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예술인에게 듣는다  - 국악인 묵계월

수많은 음반과 뛰어난 제자들을 둔, 행복한 국악인

만난 사람 : 최종민 (국립창극단 단장)

 

이 대담은 지난 12월 13일 꽤 추웠던 날 묵계월 선생님의 전수회관이 있는 서대문구 현저동의 아담한 소리 방에서 이루어졌다. 묵계월 선생님의 본명은 이경옥(李瓊玉)이고 1921년 생이시다.

국악을 하게된 동기

최종민 : 선생님께서는 태생이 서울이십니까?.
묵계월 : 네 광희동 2가예요.
최 : 광희동이라면 시구문이 있는 그 동네 아니예요?
묵 : 그렇지요. 그런데 저는 그 시구문 가기 전에 있는 계림극장 부근에서 태어났대요.
최 : 선생님 어렸을 때에도 지금의 을지로 5가 부근의 계림극장 주변에 음식점들이 많이 있었나요?
묵 : 저는 그런 것을 모르지요. 왜냐하면 그 곳에서 나기만 했지 열 살(10세)되던 해에 묵씨네 집에 양녀로 들어 갔으니까요.
최 : 아 그러세요. 선생님의 본명은 이경옥 아닙니까? 그런데 묵씨네 집에 양녀로 가면서 성씨를 다르게 사용하게 되었군요?
묵 : 그렇지요. 그 묵씨네 집에는 나 보다 나이 많은 국악하는 언니가 있었어요. 또 양아버지가 욕심이 많으셔서 내 집에 왔으니 이제부터는 내 성을 따라야 한다 하시고 이름 짓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계월(桂月)이라 지었으니 묵계월이 된 것이지요.
최 : 그러면 그 양어머니도 국악하는 분이었습니까?
묵 : 아니예요. 그냥 가정주부였는데 그 분의 딸이 국악을 했었어요.
최 : 유명한 분입니까?
묵 : 소리로는 유명하지 않았는데 인물이 아주 예뻤어요. 그래서 무슨 미인으로 뽑히기도 했어요.
최 : 선생님은 누구한테 처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까?
묵 : 양어머니한테 간 후에 그 양 어머니가 소리학원에 보내 주었는데 그 때의 선생님은 이광식이라는 분이었어요.
최 : 학원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묵 : 관철동에 있었어요.
최 : 학생들이 많이 왔던가요?
묵 : 많은 학생들이 소리를 배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처럼 어린 사람은 없고 대부분열 다섯 여섯쯤 되는 학생들이 배우고 있었어요.
최 : 그 때 선생님 나이는 몇 이었나요?
묵 : 열 살요. 그러니까 나는 10세부터 소리 공부를 시작한 것이지요.
최 : 정말 어린 나이에 소리를 시작하셨네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제일 처음 가르치는 노래는 무엇이었나요?
묵 : 시조였어요. 시조부터 가르쳐 주셨어요. 평시조로 시작해서 여창지름 남창지름 가사 등을 다 가르쳐 주셨어요. 그것은 목을 잡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최 : 하긴 성악에 있어서는 시조가 참으로 중요한 것인데요.
묵 : 그래요. 그렇게 해서 목이 어느 정도 잡혔다 싶으면 12잡가로 들어가요.
최 : 그럼 민요는 안 가르쳐 주셨나요?
묵 : 예 민요는 안 가르쳐 줘요 민요는 노랫가락이나 창부타령 같은 것을 선배 언니들이 하는 것 듣고 그냥 해 보는 것이지 선생님들이 따로 가르쳐 주지는 않았어요.
최 : 12잡가를 배운 다음에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묵 : 12잡가를 하고 나면 ‘공명가' 같은 서도소리를 배웠지요.
최 : 그럼 경·서도 소리를 함께 배우셨습니까?
묵 : 아니요. 먼저 경기소리를 배우고 어느 정도 잘 되면 목을 보아서 서도소리를 배우게 되지요.
최 : 선생님께서는 서도소리 잘한다는 칭찬 을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묵 : 네, 무슨 소리든지 곧 잘한다고 칭찬 받곤 했어요.
최 : 그러면 서도소리로 어떤것들을 배웠나요? ‘공명가'를 배웠다고 하셨는데 ‘추풍감별곡'도 배우셨나요?
묵 : 그 당시에는 배우지 않았고요. 훨씬 후에 배웠지요.
최 : 그러면 어려서 배운 서도소리는 어떤 것이 있나요?
묵 : 그야 ‘공명가' ‘영변가' ‘난봉가' ‘산염불' 같은 것들이지요.
최 : 그리고 또 ‘수심가'도 배웠을 것 아네요?
묵 : 그랬지요. ‘수심가' ‘엮음 수심가'등도 배웠지요.

