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 읽기 - 국악

판소리의 어제와 오늘
-판소리의 미래를 위하여- 

전 인 평 (중앙대 교수)

 

사회 변화와 창극의 등장

20세기의 판소리는 전개과정에서 판소리가 창극으로 그 양식이 변화하였다. 창극운동은 외래문화의 유입 과정에서 협률사라는 공연장의 등장으로 시작된 것이다. 판소리의 창극화 시도는 어전 광대로 사고참봉(史庫參奉)을 제수 받은 강용환(용한)이었다고 한다. 그는 협률사 창립 직전부터 춘향가의 창극화를 모색하다가 협률사가 창립되자 창극화를 본격화하였다.

판소리가 창극으로 전개되는 과정

당시 창극은 대단히 소박한 것이었는데 창극 춘향전은 무대 장치와 도구도 없이 흰 포장으로 배경을 삼고, 천장에 전등만을 밝힌 무대에서 2인이 번갈아 배역을 맡는 2인극이었다. 이러한 형편은 중국 경극과 흡사하다. 포장을 치고 탁자 하나만 올려놓으면 무대가 된다. 경제적 형편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의 화려한 의상과 연기를 돋보이기 위해서는 무대가 화려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당시 창극의 내용은 전편 공연이 아니고, 앞장과 뒷장만 뽑아서 연출한 것이었다.
판소리는 창극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즉 창자 한 사람의 음악적 기량에 따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음악 기법이 제한을 받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노래하게 되고 반주단이 등장하면서 음악 쪽으로는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즉 청을 통일하고,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음악성이 위축되고, 양이 늘어나자 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판소리와 창극소리를 구분하는데 창극소리가 판소리에 비해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편이다. 이것은 명창의 뛰어난 음악성으로 극적 표현을 하던 판소리가 사실적인 연극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귀중한 음악성을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며 구체적으로  는 길바꿈 기법·장단의 엇붙임 기교·넓은 음역의 사용 같은 기법이 창극에서는 제한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이, 판소리는 18세기 서민층의 요구로 탄생한 예술이다. 판소리의 발달에는 관에서 지원금을 낸 것이 아니다. 순전히 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그들이 필요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창극의 시작은 1902년 협율사(協律社) 공연으로 시작했다. 이 공연은 당시 정부에서 공연 수입을 올려 정부 재정에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정부에서 돈벌이를 위한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다. 돈벌이를 위한 것인 만큼 당연히 일반 대중들이 좋아할 공연을 해야만 했고 이 공연 종목으로 시작한 것이 판소리를 연극화한 창극을 공연하게 된 것이다. 이 협율사는 관에서 창극을 지원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창극 수입으로 정부재정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21세기를 앞둔 오늘날, 창극으로서 선택해야 할 가능성은 어떤 것이 있는가? 어떤 선택이 가장 현실과 이상을 조화할 수 있는 방안인가?
필자는 86년 아시아 경기대회, 88년 올림픽 문화 행사의 문공부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으며 이때, 한국을 대표할 공연예술로 창극으로 삼고 이를 발전시켜 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리고 현재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명창의 시대가 지나고 있다. 과거의 도제식 판소리 교육도 더 이상 계속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에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대 상황이 창극보다 더 강하게 사람들을 유혹하는 매체가 많아졌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 하나는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얻도록 창극 쪽에서 변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적인 인기는 접고 철저하게 예술적 수준을 높이는 방법이다. 