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
임
병 호 (시인·경기일보사 논설위원)
21세기를
일컬어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20세기의 산업화 과정을 통해 굴뚝산업이라고
불려지던 제조중심의 산업도 이제는 인간의 감성적·심미적 욕구를 충족하는
산업, 이른바 문화산업으로 구조가 급속히 변해가고 있다. 문화가 모든
인간활동의 기본이 됨에 따라 이제 문화는 전래적인 의미의 개념을 초월해
심지어 경제활동과 관광동기에서도 그 기조를 이룬다.
21세기는 ‘지구촌’개념이 세계가 하나가 되는 ‘지구공동체’가 되어
국경을 초월한 문화borderless culture가 형성되게 되며 2001년에는
문화관련 산업이 세계 총 생산량의 35%를 점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문화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가꾸고 경작한다”는 뜻의 쿨투라Cultura에서
시작되어 16~17세기 영어와 불어의 culture, 독일어의 Kultur에서 쓰이게
되었다.
문화란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고 그리고 교류하는 방식이다
문화는
현대에 와서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예술, 학문, 전통,
도덕 등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생활의 양식을 의미한다. 문화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일차적인 의·식·주 단계를 넘어 인간 삶의 격조와 품격을
갖추어 가는 작업이며, 그 방법으로써 인간의 가장 수준 높은 활동인
‘예술의 창작을 통해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광의적 개념의
문화’와 ‘협의적 개념의 문화’로 구분되며 우리가 말하는 ‘문화예술진흥’,
‘문화인’, ‘문화의 달’ 등에서 문화라는 말은 광의적 개념을 의미한다.
사실 문화란 단어는 “가장 복잡한 두세 개 영어단어 중의 하나”로
영국과 미국의 문헌에서만 150개 이상의 정의를 모을 수 있을 만큼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문화를 풀이한 것을
보면 문화에 대한 이해가 명확해 진다. ‘문화란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고 그리고 교류하는 방식이다’
기획예산처가 지난 12월3일 문예진흥기금모금을 2002년부터 완전폐지
한다고 느닷없이 발표했을 때 문화의 광의적 개념이 새삼스러워졌다.
1972년부터 영화관과 고궁, 각종 공연장 입장시 입장객에게 물리고 있는
문예진흥기금은 2004년 12월31일로 모금을 종료할 예정이었지만 기획예산처가
준조세 폐지 방침의 하나로 폐지시킬 11개 기금모금 중에 문예진흥기금을
포함시킨 것이다.
2002년부터 폐지 또는 개선될 준조세성 부담금은 국제교류 기여금, 도로교통안전관리기금
부담금, 교통안전 분담금, 농지전용 부담금, 산림전용 부담금, 개발전용
부담금(수도권 이외 지역), 진폐사업주 부담금, 건강증진기금 부담금,
폐기물처리 예치금, 폐기물 부담금으로 여기에 문예진흥기금을 준조세성
부담금으로 포함시킨 것 자체가 졸속 행정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기획예산처의
계획대로 이를 앞당겨 폐지하려면 국회가 이같은 시한을 설정한 문예진흥법
부칙 제2조를 바꿔야 한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현재 조성된 기금은 3천700억원으로
기금이 연평균 240억원 가량 걷힌다고 예상했을 때 2004년이 돼야 목표액
4천500억원의 달성이 가능하다. 즉 조기폐지 시한인 2001년 말까지 들어오는
기금을 합해도 4천억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계산이다. 또 연평균 450억원
가량의 예산 중 사업비 240억원과 인건비 등 경상비와 문예회관 지원금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당초 목표액인 4천500억원이 마련돼도 최근 금리하락으로
사업추진이 빠듯할 전망이다. 여기에 기금이 4천억원에도 못미칠 경우
사업비는 현재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2001년부터는 남북문화교류 활성화
등으로 지원수요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 각 예술단체들도 2002년 조기폐지가 불가피하다면
국고지원·방송발전기금 출연 등으로 기금을 추가 확보토록 하는 등
항구적 재원확보 방안이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한국 문화예술계의
젖줄은 문예진흥기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예진흥기금에 의해
문화예술계의 골간이 유지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획예산처가 규제해소와
개혁을 이유로 문예진흥기금 폐지를 제기함으로써 문화예술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는 문화예술의 특성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탁상공론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2004년 12월 31일까지 모금키로 한 1년 전의
정책을 대안도 없이 변경한다는 것은 정책의 졸속과 무원칙을 드러낸
처사이기 때문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각계에서 비난이 비등하자 기획예산처가
대안 마련에 나섰다는 것이다.
극장이나 고궁 등의 입장료에 부과해 온 문예진흥기금을 국민에게 전적으로
부담을 준다는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아무런 대안도 없이 폐지한다면 국민의 문화 향수권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야없이 당리당략만을 위해 연일 싸움만
계속하는 국회도 어쩐 일인지 문예진흥기금에 한해서만은 2004년 말까지
모금하도록 기간을 유예한 것도 기금조성 목표 약 4천5백억원 달성을
전제로 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을 3년이나 앞당긴다면 목표달성이
불가능함은 물론 지원정책에도 혼선이 빚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문화예술지원의 핵심적 수단을 정부가 경제논리와 규제개혁 잣대로 조기
폐지하겠다는 발상은 결국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우는 격이다.
