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의 문예비평론
-집중연재·연극사의 새로운 탐구 ⑥
서연호(徐燕昊) / 연극평론가·고려대 교수
(가) 문예와 인생에 관한 수상(隨想)
김우진(金祐鎭: 1897. 9∼1926. 8)은 1920년대의 대표적인 극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희곡에 관해서는 이미 「인습에 대한 도전과 좌절」(유민영(柳敏榮), 연극평론, 11∼12호, 1975. 6, 1975. 12 「극작가 김우진론」(서연호, 고려대 인문논집 제26집, 1981. 12) 등에서 논의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김우진에게서 간과할 수 없게 또 하나의 측면이 문학·연극·예술에 관한 문예비평관이다. 그의 문예비평론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문예와 인생에 관한 수상류이고, 둘째는 문학비평류이며, 세계는 연극비평류이다. 그의 작가로서의 전체성과 극작품을 온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하나의 독자적인 문예비평가로서 김우진의 이론은 한국 연극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간략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김우진이 남긴 수 편의 시와 소설, 일기와 서간문 등은 이 연재의 주제와 어긋나므로 일단 제외해 두겠다.
김우진은 1919년 12월에 「타씨찬장(陀氏讚章)」을 썼는데 이 글을 통해서 그는 3·1 운동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시대정신을 이끌 만한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하였다. 제목에서 「타씨」는 이탈리아의 시인 다눈치오 D'Annunzio(1863. 3∼1938. 3)를 가리킨다. 그는 18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유럽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섭렵하였고, 그들 중에 다눈치오는 물론, 스펜서 Spenser(1552∼1599), 불레이크 Blake(1757∼1827), 에이츠 Yeats(1865∼1939) 등의 이름이 보인다. 다눈치오에 대해서는 특히 경도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타씨찬장陀氏讚章」 이외에도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작품까지 남길 정도였다.1) 이 「타씨찬장(陀氏讚章)」에서 김우진은 제목이 가리키듯 다눈치오의 훌륭한 면모를 예찬하면서 자신의 시에 관한 의지를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우리 시인은 이와 试치 전설적 몽환과 시적 열정으로븟터 일보우일보(一步又一步) 점차로 실현적 인생에 나아갓다. 그 찬연한 붓韡鏅 기상의 정확한 핸들(파수)로, 그 서정적 시구鏅 국민적 찬탄으로, 그의 「사의 승리」鏅 「생의 염(焰)」으로, 또 연애적 열정은 애국적 열정으로 이변(利變)하였다. 아. 누가 알었든고, 일후(日後)에 큰 일을 하리라고. 그鏅 강보에 싸인 일생명의 미소에 축복한 유모의 예언이섯다. 보라, 내각·사회당·연맹의 구속과 조지(阻止)가, 일정한 목적으로 기정력(其精力)을 구사하鏅 시인, 물질의 힘이 밋치지 못하鏅 영혼의 창조의 시인에의 엇더한 권위와 자유가 잇슬가. 모든 군집의 숭영웅적(崇英雄的)의 환영과 절대한 사랑은 「나마(羅馬)의 신왕(新王)」의 정복을 승인하였다.2)
이처럼 다눈치오의 면모를 예찬하면서 김우진은 3·1 운동 이후의 혼란한 사회와 민족적인 고난의 현실을 마치 다눈치오와 같이 극복하면서 그러한 삶을 시로서 표현해 낼 수 있는 시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자신도 그러한 시인의 한 사람이 되기를 뜻하고 있다. 그는 「시鏅 곳 온갓 것, 시야말노 왼갓 것을 할 힘이 있다」고 전제하고, 「우리鏅 집을 사랑폁고 나라랄 사랑하고 인류랄 사항하기 전에 鏡의 생명을 사랑한다. 사랑에서 힘이 나오鏅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만의 투기, 견박(堅縛)한 질곡(桎梏)이 꿡 선혈과 국민의 희생(犧牲)을 익일 수가 잇슬가. 국민적 감정은 모든 것을 익일 수가 있다. 심묵(沈默)한 긴장(緊長)을 준비하야 시기의 필요한 점화선의 석냥 한 가지가 긴절(緊切)한 것을 다더라」3)고 힘차게 부르짖었다. 그는 다눈치오가 그러했듯이, 이처럼 국민의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의 운명을 생명력 넘치게 해 줄 수 있는 정신(詩)의 출현을 기원하며, 그 구체적인 사례로서 다눈치오의 「나전국민부활(羅典國民復活)의 송(頌)」, 「국민정신의 송(頌)」을 찬미하였다. 그의 시를 「진실한 화성, 기대하였든 시편」이라고 하면서 위기에 직면한 현실 속에서 민족적 정신을 불꽃같이 밝혀줄 시의 출현을 열망하였다. 오늘날 유작으로 남아 있는 김우진의 시(50여 편)를 읽어보면4) 그의 시들이 이상에서 언급된 시 의식에 충실하게 씌어진 것이라 할 수는 없으나, 본질적으로 그가 이러한 시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시인이었음을 일단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이다.
