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문화존중과 교감의 아름다운 장(場)
이
석 렬 (음악평론가)
언제부터인가
우리에 가까이 다가온 용어 중 하나는 ‘퓨전Fusion' 이다. 오락과 문화적
흐름 모두에서 이 퓨전적인 현상은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퓨전적인
현상은 이질적인 요소들, 혹은 멀리 떨어져 있던 현상들이 함께해서
제 3의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일컫는다.
퓨전적인
현상들
이제
지구에 존재하는 국가와 민족들은 지구촌이란 말이 당연할 만큼 서로가
가까워지고 있다. 광고와 음식, 패션 등 생활속 전반에서 우리는 퓨전적인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 퓨전음식들이 현재도 그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검은 머리칼과 하얀 머리염색이 혼합된 젊은이들의 헤어 스타일을
보자. 예전 같았다면 이것을 주체성 상실이라 불렀겠지만 이제는 퓨전적인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한 듯하다.
퓨전이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섞다fuse'라는 뜻인데, 이것이 영어의
명사형으로 되어 ‘퓨전Fusion'이 된다. 그런데 이 용어는 요즘 음악계에서
많이 쓰이는 ‘크로스오버(넘나듬)'라는 말과그 뜻의 차이를 갖는다.
사회적인 쓰임새로 보자면 크로스오버 현상은 클래식음악과 대중음악의
중간적 위치에서 서로의 정서를 소통시키는 성향을 말하고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 클로드 볼링이 플루티스트 장 피에르 장팔이나 첼리스트
요요마와 함께 한 작업들, 그리고 근래에 발매되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
성악가 조수미의 크로스오버 음반 등이 크로스오버의 대표적인 아이템으로
꼽힌다.
퓨전은 말 그대로 뒤섞임이다. 문화권간의 밀착으로 인해 야기된 새로운
사운드들, 또는 여러 장르의 음악가들이 함께 만들어낸 장르 불분명의
음악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퓨전음악은 음악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거나 여러 음악가들이 함께 창조해 낸 새로운 음악이다. 이것은
예술적으로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의 발로이지만 때로는 한 문화권의 홍보적
차원에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맥락이 되기도 한다.
폭넓은
정서와 상상력의 자극, 퓨전
퓨전현상은
대중음악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대중들에게
폭넓은 정서와 상상력의 자극을 제공하기 위해 국악기가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김수철의 앨범 좥불림소리Ⅱ좦는 환상과 우주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국악기를 사용한 한스런 정서에 록뮤직적인 반주
패턴을 깔아 젊은이들의 감성에 어필하고 있다. 음악가 김수철은 오랫동안
한국과 서구간의 음악적 퓨전현상을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국악기 소리가 묘사적인 차원으로도 사용되고 녹음편집을 통해서는 특정
이미지의 원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타리스트 신중현의 앨범 좥무위자연좦에는 전기기타로 연주된 좥전기기타
산조좦가 수록되어 있다. 신중현에게 산조를 권한 노재명의 글에 의하면
신중현의 전기기타 산조는 신쾌동의 거문고 산조와 유사한 음악적 특징이
반영됐다고 한다. 이 연주의 고수는 노재명이 맡았으며 전기기타의 초킹이나
밴딩을 통해 농현이 지닌 정교한 울림을 지향하고 있다. 전기기타의
서구적 울림을 거문고의 전통적 모습과 혼합하는 상상력의 발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순수 창작계의 작곡가 황성호는 퓨전적인 음악을 많이 양산하는 작곡가다.
신디사이저를 비롯한 매체의 발달은 악사들의 현존유무에 관계없이 여러
악기들의 음색을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컴퓨터와
전자 악기를 통해 국악의 소리들을 샘플링하거나 녹음하여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국악의 영역과 서구적인 스타일을 혼합할 수
있게 하였다.
