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그 내밀한 詩情의 도도한 흐름
박
영 호 (문학평론가, 협성대교수)
서울을
벗어나면서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잠결에 가파른 곳을 오르는 버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창 밖에는 이미 대관령 고개 정상을 알리는 탑이
눈에 들어왔다. 홀연 졸음이 거짓말처럼 달아났다. 이제 버스는 지금까지의
속도감과는 달리 ‘S'자처럼 굽은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문득 경포 호수와 동해 바다 그리고 사촌(沙村)의
교산(蛟山)과 난설헌 생가가 있는 초당 등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순간 가슴 한 구석에서 번져오는 설레임 때문에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가을걷이를 끝낸 황량한 벌판과 마치 파란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빠알간 까치밥 몇 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오래 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이 불현듯 떠올라 온종일 우울했던
날이나, 일상의 삶에서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저녁
무렵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먼저 생각한다.
필자의 고향 또한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필자는 현대화와 개발의 물결에
밀려 이제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대부분 상실한 고향보다 강릉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고등학교 시절 설악산 수학여행길에 들렀던 오죽헌이나 경포대 해수욕장
정도로 기억하던 강릉을 필자가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허균(許筠) 문학으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때이다. 허균의
시작품을 읽어 가다가 그가 세상사에 시달려 괴로울 때마다 강릉을 회상하고
때로는, 선경(仙境)처럼 아름다운 공간으로 형상화하면서 시름을 달랬음을
발견하였다. 그 직후 우연한 기회로 강릉을 찾고 이곳저곳을 두루두루
다녀 본 뒤에야 이 고장에 스며있는 문화적 깊이와 너비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선인들께서는 관광의 진정한 의미가 빛나는 선진 문화를 보고 체험하여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 하였다. 비록 선인들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앞선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이 남겨 놓은 유적과 흔적을
따라가며 때로는 그들의 삶에 깊이 침잠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낯선 곳을 향한 떠남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번 여행의 의미 또한 이와 같은 사실들을
새삼 확인하고 소개하는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 환기시키는 동안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이번 여행에 나를 안내해 줄 강릉문화원
심오섭 총무부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들러야 할 곳과 여정을 정한 뒤
먼저 김동명 시인의 시비를 찾기로 했다.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시인,
김동명
祖國을 언제 떠났노.
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南國을 향한 불타는 鄕愁.
너의 넋은 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情熱의 女人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머리 밭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부드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芭蕉>
<芭蕉>와
좥내 마음좦같은 주옥같은 시를 남긴 김동명 시인의 시비는 강릉 이북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어있는 국도 변에 위치하고 있다. <芭蕉>는
1930년대 우리 민족이 처해있던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을
서정적으로 노래 한 작품이다.
이 시기 시인은 초허(招虛)라는 그의 호에서 묻어나는 인상처럼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고자 의도적으로 전원에 묻혀 살았다. 이 같은 시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점점 더해가는 일제의 침략 정책에 결코 협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굳은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시인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목가적
세계를 그린 낭만파 시인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아래
민족적 울분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한에 의지하여 분출한 시인이었으며
한 순간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새로운 시 세계를 향했던 열정적인 시인이었다는
시인의 또 다른 면모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김동명 시인의 시비를
떠나며 황금찬, 함혜련, 박명자, 신봉승, 윤후명등 오늘 우리 문단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중량급 작가들과 최성각, 이순원 등과 같이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강릉에서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동해 깊은 곳에 묻어 둔
허균의 꿈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은 우리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문학가이다.
흔히 좥홍길동전(洪吉童傳)좦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 허균은 詩와 批評의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같은 이는 ‘시를 보고 고르는 안목은 조선에서 제일이다'라고 하여
그의 비평적 안목을 극찬하였다. 허균이 남긴 한시 또한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내밀한 정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허균은 고려이후로 번성하였던 양천(陽川) 허씨의 후손이다. 허균의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은 부제학과 경상 관찰사 등 비교적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당대의 신진 유학자들에 의해서 동인(東人)의 영수로
추대될 만큼 명망 또한 높았다. 이렇듯 명문가에서 태어난 허균은 타고난
명민함과 가문의 후광으로 평탄한 삶을 살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와, 예법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허균의 소원은 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자기 의지대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보는 것이었다. 39살이 되던 해 그는 마침내 삼척 부사가 되어
자기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우기 삼척은 45년 전 아버지
허엽이 부사로 재임했던 곳이며, 장인 또한 부사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여, 그는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설레임 속에
삼척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도착한지 13일 만에 불교를 섬긴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고 말았다. 파직된 뒤 허균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의 시로 대신하였다.
