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국의 위대한 문인
-「에드먼드·윌슨論」
조세프·엡스타인
미국의 문예계간지 「다이얼로그」는 최근(76. No.1) 현대미국의 가장 위대한 문인으로서 에드먼드·윌슨(Edmund Wilson)(1895∼1972)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미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조세프·엡스타인(Joseph Epstein)의 윌슨論을 초역한 것이다.
1972년 여름 에드먼드·윌슨은 뉴요크주 그의 고향집에서 7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895년에 출생한 윌슨은 1920년대에 원숙한 활동을 벌인 미국 문필가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동시대인중에는 어느 비평가보다도 그를 높이 평가한 어네스트·헤밍웨이, 프린스턴대학의 급우 F·스코트·피처랄드, 오랜 친구 존·도스·파소스, 그밖에 윌리엄·포크너 등이 있다. 비록 에드먼드·윌슨이 이들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미국문학과 미국의 지적세계에 미친 그의 영향은 금세기 어느 미국작가보다도 주목될만하다는 주장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가 사망하자 런던의 타임스지 문학란은 에드먼드·윌슨을, 미국의 가장 위대한 문인이라고 지칭했고 더·뉴요커誌는, 윌슨의 정의를 인용, 『문인이란 그에게 부여된 어떠한 문학적 과제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문학평론은 물론 소설, 역사, 희곡, 르뽀기사, 시, 패러디, 논평, 회상록 등 윌슨이 시도해 보지 않은 문학장르는 거의 없다.
작업량의 방대함(윌슨은 生時에만도 30권의 책을 출판했다)으로 본다면 그에 필적할만한 미국문인이 없는 것도 아니나 그 다양함이나 범위는 미국문학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 관념의 드라마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문인들은 문학이 궁극적으로는 인생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않는다. 따라서 문인의 역할은 문학이 가르치는 가치관에 따라 인생을 해석하는 것이다. 에드먼드·윌슨이 문인이라는 말은 바로 이같은 의미에서이다.
자신의 전부를 바친 그의 문학활동은 그가 태어난 환경으로부터 부분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모계는 대대로 내려오는 신교목사가문으로서 도덕과 규율에 대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편 윌슨은 유명한 변호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회문제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가문의 거대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프린스턴대학시절 그는 크리스챤·고스(Christian Gauss)교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고스 교수는 윌슨에게 프랑스 및 이탈리아문학을 소개해 주는 한편 「문학평론이란 어떤 것인가」를 깨우쳐 주었다.
윌슨자신은 그의 시, 희곡, 소설에 대해서도 명백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가 명성을 얻은 분야는 엣세이, 문학평론, 그리고 역사부문이다, 미국에서 소설, 시, 희곡은 흔히 「상상문학」으로 분류되며 나머지 분야는 막연히 「논·픽션」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분류에 따라, 그의 중요한 작품들을 「非상상문학」으로 취급한다면 작가 에드먼드·윌슨을 논하는데 있어 그보다 큰 잘못은 없다. 윌슨의 진정한 특질은 바로 명백함을 요구하는 작업에 상상력을 동원했다는데 있다. 윌슨의 작품을 읽고있으면 이지적인 생활속에도 내면의 드라마가 존재하며 사상에도 詩가 존재할 수 있으며, 역사와 학문 역시 상상력을 통해 여과된 것이 아니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재삼 깨닫게 된다. 윌슨은 한때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쥘르·미쉴레(Jules Michlet)에 관해 「고는 소설가다운 사회적 관심과 인간에 대한 파악력을 지녔고 시인다운 상상력과 정렬을 가졌다」고 기술한 바 있다. 미쉴레에 관한 서술은 바로 윌슨 그 자신에게도 적합한 표현이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헝거리의 언어로부터 곤충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었던 그는 긴 생애를 통해 막대한 양의 지식을 얻었지만 항상 복잡한 문제들을 명석하게 다룬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전문가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문학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어느 때도 그 자신을 지식계층으로 생각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속에는 언어의 가시철망-전문가 혹은 박식한 사람들이, 관심있는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끔 설치해 놓은 장벽을 찾아볼 수 없다. 전쟁이 장군들의 손에만 맡겨지기에 너무나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문학도 전적으로 교수들의 손에 맡겨지기에는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 윌슨의 견해이다.