여기서 ‘대중적'이란 오페라나 초기 창극에서 보듯이 공연의 초점을 대중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 음악은 즉흥성을 버리고 철저하게 계산된 음악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새로 작곡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새로 작곡하는 창극을 공연하기 전에 징검다리로 절충안을 생각해 보자. 명창 몇 사람이 모여 작창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채보한다. 그리고 이 음악에 반주를 붙인다. 이 절충안이 보통 창극 공연에서 흔히 보는 형태이다. 이번에 공연한 좥백범 김구좦가 바로 이 방법에 의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창극 공연은 계획에서 공연까지의 준비 기간을 늘여야 한다. 적어도 대본 작성에 1년, 작곡에 2년은 소요되어야 하며 작곡을 하기 전에 대본에 대한 점검을 철저히 하여야 한다. 그리고 창극 작업의 주체는 작곡가가 되어야 한다. 오페라 「나비부인」이 푸치니 작곡 「나비부인」으로 소개되듯이 앞으로의 창극은 000작곡 0000창극으로 소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번 공연한 것은 일회용으로 버리지 말고 여러번 공연을 거듭하여 매만지고 다듬어야 한다. 「나비부인」도 1904년의 초연에서는 흥행에 대실패를 한 작품이었다. 그 후 여러번 수정을 거듭한 후에 오늘날과 같은 명작이 나온 것이다.
판소리는 즉흥성과 현장성이라는 민속 음악의 본질적 속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음악이다. 판소리의 명창 고수관은 좌중에 있던 기생을 이름을 들어 즉흥적으로 춘향가의 「기생점고」를 불렀다고 한다. 판소리의 현장성과 즉흥성을 잘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판소리는 열두 바탕으로 정립된 후 일곱 바탕이 전승과정에서 탈락되면서 연주곡목이 축소되었고, 20세기초까지 새로운 곡목의 창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판소리가 현실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물론 당대의 현실 문제를 소재로 하였거나 기존의 고전 소설을 판소리로 부른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최병도 타령」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고 기존 판소리 사설을 부분적으로 개작하거나 고전 소설을 판소리화한 정정렬의 작업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전통 판소리의 범주에 들지 않는 새로운 곡목을 모두 창작판소리라 하기는 어렵다. 고전 소설을 판소리화한 경우는 일반적으로 신작 판소리라고 하는데, 뚜렷한 창작 의식을 가지고 새롭게 지어진 곡이 아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 박동진 명창이 제목만 전해오는 판소리 사설에 새롭게 곡을 짜서 부른 경우는 ‘복원 판소리'라고 할 수 있다. ‘창작 판소리'란 전통 판소리의 곡목에 속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사설을 새로운 곡조로 짜서 부른 작품을 말한다.
「열사가」가 만들어진 시기는 해방 전후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 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가는 것이 민족적 과제로 제기되던 시기이다. 좌우이념대립과 같은 내부갈등도 있었지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민족의 공통적인 정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비분강개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줄 영웅에 대한 열망 등이 「열사가」의 형성동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열사가」는 단일한 작품이 아니라, 「이준 열사가」 「안중근 열사가」 「운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로 구성된 것이며, 때에 따라 「이순신전」 「권율 장군전」 「녹두 장군 전봉준」 등이 덧붙기도 한다. 이들 작품은 일시에 만든 것이 아니라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시간적 편차를 두고 형성된 것이다.
「열사가」의 작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열사가」의 작사와 작곡 그리고 보급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이념적 지향이 매우 강하였던 박동실 명창이다. 그 외에 김연수·정광수 등 여러 명창들이 「열사가」의 창작과 보급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박동실의 「열사가」가 한승호·정월중선·정순임·안숙선 등에 의해 불리어지고 있으며, 호남 지역의 명창 가운데 「열사가」를 부를 줄 아는 이가 많다.