1925년 6월에 쓴 「곡선의 생활」에는 「Société Mai 창립의 날」이라는 부기(附記)가 붙어 있다. Société Mai는 김우진이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1924년) 목포로 돌아와(1925년) 그곳의 문학 동호인과 지식 청년들을 규합하여 만든 일종의 동인지이다. 그는 이 지면에 수 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 「곡선의 생활」도 그 창간호에 발표한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을 통해서 김우진은 창조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삶은 고정된 도덕이나 율법, 제도에 추종하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지고 부단히 투쟁함으로서 이룰 수 있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상주의 철학자는 창조와 이성과 완전을 어드려고 살고, 나는 살냐고 창조와 이성과 완전을 구한다. 이것은 패러독스가 아니다. 손쉽게 다시 말하면 법칙 밋헤 생이 잇는게 아니라 삶의 밋헤서 법칙이 생긴다」5)는 전제에서 출발한 김우진은, 「생명의 지침은 의식이다. 생명의 의식은 세계의 파괴요 또는 창조다. 개조가 아니고 개혁이 아니다. 상상할 수 잇는 시간과 공간 안까지 되푸리하는 창조다. 그러닛가 개조라는, 개혁이라는 말 우에 머믈너 서지 마라. 생명의 의식, 나는 이것에 희망을 둔다」6)고 하면서, 창조적, 삶을 위한 생명의 의식을 통해 운명의 전환을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수차에 걸쳐 생명의 의식을 강조하면서 꽃이 피는 것도 의의 있는 생활도, 역사의 발전도 모두가 의식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이상과 같은 생명의식이 깃든 창조적 삶을 곡선의 생활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써서 정의하였다.
내 우에 창공, 내 안에 살냐는 힘, 창공은 직선이고 힘은 곡선이다. 곡선은 업는 곳에 무슨 힘이 잇스랴. 힘 업는 생이 어듸 있으랴. 곡선잇는 생이기 때문에 영원한 되푸리의 싸흠이다. 직선한 모든 것을 버려라. 지금은 생명의 물굽히가 한 번 더 힘잇게 더 세게 이러나야 할 시대다. 수천만년간 양으로나 질로나 다시 비례가 업섯슬 만큼 큰 곡선의 시대가 왔다. 모든 직선의 생활을 피하라. 이상이나 관념이나 절대나 다 지버치워라. 그리고 생명의 흘음에 기회(機會)타라. 7)
김우진은 이처럼 고정적인 관념이나 기존 가치의식, 기성 체제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면서 새로운 삶의 추구를 기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곡선의 생활」에서 그가 말하는 생명의 의식은 일찍이 버나드 쇼오 Bernard Shaw(1856. 7∼1950. 2)가 주창한 이른바 생명력 Life force의 발견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본문 가운데 쇼오의 어구를 인용해 가면서 내면에 있는 본능이나 생명의 샘물을 진정으로 깨달음으로써 곡선의 생활이 가능하다는 논리 전개를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주지시킨다고 하겠다. 1919년 와세다 대학 예과를 거쳐 영문과에 진학한 김우진은 재(在)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극예술협회(1920년 봄)를 조직하고 구미의 극작가들을 폭넓게 섭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그가 깊이 경도하기 시작한 것이 버나드 쇼오였다. 바로 그때 쓴 일문(日文) 리포트인 「愛蘭人としてのバアナῄド, ッョウ」와 번역 미필고 「워렌 부인의 직업 Mrs. Warren's Profession」(1894)은 지금도 남아있다.8) 그는 영문과 졸업논문으로 「Man and superman-A critical study of its philosophy」(1924년)를 내었는데, 이 논문에서 바로 쇼오의 생명력 Life force의 철학에 관한 고찰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이 논문에 관한 필자의 고찰은 뒤로 미루겠다) 이 논문이 나온 이후 김우진의 글 속에는 도처에 쇼오의 영향과 특히 생명력에 관한 그 나름의 적용과 전개가 보이고 있음이 특징으로 드러난다. 「곡선의 생활」이 과연 어느 정도나 실현성이 있는 것이었는가는 의문이나 일단 창의성을 열렬히 주창한 그의 지론은 이 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1926년 3월 쓴 「생명력의 고갈」은 시대와 예술과의 관계를 논한 점에서 주목되는 글이다. 이 글은 「예술과 인생」,「시대와 예술」,「상대성 원리」 등 세 개의 작은 항목으로 나누어 논술되었는데, 「예술과 인생」에서는 먼저 예술을 어떤 고정관념이나 일정한 개념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경고하면서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코리니코프의 살인 동기가 작가의 의도적인 개념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어 감동이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개념으로 엇던 행동이 시작될 때 그 행동이 불순한 것은 물론이고, 그 행동의 성과가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예술에서도 이런 개념을 버려야 한다.」9)고 하면서 예술이 무의미한 유희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이어서 그는 괴에테 Goethe(1749∼1832)가 언급한 시대정신 Zeit-geist을 가지고 「예술과 시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였다.
