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분의 유훈을 길이 받들자
안제승 / 경희대교수·무용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때가 되면 저승으로 떠나기 마련이고 이것은 너 나 할 것 없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겠으나 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슬프고 언짢다.
인생의 가치란 삶을 영위하면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남겨 놓았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으나, 파경은 주관적인 것이지 뚜렷한 객관치가 서지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들은 남의 일생을 놓고 일가일부하기 일수지만 절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의 판별에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래서 생을 끝맺는 마당에 후회 없음을 자부할 수 있는 경지란 소망스러운 것이겠는데 좀처럼 그런 달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우리 형편이고 보면 조택원선생의 일생은 확실히 복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부귀영화라는 것이 행·불행을 가름하는 척도로 쓰여질 때가 많다. 이런 상식적인 기준을 놓고 조선생의 일생을 논한다면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하겠다. 돈에 애착이 없었으니 치부된 것이 없고, 권세에 미련이 없었으니 영화가 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신문화사조의 도래이후 관념적으로는 時勢에 역행할 수 없어 무용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광대에 약간 털이 난 존재로 밖에 인식하려 하지 않았던 사회풍조는 특히 남성의 경우 냉소 아닌 조소로 대하기가 일수였고, 사대부의 후예가 춤춘다하여 추락의 상징처럼 간주하기가 일수였다. 그러나 조선생 자신은 후회는커녕 자랑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조선생은 유달리 친구분이 많았다. 그중에는 정계·재계의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끼어있다.
그래서 한일회담의 막후인물로 지목되기도 하고, 일본재계와의 紐帶조성에도 한몫 단단히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교적 바탕이 무용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방면에 뻗쳐있는 풍요한 조예와 지식 그리고 치밀하고도 명석한 기억력에 힘입으면서 재치와 위트로 엮어가는 화술의 묘가 항상 좌중을 매혹시켰고, 그러는 동안에 感得되는 그분의 강한 개성에 끌려들어간 때문이었다.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퍼붓는 공박 때문에 왕왕 일어나는 곡해도 폭풍일과하면 본래의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는 그리고 결코 此二少한 꼬투리도 남기지 않는 담백한 그분의 예술가적 기질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장점일 수 있을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쓰는 나 자신이 한때 그런 체험을 했는데 지금와서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石井漠 문하에 들어가시어 신무용에 첫발을 들여놓으신 1927년부터 어쩔 수 없는 여건 때문에 고국아닌 일본 日比谷 공회당에서 은퇴공연을 가지신 1957년까지의 30년동안, 그분이 발표한 작품은 많다. 「가사호접」을 비롯하여 「만종」「춘향전조곡」「身老心不老」등은 일생을 두고 나의 뇌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평했듯이 남성다운 潑刺함보다 여성다운 가냘픔이 특색이기도 했던 조선생의 예술을 대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美辭麗句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무용이 갖는 원천적 숙명이기에 모든 것을 이에 돌려버리고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방후 친일파의 누명을 쓴 나는 자기비판을 거쳐 1년간 무위도식했던 까닭에 7명의 가족, 2명의 제자를 먹여 살리느라고 유일무이한 돈암동의 아뜨리에를 파는 결과를 가져왔다.…만일 금후에도 조선의 문화계가 나를 푸대접하여 이 돈암동 연구소만한 아뜨리에 조차도 못갖게 한다면 나는 단연코 무용의 세계에서 떠날 것이다…』<1946년 10월 8일자 경향신문> 한 斷腸의 수기는 조택원선생이 겪어야했던 波瀾曲折의 편모에 불과하다. 아마도 천생이 樂天的이 아니었다면 그분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여성편력을 더듬어가며 남자이기에 수치일수 있다고 보아 공개하기 꺼려하는 실연의 苦杯를 서슴없이 털어놓으시던 선생은 결코 푸레이·보이는 아니었다. 장기영(전한국일보사장)씨는 『20대엔 폭군, 30대엔 한량, 50대이후엔 판관』이라고 했지만 사랑의 나그네로서의 조택원선생의 여성관은 일가견을 이루면서 당신만의 독특한 철학으로 脈通하고 있는 것이다. 『아뜨리에를 떠나는 날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집을 나왔다. 아내는 지금까지도 나를 이해 못하고 나를 무정한 사람으로 여기는 모양』이라며 푸념아닌 안타까움을 털어놓으셨던 조선생의 40대나 『행여나 아내가 깰가보아 소리 안나는 푸라스틱 茶器를 샀다』고 하시던 60대의 선생 사이엔 아무런 이질이 없는 것이다.