禮敎寧拘放 예교가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오,
浮沈只任情 부침을 다만 정에 맡기리.
君須用君法 그대는 그대의 법을 따르라,
吾自達吾生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이루리라.
- 聞罷官作, 벼슬을 빼앗겼다는 소리를 듣고
이미 구축된 사회 규범에 승복하여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보다, 타고난
성품을 따라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다는 다짐을 읽을 수 있다. ‘그대는
그대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삶을 이루겠다'는 다짐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현실에서 밀려나기 보다 이제는 자신이 세상을 버리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렇듯 26세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역모를 꾀한 죄인으로 50세에
처형당할 때까지 그는 다섯차례나 파직되었고, 두차례 유배되는 등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못하였다. 거듭되는 파직이 그를 괴롭힐 때마다 그는
현실의 질곡이 존재하지 않는 신선세계로의 비약을 꿈꾸었으며,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남아 있는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였다.
강릉에서 주문진을 향해 바닷길을 따라 가다 보면 사촌(沙村)이라는
작은 마을을 만나게 된다. 이 곳은 본래 그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예전에
허균의 외조부인 김광철(金光鐵)이 세운 애일당(愛日堂)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허균은 어머니와 부인을 데리고 함경도로 피난하였다가
이곳으로 옮겨와서 두 해 동안 머물렀다. 왜적의 병화가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하여서 그의 첫 시화(詩話)인 좥학산초담(鶴山樵談)좦을 완성하는
등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촌에는 백병산(百屛山)에서 발원한 큰 내 한 줄기가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고 내의 동쪽에 산이 하나 있는데 정상에서 꾸불꾸불하게
흘러내린 산자락의 모양이 마치 용처럼 생겼다. 그 수자리 아래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내가 무너질 때 늙은 교룡(이무기)이 엎드려 있다가
1501년 가을에 그 바위를 깨드리고 떠났다. 그 때 이 바위에 구멍이
생겼는데 마치 문과 같아서 뒷사람들이 이를 교문암(蛟門岩)이라 하고
그 산을 교산(蛟山)이라 불렀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으로 삼게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용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이무기' 자신
또한 이무기와 같이 자기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불우하게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지금은 사촌의 바닷가에
있는 교문암 이외에는 그 자취들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깨끗한 동해
바다가 손에 잡힐 듯한 교산 중턱에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던 그의 삶과 문학을 오랫동안 간직하려는 후학들이 정성스레
세워 둔 시비만이 남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가에 입구를
알리는 작은 이정표만이 세워져 있고, 시비(詩碑)도 숲에 가려져 있어
불우했던 그의 삶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 같아 이곳을
찾을 때마다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번에 다시 가보니 시비
주위를 단장하고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도 번듯하게 세워져 있어 허균에
대한 인식이 변모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허균이 고향 강릉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자주 시로 옮긴 것은
학문과 재주에 대한 自負와는 달리 어긋나기만 하는 벼슬길에서 느끼는
서글픔,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끊임없는 질시와 비방으로 인한 고통을
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고향을 찾으면 “沙村에 이르자 얼굴 절로
풀리고, 蛟山은 마치 주인 오기를 기다린 듯 하네. 정자에 올라보니
하늘은 바다와 맞닿아 있고, 峰萊山 아득한 그 사이로 내가 있네"-사촌에
이르러(至沙村)-라고 평온해지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그를 괴롭히는
온갖 시름도 한 자락 시원한 바닷바람에 사라지고, 대신 그의 가슴을
한가로움이 채워준다. 이렇듯 허균은 아름다운 사촌의 산천에 자신의
아픔을 병치시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때론 자신이 신선이 살고 있는
전설 속의 봉래산(蓬萊山)에 있는 착각 속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허균은 자기 시대의 모순을 제거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좥호민론(豪民論)좦이라는 글에서 그는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존재가
백성이므로 그들을 위한 정치가 행해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학문과
능력이 탁월한데도 서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원초적으로
막아버린 경직된 의식구조의 변화를 그는 이미 400년 전에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모순으로 가득 찬 어두운 현실이 자기가 꿈꾸었던 이상 사회로
개혁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고, 그는
그런 세상을 비웃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역사에 있어 가정(假定)처럼
무의미한 것도 없다. 그러나 ‘허균의 개혁의지가 이미 400년 전에 실현되었더라면'
하고 부질없는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가 이루고자
하였던 개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때 그의 개혁 의지와 꿈도 함께 허공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산에 오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동해 파란 물결에 실려 오는 그의 꿈과 아픔을 만날 수 있다.