전통문화의 관심 고조되면서 탈춤, 판소리 확산

1960년대 후반부터 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우리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때 탈춤, 판소리 등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고조되었고 아울러 전통의 현대적 계승 문제도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통에 대한 관심은 주체성이 위기를 당할 때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전통을 통하여 자기를 확인하는 작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는 문화운동이 사회변혁의 중추 역할을 하지 못하고 보조적인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들어와 운동이 사회 모든 부문으로 확산되면서 문화운동이 일정한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임진택이 감지하의 담시를 판소리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김지하는 1985년 「똥바다」를 발표하였고 「오적」과 「소리내력」도 판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1990년에는 기존의 사설에 곡을 붙이는 작업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사·곡한 「오월광주」를 발표하였다. 그의 공연에 청중들이 공감을 하는 이유는 음악적 요인보다는 사설이 담고 있는 현실적 문제 의식 때문이었다.
판소리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판소리 창작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더구나 한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지속적인 작업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전문적인 판소리 명창도 창작 판소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문화재로 지정한 명창을 비롯한 대부분의 소리꾼은 전통적인 생각에만 몰두하여 창작 판소리에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전문 소리꾼이 1980년 광주 민주 항쟁을 다룬 「그날이여 영원하라」를 부른 것은 의미가 크다하겠다. 이 작품은 정철호가 작사한 것을 은희진, 안숙선, 박금희, 김수연, 김성애 등이 역할을 나누어 분창 형태로 부른 것이다.
「열사가」류와 박동진의 「판소리 예수전」 그리고 임진택의 창작 판소리 사이에는 작품의 의식지향이나 향수층의 성격에 있어 일정한 차별성이 내재해 있다. 「열사가」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박동진은 전문적인 창자로서는 드물게 이름만 전해오는 곡목을 복원하여 연주 곡목 확장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렇지만 박동진의 작업은 뚜렷한 창작 의식이 바탕 위에 이루어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판소리 예수전」의 경우 그 주요 관객은 기독교 신자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열사가」가 민족주의적 이념에 입각한 작품이라면 임진택이 부른 창작 판소리는 민중적 이념의 작품이다. 민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계속해온 그의 창작 판소리는 주로 사회 변혁 운동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나 지식인층 그리고 의식있는 시민층이 즐겨왔다. 전통사회와 달리 판소리의 후원을 감당할 집단이 없어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뚜렷한 성향을 지닌 집단이 판소리의 향수층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다. 그러나 이념적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된 2000년대 이후에도 그의 창작 판소리가 지속적으로 호응을 얻으면서 발전해 갈 수 있을런지는 속단하기가 어렵다.
「열사가」 사설에는 「인물치레 사설」이나 「죽고 타령」과 같이 전통 판소리에서 보이는 표현 수법을 이용하여 짜여진 것이 있다. 문체는 대체적으로 4구체가 연속적으로 나와 단조로운 느낌이다.
「판소리 예수전」은 예수의 탄생과 활동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서사적으로 엮은 이야기이다. 성경에 입각하여 사설을 짰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본래 판소리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었고, 사설 또한 전라도 사투리로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술자의 논평이나 설명이 개입하는 경우도 자주 보이는데, 한국적 상황과 연관지어 진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결말이 축제분위기이라는 점이다. 축제적 결말은 전통 판소리와 맥이 닿아있다는 점이다. 예수의 탄생 과정이 상당히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점 또한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다. 마태복음에 이 장면이 아주 간략하게 나오는데 비하여 「판소리 예수전」에서는 길게 부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의 활동·죽음·부활이 이어지는데, 이 중에서 예수의 활동은 그다지 부각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판소리 예수전」은 예수의 일대기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점은 잘 나타나지만, 예수가 인간에게 전한 메시지는 많이 나오지 않고 있다. 기독교적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공연되고 있다.
