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지킴이  - 무궁화 살리기 운동의 선두자 김영만

무궁화에 새로운 인식을 디자인하는, 김영만 선생

이 선 실 (르포라이터)

 

새천년, 인터넷에는 무궁화가 활짝 피어나고 있다. 나라꽃 무궁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근역(槿域)'이라 불릴 정도로 무궁화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때에도 ‘무궁화 삼천리'로 일컬어지는 것이 관습화되었고, 1907년에는 윤치호가 애국가 후렴에 써서 지금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은 태극기와 함께 우리나라의 상징으로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

그 많던 무궁화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무궁화를 보기는 쉽지 않다. 그 많던 무궁화는 어디로 갔을까?
지난 1997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장미인 것으로 나타났다. 41.4%가 장미를 선호했으며, 다음으로 국화, 백합의 순이었다. 이것은 나라의 상징인 나라꽃이 주변에서도 사라졌으며 국민들의 마음 속에서도 사라진 결과다. 이런 무궁화를 다시 살리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 주역은 국가나 정부가 아닌, 디자이너 김영만씨.
“오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축'을 놓고 볼 때 우리나라의 상징물인 태극기와 무궁화는 단순한 국가상징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해 온 운명공동체이며 우리 민족혼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태극기와 무궁화에 대한 자료나 정보를 얻기 쉽지 않고 또한 그에 대한 연구도 극소수의 개인과 단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김영만씨가 무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1996년, 뒤늦게 국제산업디자인대학원IDAS에 재학 중, 심볼 자료를 찾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꽃자료를 찾던 그는 무궁화자료는 5∼6개인 반면, 일본의 벚꽃과 국화에 관한 자료는 몇 백 개나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라의 상징이 철저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은, 누구나 한번쯤 의문을 가졌을 법한 상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에서 할 일이다' 또는 ‘누군가 애국지사가 할 일이지'라며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만씨는 달랐다. 그는 무궁화를 생활 속에서 우리 마음 속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은 디자이너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미는 영국의 꽃입니다. 그런데도 장미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컵, 실내화, 옷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욕실 타일에까지 장미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 아닙니까? 그런데 무궁화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거리의 가로수도 벚꽃은 흔히 볼 수 있지만 무궁화는 단 한 그루도 볼 수가 없습니다."