예술도 시대 시대에 따라서 제삼자의 즉, 일반 사회의 요구가 변해진다. 이 요구 속에서 예술가가 생기(生起)인다. 예술가의 초월성을 말하느니가 잇지만 공기 속에 사는 인간이 공기를 초월할 수 업슴과 갓히 사회의 일인(一人)으로서 생활하는 인간이 사회의 마음, 괴에테의 Zeit geist에서 떠날 수 업다는 것은 누구든지 다 알고 잇는 것이다. 예술이 시대와 엇더한 필연(必然)한 인과를 가졌슴을 여긔서 이 단순한 사실에서 보아야 한다.10)
「상대성 원리」에서 김우진의 당대의 조선사람들에게도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는 마음이 충만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아울러 그러한 요구를 예술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일련의 창조적 행위가 절실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해서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당대의 예술가들을(자신도 포함해서)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을 생명력의 고갈로 보았다. 「오늘 조선에서 무엇이 부족하냐 함은 이 요구나 생의 충동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코저 하는 힘이 부족하다」11)고 하면서, 생명의 고갈에는 물이나 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자극과 충동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예술은 생명력에서 창조되고, 창조된 예술은 다시 독자에게 생명력을 준다는 변증법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앞서도 언급된 버나드 쇼오의 생명력에 관한 영향이 이 글에서도 여전히 강하게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우진은 「조선 예술가들은 엇던가? 생명력의 고갈이 오늘처럼 심(甚)한 것은 없다」는 말로 이 글을 맺고 있다.
미필고인 「자유의지의 문제」는 당시의 Société Mai지에 발표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김우진이 중요하게 다루려 했던 문제는 진보와 자유의지의 관계였다. 진보란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해 줄 수 있고, 그러한 완전을 위한 노력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참의 신(神)」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인간의 삶이란 곧 자유의지를 「이용하고 배육(培育)식히는 것」이라 부연하였다.
살냐는 맹목적 결정적 숙명적인 자유의지다. 아모 것도 지배할 수 업고 아모 힘도 결박하거나 죽
이지 못할 생명의 힘이다. 12)
이것이 그가 정의한 자유의지의 뜻인데 쇼오가 「Man and Superman」에서 밝힌 생명력의 개념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쇼오에 의하면, 생명력이란 생명의 원동력이며 맹목적이고 충동적이긴 하지만 총명한 지식과 결부됨으로써 인간을 부단히 진화시켜 마침내는 초인의 경지까지 끌어올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초인 관념은 개인주의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개인을 말함이 아니고, 사회를 형성하는 각 단위가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도달해야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초인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이상적 사회가 실현된다고 쇼오는 생각하였다.
김우진은 자유의지의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인 자의(自意) voluntary와 부자의(不自意) involuntariness의 실상을 자상하게 검토하였다. 이 검토에서 그는 자의라고 정의된 것이 실은 부자의한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성립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양자는 자유의지의 작용에 따라 변화되는 인과율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개인의 집단인 민중이나 사회에서도 인과율이 지배한다. 민중심리가 그럿고 사회의식이 그럿다. 역사란 인과율의 간단 업는 반복이다. 또 사회제도의 변천이 역시 그럿타.13)
김우진은 역사를 발전·진보시키는 인과율을 지배하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이처럼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보와 자유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쇼오의 역사의지와 동궤(同軌)의 것임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의 문제」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하나는 자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사상에 과한 김우진의 관심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윤심덕(尹心悳)과 함께 자살하였기에 자연 관심이 쏠리게 된다.