◇ 1920년대의 작가들
그는 고전문학으로부터 나이트·클럽의 공연물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그가 가장 주목받은 것은 그의 동시대 작품들에 대한 비평가로서이다. 윌슨의 세대는 한때 「잃어버린 세대」라는 막연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이 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포크너, 해밍웨이, 도스·파소스(Dos Passos), E·E·커밍스(Cummings), 윌슨 자신, 이 모든 문인들은 이 전쟁을 직접 경험했다.
이들 문인들이 첫 작품을 출판한 1920년대는 미국문학사상 최후의 황금기였다. 이 시대의 중요 문인들- T·S·엘리오트, 에즈라·파운드, 윌래스·스티븐스를 포함-은 이제 미국문학사상 불멸의 인물들이 되었지만 그들이 아직도 올바른 평가를 받기위해 애쓰던 시절, 그들의 특질을 파악해낸 것은 바로 윌슨의 공적이었다.
그 한예로 1924년에 출판된 헤밍웨이 최초의 단편집에 대해 윌슨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헤밍웨이 문체의 간결함은 깊은 감정과 복잡한 심리상태를 전달하는데 적합하다. 이것은 미국 산문사상 괄목할만한 발전이며 깊은 물속으로 퍼져 들어가는 한줄기의 맑은 빛과 같다」윌슨의 이같은 평에 대해 헤밍웨이는 감사의 편지를 보내면서 「당신의 평문은 냉정하고 명료하며 신중하고 객관적이고 공감을 준다. 현재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의 글은 미국에서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평론이다」고 말했다.
◇ 문학적 영향력
1920년대의 에드먼드·윌슨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뉴요크의 이브닝·선(Evening Sun)기자로부터 대중적인 배니티·페어(Vanity Fair)의 편집장을 거쳐 유력한 주간지 뉴·리퍼블릭(The New Republic)지의 문학부문편집을 담당하게 되었다. 20년대는 경박함과 흥분의 재즈시대였다. 어느 의미에서 윌슨은 이 시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소설을 통해 이 당시를 가장 잘 기록한 F·스코트·피처랄드(F. Scott Fitzgerald)는 윌슨의 대학친구이자 오랜 친구였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윌슨의 진지한 태도와 문학과 사상에 대한 엄격한 헌신은 이러한 분위기로부터 그를 멀리 띄어 놓게 했다. 피처랄드는 뉴요크에 처음 도착할 당시, 5번가를 걷고있던 윌슨을 회상한다. 피처랄드는 윌슨에게서 확신에 찬 걸음걸이와 분명한 목적을 지닌 듯한 모습과, 그를 온통 지배하는 것같은 「대도시정신」을 발견한다. 그 당시 윌슨은 그리니치·빌리지에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당시 미국문화예술의 중심지라고 할만한 곳이었다. 길 건너편에는 뒤에 콜롬비아대학교수가 된 라이오닐·트릴링(Lionel Trilling)이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트릴링은 그 당시의 윌슨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인생의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으로 보였다.』
◇ 예술가의 역할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윌슨이 아무리 인상적이고 권위있어 보였다 할지라도 윌슨은 여전히 그의 지적위치를 정립하는데 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이 1929년 출판된 그의 최초의 소설의 주제가 되고 있다.
「데이지를 생각하며」(I Thought of Daisy)는 거의 자서전적 소설로서 그 주인공이나 나레이터는 의심할 여지없는 에드먼드·윌슨 그 자신이었다. 무대 역시 대부분이 20년대의 그리니치 빌리지였다.
