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전망과 흐름

80년대에서 본 우리 문학의 반성

-문화의 전망·우리 문화예술의 과제




정종화(鄭鍾和) / 고려대 교수

역사의 흐름에 무수하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큼직한 사건과 운동과 특색을 연대적으로 구분 지움에 있어 지적(地籍)을 정리하듯 자와 측량기로 시대를 반듯반듯 그어낼 수는 없다. 역사의 흐름은 결코 인위적으로 계획되고 분류될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나 20세기라는 시대적 구분은 인위적인 시간의 분류 방편일 뿐,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우리 주변의 무수한 일들을 백년을 한 주기로 일어나고 끝나고 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건을 중심으로 연대를 구분 짓는다는 것은 자연적 현상을 인위적으로 정리하는 무리와 억지를 수반하고 있다. 가령 문학적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1901년이나 1899년을 그 시발점이나 종점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1901년이 20세기가 시작된 첫해라 해도 영문학에서 빅토리아조(朝)적인 모든 문학적 특색이 청산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은 해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에서 1980년대의 시발을 80년이나 81년으로부터 편의상 계산한다고 해도 70년대의 문화적 현상이 79년에 갑자기 사라져서 전혀 이질적인 다른 양상이 80년에 돌출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70년대 초반에 강세를 떨쳤던 반(反)전통적 반(反)체제적 문화운동이 서구에서 79년에 극적으로 물러난 것도 아니며, 러시아의 형식주의를 발판으로 발전된 서구의 구조주의의 영향이 80년이나 81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갑자기 감퇴한 것도 아니다. 다만 아득한 역사의 앞과 뒤의 자국을 인위적으로 잘라 그 단면을 보려는 노력에서 10년이라는 단위가 편리한 수단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필자도 우선 80년대라는 상식적인 편법을 빌려 우리 문화와 문학의 과거와 장래를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마침 82년 1월의 서반부부터 우리의 현대사에 크게 부각될 사건이 몇 가지 나타나, 이러한 것을 계기로 우리의 문화 및 정신 유산을 성찰하여 장차의 방향을 검토하는 일은 의의가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특히 금년 82년은 한미수교백년을 기록하는 해로, 쇄국정책에서 서구의 문물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시점이기도 하다. 이 한미수교는 84년에 있은 한영 수교 등 일련의 서방국가와의 통상조약과 함께 정치적인 의의뿐만 아니라 정신사나 문화사의 입장에서 커다란 혁명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는 서구의 영향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발전되고 수정되며 성장하여 왔기 때문이다. 정치와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제도와 체제의 개혁을 의미하고 있으나, 문화와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내면구조 전체의 변혁을 의미하고 있어 82년이 지니는 뜻은 십진법이라는 편법이 열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외형적 숫자 노릇보다는 심오하고 절박한 의미를 띄고 있다.

금년 정초의 중대 사건이란 물론 통행금지의 해제와 중고교의 두발 및 교복통제의 완화 결정이다.

그러나 축하해 마지않을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즈음하여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통금해제 조치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여 주어진 자유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치안질서의 문란이나, 범죄사태의 빈발이나, 또는 안보에의 위협,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의 귀가시간의 연장에 대한 우려 등 타성에 젖은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이 주어진 자유를 자율적이며 창조적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을 아직 개발하지 못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1945년 남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되찾았을 때 정부의 운영을 다시 남의 힘에 잠시나마 의존시키려 했던 움직임에 상응하는 책임 없는 사고방식을 한번 더 직면하게 된다. 1945년에 36년이 지난 오늘에야 아직 우리들은 되돌려 받은 자유권을 창조적으로 행사 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성년적인 정신상태는 교복의 자유화와 두발 형식의 개발 정책에 나타난 반응에서도 잘 노정 되어 있다. 많은 수의 교사와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교외 지도의 어려움을 이유로 삭발을 주장하고 일제시대의 교복을 계속 입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표시한 것이다. 미성년자들이 지각없이 유혹과 호기심의 충동을 극복하지 못하는 확률이 사회 속으로 외형상의 구별 없이 섞여 들었을 때 클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학생들 스스로가 원숙한 사고방식에 의하여 옳고 그른 사례를 판단할 수 있는 자각과 자율성을 조장하는 작업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 대신, 타의에 의하여 외형적으로 조종되는 전근대적 교육체제를 계속 고집하려는 일부 교육자와 부모들의 주장이 이번의 역사적인 개방화 시책과 잘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이야말로 국민정신의 발전과 문화의 향상과 직결되어 있는 사실을 생각하면, 밀림 같은 고층 건물과 꼬리가 꼬리를 물고 물결처럼 밀려가는 국산 자동차의 행렬과 1천 6백 불의 GNP를 과시하는 경제 성장이, 책임성 있는 정신상태와 세련된 문화적 감각과는 정비례하지 않는 진실을 보게 된다.