황성호의 1996년작 좥환상보행좦은 무용음악이다. 이 음악은 핑크 플로이드나
텐저린 드림 같은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들이 추구했던 서정성 깃든 기계적인
음향, 여기에 재즈나 록 등 여러 상이한 스타일들이 순수창작의 마인드
안에서 녹여진 무용음악이다.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스테레오 음반과
신디사이저를 비롯한 전자악기들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람들은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운드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전자매체를
통해 개인이 긴 시간 차원에서 새로운 사운드들을 혼합할 수 있게 하였고,
결국은 기존의 클래식악단이나 밴드의 형태를 벗어난 사운드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작곡가 황성호의 경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장르가 다른 이질적인 스타일들이나
이국적인 정서까지 포함하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일렉스틱 사운드가 장르간의
퓨전에 깊이 관여하는 모습이 되었다. 황성호의 좥환상보행좦은 이러한
동향을 보여주는 순수 창작계의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냉소적 금관과 영화음악 좥샤프트좦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수용은 예전의
한국 창작계에서 거의 도외시되었던 맥락이다.
황성호의 작품 ‘티브이 스케르쪼TV Scherzo'는 감성을 희롱하는 고전적인
스케르쪼와 현대 과학시대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융합한 작품이다. 다양한
엔진들이 가동되는 과학적 이미지, 여기에 수많은 소리 형상과 모자이크들이
입체적으로 펼쳐져 이미지의 전환과 유희를 상당히 빠르게 전개한다.
이 작품은 비디오 영상과 한 세트로 공연되어 국제적인 호평을 받기도
했는데, 아마도 고전적 균형감과 팝뮤직의 테크놀로지, 그리고 과학시대의
상상력이 맞물려 그러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이
지구는 세계화와 국제화라는 문화적 흐름을 타고 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몇 달을 가야할 나라들을 불과 하루도 안되는 시간에 도착하고
그런 나라들의 음식들은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여기에 각종 상품과 관련된 문화적 분위기와 모자이크들이 전시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끈다. ‘불고기버거'를 비롯한 각종 퓨전 음식들,
그리고 국적의 제한이 불가능할 정도의 의상계의 아이디어들이 사람들
눈 앞에 전시되고 있다.
영화음악의
기능성을 고려한 퓨전양상
영화음악에서도
퓨전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로 다른 장르를 융합하려는 영화적
퓨전 추세로 인해 영화음악의 영역도 그러한 면모를 부여주는 경우가
있다. 외국의 예를 들자면 모리스 자르의 영화음악 좥사랑과 영혼좦이
퓨전적인 추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팝송 좥언체인 멜로디좦, 여기에 이것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눈물어린
버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하는 이미지의 발현을 위해 원초적 전자음향의
뒤범벅으로 사운드트랙이 구성되었다. 한국의 경우, 영화음악가 이동준이
음악을 맡았던 좥은행나무침대좦가 퓨전적인 성향을 담고 있다. 가야금과
대금, 소금 같은 국악기의 사용이 서양의 앙상블과 어우러지고 영화의
장면들과 상응하는 전자악기들의 음향들이 또 다른 시공을 향해 입체감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음악의 기능성을 고려한 퓨전적인 양상으로 볼 수
있겠다.
퓨전적인
음악회, 국악과 양악의 만남
1999년
6월 7일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국악과 양악의 만남을 지향하는 연주회가
열렸다. 좥화락-하늘을 여는 소리좦라는 제목의 이 공연은 서양악기와
국악기가 함께하는 퓨전적인 영역을 추구한데다가 무대에 등장한 연주자들의
지명도가 높았던터라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김덕수의 장구와 미르
현악 4중주단의 협연, 첼리스트 지진경과 아쟁의 김영길, 피아니스트
백혜선과 김덕수 사물놀이, 판소리 오정해, 테너 김영환 등이 출연해
무대를 장식했다.
현악 4중주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일반장구보다 작은 장구를 사용되기도
하여 음향적 밸런스를 꾀한 것,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사물의 거대한
음향에 물러서지 않으려고 연탄음과 자유분방한 타건을 두드린 모습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보도되었다. 즉흥적이고 격렬한 전통적인 리듬을
포함한 퓨전적인 음악회는 새로운 시도의 양상으로 인식되었다. 작곡가
이건용의 음반 좥혼자사랑좦에도 여러개의 스타일을 혼합하는 퓨전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순수 창작계의 작곡가가 전경옥, 송창식, 안치환
등의 대중가수들과 함께한 장이라는 것부터가 장르간의 퓨전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록곡 중 ‘누가 우리들 추운 가슴에'는 클로드 볼링적인
반주 스타일로 시작되서 한국의 동요적 멜로디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안치환이 부른 좥배웅좦에서는 한스러운 해금 전주에 통키타 반주가
이어진다. 그후 해금 소리가 폴리포니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그것이
첼로와 앙상블을 이루는 면모 역시 퓨전적 성향이라 할 수 있다.
