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평론 - 1 무용 |
풍요로웠던 서울의 무용무대 이근수(경희대교수)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1월 넷째 주에 있다. 고구려와 삼한시대 추수감사의식이었던 동맹(東盟)이나 무천(舞天)도 지금 절기로는 11월에 열렸다. 들판에 여물어 가는 황금빛 벼이삭과 나무마다 소담스럽게 열린 과일이 10월의 풍요로운 볼거리이지만 한 달은 더 추수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리라. 이 11월, 서울의 무용무대는 가장 풍요로웠다. 동북아시아 지역에 구전되어오던 천지개벽의 신화를 창작 춤 형식으로 재현한 서울시무용단(임학선)의 「밝산」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려진 것(11.9~10)을 필두로 하여 안애순의 「비명-기억의 놀이」가 토월무대에(11.25~26), 그리고 이미영의 「꽃춤」(11.29~30 토월극장)과 밀물현대무용단의 신작 네 편이(11.22~23 문예회관 소극장) 새로운 예술의 해인 금년 11월을 흐뭇하게 장식했다. 안애순의 「비명-기억의 놀이」-작은 몸의 카리스마가 빚어낸 수작 안애순은 졸업생과 재학생들로 구성된 무용단을 가지고 편하게 작업하는 소위 교수무용가가 아니다. 그는 작은 수효지만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 온, 그래서 눈 빛 만으로도 서로의 느낌을 읽을 수 있는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무용단을 운영한다. 그들이 이윤경, 박소정, 최혜경, 지민혜, 황수현 등이다. 그러나 이 작은 무용단이 매년 하나씩은 문제작을 만들어 낸다. 1998년의 「열한번째 그림자」 1999년의 「On Time」그리고 2000년의 「비명-기억의 놀이」(11.25~26 토월극장)가 그것이다. 「기억의 놀이」는 그 제목이 암시하듯 유년시절의 놀이풍경을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음 15분간 각색 의상을 차려입은 두 명의 남자와 여섯 명의 여자어린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와 말타기 등의 놀이를 벌인다. 그 다음 15분은 ‘나리 나리 개나리...' 등 동요 운율에 맞춰 짝짓기를 하는 등 다른 놀이가 계속된다. 그리고 다시 15분간의 마술시범이 펼쳐진다. TV도 전자게임도 없고 이렇다할 놀이기구도 없던 어린 시절 우리들의 유일한 놀이란 몸을 부딪치며 뛰노는 것이었고 그들의 상상력을 채워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로는 이따금 장터바닥에서 열리는 마술시범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안애순은 그의 뇌리에 필름처럼 감겨 있는 충청도 시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차분하게 풀어내면서, 무대에서 전개되는 볼거리를 따라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관객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관찰한다. 정작 춤은 이 때(45분)부터 시작된다. 15분간 계속되는 네번째 섹션에서 제일 먼저 검정 색 의상의 최혜경이 등장해서 솔로를 춘다. 그의 춤은 외모와 같이 날렵하고 섬세하다. 소음처럼 연속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지는 짧은 음향이 춤의 배경이다. 이윤경의 뜨거움이 가세하면 춤은 듀엣이 되고 박소정의 부드러운 춤은 곧 안애순 춤의 간판 격인 트리오를 완성한다. 무대가 다시 한 번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 무대 뒤 오른쪽 높은 곳에 네 명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조각상처럼 떠 있다. 김기영이 작곡한 짧은 두 박자 음악을 그들은 반복해서 연주한다. 그때 검은 옷의 이윤경이 다시 나와 춤추기 시작하고 이 춤은 피날레의 군무로 이어지기 전까지 계속된다. 이윤경은 천부적인 무용수이다. 미니멀 하기도 하고 로보틱 하기도 하며 과장된 듯한 동작을 섞어 넣는 정열적인 즉흥 춤이다. 그는 지난 2월의 「홀로 아리랑 3」(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보다 훨씬 더 원숙해졌다. 간결함과 깨끗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던 춤에 뜨거움과 자연스러움까지 가세되어 이제 그는 한창 물오른 나무처럼 전성기의 춤을 춘다. 무대가
앞뒤로 갈라지며 샤막이 쳐지는 등 무대디자인(김종석)도 15분씩 갈라지는
다섯 번의 장면전환처럼 치밀하고 계산적이다. 머스 커닝햄의 작품에서처럼