국악을 배운 과정들

최 : 선생님이 요즘 즐겨 부르시는 ‘송서(誦書)'라는 것은 언제 배우셨나요?
묵 : ‘송서'는 열다섯인지 열여섯인지 그 때 배운 것인데요. 그때 그것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이문원 선생님이세요. 이문원 선생님은 무슨 학원을 내고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었고 이 사랑 저 사랑 다니시면서 ‘삼설기'를 잘 부르기로 유명한 분이었는데 한번은 그의 친구들이 저를 가리키면서 “저 애에게 삼설기를 좀 가르쳐 보게"하고 말하니까 이문원 선생님이 “저렇게 조그만 아이가 어떻게 ‘삼설기'를 배울 수 있겠어"하면서 신통치 않게 말했는데 그래도 그의 친구들이 “아니야 저 아이는 해 낼거야. 자네도 저런 아이에게 그 좋은 소리를 가르쳐 놓아야 그 소리가 전해지지 그냥 없어지면 어떻게 하겠나?"하면서 재차 강하게 권하자 그제서야 “내가 가르쳐 주면 네가 잘 배울 수 있겠니?" 하시길래 “네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했더니 그 다음부터 가르쳐 주시는데 아주 조금씩 끊어서 차례 차례 가르쳐 주셨어요. 하긴 그 무렵에 한 서른살쯤 되는 한 분이 이문원 선생님께 ‘삼설기' 를 배우는데 들어 보니까 어딘가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하지 않는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그것이 좀 불만인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더 저에게 열심히 가르쳐 주신 것 같애요.
최 : 배우실 때 가사를 적어 주시면서 가르치셨습니까?.
묵 : 적어 주시지 않으세요. 그냥 입으로 따라 하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똑 똑 떼어 가르쳐 주시고 며칠이 지나면 그 내용을 이어서 한 단락으로 부르게 하여 가르치시고 그렇게 배웠어요.
최 : 그러면 이문원 선생님에게 가서 처음에는 잡가도 하고 여러가지 노래를 하다가 배울 때에는 ‘삼설기' 를 배우고 그렇게 하셨습니까?
묵 : 아니예요. 민요나 12잡가는 학원에 가서 하는데 그렇게 배우는 것으로는 내 맘에 양이 차지 않아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그러면 집에 와서 가르치는 선생님을 한 분 모시자고 하여 김윤태라는 선생님을 늘 오시게 해서 배우곤 했어요.
최 : 그럼 출장 렛슨을 받으신거네요.
묵 : 예 그렇다고 봐야지요.
최 : 그러면 ‘삼설기'는 언제 배우신 거예요.
묵 : 그렇게 김윤태 선생님에게 한 2년 동안 배운 후에 이문원 선생님에게 배웠지요.
최 : 김윤태라는 분도 그당시 유명한 선생님이셨습니까?
묵 : 네 그런데 그 분은 학원을 하지 않으시고 다니시면서 가르치는 분이예요. 전에 이진홍씨도 그 분한테 배우셨거든요. 그래서 이진홍 선생님이 절더러 “너 좋은 선생님 모셨구나 나도 그 전에 그 분하테 배웠다"고 하시더라구요.
최 : 그러면 선소리 산타령 등은 안 배우셨습니까?
묵 : 그런 소리는 그 분들이 몰라요. 그 분들은 12잡가·가사·시조 그런 노래를 부르고 가르치시지요.
최 : 그러면 그런 12잡가 등의 노래는 15세쯤 다 배웠습니까?
묵 : 아니요.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정도까지 계속 배웠지요. 최정식씨 한테도 가서 배웠어요. 최정식 선생님이 ‘금강산 타령' ‘풍등가'등을 만드셨지요.
최 : 최정식 선생님도 학원을 가지고 계셨나요?
묵 : 최정식 선생님은 학원을 가지고 계시긴 했지만 아주 작았어요.
최 : 안비취선생도 최정식선생님 한테 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보다 늦게 배웠나요?
묵 : 아니지요. 나 보다 더 먼저 배웠대요. 처음부터 배웠다니까 말예요.
최 : 선생님께서는 하규일씨 같은 가곡선생님에게는 가지 않았습니까?
묵 : 왜요? 갔지요. 그런데 내 목소리를 들어 보시더니만 “너는 가곡을 하기에는 목이  적당하지 않으니 민요를 그냥 하는 것이 좋겠다"해서 가곡을 하지 않고 민요를 하게 된 것이지요.
최 : 그러면 민요를 배운 선생님은 어떻게 되지요? 제일 처음 배운 선생님은 김광식씨라고 하셨지요?
묵 : 예, 그 다음에는 주수봉선생님 한테도 갔었지요. 그 다음은 김윤태선생님을 모셔서 배우고 최정식선생님 한테도 배우고 이문원선생님에게는 ‘삼설기'를 배웠지요.
최 : 그러면 그 당시로는 유명한 선생님들을 거의 다 거치면서 소리를 배우셨네요?
묵 : 그런셈이지요.
최 : 그러면 학교는 다니지 않으셨습니까?
묵 : 야간으로 다녔지요.
최 : 소리를 배웠으면 그 소리를 써 먹어야 할 것 아녜요.
묵 : 그 때만 해도 어른들의 생일 같은 날이 되면 친구들이 모여서 자리를 하는데 그런데서 오라고 하면 가고, 소리를 하라고 하면 소리를 하고 그랬지요.
최 : 그런 일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있었겠네요.
묵 : 네, 한 열네 살쯤 됐을 때도 사랑에서 오라고 하면 가서 소리를 하고 그랬지요.