정부는 문예진흥기금을 창작 활성화와 인프라 구축에 사용하여 국민의
문화향수 기회를 확대시켜 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문화예술 지원에 대한 세계적인 추세는 이른바 ‘팔 길이 원칙’으로
국가가 재원을 조달하되 관리는 팔 길이 만큼의 독립성을 가진 민간기구가
담당하며 정부 역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는 말로만 세계화를 부르짖을 게 아니라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국제무대에서
문화국가 대열에 설 수 있도록 최대의 배려를 해야 한다. 문화예술 발전이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룩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이치를 재인식할 일이다.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예술인들
문예진흥기금은
그동안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여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조성 관리하는
가운데 문화 예술의 창작과 보급, 민족고유문화의 발전을 위한 조사연구
제작보급, 문화예술인의 후생복지 증진을 위한 사업, 지방문화예술 진흥기금에의
출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 기타 문화예술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나 활동 등에 사용됐다. 문예진흥기금은 현재 지대하게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문화산업 뿐만 아니라 국민 문화향수, 관광,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문화산업의 근간도 문화예술 분야의 창작을
전제로 논의되는 것이며 국민들의 문화향수나 관광도 마찬가지다. 문화예술의
발전은 다른 경제관련 제품 생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문예진흥원은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예술인들 및 문화예술단체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일상 생활이 어렵다 보니 창작활동
이전에 생계가 걱정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생활을 위해 직장을 가져야
하고 일회성 프리랜서 개념의 창작활동에 연연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예술인들에 비해 소득이 안정적이고 충분한 사람들
숫자는 매우 적다.
문화예술, 특히 그것의 창작부문은 경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문예진흥기금을 ‘돈 덩어리’로 보는 사람들은 기금이 지향하고 있는
진정한 예술창작부분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예진흥기금은
기본적으로 상품화 이전 단계의 순수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장 어떤 대가성을 기대하거나 능률성을 전제로
기금 운영을 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문화예술, 문화수준의 발달 과정을 보면 문예진흥원과 기금이
탄생하던 당시와는 매우 다른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예진흥기금은
역사적으로 보거나 사업내용을 보거나 다른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앞서가는
좋은 제도이다. 30년 가까운 역사가 있고 수많은 창작 예술인들과
함께 성장해 왔다. 이 기금은 지나친 변화나 기금 통합 등의 조치로
변형되거나 사라져서는 안된다.
특히 문예진흥기금은 현재의 한국이 그야말로 세계 속의 한국으로 올라서는데
꼭 필요한 제도이다. 이를 소홀히 한다면 항상 문화예술 수입국으로
남게될 것이고 지속적이고 차원 높은 경제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소중한 문예진흥기금의 모태가 되는 ‘모금’을 폐지한다는 것은 앞에서
강조했거니와 기획예산처가 문화예술의 국가적 중요도를 낮게 보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문예진흥기금은 국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서 문화예술인들에게
긴요하게 지원되고 있으며 현재도 부족한 상태이다. 2001년도 문예진흥기금
지원신청서만 해도 2천9백여건에 420억5천여 만원이 소요돼야 한다.
따라서 조세에 대한 저항이나 거부감 없이 그대로 문화예술계로 재투자되는
문예진흥기금은 경제논리와는 다른 시각으로 검토돼야 하는 것이다.
특히 문화관광부 예산이 정부 예산의 1%가 실현되었다고는 하지만 체육·문화·산업·관광·관련기관
운영비 등을 제외하면 순수문화예술활동에 대한 지원은 극히 미미하다.
문예진흥기금은 준조세라기 보다는 기부금 성격의 재원이므로 당연히
2004년 말까지가 아니라 더오래 존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문예진흥기금 모금은 결국 폐지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문화예술인들의 자구책이 빨리 확립돼야 한다. 문예진흥기금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
문화예술인들의
자구책이 빨리 확립돼야
공연
예술의 경우 뮤지컬 <명성황후>가 미국 LA오베이션어워즈에서
<한국판 에비타>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시아 작품으론 처음으로
여우주연상 등 3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가 하면 비언어 퍼포먼스 <난타>는
국내 최초로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초청돼 연일 매진 사례 속에서
100만 달러의 공연계약을 체결하는 성과가 그 좋은 사례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이
공연한 작곡가 윤이상의 대작 좥심청좦과 헨리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아스>,
백병동의 좥사랑의 빛좦을 비롯해 이영조의 좥황진이좦(한국오페라단),
모차르트의 <후궁탈출>(서울시오페라단), 이동훈의 <백범 김구와
상해 임시정부>(베세토오페라단) 등 창작 오페라들도 성공했다.
연극계에선 <바리-잊혀진 자장가> <황구도> <못다한
사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의 창작 뮤지컬과 <아리랑>
<번지없는 주막> <가거라 삼팔선> 등의 악극, 그리고 무용계의
유니버설발레단이 한국 발레사상 최대 제작비인 8억원을 투입한 <리바야데르>를
무대에 올린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때 ‘순수예술’의 메카로 군림했던 세종문화회관이 2001년도에도
장르에 관계없이 ‘팔리는 공연’위주로 무대를 꾸미는 것처럼 전국의
각 문예회관이 수익성 높은 공연을 유치하는 것도 문화예술계가 스스로
생존하는 방법일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의 문예진흥예산도 형식적이지 말고 실질적이어야 한다.
대부분 선심성 예산은 과다하게 편성 해놓은 반면 문화예술진흥 예산은
너무 적은 예산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문화예술계가 당당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문화예술인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차원에서 특히 기대는 간절하다. 이제는
문화의 힘을 21세기 문화국가 형성의 지주로 삼아야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