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실상과 허상
-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 ①
전완길(全完吉) / 태평양박물관장
서일(序一) 남의 떡이 크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한국인의 생활 습관에서 생겨난, 그저 무의미한 구절로 흘려버리기 쉽지만 한국인의 고질적인 병리를 내포하고 있다. 즉 자조병 신음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깔보고 낮추며 반대로 남을 우러러보는 인습에 젖어왔다 우리 문화, 우리의 전통을 업신여기고 남의 문화, 남의 전통을 숭상하고 그를 모방하려 애썼다. 그래서 한국역사 5천년의 유산이 많지만 문화전통이 무엇인지 모른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남을 헐뜯기 좋아하고 모함하기 일쑤며 단결심이 약하다고 믿고 있다. 그 예로 당쟁을 든다. 그러나 어는 나라인들 이 정도의 정쟁이 없었을까. 오늘날에도 영국은 피 비린내나는 내란 상태에 있지 않은가. 당파를 정파 혹은 정당의 기원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동인 서인 등 당파나 정당 모두 정권 쟁취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다른 정견을 내세웠다. 설사 그렇게 하나만으로 한국인 모두가 모래알 같다고 말하는 것은 남의 떡만 크게 보는 한국인의 병폐다.
그리고 일본의 칼잡이를 무사도, 서부의 총잡이를 신사도의 표본이며 정의의 사나이로 보는 건 또 뭔가 ? 남의 단점을 굳이 캐낼 필요야 없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하여 너무 외면해 왔기에 하는 말이다.
한국에 훌륭한 전통문화가 있었고, 전통문화의 주역이 있었다. 필자는 그것을 선비문화, 선비라고 단언한다(서민문화 역시 존재하였으나 서민문화는 일단 논외로 한다) 선비는 한국의 양심이었고, 역사의 주류였으며 예와 법을 잘 이어 내렸다. 의를 생명보다 중시하였다. 그들의 생활예절은 동서양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고귀하며, 어느 나라의 신사도보다 엄격했다. 그런데도 선비나 양반은 고루한 집단이며 조선조를 패망시켰으며 한민족의 발전을 저해한 독충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게다가 TV 사극의 주인공인 양반이 한결같이 인습의 외고집장이로 묘사되기에 그들의 정신문화가 외면되고 그들의 가구·의상·장신구 등 생활 용구가 먼지 낀 골동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골동상에게는 돈으로만 값어치를 따지고, 박물관에서는 명칭만 적어 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양반문화, 양반사회를 모두 예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생활양식 한국 상류사회의 전통맥락과 생활양식을 편린(片鱗)이나마 고찰할 필요성을 강조 할 따름이다. 그런 욕심에서 「한국의 전통사회」를 엮는다. 선배제현(先輩諸賢)의 질정(叱正)을 바라보면서. 「질정이 있으면 기꺼이 사과 혹은 수정·보완하리라고 약속한다.」
문일평(文一平) 선생은 사가(史家)가 재(才)·학(學)·식(識) 외에 객관(客觀) 등 사덕(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덕(四德)은커녕 일장(一長)도 갖추지 못한 천학(賤學)이지만―.
양반(兩班)의 말뜻
「한국의 전통사회」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흔히 사용할 「양반」의 어의를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양반이란 원래 동(東)반(문(文)반) 서(西)반(무(武)반) 등 관료만을 가리킨 것이며 고려·조선사회에서 통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 관료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문무반직(文武班職)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민족과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지배 신분층을 지칭하게 된 것이다.
한편 양반은 사대부(士大夫)·사족(士族)·사류(士類)·사림(士林)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사대부는 본래 문반의 4품 이상을 대부(大夫), 5품 이하를 사(士)라고 한데서 나온 명칭이었다. 따라서 사대부는 문반관료만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대부는 문반뿐만 아니라 무반까지 포괄하는 관제상의 문·무량반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사족은 사대부가 될 수 있는 족속 즉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로서, 양반신분층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이고, 사류는 사족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사림은 사족보다 범위를 좁혀 사대부군(士大夫群) 즉 사대부 자신을 통칭하는 말인데 15세기 이후에는 중앙의 훈구세력(勳舊勢力)과 맞선 재지량반군(在地兩班群)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조선의 지배 신분층 즉 상류사회를 지칭하는 어의로 쓴다. 그러므로 「양반」과 「상류사회」를 혼용하게 될 것이다.