최 : 일제시대에는 방송도 있었는데 방송을 한 적은 없나요.
묵 : 방송활동도 했습니다. 방송국에도 갔지요. 우리 어머니가 욕심이 많으셔서 아주 어렸을 때인데 부탁을 해서 내가 방송을 하러 갔지요. 그 때 얘기를 하면 참 우스울 거예요. 그 때에는 방송국에서 차가 나와요. 차가 나오면 방송할 사람들이 그 차를 타고 가게 되어있는데 차가 왔길래 제가 “이 차 방송국에서 나온 차예요?" 하고 물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네가 타려고 그러느냐?" 해서 “그래요" 했더니 방송국까지 태워다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분들은 차로 방송국까지만 데려다 주지 그 다음은 그냥 내려주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서 더듬 더듬하면서 여기 저기를 다니니까. 어떤 사람이 “너 여기 무엇하러 왔느냐"하고 묻기에 “저 여기 방송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2층으로 올라가 보라고 해서 2층에 올라 갔는데 거기 있던 사람도 “너 무엇하러 왔느냐" 하길래 “방송 하러 왔어요" 했더니 “이름이 뭐냐?" 그래요 “그래서 묵계월입니다" 했더니 “아 네가 묵계월이야" 하면서 잠깐 기다리래요. 그때는 12시에 뉴스를 하고 그 다음에 소리가 생방송으로 나가는데 조금 있으니까 아나운서가 와서 뉴스를 합디다. 그런데 그 아나운서도 나를 보자 마자 “너 무엇하러 왔니" 하는거예요. 그래서 똑 같이 “방송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었지요. 그런데 뉴스가 끝나자마자 소리를 해야 하는데 장단이 있느냐고 묻는거예요. 그래서 그런소리는 못 들었다고 했더니 장단 치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전화를하더니 장단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노래를 했는데 ‘유산가'와 ‘제비가'를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5원인가를 받았는데 그 돈을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지요. 그리고 나서는 한 1년 동안 아무 연락이 없더니 다시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더라구요. 그런데 그때에는 그 전과 다르게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악기를 쓰는 것이 아니고 단소 한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는 거예요. 그때 함께 노래했던 동료도 있었는데 그이는 그 후에 더이상 국악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름을 밝히기가 곤란하군요.
최 : 왜 그럴까요. 그런 분들은 자기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 하나 보지요?
묵 : 예 자식들이 아는게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최 : 그 당시로는 소리하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하면 신 여성축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니 잘 못 된 거예요.
묵 : 그래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소리하는 직업이 썩좋은 직업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최 : 그 당시 그렇게 방송일도 하고 생일집도 가고 하면 돈도 꽤 잘 벌었겠는데요. 방송국과 생일잔치 같은 곳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돈을 많이 줬나요?
묵 : 그야 생일 잔치 같은 데에서 더 많이 줬지요.
최 : 하긴 손님들도 노래를 잘 하면 돈을 더 많이 주기도 하고 했을 것 아네요?
묵 : 그때는 돈을 더 주고 그런 것은 없었어요. 끝나면 봉투에 넣어 주었었지요. 지금처럼 장구에다 돈을 얹어주고 그런일은 전혀 없었어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큰 변이지요. 장구에 돈 붙이는 것은 피난 갔다 온 뒤에 생긴 것이예요.
최 : 일제시대에 선배 명창들이 소리하는 것도 많이 보셨겠네요.
묵 : 박춘재 같은 명창들이 광무대에서 소리할 때 구경을 갔었지요.
최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묵 : 스물 둘에 했어요.
최 : 일찍 하셨네요.
묵 : 그 때로는 늦게 한 것이지요.
최 :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두셨어요?
묵 : 셋이요.
최 : 다 따로 살겠네요.