「오적」은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고 하면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시작하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크게 4단락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다섯 명의 도적인 재벌·국회의원·고급 공무원·장성·장차관이 벌이는 도둑시합 장면이다. 둘째 부분은 오적을 잡으려는 포도 대장이 위세 부리며 전라도 갯땅쇠 꾀수를 문초하는 장면, 셋째 부분은 오적의 호화찬란한 생활, 넷째는 포도대장이 꾀수를 무고죄로 입건하는 장면이다. 오적이 나와 자기 자랑을 하는 첫 단락은 반복과 나열이 많이 나온다.
이와같은 구성 방식은 「적벽가」의 군사설움타령이나 「흥보가」의 ‘흥부지식들 음식타령 대목'과 ‘박 속에서 초라니패 등이 나오는 대목' 그리고 「변강쇠가」의 ‘거사와 사당이 나오는 대목' 등에서도 보인다. 제2단락은 포도대장이 꾀수를 오적으로 체포하려 하자 꾀수가 자기는 오적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수궁가」에서 용궁에 잡혀간 토끼가 나졸에 의해 정체 확인을 당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제3단락은 오적의 호화로운 생활상이 다소 과장되게 묘사되어 나온다. 그리고 결말은 박문서관 본 「흥부전」과 유사한 사설로 되어 있다.
이처럼 「오적」은 그 표현 수법이 전통 판소리와 비슷하다. 「오적」이 보여주는 핵심적 의미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된 가치의 전도이다. 사회의 상층을 이루는 사람들이 오적으로 규정되는 상황부터가 그러하다. 정의를 지켜야 할 포도대장은 도적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오적이 만들어준 개집에 살면서 오적의 안위를 지켜주는 충견으로 전락한다. 결국 죄없이 당하는 것은 전라도 갯똥쇠 꾀수로 대변되는 힘없는 민중들이다.
「오월 광주」는 광주 민중 항쟁이 일어난 10일간의 사건을 서사적으로 엮은 것이다. 전통 판소리의 표현 방식에 입각하여 짜여진 사설은, 학생이 금남로에서 도청으로 집결하는 과정에 삽입한 노정기 형식의 사설이나 나열 방식의 시위에 참가한 대학을 열거한 사설 등에서 확인될 뿐이고 사실은 이야기체에 가깝다.
「오월 광주」에 보이는 구호·운동 가요·가두 방송·연설 전단 등과 같은 시위 요소를 많이 수용하였다는데 있다. 이러한 요소는 현장감을 잘 살려주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제 1단락 계엄포고의 확대와 공수 부대의 만행, 제 2단락 광주 시민의 시위 합세와 도청 탈환, 제 3단락 투쟁파와 투항파의 대립, 제4단락 수습위의 해체와 도청을 사수하던 항쟁 지도부의 장렬한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항쟁 주체의 변모가 확연히 제시되고 있으며, 또한 투항파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드러난다. 시장 상인·가게 점원·요식업소 종업원·회사원·가정 주부·할머니·술집 아가씨 등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고 함으로써항쟁에 전 계층이 참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은 민주항쟁이 일어났던 열흘간의 일을 인물 중심이 아니라 서건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몇몇 인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형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 도청 사수를 결심하는 윤상원의 모습을 통해 항쟁 지도부로서의 결단과 인간적인 고뇌를 잘 형상화하여 광주 민주 항쟁의 비장한 최후와 그 역사적 의의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에 ‘광주의 죽음이 청사의 길을 여는 죽창으로 부활하는 그날까지, 일어서라! 투쟁하라! 쟁취하라! 산 자여 따르라!'라는 시를 낭송하고 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온다. 이 행진곡은 80년대의 운동가요 가운데 최고의 서정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 처리로 인해 항쟁의 비극성은 한껏 고조되며, 그 비장한 분위기가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열사가」를 비롯하여 임진택이 이룬 성과는, 판소리가 당대의 절박한 문제를 담아내면서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예술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창작 판소리는 해학과 풍자를 겸비하면서 대부분 비장한 분위기가 주된 분위기이다. 주제 의식을 은밀하게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결말도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이 많다. 이는 골계와 비장의 교직을 바탕으로 축제적 결말을 보이고 있는 전통 판소리의 미적 특징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기존 창작 판소리에 비장미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심화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문학이나 예술이 윤리성을 중시하는 엄숙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조건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
