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본 일본의 문화예술계
윤치오(尹致五) / 본원 부원장
지난해 11월말, 10여일 동안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초청으로 일본 문화청을 비롯한 그 산하 박물관·미술관 등 일본의 문화계를 둘러보았다.
단시일 안에 일본의 문화예술계를 둘러보아야 할 바쁜 일정이어서 국제교류서비스협회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국제교류서비스협회(IHCSA)는 1970년에 설립되었다는 바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각종 방문단에 대한 통역·번역·에스코트라는 특수한 기능과 완벽할 정도의 관리 방식으로 일본의 국제교류 부문에서 가장 부각되고 있는 단체라고 한다.
필자는 방문기간 내에 무언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우리와 비교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자 했다. 처음 사흘 동안에는 초청자인 국제교류기금, 문화청, 외무성 정보문화국 아사히(朝日)문화센터 등을 돌아보았고 나머지 기간에는 동경(東京), 대판(大阪), 경도(京都), 내양(奈良), 복강(福岡) 등지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중점으로 한 문화 유적지 등을 돌아보았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국제교류기금을 방문해서는 임건태랑(林建太郞) 이사장의 접대가 인상적이었다. 사학자로서 동경대 총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바 있는 그는 또한 문인이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의 옛 선비를 연상시킬 만큼 부드러움이 몸에 배여 있었다. 잇달아 만나 본 국제교류기금의 업무이사, 사업부장 등에게서 국제교류 기금의 규모, 성격, 사업방향 등에 대한 브리핑을 받으면서도 필자는 재삼 일본인들의 친절하면서도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국제교류기금은 1972년 외무성 산하기관으로 설립된 이래 각 분야의 인물교류사업, 일본문화에 대한 연구사업 지원, 문화예술 관계 자료의 작성과 보급, 각종 전시, 공연의 보조 등을 맡아하는 곳이다. 재정은 국고 보조와 자체 운영사업 수입 기부금(일화 60여 억 엔) 등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이 법인이 연간 초청하는 해외 저명 인사들은 5백여 명, 외무성 초청 인사 등과 합치면 약 일 천 여 명에 달하고 있다고 했다. 필자는 우리 진흥원의 사업, 재정 등을 생각하며 우리가 보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거듭 생각해 보았다.
잇달아 외무성 정보문화국을 방문하여 가등(加藤) 심의관과 소창(小倉) 과장을 만나 문화교류나 해외문화 관계 정보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일본이 그들의 문화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외무성이나 문부성의 유관부처끼리의 원활하고도 조직적인 업무 추진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실감은 방일(訪日) 이틀째인 12월 1일 문화청 방문 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10시 30분 정각에 좌야문일랑(佐野文一郞) 문화청 장관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는데 매우 솔직하면서도 소탈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특히 한국미술오천년전에 대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털어놓으면서 그와 같은 유의 한·일간의 문화교류를 적극 희망한다고 했다. 필자는 문화사업 분야를 맡고 있는 한 실무자로써 결코 어디를 가거나 손색이 없는 우리 문화예술이 좀더 의욕적이면서 활발하게 소개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알 것 같았다.
문화청은 문부성의 외청으로서 예술문화의 진흥, 문화재 보호, 일본어 순화, 저작권 보호, 종교관계, 국제교류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시책을 추진하는 바 우리의 문화예술 정책 수행과 대체로 비슷한 것이었다. 소속 기관으로 미술관, 박물관 등을 두고 있어 이 역시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특히 진흥 업무에 큰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았다. 그들의 진흥책은 크게 예술창작 활동의 장려와 그 보급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예술 각 분야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급들을 선발해서 해외연수를 시키고 신인 예술상 제도를 두어 신인 육성을 꾀하는 일, 특히 예술 작품을 매입하여 예술인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는 정책이나 예술가 중 중진, 원로급으로 공적이 뚜렷한 인사에게는 각종 서훈, 포장을 실시하는 제도 등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이들의 경우는 한 부처에서 유관 업무인 겨우 행정적인 집약을 기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는데 현재 우리 진흥원이 이 분야 사업이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라는 감도 없지 않았다.