묵 : 네 따로 살기 때문에 지금은 혼자 살아요. 아들하나 딸 둘인데 아들은 미국에 가서 살고 딸은 여기 사는데 멀리 살고 있어요.
최 : 해방 된 다음에는 어땠어요. 그 때에는 돈 벌 일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묵 : 해방 후에는 마을마다 대동놀음이 많았어요. 동네 잔치를 하는 것이지요.
조금 변두리 왕십리라든지 창신동 같은 동네에서 추렴으로 돈을 걷어 가지고 대동잔치를 하는데 그런 때에는 꼭 소리하는 사람을 불러요. 먹고, 소리 듣고, 놀고, 그러니까 그런 일에서 돈을 꽤 벌 수 있었지요. 그 때에는 그런 것 밖에 없었잖아요. 텔레비전도 없고 하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이 동네에서 대동 잔치를 했다하면, 저 동네 예를 들면 사근동에서도 대동잔치를 하자 하면서 그런 행사가 많이 생겨났던 거예요.
최 : 요릿집에서도 소리를 많이 했지요?
묵 : 일제때에는 많이 했지요.
최 : 선생님 6.25 때에는 피란 갔습니까?
묵 : 예 갔지요. 부산으로 갔었지요.
최 : 부산에서도 국악으로 살 수 있었나요.
묵 : 국악으로 살긴 살았는데 처음에는 참 어려웠어요. 한번은 광복동에 있는 큰 요릿집에를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피난민이 워낙 많아서 별로 벌이가 안될 겁니다. 다른데 가보시지요" 하길래 내가 떼를 썼지요 해 봐서 안되는 것은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기회를 주면 해 보겠다 했더니 이틀후에 나와 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날 나갔지요. 그런데 어느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기에 들어갔더니 소리하는 사람도 몇명이 나왔는데 소리를 하라고 해요. 그래서 소리를 했더니 거기 총무쯤 되는 이가 듣고 감짝 놀래요. 정말 보통이 아닌 사람이 왔구나 하는 눈치예요. 그렇게 시작해서 그 곳을 몇 개월 동안 나갔어요. 피난 가서 먹고 살 방법은 없고 꽤 고생되었었지요.
최 : 그때야 모든 사람들이 고생할 때인데 선생님은 그래도 무슨 생선장사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국악을 하면서 살았으니까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수복 후에는 바로 서울로 올라 오셨나요?
묵 : 수복되고 얼마 있다가 바로 올라왔지요.
최 : 수복 후에도 대동놀이가 많이 있었나요.
묵 : 꽤 있었지요.
최 : 얘기를 조금 바꿔 볼까요. 선생님에게 제자들이 와서 소리를 배우겠다고 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묵 : 그것은 인간문화재가 되고 부터이지요. 그 전에는 가르칠 생각도 못했고 배우러 오지도 않았어요.
최 : 언제 문화재가 되셨지요?.
묵 : 1975년이지요.
최 : 그 전에는 방송하시고 대동놀이나 환갑 잔치에 불려 가시고 그러면서 돈을 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렇게 국악만해서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까?
묵 : 예 살 수 있었어요. 내가 원래 부지런히 다녔으니까.
최 : 남편은 뭘 하셨어요?
묵 : 뭘 하신다고는 하는데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집안 꾸려 가다싶이 했지요.
최 : 그러면 이은주 김옥심 안비취 같은 분들과 함께 활동하게 된 것은 언제 부터인가요?
묵 : 피난 갔다 와서 나는 돈암동에 살고 그네들은 문안에 살았는데 그네들은 좀 활동을 했지만 나는 형편이 어려워서 나대로 집을 고치고 생활하는데만 열중하면서 살았지요. 그런데 한번은 성북동에 있는 큰 요정에 갔더니 박귀희 박초월씨등이 오고 경기창으로는 내가 갔는데 내 소리를 들어 보더니 박귀희씨가 당시 방송국의 국악담당 프로듀서였던 강정수씨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뭣 하노 내가 보니까 이렇게 대단한 경기명창이 있는데 당신 뭣 하노"하면서 나무라듯이 말하더라고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강정수씨가 나를 찾았지만 내가 늘 일하러 다니니까 만나지 못하다가 이정업씨 생일인데 이소향씨가 같이 가자고 하여 갔지요. 그런데 거기서 강정수씨를 만나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당장 “내일 모래 방송국에 오시요"하더라구요. 해서 방송국에 나가게 되었지요. 그 때부터 방송을 하게 되었는데 이소향 김옥심씨와도 많이 했어요.
최 : 안비취씨는 언제쯤 합세를 하게 되지요?
묵 : 60년대쯤으로 기억됩니다. 국악계활동을 하지 않고 계셨으니까요.
최 : 인간문화재 되고 나서 제일 처음 제자로 들어 온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묵 : 임정란 고주랑 둘이예요.
최 : 이춘희 김혜란 등은 안비취씨가 데려가고요?