판소리는 늘 슬픈 대목이나 늘 웃는 대목으로만 만들 수 없다. 이러한 판소리는 판소리의 맛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판소리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본질적인 속성을 구비할 때 창작 판소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널리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의 새로운 창극 운동으로 내세운 것이 1994년의 좥천명좦이다. 이 곡은 동학혁명 100주념을 기념하여 동아일보사에서 마련한 것으로 1994년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동학혁명을 기념한다는 의미외에도 한국음악계에 많은 자극을 준 획기적인 공연이라고 하겠다. 동아일보사는 전통예술의 발전과 계승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동아국악콩쿠르 명인명창공연 판소리유파발표회 등 국악진흥사업을 벌여왔는데, <천명>은 창극공연으로는 여섯번째의 작품이다.
특히 이번 공연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전통적인 창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창극개혁의 첫 시도라는 점이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창극은 혼자서 여러 사람의 역을 하던 일인다역(一人多役)의 판소리를, 극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다른 역을 담당하는 중인각역(衆人各役)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판소리는 혼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기량에 따라 그 공연의 성패가 좌우된다.
창극은 여러사람이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극적인 구성에 힘을 쏟게 되고 음악쪽은 자연히 소홀해지기 쉽다. 이와같이 극적인 구성에 힘을 쏟던 창극은, 영화의 등장으로 쇠락의 길을 걸어왔고, 오늘날에는 TV라는 매체가 나타나자 창극이 설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장면전환이 빠른 영화와 TV를, 창극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창극이라는 것은 선율은 기존의 선율을 짜집기하는 것이고, 반주는 수성(隨聲)가락이라고 하여 부르는 노래를 듣고 그 가락을 따라가며 즉흥으로 연주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와같은 짜집기 선율이나 수성가락의 기법으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창극은 어떤 형태로든지 개혁해야지 지금과 같아서는 안되겠다는 공감대의 형성이, 바로 이번의 좥천명좦이라는 신창극을 마련한 계기였다고 하겠다. 이것은 ‘수성가락 시대를 끝내야 한다' 라는 박범훈의 선언적 의미를 더욱 드러내기 위하여 새로 작곡하였고 몇 개의 악기가 담당하던 수성가락 수법을 대규모의 관현악을 도입하여, 기존의 창극을 일신한 새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관현악으로 표현한 애절한 이별장면과 박진감 넘치는 전투장면 등은 수성가락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효과여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또한 창자마다 개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음역을 감안하여 여러 가지 조를 구사한 것은 기존 창극의 단조로움을 극복한 것이었다. 이와같은 새로운 시도는 안숙선의 윤기 넘치는 절창과 함께 사람들을 휘어잡고도 남았다.
그러나 신창극 좥천명좦은 이같은 성공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혁명과정을 소설쓰듯 모두 다 들려주려는 것이 극의 줄거리를 쫓느라 음악을 즐길 틈이 없다는 구성상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푸치니 작곡의 좥라보엠좦의 경우, 자세한 극의 전개는 모두 생략해 버리고 모두 4막으로 구성하여(특히 4막은 주인공 미미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만을 다루고 있다) 청중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까지 자세히 읽으며 비극미의 극치에 빠져들게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공연은 국악기의 문제점을 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극적효과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악기를 개량해야 하고 국악관현악의 표현력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듣자하니 이 음악은 한 달만에 작곡을 했다고 한다. 서양의 오페라가 대개는 2~3년씩 걸려 작곡하고 적어도 1년을 작곡기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비추어 볼때 사실 연주시간 41곡의 두 시간 반짜리 음악을 한 달만에 작곡한다는 일은, 박범훈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좀더 긴 안목으로 멀리를 내다보며 준비하는 치밀한 기획이었더라면, 더욱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재작기간이 짧았고, 새로운 시도 때문에 출연자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천명은 창극의 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있으면서도, 그 뿌리를 전통적인 한국의 판소리에 굳건히 박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창극운동에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었다고 하겠다.