자살자의 예를 들쟈. 실연한 청년이나 소녀라고 하자. 그이는 환경의 부여의(不如意)에 혹은 욕망의 실패에 비관한 끗헤 자살을 해서 실망의 고통을 이즐녀고한다.(실망을 극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살의 행동―칼이나 네고이라스나 총이나 허리끈으로나―은 부자의운동(不自意運動)이기 때문에 이런 제이의적(弟二意的)의 수단이 살냔는 자유의지를 자기생명일지라도 건듸리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명이 떠러지는 그 찰나까지라도 현실의 빗을 일치 안으려고 팔다리를 허덕그린다. (중략) 자유의지가 잇는 까닭이다. 14)
그는 이처럼 자살을 「실망의 고통을 잊으려는 부자의운동」으로 보았고 「현실의 극복이 아닌 패배」로 생각하였다. 이 글이 그의 자살 얼마 전에 씌어진 것임을 감안할 때, 그의 자살 사건은 흔히 세론(世論)이 그러하듯 결코 윤심덕과의 로맨틱한 정사만으로 미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은 공장 노동자와 사회 운동가가 상호간에 자유의지의 작용이 실제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에 실려 있는데,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실력 행사 역시 그들 자신에게 미치는 인과율과 그 인과율에 작용하는 자유의지에 의해 본질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사회 운동가의 단순한 선동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김우진이 영역된 「공산당선언 Communist Manifesto, 1848」을 읽었고,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필고인 「신청권(新靑卷)」은 김우진 자신의 말로 미루어 본래는 장문의 서술을 계획했던 글임에 틀림없다.
저자말―이 제목은 스트린드벨히의 만년 생활의 총결산을 한 책 제목에서 온 것입니다. 나는 총결산 대신에 총출발점에 안져서 이 제목을 슴니다. 물론 그 내용이야 상반될 것이지만.15)
스트린드베리 Strindberg(1849. 1∼1912. 5)는 김우진이 사숙했던 서구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영향은 극작품 상에서 뿐만 아니라 이처럼 생활 속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스트린드베리가 그의 인생을 총결산해서 썼다는 일련의 「청서 Blue Books」(3권, 1607∼8)를 모방해서 「신청권」이라는 서명을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된 쇼오 뿐만 아니라 스트린드베리 역시 복잡한 가정 문제, 여성 혐오증, 비타협적인 성격, 우상·권위·허위에 대한 과감한 도전 등 공교롭게도 김우진의 환경과 상통하는 점이 특징이며, 아마도 이러한 유사성이 더욱 이러한 작가들을 사숙하게 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나의 저서를 목표로 시작된 「신청권」은 실제로 「엇지하면 됴홀가」하는 서언(序言)만을 쓴 채 중단되고 말았다. Société Mai지에서 사용하던 원고 용지에 기술된 것으로 보아 1925년 6월 이후에 쓰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고, 서언만으로 중단된 이유는 불과 1년 후에 생긴 그의 자살 때문인 것으로 유추된다.
「확실히 부정할 수 업는 사실이 한 가지 잇다. 즉 영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세상 사람이 이것을 현실이라고도 말한다. 어졔의 챰된 속을 알 수도 업는 것과 갓히 내일의 챰된 마음도 알 수 업다. 다만 오늘의 이 쟈리에서 제군이 알고 생각하고 늣기는 것 외에 무슨 챰됨이 잇스며 엇던 발은것이 잇스랴.」16)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김우진은 이 글에서 현실의 고뇌를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론자의 입장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시인의 입장에서 보려 하였다. 영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곧 현실로 해석한 것이 그것이다. 즉 현실의 인생고 자체는 영원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苦)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통찰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삶을 허무한 것으로 해석한 쇼펜하우어 Schopenhauer(1788∼1860)를 비판하였는데, 그를 「한숨만 쉬다가 수명대로 도라간 이」로 몰아붙였다.