문화청 방문을 마친 후에 문화예술의 진흥과 보급이란 면에서도 그 활동을 크게 평가할 수 있는 아사히 문화센터를 찾았다. 이 아사히 문화센터는 민간기업(아사히신문)이 국민계도와 문화발전을 위해 투자한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한 나라의 문화예술의 진흥이나 발전은 단순히 정책적인 차원의 지원 또는 정부 주도만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에는 아사히 문화센터 뿐만이 아니라 능력 있는 많은 민간인, 기업, 언론, 방송국 등이 문화재단을 설립 운영하며 민간차원에서 문화와 예술진흥에 의욕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와 민간은 긴밀한 상호유대를 갖고 있는데 정부는 참여 기능의 역할을 맡아 직접 예술진흥을 담당하는 갖가지 기관을 설치 운영하는 것이고 민간은 조성 기능의 역할을 맡아 각종 문화재단, 단체 등을 자율적으로 설립,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이 문화청을 중심으로 횡적 유대 아래 긴밀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경제발전의 측면에서 이제 중·상위권에 올라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우리나라의 기업이나 민간인들이 문화, 예술 부문의 사업에 투자를 꺼려하고 있는 실정과 비교해 보면 일본이 그간에 쌓아온 국력이나 문화의 힘을 재인식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업이나 민간인들도 이제는 단순히 수지(收支)의 측면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보다 멀고 큰 안목에서 이 같은 문화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국민정신 문화개방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민간기업들의 문화예술계 투자 못지 않게 지방자치단체들의 투자 역시 대단히 적극적이어서 그 시설 관리 상태가 국립보다는 시립이 시립보다는 현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더욱 두드러지게 좋았다는 사실이었다. 지방자치제인 일본에서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자기 실정에 맞는, 그러면서 향토성과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이란 뚜렷한 문화의식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또 상호 경쟁적으로 시설이나 관리를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정부 예산으로 운영 관리되는 국립이 오히려 재정상으로 볼 때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 미술관과 박물관을 시찰하며 느낀 또 한 가지 인상 깊은 사실은 각기 그 시대적 성격, 특수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한계를 설정하여 박물관, 근대, 현대미술관의 성격규정이 확실하다는 점이었다. 시찰 도중의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1907년(명치 4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작품은 박물관에, 개화기 그 이후의 작품은 근대미술관에 소장 전시되며, 1959년에 설립된 국립서양 미술관은 1914년 이전의 서양화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근대의 서양화는 근대미술관에 소장,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들 미술관, 박물관들이 모두 최신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의 문화 행정, 문화재 관리의 충실성을 거듭 실감할 수 있었다. 운용상의 작은 일인지도 몰라도 미술관의 작품 전시 역시 시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어 이른바 로스타임이 별로 없었다.
돌아본 미술관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동경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이었다. 1959년에 건립된 이 미술관에는 로댕, 고갱, 피카소, 헨리 무어 등 이미 현대의 고전작가가 된 화가들의 작품들이 소장 전시되어 있었는데 로댕의 경우엔 1층 로댕 전시실에 40여 점이나 전시되어 있어 그 규모나 작품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이들 서양미술의 걸작품이 원래는 마쓰가다 콜랙숀의 소장품으로 일본 정부에 기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의 미술 애호나 예술 감상이 유별나다는 생각은 미술관을 몇 군데 다니면서 거듭되었다. 상근(斀根)의 조각의 숲(彫刻の森) 미술관에 들러 궁본방언(宮本邦彦) 관리과장의 브리핑을 들을 때 특히 그러했다. 1923년에 건립되어 3백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 야외조각 미술관은 연간 관람객이 1백만 명 이상을 돌파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품 구입비를 제외한 운영 관리비가 입장 관람료로 충당된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도 미술 작품에 대한 애호도가 높아지다가 급기야는 이상 현상을 불러 일으켰던 사실을 상기하면 일본인들의 이 같은 현상은 필자에게 씁쓸한 감회마저 감추지 못하게 하였다.
