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영화

새 영화의 가능성이 풍요로움으로 바뀌는 힘이 되길

김 경 욱 (영화평론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영화계는 전 세계에서 신인감독들을 가장 많이 배출해 낸 곳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했다. 이와 같은 추세는 2001년에도 계속될 전망인데, 먼저 단편영화를 통해서 주목을 받고 장편영화에 도전할 채비를 하는 감독들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장편영화에 도전하는 신인 감독들

간과 감자」로 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소풍」으로 제 52회 칸영화제 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 우수상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요상을 여러 차례 받았던 송일곤 감독은 「칼」이라는 영화를 데뷔작으로 준비중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기원전 2000년에 가뭄으로 멸망의 위기에 몰린 부족이 신탁에 따라 족장의 딸을 희생물로 바치게 되자 그녀를 사랑하는 주술사의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게 된다. 그들이 현대에 환생하면서 다시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가는데, 영화는 그 비극의 고리를 끊고 구원에 이르는 매우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추적해 간다. 단편영화를 통해서 사색적인 이미지를 연출해 냈던 송일곤 감독은 이번 장편 데뷔작에서 “성스러운 선택으로 미화되는 희생양이 사실은 집단적인 폭력에 의한 희생물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고 말한다.
서울단편영화제에서 「플레이백」 「메멘토」 「풍경」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주목을 받았던 윤종찬 감독은 장편데뷔작의 제목을 「소름」으로 정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로, 어딘가 미심쩍은 택시기사, 삼류소설가, 밤마다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여자, 알부자로 소문난 이발사, 화재로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여자 등이 그들이다. 그 인물들 사이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주술에 걸린 듯 과거의 망령이 살아나고 아파트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다. 윤종찬 감독은 세 편의 단편영화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악몽 같은 기억의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했었는데, 이번에도 그 강박관념의 세계가 영화를 지배하게 될 듯 하다.
「햇빛 자르는 아이」로 1998년 클레르몽페랑 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 창작상을 받은 김진한 감독의 첫번째 장편영화는 「정크맨」이 될 예정이다. 김진한 감독은 세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면서 직접 세트를 지었고, 「런어웨이」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미술감독으로 참여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매번 강렬한 이미지가 돋보였는데, 「정크맨」은 한국영화에서는 매우 드문 SF영화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영화의 모티브는 에밀레종에서 비롯되었고, 이야기는 철의 무덤 정크랜드로부터 시작된다. 그곳에서 희망 없는 세상에 신종을 만들어 구원에 이르려는 집단과 그에 대립하는 집단의 갈등이 숨막히게 펼쳐지게 된다. 김진한 감독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으로 한국적 SF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소년기」와 「베이비」로 알려진 임필성 감독은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공포영화 「엘리베이터」를, 「그랜드 파더」의 김용균 감독은 순정만화같은 영화 「쿨」을, 「지하생활자」 「나마스테 서울」의 김대현 감독은 1990년대 한국만화의 걸작으로 평가될 만한 박흥용의 「내 파란 세이버」를 각색한 영화를, 「도형일기」의 정재은 감독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섯 명의 단짝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각각 준비중이다.
2001년에 데뷔할 예정인 감독 가운데는 물론 단편영화 작업보다 현장에서 연출부 생활을 통해 영화를 익힌 이들도 있다. 박광수 감독과 임순례 감독의 영화에서 연출부와 조감독으로 일했던 박경희 감독은 「미소」로 데뷔하려고 한다. 점점 시야가 좁아지는 망막색소변성증에 걸린 사진작가 소정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던 소정은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경비행기 조정을 배우기 시작한다.
박광수 감독과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조감독을 했던 박흥식 감독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데뷔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출근길 지하철이 갑자기 멈추어서도 어딘가 전화 걸 곳이 없는 은행원 봉수가 결혼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면서부터 영화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으로 연출부 생활을 시작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서 조감독을 했던 김대승 감독은 멜로 드라마 「번지점프를 하다」로 출사표를 던질 계획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준비하는 감독들

그렇다고 2001년에 신인감독들의 영화만 준비중인 것은 아니다. 신인감독이 많은 대신 세 편 이상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드문 것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지만, 데뷔작을 이미 찍은 감독들 가운데 오랜만에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소식이 반갑게 들려온다. 「세친구」의 임순례 감독은 수안보에 있는 나이트클럽의 밴드를 주인공으로 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그들만의 세상」의 임종재 감독은 공익근무요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삼각관계 영화 「온 에어ON AIR」, 「미지왕」의 김용태 감독은 조직내의 갈등을 그린 좌충우돌식 스릴러 「언더커버」,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홍기선 감독은 45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기수 김선명씨의 전기를 영화로 옮긴 「선택」, 「내일로 흐르는 강」의 박재호 감독은 위층 남자와 아래층 여자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그린 「썸머 타임」을 각각 준비 중이다.