묵계월 선생의 제자들

묵 : 그렇지요. 그리고 지화자를 내가 지목을 했는데 지화자는 일본을 간다고 하면서 그것을 안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일본을 가더라도 해라" 했는데도 안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주랑이가 하게 된 것인데 실제로는 고주랑이가 일본에 오래 가 있다가 왔고 지화자는 한국에 있었으니 우습게 된 것이지요.
최 : 임정란씨는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래서 이수를 하고 준문화재라고 하는 전수조교도 하고 했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은 경기도의 지방문화재가 되었으니까 행정적으로는 선생님문하를 떠나 독립한 셈이네요. 그러면 지금 선생님의 문하에는 어떤 제자들이 공부하고 있나요?
묵 : 지화자가 다시 오고요. 김영임이 들어오고 유창이도 들어오고 했지요.
최 : 유창 같은 남자 제자가 있어서 좋네요. 유창은 요즘 ‘삼설기'를 열심히 하던데 잘 하고 있지요?
묵 : 네 유창도 여러 선생님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 분인데 요즘은 저에게 ‘삼설기'를 열심히 하고 발표회도 하고 했지요.
최 : 요즘도 이곳에서 전수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지요? 제자도 많겠네요.
묵 : 많지 않아요. 많이 가르칠 힘도 없어요.
최 : 일주일에 몇 번이나 나오세요?
묵 : 두 번 나옵니다.
최 : 그러면 지금의 제자로는 지화자 김영임 유창 등이 제일 두드러진 제자들이네요. 모두 크게 활동하고 실력도 인정받고 있으니까 훌륭한 제자를 많이 둔 셈입니다.
묵 : 훌륭합니까?
최 : 훌륭하지요. 다만 선생님을 잘 모셔야 되는데 그것이 문제네요. 그 사람들 지금도 자주 배우러 오나요?
묵 : 오긴 오지요. 바쁘니까 시간이 있을 때에나 오지요.
최 : 연세가 높아지시니까 아무래도 전과 다르지요?
묵 : 우선 목이 잘 안 나와요. 다리도 아프고 불편한데가 많지요.
최 :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음반이 많이 있고 제자들도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으니까 행복한 음악가에 속하는 셈이예요.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더 많은 제자들에게 고귀한 선생님의 소리를 잘 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운데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