이 미술관의 전시작품들을 돌아보며 문득 누군가가 기증한 재일 조각자 김수연씨의 작품을 대했을 때, 그리고 그곳 카탈로그에서 이 미술관이 주최한 제2회 헨리 무어 대상전의(1981년) 심문섭씨의 최우수상 수상 기록을 보게 된 것은 씁쓸한 감회 속에 뿌듯한 위안이었다. 잠시 앞에서도 언급했었던 사실이지만 나양(奈良)현립미술관과 복강시(福岡시)미술관을 돌아보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소장 작품도 작품이지만 모두 지방자치단체들이 설립한 미술관들로 소방진화시설이 하롱 가스 시설로 되어있고(福岡) 공기 중의 살균 소독을 위한 공기정화장치(奈良), 조명 전시시설의 최신식 설비 등이 뛰어났던 점이다.
현대미술관에 재직 시에 예술을 통한 정서의 함양과 미술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하여 미술관회라는 일종의 멤버십 제도를 마련했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 직접 경도(京都) 국립박물관 시찰에서도 그러한 면에 관심을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곳 모임(友の會)엔 약 7백 50여의 회원들이 가입, 참가하여 자유로운 관람이 허용되는 등의 특전을 받고 있었다. 이번 시찰에서 돌아본 미술관은 앞에 적은 것 이외에는 동경의 국립근대국립박물관, 국립민족학박물관 등이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사실은 매우 고도로 잘 훈련된 인적 자원들이었다. 부서마다 직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그 방면의 전문가들로서 업무 수행에 높은 전문성과 이를 바탕으로 시스템화된 조직력을 과시할 만큼 바람직한 현실에 놓여 있었다. 또한 파손된 문화재를 보수 수리하는 전문 기능공들은 대단히 높은 수준에서 거의 파손전과 다름없이 완벽한 복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경도국립박물관은 문화재 보존수리소를 별도로 두어 문화재 보수·수리를 전담시키고 있는데, 전문적·기술적인 정보 제공, 실제적인 조사 연구, 기술 개발 결과의 공개 등으로 문화재에 관한 지도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수리 기술자의 양성·연수, 수리용 자재 확보, 외국 수리 기술자의 연수·교류에 힘쓰며 한해 평균 1천 5백여 점의 문화재를 보수 처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경도국립박물관은 약 1만 2천여 점을 수장(자체 3천여 점, 기탁 9천여 점)하고 있었는데, 연간 일화 5억 여 엔의 예산을 쓰고 있다 한다. 소산충남(小山忠男) 차장의 설명으로는 재직 인원 53명 중 절반 이상이 그 부문의 전문가들로 충원되어 있다고 하니 그들의 저력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았다.
하나라도 더 보자고 발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여정이 끝났다. 12월 8일 후꾸오까에서 귀로에 올랐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고들은 것을 차분히 정리해볼 여유가 생겼다. 비행기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일본을 내려다보며 이번 방문의 수확을 간추려 보았다.
첫째는 저들의 문화예술 정책에 있어서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구나 하는 확인이었다. 저들의 업무 체계나 조직 운용이 그러했고 유관 기관끼리의 협조가 또한 그러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저들이 치러야 했던 문화적 사회적 훈련을 우리가 거쳤던가 하고 자문해 보았지만 망설임이 뒤따랐다.
두 번째는 이제 우리의 민간기업이나 민간인들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여러 사업에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현재 다소의 어려움을 우리 경제가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능력 있는 기업들은 가시적이고 물량적인 부문에만 투자할 것이 아니라 정신문화 영역에도 그들의 기여도를 확대해야만 민주복지사회에 상응하는 문화창달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이었다.
이와 연관된 문제로서 세 번째는 중앙행정 기관이나 정부 주도에만 의존하던 문화시설이나 문예진흥사업이 지역별, 문화권별로 그 지방행정기구나 민간단체들에 의하여 자주적으로 각 지방 특성에 맞도록 의욕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되어야 되리라는 바램이었다. 그러나 가장 값진 수확은 우리도 목표를 향하여 하나씩 매듭을 풀어나가게 되면 머지않아 문화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것은 결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