무대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춤을 잘 받쳐 주는 독창적인 음악과 다양하고
경쾌한 의상(선미수)도 작품의 신선함과 코믹한 재미를 살려내는 데
효과적이다. 이미영의 꽃춤: 꽃보다 아름다운, 「수천가 2」 금년
2월 바뇰레 국제서울안무가대회에 진출했던 「수천가Beyond the sadness」의
후속작품인 「꽃길-수천가 2」에서 이미영은 한국 춤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수천가 1」이 죽음조차를 의식할 수 없는 치매 들린 여인들의
흥겨운 춤가락을 군무로서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이 작품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들의 두려움과 미련, 내세의 대한 기대 등을 안상화와의
듀엣으로 아름답게 표현해주고 있다. 이미영의 무대는 오염덩어리들을 줄곧 뱉어내는 장치산업공장의 황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앞에서 펼쳐지는 슬픈 군무와 애처로운 음악은 닥쳐올 미래에 대한 우울한 예언이리라. 탐욕과 파괴로 주변을 오염시킨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연의 복수는 흰 상의와 검은 바지차림으로 춤추는 무용수들의 기형적인 두 팔의 흔들거림과 ‘에드먼드 뭉크'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절규로 그려진다. 그들의 시선은 절망적이고 양팔과 다리의 움직임은 서로 어긋나고 지상에는 나무와 꽃들이 죽어간다. 소돔성을 연상케 하는 죄악으로 휘황하게 치장한 ‘고질라'같은 괴물이 무대 뒤편에 등장해서는 눈을 부라리며 세상을 호령하는 것 같다. 그러나 머지않아 먼동이 터 오듯 질서 있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슬로우 무비처럼 느린 동작으로 사람들의 일그러졌던 표정이 회복되며 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공해와의 싸움에는 전통춤사위인 검무가 응용된다. 침묵과 정지를 되풀이하며 바이올린의 청아한 음악소리가 무대를 장악할 때까지 선악간의 본격적인 싸움은 계속된다. 악이 무너져 내리고 대지는 소생해서 다시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21세기를 향한 희망찬 메시지를 이미영은 꿈꾸고 있는 듯 하다. 향로에 숨겨진 신화 살려내기 - 서울시무용단의 「밝산」 「밝산」은
25년 연륜의 시립무용단시절을 접고 새롭게 탈바꿈한 서울시무용단이
1년의 산고 끝에 시민들에게 보여준 특이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특이성은 우선 1992년 발굴되어 국보 287호로 지정되고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란
긴 이름이 붙여진 문화재를 무대 위로 끌어올려 한국춤사위로 풀어갔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향로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 거리를 감추고
있다. 64cm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키이지만 정교하게 조각된 용이 포효하면서
바다 한 가운데에 봉래산을 토해내는 형상이다. 용이 토해낸 산의
정상엔 날개 편 봉황이 여의주를 물고 있고 파도 위에 얹힌 듯 날렵한
자태의 산에는 74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솟아 있고 그 구비구비 마다
십장생(十長生)을 포함한 65마리의 형형색색의 동물들과 다섯 명의 악사를
포함한 18인의 신선들이 숨겨져 있다. 밀물현대무용단의 2000정기공연 밀물현대무용단(이숙재)의 2000 정기공연은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중진급 단원들인 이보경, 김은희, 이경은, 이해준이 각각 안무하고 출연한 15분 짜리 신작들로 꾸며졌다(11.22~23 문예회관 소극장). 한 무용단의 단원들 작품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네 편의 작품이 각각 상이한 소재와 개성적인 춤을 보여주고 있고 작품 수준 또한 고르게 높아진 것이 「밀물」의 17년 연륜을 말해주는 듯 하다. 이보경이
안무하고 솔로를 춘 「홀로 서기」는 깨끗하고 정돈된 서정적인
춤이다. 순백의 의상과 무대에 흩뿌려지는 빨간 꽃잎이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양희은이 부르는 잠들어 있던 대중들의 감성과 의식을 깨우면서
70년대 한참 유행했던 발라드 풍 노래가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