88년도의 올림픽과 84년의 아시안 게임 등 국제적인 행사를 앞둔 우리 입장에서는 자율적인 정신과 책임감의 결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하루 평균 3백대씩 늘어나고 있다는 자가용 차를 제한된 도로 사정으로 어떻게 수용하며, 타율적인 제재 방법에만 의존하여 유지되고 있는 교통질서를 어떻게 짧은 기간 사이에 자율적인 질서 속으로 융화할 수 있을 것인지 ? 고등 교육을 거친 일선 중고교의 교감과 교장이 아직도 획일적이며 타율적인 사고 속에서 2세들의 정신 교육을 타성적으로 운영한다면, 각박한 생활 전선에서 단돈 천 원 2천 원을 더 벌기 위해 살인적으로 택시를 몰고 다니는 기사들에게 질서 감각과 공동생활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 그리고 박봉과 격무라는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하달하는 명령만을 타율적으로 집행해 온 제복의 교통 순경들이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린다거나 도로 좌측으로 자동차를 몰아 잠시 기존 교통질서에 혼란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들의 법을 초월하는 무책임한 짓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

이러한 지엽적인 사례를 보완하기 앞서 선행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국민 전체의 정신구조를 의타적인 상태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능력과, 헌법에 의하여 주어진 자유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해야 하는 점이다. 민주주의와 정의 복지 사회를 표방하면서 올림픽 대회라는 거창한 국제 행사를 앞둔 우리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점을 비로소 80년도에 와서 교복 자유화와 통금 해제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명과 문화가 현 시점에서 일치된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질적인 외형을 그 내용으로 하는 문명이 정신적인 내면을 그 핵심으로 삼는 문화와 서로 합일되는 상태에 놓여 있지 않음은, 세계 문학과의 상대적인 관계에서 우리 문학이 위치해있는 입장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하철을 완성하고, 고층 호텔이 치솟고, 컬러 텔레비전이 안방마다 놓여있어, 외형상으로는 서울이 세계의 어느 수도에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치더라도 정신적 폭과 깊이가 다져져 있지 않는 한 80년대의 우리나라의 문화는 삭막하고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문명의 골조를 이루는 기술은 쉽게 서구의 선진국으로부터 차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문명의 내면을 채워야 할 정신적인 문화는 쉽사리 모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 설사 이쪽으로 차용되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 것으로 수용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판적인 재구성을 필요로 하고 있어, 우리에게 시급한 당면과제는 우리 문화를 재정리하여 80년대 후반부를 향한 전통의 창조적 재구성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국민 생활에 자율화 물결이 밀어닥친 82년도의 시점에서 노출된 우리의 정신적 의식구조가 아직도 타율적이며 의타적이어서 원숙한 성인의 문화와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현실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문학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압도적으로 풍미하고 있는 우리 문단의 참여 작가들의 어두운 작품들 속에 나타나 있는 사회 밑바닥의 인간상들은 하나같이 힘과 돈에 짓눌린 무학무식한 약자들로서 자신의 양식과 지적인 판단에 의하여 사회를 쳐다보고 자율적인 행동이 가능한 인물형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이문구(李文求)의 대표작의 하나인 「몽금포타령」(1969년)은 한강 주변의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세계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에는 서울역 윤락가 주변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에서 깔려 부상당한 사람의 대역을 하기 위해 자신의 위신을 단돈 이 백 원에 파는 「박」이라는 청년을 등장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체신을 이렇게 옹호하고 있다.

……교통사고 방지 계몽 사진전에 출품되면 대수로운가, 이 땅에 날 기억할 놈이 몇이나 된다구, 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누가 지시를 받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차 밑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가 흥건하고 냄새가 비위를 뒤집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는 시민들은 「박」을 두고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야 저기…… 웃지마 말아라 자식……」