주인공은 戰場으로부터 막 돌아온 터였다. 전쟁의 경험은 그에게 돈과 지위의 추구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그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진정한 작가가 되기 전에 그는 먼저 작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느낀다. 「데이지를 생각하며」의 나레이터가 말하는 것처럼 작가는 『미국의 생활에 관한 태도를 정립해야만 했다.』
여러 가지 형태의 태도가, 이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급진적 정치 이념으로 무장한 작가 휴고·배먼은 작가는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예술지상주의자인 여류 시인 「리타」는 자신의 유일한 의무는 미학이라고 믿는다. 그로스비크교수(크리스찬·고스를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함)는 지식인의 덕성과 인류애의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 데이지는 작가도 지식인도 아닌 한낱 쇼우걸로서 미국 대중문화의 활력과 정력을 옹호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작품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미국의 대중문화와 타협해야 할 것이라고 느낀다. 윌슨은 이상 네 가지 성격간의 섬세한 문호작용과, 주인공이 이 성격들을 모두 소화하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주인공은 그 네명의 다양한 관점에서 정수를 추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진정한 예술가는 어둠속에서 광명의 해안으로 떠나는 존재이며 이것은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도덕적·미학적 가치를 작품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가능하다. 그의 목표는 문명인 것이다.』
◇ 현대문학의 해설
「데이지를 생각하며」가 출판된 지 2년후 윌슨은「액슬의 성」(Axeli's Castle)을 내놓았다.
현대 상징주의작가들에 관한 이 연구는 탁월한 문학평론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굳건히 했다.
이 책을 헌정받은 크리스찬·고스교수는 이 평론으로 말미암아『윌슨은 우리시대의 가장 지적이고 통찰력있는 평론가』임이 증명되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목적은 마르셀·프루스트, 뽈·말레리, 제임스·조이스, T·S·엘리오트, W·B·,예이츠, 거투르드·스타인 등 난해하고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현대작가들을 문학적, 역사적, 철학적으로 분석, 현대독자들에 대한 그들의 중요성을 규명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이들 작가들에 대한 막대한 양의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그 대부분이 윌슨의 「액슬의 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액슬의 성」은 이 작가들을 서구문학의 전위에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일반 독서인구들에게 이들 작가들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으며, 윌슨의 작품이 항상 그러하듯이, 이 작가들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왜 중요한가를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표면상「액슬의 성」은 객관적인 평론처럼 보이지만 其實, 이 작품은 「데이지를 생각하며」와 동일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평론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이 작품은 상징주의자들의 문학적 역사적 상황에 대한 탐구이다. 이 작품의 또 한가지 중요한 업적은 이 상징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작가의 책임문제에 여하히 대처했는가를 규명한 것이었다.
이 평론집의 이름자체 역시 의미 깊다. 이것은 빌리에·드·릴아당(L'Isle·Adam)의 「악셀(Axel)」에 등장하는 가상의 中世城에서 따온 것이다. 윌슨의 「액슬의 성」이 상상속의 성으로 숨는 상징주의자들의 도피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만큼 이 이름은 아주 적절하다.
윌슨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액슬의 성」도 고도로 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극적인 요소는 관념의 갈등에서 기인한다. 이 평론집 속에는 주인공이 있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일런드의 시인 W·B·에이츠와 역시 아일런드의 소설가 제임스·조이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조이스는 윌슨에게 있어 숭배의 대상이었다. 조이스가 문학의 위대한 개혁자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의 고전적작품「율리씨즈」를 통해 『범상한 인간성도 그다지 범상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윌슨의 관점에 의하면 시인 W·B·예이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어느 작가보다도 탁월한 것 같다. 예이츠는 그가 살고있는 무질서한 세계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어느 작가보다도 성실히 노력했으며 또한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가담하면서도 그의 상상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이츠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현대문학의 기교가 대중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예이츠는 윌슨이 평생을 통해 갖고 싶었던 것, 즉『인간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부터 얻은 힘, 인류에 대한 애정있는 관심, 여론과의 직접적인 접촉, 그리고 문학을 통한 사회참여를 가졌던 것이다.』
◇ 사회비평
「액슬의 성」이 나온 뒤인 1930년대의 윌슨은 그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받을 폭넓은 기회를 가졌다. 30년대는 미국의 대공황기였다. 미국인들에게는 전무후무한 시련기였다. 평소의 문학활동과 함께 윌슨은 사회르뽀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단 윌슨의 손을 거치자 르뽀기사들은 탁월한 사회비평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후에 「미국의 불안」(The American Jitters)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그의 르뽀기사들은 「미국의 모든 얼굴을 연구하고 그 요소를 평가하고 다시 전체적인 형태의 풍속도를 작성하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을 경주한 것」이었다.