그러면 어더케할까. 피할 수 업는 거름재처럼 신변에 딸아오는 이 현실을 엇더케할가. 이 해답은 불필요하다. 해답 대신에 제군의 생활이 잇다. 인생 그것이 잇지 안는가. 철학자 되기 전에 시인이 되어야 한다. 하는 속에다가 천당을 바라는 것도 지금은 헛일이겠지만 이 땅 우에다가 옛날 그네들 모양으로 낙원을 맨들어낼 쥴 밋는 것도 헛된 수쟉이다. 그러면 엇지할가. 여보 동모여 그러면 엇지할가. 陵타. 제군의 압헤 생활이 잇고 생명이 잇다. 엇지할 수 업는 생명력이 잇다. 생명력을 결정해 쥬는 자유의지가 잇다.17)
이처럼 삶의 의지에 충만해 있던 김우진의 자살은 확실히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거니와, 「신청권」을 통해서도 앞서 거론된 생명력과 자유의지가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일자(日字) 미상의 「기록의 마력」은 Société Mai지 원고지에 기록된 점으로 보아 역시 그 당시에 쓴 글이 아닌가 한다. 선인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면 무엇이든 과신하고 맹신하는 인습에서 벗어난 작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진정한 문명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이 글은 또한 김우진의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기록된 것을 맹신하는 버릇은 야만인이나 미개인뿐만 아니라 「개명인·문화인에게도 크게 지배되여있는 인류 공통의 미신적 본능이다. 자기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우월한 이의 생각이나 행동이면 곳 거의 본능적으로 모방하게 된다. 모방하는 동시에 신임하고 숭배하고 예찬한다. 다만 문학상으로 기록된 것에 대해서 이럴 뿐 아니라 엇던 사상, 어던 창견(創見), 엇던 행동에 대해서 모도 그럿다.」18) 그는 기록을 믿는 행위를 이처럼 미신적 본능으로까지 보았다.
그는 기록된 것을 그대로 맹신하고 추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공자교(公子敎)를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공자는 모든 이상을 의지에 두지 않고 상고주의(尙古主義) 사상에 두었는데, 실제로 공자가 숭배하던 고대 국가들은 사적(史的) 근거가 미약하여 거의 후세에 날조되었을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선왕지법복불감복(非先王之法服不敢服), 비선왕지법언부개언(非先王之法言不改言)」을 인용하고, 오늘의 사람들이 공자가 살았을 당시의 그 시대의식을 알 수 없는데 덮어 놓고 선왕의 법을 따르라고 가르치고, 또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독연(毒煙)에 마비되는 것이나 같다 하였다. 공자교는 귀납적인 것이 아니라 연역된 강령인데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그러한 독연기에 젖어 창의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왔다고 비판하였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점은 공자교가 자유의지를 결박하는 교훈을 강요하는 것이라 하였다.
도시 문명인이란 것이 모두 수인(囚人)생활에 불과하다. 그도 코카사스 산상(山上)에 결박된 프로메튜스의 수인생활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안 가지고 의력(意力)과 반발성이 업는 아편 중독자의 생활이다. 다시 말하면 기록 중독자의 생활이다. 그러다가 일대의 큰 혁명가나 사상가가 나오면 누구든지 그 당시에는 순교적 고난을 밧는다. 19)
그는 낡은 율법에서 벗어나려는 이 같은 선구자들을 찬양하면서도, 그러나 덮어놓고 「그 시대 그 장소 그 민중과 반대되는 지위에 서 잇다는 것이 반드시 천재」는 아니라 하였다. 천재를 결정해 주는 것은 기록에 마비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갖는 것이라 하였다. 아울러 그는 소위 당시에 신청년, 신여성을 자처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경고를 금치 않았다. 「우리딴에는 새 사고방식을 배웠고 새 의식과 새 생활에 대한 목표를 가륵다는 소위 신청년, 신여성들에게 우리는 실망 아니 할 수 업다. 생활과정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수백 년간 골수에 백히기까지 져저온 생활과정이 그들의 두뇌의 맨 밋구녕에 쳐져잇다. 지금은 최상부의 것물만 거더낸 것에 불과하다.」20)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아직도 진정한 「새 세대」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의 부단한 노력이 기대된다는 요지의 주장이다.
일자 미상의 「초야권(初夜權) Jus Primae Noetis」도 Société Mai지의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처녀의 초야권 문제를 중심으로 남성 대 여성의 불평등한 관계를 비판한 것이다. 김우진은 처녀 숭배의 시원이 불(火)이나 열, 피(血)에 대해서 원시인들이 지녔던 미신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을 피력하고, 옛날 여성들은 처녀막 hymen이 파열될 때 오늘의 문명인보다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므로 이에 대한 두려움, 공포와 더불어 한층 더 나아가 신비로운 존경의 마음까지 생겼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문명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이멘의 숭배란 한 가지의 미신적 기행에 지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문명인들이, 특히 남성들이 여성의 순결과 정조를 문제삼고 그들에 대해서 초야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도 미개인이나 같은 처지임을 비판하였다.