2001년에도 여전히 한국영화 산업을 뜨겁게 달굴 블록버스터

그리고 2001년에도 여전히 한국영화 산업을 뜨겁게 달굴 블록버스터 영화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영화제작에 투자되는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흥행영화가 여러개의 관을 독식할 수 있는 복합상영관이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2000년 블록버스터의 일정한 성공은 이와 같은 전망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다. 게다가 이미 기획 제작에 들어가 여름에 개봉될 영화 가운데 제작비가 30억원이 넘는 영화만 해도 다섯 편이나 된다. 싸이더스 우노 필름이 제작하는 김성수 감독의 「무사」는 50억원, 인디컴이 제작하는 이시명 감독의 데뷔작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45억원, SF영화 전문 제작사를 표방하는 주니 파워 픽처스의 창립작품으로 박희준 감독이 연출하는 「천사몽」은 32억원, 싸이더스 우노 필름에서 제작하는 김태균 감독의 「화산고」는 37억원, 씨네 아이의 창립작품이자 장훈 감독의 데뷔작인 「광시곡」은 45억원의 제작비가 각각 투입될 예정이다. 이밖에 기획 단계인 영화 중에서 쿠엔씨 필름의 「제노사이드」가 50억원, SW엔터테인먼트의 「내추럴 시티」가 70억원의 예산을 예고하고 있다. 각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사」는 아홉 명의 무사가 몽고군의 추적을 피해 고려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무협영화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데 실패했다면?'이라는 역사적 가정으로 펼쳐지는 SF영화로 역사를 원상복귀하는 과정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천사몽」은 지구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주로 펼쳐지는 전생(前生)을 소재로 한 모험담에 멜로 드라마가 가미된 영화, 「화산고」는 무협영화, 「광시곡」은 테러진압부대의 활약을 그린 액션영화이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여되는 블록버스터 영화인만큼 관객들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스타도 총동원되고 있는데, 정우성, 장지이, 안성기, 장동건, 여명, 이나영, 장혁, 신민아 등이 그들이다. 참고로 앞에서 언급한 다섯편의 영화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려면 서울에서 다섯 편의 영화에만 최소한 390만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야 한다.

인터넷 영화와 그 가능성

블록버스터 영화가 오프라인의 영화시장을 서로 제패하려고 한 판 승부를 겨루는 동안, 온라인에서는 인터넷 영화가 더욱 더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1999년 6월 25일, 한국 최초의 인터넷 영화인 조영호 감독의 「영호프의 하루」가 공개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터넷 영화가 네티즌을 스쳐 지나갔으며 앞으로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인터넷 영화는 감독과 관객이 1대 1로 의사소통을 하며 영화를 볼 수 있는 ‘인터넷 인터랙티브 영화', 보고 싶은 비디오를 인터넷을 통해 주문해 볼 수 있는 ‘VOD 방식', 드라마 또는 영화가 진행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장면이 멈춰지고 완전히 다른 여러 가지의 결말이 제시되면서 관객들이 선택하게 만드는 ‘피드백 영화', 인터넷에 올라온 작품을 관객이 서로 이어나가면서 완성해 가는 ‘팩 픽션 무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인터넷 영화 몇 편을 예로 들면, 장진 감독의 「극단적 하루」,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리」, 김지운 감독의 「커밍 아웃」, 디지털 러브스토리를 표방한 「메이」, 인터넷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며 2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SF영화 「M.O.B 2025」 등이 있다.
인터넷 영화는 이제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등장하는 영화마다 새로운 사례가 될 수 있고 그래서 개척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반면 미래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인터넷 영화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직은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이 한국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주게 될 지도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영화 또는 영상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2000년 한국영화의 성과는 풍요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 ‘참신한 작품이 없었다' ‘기존 스타일과 장르의 혼합이 반복될 뿐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앞에서 살펴본 신인 감독들의 영화는 각각 나름대로 독특한 소재를 갖고 있고 감독의 주제의식도 분명하고 장르도 다양한 것처럼 보인다. 신인감독들이 단편영화를 통해서 드러냈던 개성을 장편영화에서도 적절하게 살린다면 한국영화는 새로운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오랜 공백을 깨고 새롭게 준비하는 감독들의 영화도 기대가 된다. 그 작품들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무르익은 영화적인 깊이와 성숙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과도하게 상업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다른 영화적인 가능성은 버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관심이 블록버스터 영화에만 집중된다면, 한국영화는 매우 빈곤하고 척박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신한 신인감독들과 새로 시작하는 감독들의 영화가 그 빈곤함과 척박함을 풍요로움으로 바꾸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2001년의 한국영화는 2000년의 한국영화가 채워 넣지 못했던 아쉬운 공백을 메우게 되기를 벌써부터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