 보도를 신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그 수치 자체가
주는 의미란 거의 없다. 문제는 안무자에게 혹은 그 무용단에게 고정
관객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고정관객을 확보하지 못한 안무자나 무용단은
신인이다. 그들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지켜보는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작품세계가 있는 안무자나 무용단이 많건, 적건간에 그
수와 관계없이 고정 관객을 확보하고 있지 못했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활동과 임무에 있어서 충실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 보는 것은 이렇게 작품세계를 확고히 하지 못하는
환경 제공의 출처이다.
예술에 있어서의 자기발전 법칙을 따르자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예술은 존재했고,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본능과 연관된 문제였다.
금전 만능주의를 지나 이제, 경제가 모든 영역에서의 판단 기준이 된
때에 그 절대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학문을 기반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은 그 기준의 명실상부함을 증명해 주고있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관객이 없는 공연이라는 언론의 판결을 무시할 수 있는
배포있는 예술인이 얼마나 될 것인가? 과연 그런 인물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인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판결은 대단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는 조사의 수치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승복은
거의 강압적이라 할 수 있다. 갈등을 즉시 해결해 주고 선택에
절대적인 당위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결과 없는 생각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물론,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것이
본인에게 맡겨진 임무나 책임이 아닌 경우에는 벗어나거나 회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본성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 생각할
것이 많은 환경에서 자신의 돈을 투자해서 선택한 예술공간에서까지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예술의 대중화 내지는 무용의 대중화는 모두가 함께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무용의 개발과는 달리 이러한 생각과 토론의 장으로서의 무용공연에
친숙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그 대화의 주제나 방법론에서 오락무용과 타협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 생각과 토론의 장을 자주 그리고 대중들 가까이에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작품의
질 즉, 내용적인 수준일 것이다. 머리를 식히고 즐기려고 찾은 공연장에서
너무 무겁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그 이해의 과정에서부터 혼란과 어색함을
주는 작품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든지 다르게는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할
친구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서 찾은 공연장에서 TV 드라마 수준의 값싼
감정 놀이를 경험하게 만든다면 그들이 다시 무용공연을 선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관객의
수를 통해 우리는 당시 시대상을 읽고 민심을 읽고 그리고 문화 수준과
취향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무용계의 구체적 현실로 돌아와 얘기해 보자. 2000년에 시작된 유료
관객확보의 표면적인 선포는 단지 초대권 남발의 저지 목적 이외에는
어떠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는 증명에 다름아니다.
그 한해 동안도 무수히 치러진 기획공연들은 선발된 작품과 안무가들이
어떤 기준에서 하나의 기획으로 묶일 수 있었는지를 객관성있게 제시해
주지 못했고, 공공기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고 공연되는 안무자나 단체들의
공연은 아직 그 고정관객 조차 확보해 놓지 못한 즉, 작품세계가 불확실한
아마추어 내지는 신인의 작품들과 같은 수준의 무기준 선발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미 작품 세계가 확고한 안무자나 단체의 작품에서
관객의 수는 무의미하다. 그 수치는 단지 그 관객의 수를 통해 우리가당시의
시대상을 읽고 민심을 읽고 그리고 문화 수준과 취향을 읽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국립발레단 안무자의 안무 능력에 대한 비난 그리고 한 대학교수가 제목을
달리해서 같은 작품을 공연했다는 시비, 유료관객 확보를 위해 기획의
공평성과 객관성을 내세우며 정진하는 무용 기획팀들, 이 모든 사건의
쟁점은 그들이 적용한 기준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에 대한 비난이나
질책이 아니기 위해서는 그 비난과 시비의 기준이 그리고 정진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것이 분명히 제시되기 위해서는 무용에서 작품세계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무용공연계도 한가한 편이 아니었다. 우리시대의
무용가를 비롯해 연말의 고전 발레 공연 그리고 지원금 수혜 단체들의
창작품 공연 등으로 어찌보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 듯도 하지만 관객은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며 공연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불안함과
난감함에 대한 무용인들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예기치 않은 다른 친구가 나를 기다릴 때의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을
생각해 보면서 말이다. 운 좋게 그런 대로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 기대하고, 원하던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의 만족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즐겁고, 편안하고 그리고 환상적인 시간을 선사해주는 많은 장르의 예술들
중에 무용이 충족시켜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발레와 그것이 현대의
옷을 입고 변형된 적지 않은 종류의 무용들이 그 방향과 결과를 제시해
주고 있다.
고단한
삶을 함께사는 동시대인으로서의 무용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삶의 동지로서 즉, 고단하고 힘든 삶을 함께 사는 동시대인으로서 무용이
얼마나 진실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이제 제출할
때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무용이 휴식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친구에서
함께 고민하고 서로 대화하기를 원하는 정신적인 동반자로서의 예술을
표방한지 이제 한 세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공연을 위해 고민하고 땀 흘리는 무용인들의 작업 그리고 그들의
작업을 빛나게 하는 관객의 성원을 선물해 주기위해 기획의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주변인들의 노력이 기대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진실하고 바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 창작인의 자질과 신념이 우선된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가
무모함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도록 소속감과 동지의식을 주는 생각의
나눔터를 제공하는 예술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면 관객에게 다가서는
방법론이나 그것에 소요되는 시간과 돈의 조달 방법은 어떤 것으로도
그 당위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기다리는 친구가 되어서 정말 진실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동지로서의
무용이 그리운 시대이다. 그리고 문화상품권으로 무용공연을 선택하는
지금보다는 무용에 조금 더 친숙하고 그리고 지금 보다는 조금 더 무용에
대한 지식이 있는 관객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