자기네들이 여성의게 대해서 성적으로(내죵에는 정신적으로도) 절대한 하이멘의 순결을 요구하는 것도 역시 미신이고 기습(奇習)이 아닐까. 남성 자기들은 여성이 역시 남성의게 대한 이런 요구를 한 분(分)의 가치도 업는 것으로 아는대서야 다시 말할 바가 업지 안는가. 말할 것 갓흐면 출가이전(出家以前)의 노라가 한 개 남성의 완롱물(完弄物)로서 아버지의 손에서 남편의 손으로 옴겨온 것과 갓히, 오늘까지의 여성의 하이멘은 醕날 승려가 제사장이나 존친(尊親)의 손에서 떠나게 되는 동시에 남성 일반의 손에 옴겨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성까지도 당연한 일로 알고 그 생명을 남성의 가치 표준에 맛추려고 애를 쓰고 잇다.21)
이처럼 김우진은 초야권을 고집하고 있는 남성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치기준에 타당한 이유 없이 덩달아 동조하고 나서는 여성들까지 비판하였다. 특히 당대의 신여성을 자처하는 여자들까지도 소위 「순결」에 대해서는 거의 맹목적으로,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체면을 고려하여 고수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면서 그 거짓스런 태도를 지적하였다. 그는 남성의 기준에 맹종하는 여성을 불쌍한 여성으로 보았다. 「불쌍한 여성이다. 자기의 사명―사랑, 생식―을 다하려는데 난데없이 남성의 구실에 자기네들 스스로 얽매여 나가는 것이 불상하다. 그래서 남녀성이 모도 이러셔셔 처녀숭배의 이상(理想), 소위 순결의 시(詩)를 맨들어냈다.」22) 그는 이처럼 순결과 정조 숭배의 관습을 만든 책임을 남녀성 모두에게 적용시켰다. 김우진은 한층 나아가서 이러한 맹신적인 순결관이나 정조관에 의거하여 춘향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춘향이가 이도령 도라오기 전에 다른 옥골남자(玉骨男子)만 어덧으면 수청 기생으로 드러갈 염려는 업섯겟지. 만일 이도령이 과거급제를 아니 했드면 춘향이는 옥 속에서 뭂엇을 것이다. 앗가운 춘향의 성격(性格)만한 휼늉한 여성이 송쟝이 되어 썩어버렷겟다는 말이다. 그도 더러운 원님 한 놈의 희생이 되어 가지고. 만일 이 정조 관념만 업섯드면 춘향이는 훌늉한 놀웨의 노라보다 더 가치잇고 고마운 여자가 되엿슬 것이다. 23)
이상에서 「인형의 집」 A Doll's House(1879)의 노라 Nora와 춘향의 경우를 정조 관념이라는 측면에서만 대비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으나, 김우진의 본뜻은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여성인 춘향을 기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근거는 노라를 언급한 다음 부분에서 분명해진다. 「정신상으로 노라의 자각이 오늘 이후의 여성의게 필요하다면 육체상·심리상으로도 이 Jus Primae Noctis를 여성 자기네들이 주재(主宰)해야 한다. 남성으로붓허 날근 정조 관념으로붓허 떠나야 한다.」24) 이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김우진과 윤심덕의 연애와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연상의 여인이었던 윤심덕은 남의 첩 노릇, 뭇 남성들과의 염문, 무질서한 남녀관계 등으로 당대 언론의 화젯거리였고 소위 요조숙녀들의 비난거리였다. 그녀는 조선 여성들에게 부덕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나쁜 사례」로서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여성이었다. 25)
세평이 이러한 윤심덕을 김우진은 무척 동정하였고 차차 사랑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동반 자살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만약 초야권을 고집한 범부와 같은 남성이었다면 그녀와의 정사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세상 사람들의 험담이나 통념과는 달리, 윤심덕에게는 하나의 독자적인 여성으로서의 개성과 주체성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그러한 장점들이 김우진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접근하도록 하는 심리적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누가 뭐라든 그 두 사람의 사랑은 매우 값진 것이었고 또 한국 전통사회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인간관계였다는 해석도 아울러 가능해진다.