허난설헌의 생가, 그 처연한
빛으로 남아
강릉 지방의 음식 가운데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초당 두부이다.
바다 물을 간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여느 지방의 두부와는 다른 맛을
낸다. 이번 여행길에 안내가 되어 준 강릉문화원 심오섭 총무부장에게
초당 두부가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초당 두부는
아침 해장에 좋을 뿐이지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은 한정식이라고 했다.
어느 음식이 강릉을 대표하는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초당동에 난설헌의 생가가 고색 창연한 모습을 유지하며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당동 입구에는 이 곳이 조선시대 시와
문장으로 명망이 드높았던 허씨 오 문장 즉 허엽과 허성, 허봉, 허초희,
허균의 시심이 발원한 유서 깊은 마을임을 알리는 표석과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고향임을 알리는 홍길동을 캐릭터화 한 동상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산책로를 따라 다섯개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난설헌의
생가는 노오란 은행잎이 떨어져 한층 운치를 더해 주는 초당동에서 조성한
산책로 끝에 있다. 소설가 박완서는 강릉을 무대로 쓴 그의 작품 좥참을
수 없는 비밀좦에서 그 집의 사랑채와 난설헌의 생애를 지배했을 고통의
흔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랑 마당은 네모 반듯하고 외부와는 운치있는 돌담으로 차단돼 있어
마당임에도 불구하고 이 집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처럼 보였다. 사랑채의
보존상태도 안채와는 댈 것도 아니게 좋았다. 흙바닥 그대로의 마당에
낀 푸른 이끼는 잔디보다 우아했고 한쪽에 꾸며놓은 조촐한 정원에는
백일홍이 만개해 있었다. 호텔 마당에서 본 백일홍과는 댈 것도 아니게
그 붉은 빛이 처연했다. 몇 가닥이나 되는 줄기가 서로 꼬이면서
올라가 뻗은 가지들은, 꽃이 진 후에도 조금도 허전해할 것 같지 않게
자유롭고도 자기 주장이 강해 보였다. 백일홍나무의 실제 수령이 얼마인지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난설헌도 그 나무 아래서 꿈을 꾸었다고 믿고 싶게
잔인하고 아름다운 고통의 흔적이 마디마디 배어 있는 것 같은 나무였다."