윌슨은 이 작품에서 나이트·클럽의 생활과 빈민가처녀의 살인사건 재판이야기를 동시에 서술하는 등, 극단적인 대조를 拄置하는 방법을 통해 극적효과를 높이고 있다.
「미국의 불안」에서 윌슨은 약자의 옹호자역을 맡고 있다. 훨씬 뒤인 1960년에도 윌슨은 「이러쿼이人(북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한 사죄」(Apology to the Iroquois)라는 책을 통해 뉴요크州 북부의 한 인디언부족들이 댐건설 때문에 땅을 잃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어 1965년에는 캐너더문학에 대한 평론 「오 캐너더」(O Canada)를 통해 퀘백州의 프랑스계 캐너더人들이 현대사회의 압력앞에서도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음을 깊은 동정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내, 내면적인 정렬, 숭고한 가치에 대한 집착 등은 윌슨에게 항상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혁명에 대한 관심
그러나 「미국의 불안」에서 윌슨은 보다 광범위하고 중요한 문제에 노력을 기울였다. 30년대 대다수의 미국 지식인들이나 마찬가지로 윌슨 역시 칼·마르크스를 탐독했으며 혁명적인 인물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 무렵 그는 어학에 대한 재질을 살려 독어와 露語을 배웠고 한 미국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 1935년 봄 소련을 방문했다. 이러한 그의 관심, 독서, 방문의 결실이 「핀런드역에 이르기까지」(To the Finland Station)라는 책으로 나타났다. 이 책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반니·비코(Giovanni Vico)의 저작에서부터 레닌이 러시아혁명을 지도하기 위해 세인트·피터스버그(現레닌그라드)의 핀런드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사회주의이념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있다.
「핀런드역에 이르기까지」는 『역사의 기술과 행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記述」과 「행동」의 관계란 윌슨이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관심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우울하고 환상적인 城으로부터 북적거리는 러시아의 기차역으로 바뀌었다는 것 역시 매우 의미깊다. 이 책은 첫째 미쉴레, 르낭, 테느 등 혁명적 전통과 조직적인 사회연구에 몰두한 서구역사가들에 관한 부분, 둘째 이상향론자, 무정부주의자를 포함, 칼·마르크스, 프리드리히·엥겔스 등 초기 마르크스주의자 및 기타 사회주의자들에 관한 부분, 셋째 러시아혁명참가자, 특히 레닌, 트로츠키에 관한 부분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핀런드역에 이르기까지」는 윌슨의 문학비평관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역사에 관한 그의 교양을 들어 내보여준다. 프루동, 마르크스, 엥겔스, 바쿠닌, 레닌 등 혁명가들에 대한 그의 평문은 그의 저작활동중 최고의 것에 속한다. 그가 이러한 작업에 탁월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의 지적흥분과 역사에 나타나는 그 결과를 포착하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수많은 저작중 「핀런드…」만큼 세계사적인 광범위함과 치밀도와 힘을 지닌 작품은 거의 없다.
「핀런드…」와 함께 윌슨은 시, 역사, 문학비평에 관한 에세이와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빛의 해안」(The Shores of Light), 「고전과 상업작품」(Classics and Commercials) 「잇빨사이의 재갈」(The Bit Between My Teeth)등 세편의 논문집은 각각 1920∼1939, 1940∼1949, 1950∼1965년 사이를 다루고 있다.
이들 평론집들은 한 작가에 의해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미국의 정신사로 포괄적이고 이지적인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 심리학적 분석
윌슨의 다른 평론집들은 제마다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한 예로 「상처와 활」(The Wound and Bow)에서 윌슨은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찰스·딕킨스, 루디야드·키플링, 제임스·조이스, 어네스트·헤밍웨이, 에디스·훠어튼 등의 생애와 작품을 분석하면서 『탁월한 능력이라는 것은 무능력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윌슨은 이 문학의 천재들이 주로 어린 시절의 심리적 상처로부터 작품의 원동력을 찾고 있음을 발견한다. 비록 윌슨의 이러한 방법은 프로이드학파로부터 차용한 것이지만 그는 이 학설을 경직되고 이론적인 방법보다는 정확하고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딕킨스論에서 윌슨은 딕킨스의 아버지가 빚으로 감옥에 들어갔던 그의 소년시절 6개월간이 딕킨스의 전생애와 전작품을 통해 어떤 영향을 미쳤나를 보여준다.