「원 저런 걸레 같은 새끼, 웃음이 나오겠다.」

「저런 인간 보면 한심해서……」

「사람 새끼 같으면 저 지랄하고 있을까봐.」

이러한 「걸레 같은」,「한심」한 인간들은 이문구의 「동네」를 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작(趙善作)의 개 도둑과 자전거 도둑과 창녀들이 칩거하는 「성벽」 속에 갇힌 군상들을 이루고 있다. 이들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국민의 기본권리나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생활과는 담을 싼 조세희(趙世熙)의 씨종의 후예 「난장이」 일가의 주인공의 「형」은 이런 생각을 적고 있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 당하고, 또 상실한 것은 아닐까 ?/ 세대와 세기가 우리에게는 쓸모가 없이 지나갔다.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 오직 기만적인 껍질과 쓸모 없는 가장 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다./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년)의 주제를 작가 자신이 요약해 놓은 핵심적 부분이다. 여기서 작가는 난장이 일가가 처해 있는 입장을 우리나라가 겪는 상황으로 축소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서구의 고전음악에 인박힌 지성인이나 사회의 지배층이 무능하여, 난쟁이 일가와 그 밖의 모든 밑바닥의 사람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게 만들었다고, 작가는 비난하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우리의 현실이란 남의 문명에서 「겉껍질과 쓸모 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며 「인류의 사상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못」한 민족으로 「고립」 되고 소외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나」라는 소녀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고민」하는 「형」의 「이상주의」를 두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율과 타의에 의하여 움직이는 비창조적인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고민 자체를 「이상주의적」 사치로 보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재용(柳在用)은 그의 80년도 이상 문학상 수상 작품인 「관계」에서, 실직한 「이만복」씨로 하여금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의 손발이 되어 그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로부터 얼굴 씻는 일, 산보하는 일, 목욕하는 일, 가정부의 조수 노릇 등의 굿은 일을 다 맡아 불평 없이 해내는 인간 기계가 되도록 그리고 있다. 드디어 주인공의 타의적 생활은 그의 상전인 불구자 대신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낳아 바치는 입장으로 몰리는, 철저한 몰아적인 역할을 해 낸다. 주인공이 받아들여야 할 「관계」란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문구나 조선작이나 조세희가 그리는 피동적이며 타율적인 한국인 상을 가장 극단적이며 상징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복」이나 「난장이」일가나 「박」이라는 막노동꾼에게 통행 금지의 해제와 교복 자유화가 가져오는 국민의 기본권리나 자유권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주어진 자유를 창의적으로 사용한다는 말인가 ? 조세희는 「난장이」 일가의 「형」의 글을 통해 이러한 피동적이며 타의적인 생활과 사고가 사회의 하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권력과 식자층마저도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사고력이 「마비」되고 「상실」 되어 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하나 유의할 점은 난쟁이 일가의 「형」이 이러한 「마비」와 「상실」의 상황을 의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도층이 비참하고 비창조적인 삶을 무능하게 그대로 방관하고 있는 사실에 분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피동적이며 타율적인 생활을 자율적이며 창조적으로 개선하기를 원하는 강렬한 자의식과 열망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문구도 「몽금포타령」에서 「박」으로 하여금 단돈 이 백 원에 개인의 존엄성을 팔아버리는 처신을 두고 구경꾼들이 욕질을 하자 이런 반응을 보이게 하고 있다.

박은 못들은 체 해버린다. 죽고 삶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철 안든 소리라 탓할 가치조차 없는 거였다.