디자인을 통한 친숙함과 생동감을 주는 무궁화 만들기

그는 더 이상 나라꽃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궁화에 대한 편견은 너무나 높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무궁화에 갖는 인식은 진딧물이 많다거나 지저분하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았다. 그는 디자인을 통해 친숙함과 생동감을 주는 무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날부터 업무시간 이후, 남는 시간마다 무궁화에 관한 조사와 시각화 작업을 하게  된다. 사진만 3천컷을 찍었고 무궁화 연구가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무궁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마다 대표적인 꽃이 있지만, 대부분의 국화는 귀족이나 왕실의 꽃이 국가의 상징이다. 전세계에서 유독 우리나라의 무궁화만이 특정 계층의 꽃이 아니라 국민들이 정한 나라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궁화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2,3년 동안 혼자서 틈틈이 무궁화를 디자인했다. 무궁화를 친숙하게 전달하기 위해 심볼, 패턴, 텍스타일, 캐릭터 등 모든 방법으로 무궁화에 접근했다. 그 후 동료와 후배 디자이너 70여 명이 참여해 대규모 프로젝트로 발전되었고, 그 결과 개발 작품 중에서 2,002작품을 선정해 대한민국인터넷 디자인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새천년 첫 광복절인 8월 15일에는 무궁나라 웹 사이트가 오픈됐다. 연인원 100여명이 작업하여 개발된 무궁나라는, 자라는 어린이에게 무궁화에 대한 친근함과 사랑을 심어주면 자라서 무궁화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고 무궁화를 통해 국가의 소중함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시작된 철저한 비영리 사이트이다. 무궁화 키우기 게임, 무궁화 편지지, 무궁화 엽서, 어린이 ‘나라꽃 무궁화 이메일 갖기 캠페인' 등을 전개하여,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무궁화와 친숙해지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또한 아동문학가들과 공동으로 ‘솜씨자랑' 공모전도 진행하고 있다. 무궁화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 사이트는, 텍스트만도 책 다섯권 분량에 해당한다.  또한 무궁나라 웹사이트는 단순히 한 명의 디자이너가 시작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그 취지나 구성이 독특하다.  
김영만씨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공대생이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그의 끼는 어릴 때부터 잠재해 있었다. 영화광고 디자이너인 아버님과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누나, 공대를 나왔지만 회화를 하는 형님 등 미술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서 자연히 그림과 친숙해졌다. 그러나 한 번도 그림이나 디자인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학부를 졸업할 때, 그는 계속 공부할 생각으로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 그 사이 그는 우연히 CIP 공모전 소식을 접했고, 무작정 응모를 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1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대학원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디자인에 입문하게 되었다. 비전공자에 대한 벽이 높은 디자인계, 그것도 뒤늦게 뛰어든 그에게는 반대도 많았다. 실제로 4,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비전공자 딱지를 달고 다녀야 했다. 처음 직장 생활에서는 콤플렉스를 느껴야 할 정도로 힘든 일도, 서러운 일도 많았다. 그러나 노력 하나로 그런 모든 벽을 뛰어넘었다. 첫 직장에서는 2년 동안 집에도 안 갔다.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디자인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굳힐  수 있었고, 1991년에는 자신의 회사를 설립해 독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영만씨는 그런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 않았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곧 영상시대, 멀티미디어 시대가 닥칠 것을 확신하고 재충전 겸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무궁화와 운명적인 조우를 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는 하루 평균 16시간씩 일하고 있으며, 디자인계에 입문한 이래 지금껏 여름 휴가 한번 가본 적이 없다.

21세기에는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우리국가의 이미지가 있어야

디자인은 순수예술과는 다르다. 순수예술처럼 창의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상업적인 이윤이 없으면 그 디자인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런 디자인의 속성을 볼 때, 그가 무궁화에 뛰어든 것은 무모한 모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무궁화 디자인을 할 때, 상업적인 이익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까지 자신이 디자이너로써 사회적으로 한 일이 없다는 자각이 그를 무궁화에 뛰어들게 한 것이다.
“무궁화를 처음 기획할 때, 21세기에는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우리 국가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업이나 개인도 아이덴티티를 관리하는데, 국가는 그런 작업이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역사가 5천년이나 되고 전통적인 문화가 보전되어 있습니다. 국가 이미지로 도출할 소재가 많은데,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이 나라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국가 이미지가 부족한 것은 정부나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기 보다는, 디자이너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세기라는 이슈가 전세계적으로 떠오르면서, 디자인은 이제 단순히 상업을 위한 부수적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동안 ‘메이드 인Made in'으로 표기되던 상품 출처가 선진국에서는 ‘디자인 바이Design by'로 바뀌고 있다. 시각화 시대 디자인은 생산성을 높이고 생활에 즐거움과 안정성을 주는 생활예술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은 가치를 만드는 사업이며, 단순히 상품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부정적인 인식은 사라지고 진정한 국화로 다시 태어나길

그는 무궁화 사이트를 통해 어린이들의  마음 속에 친근한 나라꽃, 생동감 있는 나라꽃을 심어주려고 한다. 그런 무궁화를 통해 어린이들은 친근한 나라, 생동감 있는 나라를 느끼게 될 것이며, 그것은 곧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무궁화 캐릭터와 디자인을 상품화할 것도 계획하고 있다. 무궁화가 생활 속에 친숙한 꽃으로 자리잡을 때, 무궁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지고 진정한 국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무궁화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는 한국의 고유 문화를 디지털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앞으로 그는  인사동, 경복궁 등 고유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산업에 연계할 계획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국내에서는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해외에는 한국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인터넷에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무궁화가 우리 생활 속에서 활짝 피어날 때, 세계 속의 한국도 그만큼 활짝 피어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