- 박완서의 <참을 수 없는 비밀> 일부
어린 아이 티를 채 벗지도 않았을 8세에 좥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좦을
지어 빼어난 글재주로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녀의 생애는 평탄하지
못했다. 당시의 관습대로 집안에서 정해준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남편과의
불화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거기다 어린아이들마저 잃고 난 뒤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아리따운
연꽃 스물 일곱 송이, 분홍빛 사라지고 시월 달은 싸늘하다"라는
자신의 시처럼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애통했던 생애와는 달리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경포대에는 다섯개의 달이
뜬다
경포대는 초당에서 수분거리에 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차를 타지 않고
젊은 남녀처럼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한가롭게 걸어가고 싶었다. 고려
충숙왕 때 인월사 옛터에 박숙정이 세웠던 것을 조선 중종 때 강릉 부사
한급이 지금의 위치에 옮겨지은 것이다. 정자가 있는 언덕에 올라 경포호를
바라보는 맛은 호수 주변에서 바라보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호수
가장자리에는 어른 키만큼 자란 갈대가 우거지고 호수 한 가운데 작은
섬에는 그림 같은 정자가 있다.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며 노니는
철새들조차 한가롭기가 그지없다. 경포대 전체는 공원처럼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호수 전체는
물론 멀리 동해 바다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정자에는 정작
오를 수 없으며 관람 시간도 제한되어 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절경을 노래한 좥관동별곡(關東別曲)좦을
기념하여 만든 시비를 너무 외진 곳에 세운 것도 그렇다. 경포대의 경관이
유명해 진 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경포호에 모두 다섯 개의 달이
뜬다고 노래했던 시인 묵객들의 예찬에서 비롯되었다. 관리와 보존 때문이겠지만
옛 시인들이 느꼈을 정취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도 맛 볼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달이 뜨는 시간까지 개방하는 것을 고려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정자 주변에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면 경포대의 절경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관동별곡 가운데 경포호와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한
부분만이라도 노래로 만들어 틀어준다면 이 곳에 배어있는 정취를 더
깊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정자 주위에서 이런저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면서 발길을 오죽헌으로 돌렸다.
문화유산을
소중히 보존·관리한 강릉인의 마음이 느껴지는 오죽헌의 생가
오죽헌은
율곡 이이 선생과 그의 모친인 신사임당의 생가이다. 집 주위에 줄기가
검은 대나무가 무성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과거에서 모두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칭해질 만큼 명석했던
그는 당시 퇴계와 쌍벽을 이룬 대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좥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좦를
비롯하여 많은 시문을 남긴 문학가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앞에 서니 자못 숙연해진다. 오죽헌에는 세 칸의 방이
있는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 신사임당이 동해에서 흑룡이 날아드는
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분만했다는 ‘몽룡실(夢龍室)'이다. 그러나 현재는
보수 공사가 한창이라서 주변을 배회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각(御制閣)에는 선생의 저서인 좥격몽요결(擊蒙要訣)좦과 벼루가
오랜 세월의 풍파를 이기고 창연한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다.
주말 오후이지만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인데도 어린아이와 함께
이곳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기도 하고, 수령 600년이라는 배롱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먼 훗날 그 아이들이 다시 부모가 되어서 또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전통이란 바로 이 같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죽헌을 들어설 때부터
오래된 항아리 수십 개를 모아 놓은 것이 시선을 끌었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다시 그 곳을 지나며 심오섭 부장에게 물었더니 이제는
쓸모 없다고 버리는 것을 하나하나 수거해서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버리는 것이 쉽고 편하다고 해서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항아리도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게되지 않을까 해서 모아 놓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더라는 말을 해주었다. 사실 강릉보다 율곡 선생과 더 깊은
인연이 있는 지역은 경기도 파주이다. 강릉은 율곡 선생이 태어난 곳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한정된 유품과 유적만으로 강릉하면 오죽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몇 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겠는가.
자기 지역의 문화 유산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강릉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새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는 특히 강릉문화원을 신축하며 애초부터 울타리를 배제하고 건축하여
누구나 편안하게 문화원을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나 솟대를 조형물로
만들어 입구에 배치한 것 등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조선조 양반가의 전형, 선교장
흔히 강릉 사람들에게는 ‘배다리'로 통하는 선교장(船矯莊)은 조선시대
강릉에서 제일 큰 민가로 전주 이씨의 대저택이다. 선교장이라 부르게
된 것은 경포호수가 현재와 같지 않고 둘레가 12㎞였을 때 배를 타고
건너 다녔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행랑채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주옥인
안채,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과 ‘동별당(東別堂)' 그리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 등 조선조 양반가의 전형적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밖에도 서재 겸 서고로 쓰이던 ‘서별당(西別堂)'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생활에 필요한 각종 용구가 보존되어 있어 주거생활
연구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필자가 찾았을 때는 보수 공사
때문에 공개하고 있지 않아서 그저 문 밖에서 대강 볼 수밖에 없다.