여기서 「박」은 자신의 타율적이며 「걸레」같은 「한심」한 인간 이하의 「지랄」이 한 개인의 위신과 존엄성을 의식하면서 고의적으로 하는 계산된 행위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박」의 친구 「두만」이가 그의 편을 들어서 「누군 저 짓이 좋아서 하나, 욕은 왜 욕이여……」하고 거리의 구경꾼들에서 「박」을 옹호하고 있다. 즉 「박」의 챙피스러운 생활방식이 결코 바보스런 무지각한 행동의 결정이 아니고 살아가기 위한 일시적인 편법에 불과하며 그에게도 자의식과 자부심이 없지 않음을 그의 친구가 항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발로와 자율적인 생활에의 각성은 우리 문학을 특징짓고 있는 무기력하고 피동적인 인간상 부각의 전통에 하나의 특색으로 나타나 있다. 김동인(金東仁)의 「붉은 산」에서 「삶」이 마지막 순간에 중국인 지주의 집으로 쳐들어가 대결하는 모습이다. 이상(李箱)의 「날개」에서 주인공이 「날개」를 갈구하는 절규나, 선우휘(鮮于煇)의 「불꽃」에서 「고현(高賢)」이 「껍질 속에 몸을 오므리고 두더지처럼 태양의 빛을 꺼린」「산송장」 같은 「도피」와 「외면」의 「30년」을 청산하고 「생의 여울」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하는 「불타는 의욕」이, 모든 창조적인 인생에 대한 인식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산」의 「삶」이 살아간 시대가 일제 통치의 초기이며, 「날개」의 「나」가 「날개」를 얻어 의미 없는 생활에서 날아가고 싶어하는 시기가 식민지 시대 제 2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이며, 「불꽃」에서 생명의 「무수한 불꽃」이 고현의 마음속에서 튀겼던 것이 6·25를 겪는 1950년으로 우리는 여기서 191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타율적인 생활에 대한 자각과 자율적인 인생에 대한 인식이 있어온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각과 인식이 단지 순간적인 각성으로 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동인과 이상과 선우휘의 경우 각 주인공들이 패배나 좌절의 순간에 부르짖은 절규나 그냥 행동이 수반되지 못한 염원으로 남아 작품이 주는 효과는 강렬한 충격으로 오기보다는 약한 동정과 비참감만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로 끝나고 만다. 이것은 우리 한국 현대 문학이 심각하게 검토하여 조속히 극복하여야 할 과제로 되어있다. 문학 작품을 주제와 효과라는 측면에서 판단한다면 무거운 주제가 무력한 주인공을 통하여 전달될 수 없으며 강렬한 효과가 연약한 결말에서 얻어질 수도 없다. 「붉은 산」의 애국가 봉창으로 끝나는 결미에서 독자는 엄청난 민족의 비극 앞에서 느낄 수 있는 미학적 비장감보다는 소녀적인 감상주의를 느끼고 마는 것이며, 이상이 아무리 「날개야 다시 돋아라」를 외쳐도 독자는 그의 절규에서 그의 엄청난 절망을 가볍게 동정하는 정도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상의 「날개」는 그냥 꿈으로 남으면서 그 다음에 다시 등장하는 나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타성적인 인간형으로 남아 「구슬픈」 영변가와 육자배기를 부르며 자멸적인 생활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이상은 「봉별기(逢別記)」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제 이 생에서의 영이별(永離別)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이러한 구슬픈 이야기에서 독자가 받을 수 있는 인상이란 강압해 오는 정렬과는 거리가 먼 애가 정도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선우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고현이라는 패배주의자가 본 생의 「불꽃」은 결국 점화되어 불길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후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타율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생에서 명멸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묵시(默示)」(1970)에 나타나는 「서낭」의 경우이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는 민족적 지도자로 클 수 있는 주인공을 작가는 벙어리 행세를 하게 함으로써 장엄한 비극의 효과 대신 또 한 번 애절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서낭」은 일제에 협력하는 대신 소극적인 항거 방법으로 입을 닫는 가짜 벙어리 역할을 택하여 아내와 아들과 국민을 속이는 「희극 배우」적인 일생을 마치고 마는데, 아버지의 비밀을 아는 아들이 작품의 종말에 시골을 방황하게 하는 처리법을 쓰고 있다. 선우휘는 작품의 결미를 이렇게 맺고 있다.

그는 조그만 손가방 하나를 들고 바람에 밀리듯이 성큼성큼 둑을 걸어갔다. 그런데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눈을 주고 있다가 나는 자욱한 고독의 그늘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 같은 것이 그의 두 어깨를 누르고 있음을 환각 했다. 그것은 스스로가 짊어진 것이면서 그의 부친인 시인 서낭이 이어준 것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나 같은 이승의 속물들이 어거지로 떠맡긴 것인지도 모를, 그러나 어느 누군가 짊어져야 할 그런 성질의 짐으로 여겨졌다.

나는 이 「짐」을 「선우휘의 세계 속에 충만해 있는 영탄과 우수의 핵심이며, 또 우리 문학이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이기도 하다」고 다른 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 「수수께끼」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이것이 그냥 남아 있는 한 대부분의 우리 문학은 「금강」의 「구슬픈 창가」이며, 문명과 문화가 합일하지 못하는 삭막하고 공허한 성질의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수수께끼」를 풀어 타율에서 자율로, 마비에서 창조로 우리 문학 전통을 옮겨가는 것이며, 구슬픈 이야기를 공포와 연민의 정열로 가득 찬 참된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며, 또 단색적이며 획일적인 사고 방식에서 복합적이며 다양한 감각으로 우리의 감수성을 발달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문학을 보다 심화되고 폭넓은 구조로 이해하는 태도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이야기의 길이나 소재가 서구의 어떤 대작과 유사하다고 해서 노벨상을 받는데 손색이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 자체가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우리 문학은 세계 문학과의 관계에서 보다 자율적이며 창의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부터는 오직 기만적인 껍질과 쓸모 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라고 극언을 하고 있는데, 실제 문학을 껍질만으로 받아들여 그 심층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소홀히 하는 한, 그리고 우리의 정신구조를 보다 복합적으로 세련시키지 않는 한, 「난장이」 일가의 「형」의 글이 우리의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며, 이 글의 요지도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