「처녀성에 대한 유일무상(唯一無上)한 미신을 버리고 자기네들이 이 초야권의 주재자(主宰者)가 되지 않는 동안 정조 문제란 영원히 여성의게 다시 피치 못할 철강(鐵鋼)에 지내지 못할 것이다.」26) 김우진의 글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이상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듯이 그는 남녀의 문제를 각자의 개방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각자의 주체성에 입각해서, 나아가서는 각자의 인생관에 기초하여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는 지론을 안고 있었으며, 또한 몸소 그러한 지론을 실천에 옮긴 시대의 첨단자였던 것이다.
1926년 6월 9일 서울에서 씌어진 「Protesto」는 김우진의 목포의 집을 나와서 그 출가의 변을 조명희(趙明熙)에게 남긴 것이다. 그는 이 글을 남기고 동경으로 건너가 홍해성(洪海星)과 잠시 동거하면서 극작품 「산돼지」를 썼다. 그러니까 이 글은 자살 2개월 전에 쓴 셈이 된다.
「출가는 왜 하니 ?」
「내 속의 생활을 완미(完美)케 하려고.」
「흥 속 생활이 다 무엇이야. 가정을 실생활을 이져버린다니 네 처지와 경우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
「처지니 경우니 하는 것을 지금 날더러 이약이 할 필요는 업다. 과거의 내 생활과 주위는 죄다 이져버릴테닛가.」2)
이상과 같이 「Protesto」는 두 사람의 대화체로 엮어져 있는데 두 사람은 모두 김우진 자신의 분신이자 내면적 갈등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글에 나타난 의식을 요약해 보면 지금까지의 처지와 경우에 얽매인 가정 생활에서는 미지근한 타협이 불가피하므로 차라리 집을 떠나서 생활의 완미를 추구해 보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다. 그는 타협을 비상이나 독으로 여길 정도로 증오하고 있으며 자신 같은 기인의 생활에는 「이상(異常)이 곧 평상(平常)」이기에 가출함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은 「내 속 생활」이라고 밝히고, 아버지·처·자식들과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속 생활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로 못난이라도, 영웅·천재 아닌 사람이라도 제각기 제 멋대로 제 특징과 가치만에 의하여 샬어야 한단 말이다. 수십 장 되는 폭포도 져 힘에 넘쳐 뛰내리지 잇지. 그와 동시에 져근 시내물도 제가 엇지할 수 업는 힘에 몰녀 흘으고 잇지 안니 ? 초목(草木)이 그럿코 금수(禽獸)가 그럿코 미물(微物)이 그럿타. 그런대 사람만은 그럿치 못하고 잇구나. 인습과 전통과 도덕에 억매여 잇구나. 나는 이 모든 외부적의 것에 대한 반역의 선언을 지금 행동화하고 잇다. 그러니 내 행동은 논리가 아니고 공리가 아니고 윤리가 아니다28)
이 부분에서 그 출가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종래에 그가 언급해 온 창조적 생명력을 충실히 발휘해 보기 위해 그는 인습과 전통과 도덕에 대해 과감히 저항하려는 결심이었다. 「내 처자도 다 이졌다. 더구나 방한(芳漢)이는 그리웁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게는 제이의적(弟二意的)이다. 그만큼 내 속에서는 엇지할 수 업는 내 생명이 띄놀고 있다. 흥, 아버지것흐니는 문학의 중독이라고 하겠지. 중독도 됴타. 내게는 이것만이 제일(第一)이닛가.」29) 이처럼 그는 자신의 내면적 의지를 시종 주장해 온 자유의지를 우선적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아버지와 처자에 대해서는 시종 존경과 애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의지였다. 그가 동경으로 건너간 것은 독일어 공부와 함께 장차 독일로 떠날 준비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제로 그는 동경에 있는 동안 이러한 준비를 남모르게 진행하고 있었다.30)
1926년 6월 21일자로 김우진은 「출가」라는 글을 또 하나 남겼다. 조명희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동경으로 건너간 뒤 써 보낸 것이라 한다. 이 글은 앞서의 「Protesto」에 이어서 그의 출가에 따른 심경을 밝힌 마지막 인생론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사후에 세상에 발표되었다.31) 이 글 역시 A와 B라는 두 사람의 대화체로 엮어져 있으며 내용도 앞서와 흡사하다.