외국인들의 양반스케치
그런데 서에서 전제하였듯이 조선의 지배 신분층이 왜 고루한 군상으로만 이해되고 있으며, 전통문화가 망각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본이 조선병합을 합리화하고, 한국인을 열등족으로 격하시키기 위하여 소위 식민사관으로 한국인과 한국사를 조명하였으며 그러한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사학자들이 무의식중에 동조한 데다가 반대로 민족 사학을 제창한 이들이 조선 패망의 원인을 양반의 부패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한데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이보다도 더 큰 원인은 외국인들의 조선 기행문에 있다. 개항 이후 도는 그 이전에 조선을 여행한 외국인들은 짧은 기간에 피상적으로 관찰한 나머지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하여 적잖게 오해하였는데 그들의 오해를 그대로 수용한 탓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인의 특성을 칭찬했건 그 반대이건 외국인들의 비평을 중시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면 실례를 보자.
미국인 동양 학자 그리피스가 쓴 「은둔의 나라 한국」(19887년 초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과거 3세기 동안 양반들은 줄곧 정권 투쟁에 몰두하였으며 탐욕스럽게도 백성의 피를 빨아먹을 뿐 아니라 왕의 대권도 가로챈다. 조선은 관권만능(官權萬能)의 수종병(水腫病)에 걸려 있으며 그로 인한 출혈로 고생하고 있다. 관리들은 백성들을 겁주기 위하여 시시한 예법을 몹시 강조하며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느라고 엄청난 수선을 떤다.」(필자 주(註). 그리피스는 한국에 온 일이 없으며 일본측 사료를 근거로 집필했다)
또 옵페르트의 「조선기행」에는 「양반이 관리로 임명되는데는 그 지방을 착취하는 권리도 포함되며 그들은 최고 관청의 직접 보호 하에 놓이고 관리의 주구(誅求)와 양반의 착취가 보호받고 있다」하였다.
그런데 옵페르트는 1866년 두 번, 1868년에 한 번 내항하였을 뿐이므로 매우 피상적이고 논거가 희박할 수밖에 없다. 달레는 더욱 그러하다. 달레는 그리피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온 일이 없으며 파리에서 「조선교회사」를 썼다. 그런데 그 역시 양반을 매우 추악하게 묘사하였다.
「조선의 양반은 지배자와 폭군처럼 행세한다. 돈이 없으면 하인을 보내서 상인이나 농민을 체포한다. 그가 기꺼이 돈을 낼 때는 놓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양반 집에 끌고 가 가두고 먹을 것을 안주고 때린다. 정직한 양반들도 자기들의 강탈 행위를 차용 형식으로 가장하나 그들은 차용한 것을 결코 돌려주는 일이 없으므로 아무도 그런 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들이 서인(庶人)으로부터 논밭이나 집을 살 때는 대개 값을 치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강탈 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수령이란 하나도 없다.」
1895년 우리나라에 온 프랑스 기자 라게리는 「한국」에서 「양반은 왕이나 관찰사의 명령이 아니고는 막을 수 없는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대역죄만 제외하고는 모든 체형을 면제받는다. 그들은 공손치 못하다는 이유로 평민 계급을 즉석에서 벌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관리나 훈장직 말고는 먹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일체 금지되어 있다. 놀며 파먹고 사는 것이다. 그들의 수는 인구의 10분의 1에 육박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한국의 퇴폐와 찌든 가난, 고립 사회상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1894년 3월부터 1897년 3월까지 3년간에 네 차례 한국을 여행했던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백성이 보호자요 지도자인 관리들이 한국인의 산업의욕을 해친 장본인임을 어렴풋이 나마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의 횡포 때문에 백성들은 자신의 계산에 의해 산업을 영위할 수가 없다. 곧 발전 의욕이나 발전 동기를 박탈해 버리기에 그저 군색 한대로 요기만 하는 것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값싸고 편리한 유기 그릇을 써도 관리들로부터 사치스럽다고 백안시 당한다는 것이다」고 양반이 산업 발전에 저해시킨 장본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예문을 잘 관찰하면, 한국을 방문한 사람이 덜 비판적이고 구체적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장기 체류했던 하멜이나 헐버트, 에밀 마아델 그리고 목린덕(穆麟德: 묄렌도르프)의 부인 등은 양반에 대하여 비판하되 공과(功過)를 병기(倂記)하였다. 따라서 매우 구체적이다. 제임스 게일도 그렇다. 「코리언 스케치」를 보면, 「조선의 신사가 지니고 있는 침착하고 태연자약한 태도는 동양의 신비의 하나다. 그는 빚을 잔뜩 짊어져서 어쩔 줄 모르기도 하고 벽 틈으로 엿보는 굶주린 늑대한테 위협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생활의 좀처럼 혼란 되지 않고 평온하게 유지한다.….소극적이지 적극적이 아니다. 무슨 일이건 단호한 태도로 밀고 나가지 못한다… 조선 신사의 가정의 특색의 하나는 모두 점잖다는 사실이다. 말투는 솔직하고, 자유로우며 허투로 지껄이는 법이 없다. 서양의 상류 가정에서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겨나지만 조선 신사의 가정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하였다. 즉 게일은 한국의 양반을 서양의 신사와 견주고, 장단점과 특색을 논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게일의 관찰이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객관적이다. 그런데 게일의 그것처럼 객관적인 비교 관찰보다 난도질에 가까운 비판에 쾌감을 느낀 탓에 전통 사회가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본 「양반전(兩班傳)」
양반이 왜곡되고 전통사회가 외면된 더 큰 이유가 있다. 박지원(朴趾源)의 소설 「양반전」에 대한 잘못된 평가가 그것이다. 「양반전」은 퇴폐적이고 타락한 양반을 고발한 것이지, 양반을 부정한 것이 아닌데도 양반을 부정한 양 오해되어 왔다. 이는 박지원의 양반전 자서(自序)를 보면 알 수 있다.