『굶주린 아이에게 씨·레이숀을 주었더니 어른들이 먹어치우더라』하면서 『이렇듯 무지한 나라에 원조를 줄 필요가 없다』는 한 귀환병사의 수기를 실은 신문사 주필을 찾아가 『미국의 형무소엔 미국사람 아닌, 이민족이 들어가 있는가?』하며 일가족이 그것을 먹어치워야 했던 처참한 동난속의 현실을 역설하시며 사회발전의 본질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사과문을 발표케 했던 에피소오드라든지, 『조택원이란 이름은 나의 상표니 창씨개명을 강요하려거든 나와 나의 가족을 먹여살려야 할 것』이라고 남총독을 說服시킨 대목들은 선생의 강인한 민족의식을 엿보는 것 같다.
『무용을 떠난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무용을 떠난 조택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며 「한국민속무용단」결단의 동기를 설명하시던 선생은 운명하실 月餘前 나를 아파트로 부르시고 『덤으로 살아오던 인생이나마 무용에 바치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여의치가 않다』며 무용계에 바라는 뜻을 펴보이던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70을 못넘기신 선친에의 마지막 효도가 5월 22일 선생의 70년 생일을 넘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당시의 정경에서 나는 무용가 조택원이기에 앞서 인간 조택원을 새삼 발견하는 것같아 눈시울을 적시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분의 인간성이 국제적으로 폭넓은 우정을 피게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말해 주는 좋은 자료라 생각한다.
70고희라 하였으니 조택원선생의 생애는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이 좀더 살아 계시기를 간절히 염원할 만큼 그분의 존재는 우리에게 컸다고 해야 하겠다. 신무용 50주년을 맞는 해에 홀연히 떠나신 것도 극적이라 해야 하겠는데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분의 유훈을 길이 받드는 길이다.
故 조택원선생 약력
1907년 5월 22일 嚴親조종완선생과 慈堂 김금오여사의 삼대독자로 함흥에서 출생.
1919년 홍원공립보통학교졸업
1920년 海參威교포음악단 모국방문을 인솔했던 시몬朴 선생으로부터 露西亞민속춤을 師事
1923년 토요회 제3차 공연시 코쟉춤으로 첫 무대를 밟음.
1925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 보성전문학교법과에 입학.
1927년 10월 渡日하여 石井漠 무용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수련을 쌓기 시작.
1932년 동연구소 제1기생으로서 전과정을 수료하고 서울에 조택원 무용연구소 개설.
1933년 귀국 제1회 발표회를 갖고 「가사호접」을 발표.
1935년 제2회발표회에서 작품 「만종」「포엠」등을 발표.
1937년 도불한 후 「무지암·끄메」에서의 공연을 비롯한 수많은 해외공연을 가짐.
1940년 작품「학」「춘향전조곡」을 발표.
1941년 무용시「부여회상곡」을 서울부민관에서 발표.
1946년 해방을 맞이하여 무용인의 첫 협의체가 된「조선무용예술협회」창립을 주도하고 그 위원장에 취임.
1949년 작품「身老心不老」를 발표.
1952년 일본 日比谷 공회당에서 공연.
1953년 약 2년여에 걸쳐 불란서·벨지움·스웨덴·핀런드 등 유럽각지를 巡演.
1957년 당시의 국내여건으로 귀국하시지 못하고 일본 日比谷 공회당에서 은퇴공연을 가진후 다시 연구차 渡佛.
1960년 14년만에 귀국. 부인 김문숙여사와 결혼.
196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겸 무용협회 이사장에 被選.
1961년 한국무용협회 고문에 추대.
1962년 한국무용협회이사장에 被選.
1964년 제1회 무용상 수상.
1966년 한국일보사 고문에 취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68년 예총상임고문·무용협회고문에 추대
1968년 세계각국민속무용시찰차 3개월간 세계일주여행.
1969년 사재를 털어 사단법인 한국무용단을 창단, 이사장에 취임.
1970년 「EXPO」70 한국의 날 기념행사에 참가하는 한국무용단과의 동남아5개국순방·한국무용예술단 단장으로 월남·버마·타이·말레이지아·필리핀 등을 돌아왔음.
1973년 사재를 희사, 무용용어심의회를 구성. 후일 문화예술진흥원에 의해 용어통일이 완성되는 기반을 마련.
197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자서전「가사호접」출판.
1974년 예술원회원으로 추천. 국립극장 운영위원에 위촉. 문화훈장 금관 제1호를 敍勳받음.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무용개발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
1975년 투병생활을 계속하시면서도 무용발전에 항상 유념하여 몸소 지도하시다가 1976년 6월8일 오전 0시 20분 永眠.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문숙여사와 2남2녀를 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