장지문을 사이로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생활 용구들을 둘러보며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저런 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까 자못 궁금했다.
선교장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사랑채인 열화당으로 팔작기와 지붕양식이
도도하다. 그리고 선교장을 들어서는 입구의 우측에 비원의 부용정과
유사하게 네모난 석조기둥을 연못 안에 둔 누마루를 가진 정자가 있는데
활래정이다. 여기저기서 한창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활래정 역시
그 주변만을 둘러 볼 수밖에 없었는데, 강릉시에서 편찬한 좥江陵市史좦에
의하면 방과 마루로 구성된 이 건물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다실이 방과
누마루 사이에 있어 근세의 한국건축양식을 보여주며, 또한 외부는 전부
창호로 되어 있어 여름을 지내는 별당 건축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방지의 가운데는 노송이 있는 봉래선 산이 있으며 옛날에는 목조보교가
있어 안으로 통행이 가능하였으나 지금은 다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선교장
외곽에 외형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찻집과
음식점을 겸한 별채가 있다. 문화 유적도 상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의의를 부여할 수 있지만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찻집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뱃노래를 부르며 만선을
기원하는 놀이굿, 진또배기굿
경포호에서
바다가 쪽으로 내려오면 강문동이 있고, ‘남서낭', ‘여서낭'으로 불리우는
당집이 각각 약 오분 정도의 거리에 이웃하고 있다. 강문동의 진또배기는
1984년 제2회 강원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토속신앙에 바탕을 둔 민속놀이다. 강문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진또배기' 의식이 지켜져 오고 있다. ‘진또배기'란
본래 ‘하늘기둥' 또는 ‘나라기둥'이라 하여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일러 ‘진또배기 굿'이라 한다. 강문동에는 긴 장대 위에 세마리의
나무로 깍은 오리를 올려놓은 ‘솟대'를 세우고 매년 세 차례씩 부락제를
지낸다고 한다. 그 과정이 <강릉시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여서낭과 남서낭에서 각각 제사를 지낸 다음 진또배기
서낭에 모여 풍농과 풍어를 비는 제사와 발원굿을 시작한다. 발원굿을
마친 무녀와 주민은 바닷가의 배로 나가 용왕굿을 벌여 각 배의 풍어와
안녕을 빌며 지신을 밟아준다.
발원굿과 용왕굿을 마친 업들은 뱃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가 고기를 많이 잡아온다. 만선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주민과 어부들은 고기를 품고 진또배기 서낭에 모여 감사하는 놀이굿을
벌여 마음껏 흥을 돋운다."
강문동 솟대는 우리나라 솟대 가운데 조형미가 가장 빼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솟대는 그 모양처럼 지상의 소원을 하늘에 전하는 매신저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그 위에 올려놓은 세 마리의 오리 역시 지상과 수중
그리고 하늘을 왕래하는 전령사의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솟대를 향하여
풍농과 풍어 그리고 행운을 기원했다. 이제는 솟대를 향한 신앙심이
많이 퇴락 했다고 하지만 엷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는 하늘을 향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모양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강릉을 대표할 만한 문화예술 행사는 5월 단오제이다. 단오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은 많은 문화행사가 동시에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단오제가
과연 얼마나 알려져 있는가는 미지수이다.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관리하여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이어가려는 노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을 다각화하면 훨씬 더 많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예컨대 사촌의 허균 시비, 경포호 주변에
있는 해운정(海雲亭)을 비롯한 많은 정자와 경포대 그리고 초당동에
조성한 문학의 거리를 하나의 벨트라인으로 묶어 문학작품의 산실이라는
문화상품으로 개발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단오제와 선교장, 솟대 그리고
남서낭, 여서낭 등을 하나로 묶어 민속문화상품으로 개발해 보면 의외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주제가 있는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면
지금처럼 산발적으로 관리 운영되는 것보다 파생되는 효과가 증대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현대화와 세계화를 지상 최대의 과제인 것처럼
부르짖다 우리 문화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통 문화의 원형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한편 다양한 문화상품을 개발하여
문화적 인프라를 극대화시킬 때 강릉은 유서 깊은 문화도시로 새롭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