「선비는 천작(天爵)이니, 선비의 마음은 지(志)이어야 한다. 지(志)란 무엇인가 ? 세리(勢利)를 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현달(顯達)하더라도 선비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며 곤궁하더라도 선비의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비들이 명망과 절행(節行) 닦기에 힘쓰지 않고 문벌만 내세우고 가문의 덕을 팔고 사니 장사치와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나는 이 <양반전>을 지었다.」
그러면 「양반전」은 어떤 내용의 소설인가. 양반의 타락성을 얼마큼 노출시킨 소설인가.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어질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군수가 새로 부임할 적마다 그를 찾아와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몹시 가난하여 해마다 관가에서 내는 환자미(還子米)를 타 먹었기에 어느덧 빚이 천 섬에 이르렀다. 어느 날 관찰사가 순행(巡行)하다가 이곳에 들러 관곡(官穀)의 출납을 검열하는 중 이를 발견하고 크게 노하였다.
양반은 환자 천 섬을 갚을 길이 막연하므로 훌쩍훌쩍 울기만 하였다. 그 꼴을 본 아내가 투덜댔다.
「여보 당신은 한평생 부질없이 글만 읽는구려. 글을 읽었댔자 천 섬 값어치커녕 한 푼 어치도 못 되는구려.」
마침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부자 하나가 이 소문을 듣고 비밀리에 가족 회의를 열었다.
「도대체 양반이란 아무리 가난해도 지위가 높건만 우리들은 부자이면서도 천하게 굴다니, 길거리에 다닐 때 말 한번 거드름 피며 타지 못하고 양반만 보면 기가 죽어서 굽실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 뜰 아래서 절하고 코가 땅에 닿도록 질질 끌며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여 우린 늘 창피만 당해. 이제 저 양반이 환자를 갚을 길이 없어 양반 행세를 더 할 수 없을 거야. 이 기회에 그것을 사는 게 어떨까.」
한 뒤 양반 집을 찾아가 환자를 대신 갚겠다고 제안했다. 양반이 대희(大喜)하여 쉽사리 응낙했다.
군수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려 양반 집을 방문했다. 그랬더니 양반이 뜻밖에 벙거지를 쓰고 베잠방이 차림으로 길바닥에 엎드려 「쇠네 쇤네」하면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 하는 게 아닌가. 군수가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잡으며,
「선생님 어째서 이처럼 행동하시는지요.」
양반은 황송하여 어쩔 줄 모르는 시늉이다.
「그저 황송하외다. 쇤네가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외다. 저는 벌써 양반을 팔아서 환자를 갚았아온즉 이들 사간 동네 부자가 양반이오니 어찌 제가 양반 행세를 하겠습니까.」
군수는 깜짝 놀랐으나 큰 일을 둘이서만 사고 팔고도 아무런 증서가 없다면 소송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하여 공증을 하기로 했다.