어린이 창극 운동

국립창극단은 2000년 마지막을 어린이 창극으로 마감하였다. 국립창극단은 어린이 창극 「흥보가 - 은혜갚는 제비」를 제작하면서 창극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 어린이들이 보다 쉽게 우리의 전통 공연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이 공연을 통하여 어린이 국악 교육을 체험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창극 연주곡목 중 제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흥보가를 택하였고, 대본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최종민 단장이 새로 썼다. 창극의 사설 내용를 쉽게 풀어 쓴 것은 물론이고 소리가 쉬운 민요 선율도 많이 넣었다. 선율은 어린이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안숙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작창하였다. 또한 교과서에 수록된 「강강수월래」 「고사리 끊자」 등을 창극에 넣었는데, 이것은 민요의 멋을 느끼고 판소리의 흥을 더욱 돋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였다.
어린이 판소리는 초등학교에서 학예회에서도 할 수 있도록 쉬워야 한다. 그리고 서양 오선보로 정리하여 간단히 지도하여 소리를 하고, 창극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 창극은 판소리 청중을 어린이 층으로 확대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판소리 청중을 어린이까지 확대한다면 판소리계로서는 백만 원군을 만나는 셈이 된다. 이제 국립창극단의 어린이 창극 흥부가로 한국 창극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맡게 되었다. 이 어린이 창극이 씨앗이 되어 한국 창극의 꽃 필 날을 기다려 본다.
판소리의 창작은 판소리가 오늘날에도 의미있는 예술로 살아남기 위하여 필요한 일이다. 창작 판소리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곡목을 만드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판소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뒷밭침할 수 있는 의식과 소양을 지닌 문필가와 소리꾼이 많아져야 한다.
아울러 판소리가 더늠이나 삽입가요의 첨가를 통하여 작품을 확장한 것처럼 이미 부르고 있는 창작 판소리도 이와 같은 확장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불리고 있는 작품을 ‘열린 구조'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통은 고여있으면 썩기 마련이다.
창작 판소리는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당대 현실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면서 유통될 때 그 존재 의의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작품의 완성도나 음악적 수준을 어느 정도 갖추었느냐 하는 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지금까지 공연한 일련의 창작 판소리는 양적인 면에서 매우 빈약한 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기존 창작 판소리 작품은 앞으로 판소리의 재창조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점검해 보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산이라고 하겠다.
판소리 속에는 우리 겨레가 오랜동안 간직해 온 도덕률이 담겨 있다. 요즘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누구나 각박해지는 인심과 무너지는 사회 도덕과 팽배해 가는 사회악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잘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흥부가에는 형제간의 우애를, 심청가에는 효성심을, 춘향가에는 대쪽같은 여성의 절개를, 별주부전에는 충성심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판소리를 듣는 동안에 마음의 고향을 찾을 수 있다. 가난하지만 이웃과 다정하게 정을 나누며 살던 모습을 그릴 수가 있고, 황폐해진 나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또한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몸을 단정히 하던 집안 어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허전함을 메울 수 없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더욱 욕심장이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큰 좌절감과 뼈아픈 가난과 소외감을 느낀다. 특히 우리나라 지도층의 부패와 몰염치는 더욱 국민을 좌절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회와 법당은 늘어나고 있지만 범죄율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청소년의 가치관 붕괴는 극을 달하고 있다. 늙은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자식을 버리는 부모 소식이 자주 들린다. 최근 백지영 비디오 사건은 딸자식을 가진 부모의 가슴을 떨리게 하였다. 이러한 가치관의 붕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가치관만 뚜렷하다면 비록 내가 가난하더라도 당당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돈 방석에 앉았다 하더라도 최고급 승용차를 탄다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항상 허전하고 불만이 가득할 것이다. 이게 불행이 아니고 무엇이 불행이겠는가? 우리는 판소리를 음미하면서 가난한 이웃도 돌아보고 나는 혼자가 아니고 이웃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할 숙명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에는 각기 자기나라를 대표하는 고유의 전통적인 종합공연물이 있어 이를 자랑하고 있다. 중국에는 경극(京劇)이 있고, 일본에는 가부키(歌舞伎)가 있어 자국민이 즐길뿐 아니라, 해외공연을 통해서 예술적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음악사를 살펴보면, 18세기에는 영산회상과 판소리가 등장하였고, 19세기는 기악곡의 백미편인 산조를 낳았다. 20세기가 가기 전에 우리는 후손에게 무엇인가 20세기의 음악을 물려주어야 한다. 이제 이 신창극, 창작판소리, 어린이 창극이 더 다듬어져,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공연예술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