윌슨의 비평방법과 관점은 딕킨스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딕킨스는 그 자신을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평가받고 싶어했으며, 그를 가구더미 속으로 몰아넣었던 마법의 힘을 풀려고 노력했으며, 빅토리아왕조의 휘장을 가장 분명히 꿰뚫어볼 수 있는 시인의 지위에 도달하려고 했다.』
윌슨의 목적은 딕킨스를 단순한 빅토리아朝의 감상주의자로 취급하던 1939년 당시의 일반적인 평판으로부터 구제하여 그 역시 프란츠·카프카, 토마스·만, 제임스·조이스 못지 않게 복잡하고 수준높은 작가로서 其實 도스토에프스키와 많은 유사점을 갖고있는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윌슨은 딕킨스의 소설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논문은 상류도 중류도 아닌 딕킨스 일가의 불편한 위치, 딕킨스가 어린시절 잠시나마 하류사회속에 휩싸였을 무렵에 받은 정신적 상처 등 그의 전기적 사실들을 섬세하게 열어놓았다. 이처럼 능란하게 전기적 사실들과 허구들을 혼합함으로써 윌슨은 딕킨스가 실제로는 크리스머스 소설가나 아동문학가라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산업사회의 문제와 대결한 영국 최초의 소설가이며, 영국에 있어 중산층의 등장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이며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연약함을 감지한 최초의 인물임을 매우 설득력있게 주장했다. 윌슨은 논문을 통해 딕킨스는 깊이있고 어두운 작품들을 가진 작가로 부각되었다. 「딕킨스 : 두 개의 스쿠리지」(Dickens : The Two Scrooges)를 읽은 사람은 그뒤부터는 딕킨스를 결코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
윌슨의 문학적 관심이 대단히 광범했다는 것은 다른 논물들의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Marxism and Literature), 「플로베르의 정치학」(The Politics of Flaubert), 「푸쉬킨을 위하여」(In Honor of Pushkin), 「헨리·제임스의 모호성」(The Ambiguity of Henry James), 「80년대의 버나드·쇼」(Bernard Shaw at Eighty), 「운문은 낡은 기법인가?」(Is Verse a Dying Technique?) 등이 그 예이다.
만년의 윌슨은 랄프·엘리슨(Ralph Ellison) 솔·벨로(Saul Bellow) 등 중요 소설가와 로버트·로우웰(Robert Lowell), 존·베리먼(John Berryman), 테오드르·뢰트케(Theodore Roetke) 등 시인을 무시함으로써 현대미국문학 비평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는 보다 국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5년 그는 그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미국의 문학인구들이 우리의 앵글로·어메리컨문화와 유럽제국의 문화를 상관관계 아래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중남미문학에 대해 거의 완전히 무식』함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는 이 지역의 문학들이 어느날엔가 다른 문학 못지 않게 세계문학속에 등장하리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그러나 윌슨의 긴 문학적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업적은 외국의 과거에 관한 연구이다. 미국이 경험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인 남북전쟁(1861∼1865)에 관한 일련의 논문이 「애국의 피」(Patriotic Gore)에 수록되어 있다. 『남북전쟁당시의 문학연구』란 이책이 부제가 무엇인가 학문적인 냄새를 피우고는 있지만 이책은 미국 역사상 대사건으로 남아있는 이 전쟁의 공포를 전달하고 있다. 어떤 미국평론가들은 이 책에서 한 노작가의 냉소적인 사색과 인간들이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슬픈 환멸을 발견하고 있다.
말년의 외로움을 느끼며 그는 자신의 과거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런 나의 작품들을 읽어보노라면 마치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 같다. 그 작품들이 뒤떨어진 것 같아 보이는 까닭에 그다지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
이 술회는 매우 가혹한 자기관찰이며 또한 잘못 내려진 판단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기묘하게도,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날이 갈수록 더욱 높이 평가받는 것 같다.
에드먼드·윌슨은 문학정신의 가장 위대한 구현자였으며 그의 작품들은 그가 말한 「문명의 금자탑」(The edifice of civilization)을 쌓아 올린 벽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