군수는 곧 동헌으로 돌아와서 온 고을 사족(士族)과 농민·공장(工匠)·장사치를 모아 부자는 향소(鄕所)의 오른편에 앉히며 공형(公兄: 서사(胥使)의 아래에 세워 두고 곧 증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745년 9월 0일에 다음과 같이 문권(文券)을 작성하여 양반 매매를 확인한다. 양반의 호칭은 여러 가지인데 글만 읽는 이는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한 이는 대부(大夫)라 하고 덕을 갖추었으면 군자(君子)라 한다. 그리고 무관은 서쪽에 서고 문관은 동쪽에 섰으므로 이들을 양반이라 한다. 이들 여러 가지 중에서 선택하되 오늘부터는 야비한 짓을 일체 잊고 선인의 선행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지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오경(五更)이 되면 일어나 등불을 켜고 정신을 가다듬어 눈으로 코끝을 슬며시 내려다보며, 두 발뒤꿈치를 모아 괴고 앉아서 동래박의(東萊博儀)처럼 어려운 글을 읽되 마치 얼음 위에 박 밀듯하고 아무리 배고프고 춥더라도 잘 참아 입에서 "가난타"는 말을 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아래윗니를 맞부딪치어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겨 코뚱에 키잉하고 뀐다. 가는 기침이 날 때마다 가래침을 지근지근 씹어 넘기고, 털 감투를 쓸 때면 소맷자락으로 그것을 털어서 티끌결을 북신 일으키고 세수할 땐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은 하되 너무 지나치게 말며 여종을 부를 땐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하고 걸을 땐 느릿느릿 굽을 옮겨 신축을 딸딸 끌어라.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와 당시품휘(唐詩品彙) 같은 책을 한 줄에 백자씩 깨알처럼 베끼고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아무리 날씨가 무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 것이며, 식사할 때 맨 상투 꼴로 앉지 말 것이며, 먹기 시작할 땐 국물을 맨 먼저 마시어 버리지 말 것이며 혹시 마시더라도 훌쩍훌쩍하는 흘림 소리를 내지 말 것이며 젓가락을 내릴 때는 반을 찧어 소린 내지 말 것이며,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쭈욱 빨지 말 것이며 담배 필 때는 볼이 오목 파이도록 연기를 빨아들이지 말 것이고,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아내를 때리지 말며 화가 치밀더라도 그릇을 차서 깨뜨리지 말고 맨주먹으로 어린이를 때리지 말며 노비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족쳐 죽여선 안되며, 마소를 꾸짖되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 것이며 병이 들어도 무당을 맞이하지 말고 제사지낼 때 중을 맞아 제(齊) 지내지 말며 아무리 추워도 화로 손을 쬐지 말며 남과 이야기할 때 침이 튀지 않게 할 것이며, 소 백정 노릇을 하지 말고 투전놀이도 하지 않는 법이다. 이러한 여러 행위에 부자가 한 가지라도 어기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갖고 관청에 와서 송사(訟事)하여 바로 잡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부자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양반이 겨우 요것뿐이란 말이우. 내가 듣기엔 "양반은 신선(神仙)과 다름없다"던데 정말 이것뿐이라면 너무나 억울하게 곡식만 몰수당한 것이어요. 아무쪼록 더 이롭게 고쳐 주시유.」
군수는 부자의 요청에 따라 증서를 보완했다.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제 네 등급을 두셨다. 네 등급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바로 그 선비를 <양반>이라 한다. 그들은 농사나 장사를 하지 말고 옛 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 정도이면 곧 과거를 치러 잘되면 문과요 못되더라도 진사(進士)는 하게 된다. 문과의 홍패(紅牌)야말로 보잘 것은 없으나 만사가 예서 비롯되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그리고 진사에 오른 선비는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이름 높은 음관(蔭官)이 될 수 있고 남인(南人)에게 잘 보인다면 수령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가 일산(日傘)바람에 핼쓱해지고 배는 동헌사령의 예, 예하는 소리에 살찌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깊숙한 방안에서 귀개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에 쌓인 곡식은 학을 기르는 양식이니라. 비록 그렇지 못해서 비록 궁한 선비 신분으로 시골 살이를 하더라도 무단적(武斷的)인 행위를 감행할 수 있다.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에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끌어내어 내 김에 먼저 매게 하더라도 누가 괄시하랴.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누가 원망하랴.」
증서가 이렇게 반쯤 작성되자 부자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어이구, 그만 두어유. 제발 그만 두시유. 참 맹랑합니다.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유.」
그리고는 달아나 버렸다. 그후 부자는 「양반」을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 소설은 분명히 양반의 타락성을 고발한 것이되, 바람직한 「양반상」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 또 아무나 양반이 될 수 없다는 야유를 다고 있다. 연암(燕巖) 자신이 명문 양반가 출신이며 매우 가난하였기에 누구보다도 양반의 부조리를 잘 성지(成知)하였고 울분을 품었으리라.
아무튼 연암이 「양반전」에서 보였듯이 양반에겐 공과가 있다. 이제까지 과실만이 과장되었으나 공도 사실대로 기릴 만큼 기려야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하나씩 살피고자 한다. 이를테면 양반사회의 부부예절·가정교육·옷차림이나 문방사우, 신발·담뱃대·오락에서도 느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