내가 가정에서 지위에서 신분에서 떠나온 그것만이 내 행동이 아니다. 그런 것은 내가 지금이라도 다시 회복(回復)식힐 필요가 잇스면 있겠지. 그러나 내의 속의 엇던 존재가 나로 하여금 그런 것을 버리게 한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쥬면 이 번 내 출가가 결코 일시적의 것이 아니고 きまぐれ(변덕)가 아니고 네가 그럿케 힘듸려 흘녀가면서 권고할 것이 아닌 줄을 잘 알 것이지만. 나는 이 행동이 곳 내의 생명 그것인 줄을 뵈일녀고 한다. 오늘 이 쟈리붓허 너의게 뵈이려 한다. 모든 인습·전통을 버리고 내 자신 이외의 왼 세계를 죄다 버리고 나선 길이다. 나는 살뿐이다. 사는 그것뿐이다. 나는 엇떤 까닭인지도 몰으고 무엇이 식히는 것인지도 몰으고 잇으면서 살아가는 그것만이 참 내의 존재 그것일 것을 말할 뿐이다. 32)
「출가」에서도 이처럼 여전히 그의 생명력의 철학은 지속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이원적 생각, 제이의적(第二意的)의 철리(哲理)라 부르고, 그것은 일종의 상징의 세계인데, 이제부터는 그러한 상징에서 벗어나 참 생활, 참 생명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첫 힘을 발견했다」고 실토하였다. 「이번 이 행동이 내 자신 속의 참 존재,― 아, 나는 지금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죠을가 몰으겠다―네나 내가 건디리거나 눌으지 못한 엇던 원시적 존재, 그것이 푹 하고 터진 소리에 불과하다.」33) 그는 이처럼 자신의 내면적 발견을 기쁨에 넘쳐 표현하였다.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하였으나 본래 자신의 내면 속에 간직되었던 생명의 힘과 생명의 샘을 드디어 확인하고 찾아낸 듯이 그는 부르짖었다. 그는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 한센클레버 hansenclever, (1890∼1940)의 「아들 Der sohn, (194)」에 나오는 대사의 한 구절을 가지고 「출가」를 끝맺었다.
아버지 당신은 저를 업시녁이시지요. 그것이 당신의 권리이닛까. 저는 아버지의 돈으로만 사러왓스니까. 허지만 저는 이 심장속 회호리 바람으로써 처음으로 아들이라는 울타리를 여너멋슴니다. 그래서는 못 쓴다구 ? 대체 무슨 법칙이 잇기에 저를 이 속박 속에 지버넛슴닛가. 아버지도 역시 사람이 아니요 ? 저도 역시 사람이 아니요 ? 저는 아버지 무릅 밋헤 안저서 아버지를 축복햇슴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를 이런 엄청나는 고통 속에다가 너어 두고 잇섯지요. 그것이 아버지가 저한테 주시는 사랑이오 그려.34)
공교롭게도 그가 맨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언제나 애증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1926년 8월 4일 김우진은 투신 자살하였다. 그처럼 열렬히 생명력의 철학과 자유의지를 부르짖었고, 마지막까지도 「나는 살뿐이다. 사는 그것뿐이다」라고 절규하던 그의 자살이야말로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웅변이 아니고 무엇이라.
1) 초성유고(焦星遺稿) 기이(其二) 참조.
2) 「타씨찬장(陀氏讚章)」, 초성유고 기삼(其三).
3) 전게서.
4) 초성유고 기일(其一) 참조.
5) 「곡선의 생활」, 초성유고, 기이(其二).
6) 전게서.
7) 전게서.
8) 초성유고 기일(其一), 기삼(其三).
9) 「생명력의 고갈」, 초성유고 기이(其二).
10) 전게서.
11) 전게서.
12)「자유의지의 문제」, 초성유고 기이(其二).
13) 전게서.
14) 전게서.
15)「신춘권」, 초성유고 기이(其二).
16) 전게서.
17) 전게서.
18)「기록의 마력」, 초성유고 기이(其二).
19) 전게서.
20) 전게서.
21)「초야권」, 초성유고 기이(其二).
22) 전게서.
23) 전게서.
24) 전게서.
25)「윤심덕 사건에 대하야」, 신여성, 1923. 3 pp.41∼43 참조.
「윤심덕의 넉두리」, 별건곤, 1929. 6 pp.114∼117 참조.
「윤심덕의 관상평」, 선광, 1938. 11 pp.113∼121 참조.
26)「초야권」, 초성유고 기이(其二).
27) 「Prostesto」, 초성유고 기이(其二).
28) 전게서.
29) 전게서.
30)「조명희에게 보낸 편지」 1926. 6. 29, 7. 30., 참조
31)「출가」, 개관, 1926. 8 pp.22∼27 참조.
32) 전게서.
33) 34) 전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