퓨전적
성향에 대해 무심했던 한국의 현실
얼마전
독일의 록그룹 스콜피언스가 베를린필과 협연한 음반이 화제가 되었다.
현재도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여 퓨전적인 면모를 이루는 음반들은 계속해서
기획이 되고 있을 것이다. 1967년 영국의 록그룹 무디 블루스는 런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좥Days of Future Passed좦라는 음반을
내놓아 호평을 받았다. 그후로도 프로콜 하룸 같은 록그룹들이 록음악과
클래식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메카트니는
히트곡 좥Mull of Kintyre좦에다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 소리를 집어넣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와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들의 히트곡
좥하여가좦에 태평소 소리를 사용하여 큰 히트를 기록했는데, 당시 이것이
대표적 퓨전현상인 것처럼 부각되었던 현실은 나름대로 시사성을 던져주는
맥락이기도 하다. 필자는 여기서 서태지의 음악성에 대한 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한국의 현실은 장르간 문화권간의 퓨전적 성향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지난 해 4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일본의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회가 열렸다. 사카모토는 영화 좥마지막 황제좦의 사운드트랙(이
사운드트랙은 록그룹 토킹 헤드의 멤버였던 데이빗 번과 반반씩 작곡한
것이다)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사카모토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전략이라면 바로 ‘퓨전'이었다. 동양의 황제가 등장하는 영화에
일본인들은 동양의 정서와 서양의 오케스트라가 혼합된 퓨전적 사운드를
제공했고 결과는 아카데미상이라는 쾌거로 이어졌다.
사카모토는 유럽의 전통적 요소와 테크노 팝까지를 수용하는 실험적
사운드를 제공한다는 대대적 홍보와 함께 한국의 가장 크고 권위있는
연주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필자는 그의 음악적 역량과 영양분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
음악계에 던져주는 메시지를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퓨전,
문화존중과 문화적 교감의 장
‘퓨전'이란
호환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고추장을 미국식 소스로 만들어 미국인들에게
호환시킨 어느 여사장님의 예처럼 국제화 시대에 어울리는 호환성있는
매체로 거듭나는데 퓨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문화적 홍보의
첨병이 될지도 모를 퓨전의 영역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악적 퓨전의 현장은 이벤트식 공연의 나열이 아니라 실제로
사운드로 검증되는 ‘사운드의 세계'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열린음악회류의
무대가 지닌 일회성의 한계인 것이다. 새로운 사운드, 깊이 있는 사운드로
여겨지는 다원적 사운드를 우리 음악인들에게 기대한다.
더불어 한국에 퓨전적인 성향을 수용하는 악단들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필자가 보기에 현재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에서
퓨전적 성향을 대변하는 악단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LG아트홀의 개관연주회에 초대된 미국의 크로노스 현악 4중주단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현악 4중주라는 매체로 녹여내는 대표적인 실내악단이다.
그들은 첫번째 내한 공연 때 지미 핸드릭스(고향의 기타리스트)의 음악을
연주했다. 당시 그들의 편곡판은 한국에서도 많은 갈채를 받았다. 아프리카에는
현악 4중주곡들이 있는가 라고 질문해보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크로노스 4중주단의 앨범 좥Pieces of Africa좦를 먼저 들어봐야
할 정도다. 지난 해 내한한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로비 라카토시는 집시
바이올린의 유산을 재즈적인 감성과 접목시켜 국제적인 양상으로 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퓨전의 의미를 문화권간의 상호존중이란 차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지구촌의 민족들이 모두 평등하고 가까워지면 당연히 문화들이
뒤섞이는 결과가 발생할 것은 분명하다. 소비적이고 상업적인 것만이
아닌, 서로간의 존중과 문화적 교감의 장이 되는 퓨전문화의 양산이
앞으로 세계 예술계의 이슈이자 흐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기개발과
함께 호환성이란 채널의 개발, 그리고 남의 문화도 존중하는 정겨운
풍토에서 퓨전문화는 존중받을 것이다. 이것은 교통과 통신의 제약 때문에
예전의 지구인들이 얻을 수 없었던 맥락이다. 그래서 현대인만이 누릴
수 있는 현대성의 지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