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그 자체로서의 민족문학
오세영(吳世榮) / 시인·단국대교수
1.
70년대에 논란이 되었던 민족문학이라는 말은 최근 한국의 모 문인이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풍문과 함께 다시 한 번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것은 이 문학상이 근래에 들어 점차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민족 문학적 성격이 짙은 작품에 수상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이미 몇 차례의 논쟁을 통해 경험한 바와 같이 이 용어의 사용에 많은 오해 혹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도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민족이라는 말을 쇼비니즘의 표현이라 보아 이를 격렬하게 배척하였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민족을 현실적 삶의 주체로 이해하여 민족문학을 참다운 의미로 민족문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상반된 견해는 물론 작자의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그 상당한 부분이 용어의 개념 규정을 서로 달리하는데서 연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란 의미되는 것과 의미하는 것 화자와 청자 사이에 이루어진 임의적 약속 체계인 까닭으로 그 약속이 언어 행위에 참여하는 각자에게 동일하지 않을 때 쉽사리 미망(迷妄)에 빠져버리는 법이다. 가령 한 평론가가 민족문학을 「정신의 나치즘화에 쉽게 가담하는 문학」이라 정의하고, 다른 평론가가 「민족의 주체적 생존과 인간적 발전이 요구되는 문학」이라 정의하며, 또 다른 평론가가 「인간주의 문학―인간성의 옹호와 인간성에 대한 탐구의 문학」이라고 정의할 경우 이들 술어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즉 민족문학을 옹호하거나 배척한 위의 평론가들에게 있어 민족문학이란 이들 모두가 허락한 동의어로서의 민족문학이 아니라, 각자의 의미가 다른 동음이의어로서의 민족문학이다. 따라서 엄밀히 하자면, 언어의 우상화를 피하기 위하여 위의 평론가들은 자신이 뜻하는 이외의 타인이 가리키는 바의 민족문학을 다른 용어로 호칭해야 할 것이다. 민족문학이 정신의 나치즘화에 가담하는 문학이라면 그것을 파기하는데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민족의 주체적 생존과 인간의 발전을 도모하는 문학이라면 적극 옹호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상반하는 개념들을 하나의 용어로 묶어 놓은 데 있다.
2.
민족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흔히 민족주의를 연상하기 쉽다. 실제로 민족이라는 말로부터 우리가 저항감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는 이로부터 유추되는 민족주의라는 말에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그것이 지닌 역사성으로 인해 여러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때론 극히 위험스러운 명분으로 이용되어온 예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대체로 그 앞에 관용사를 붙여쓴다.
가령 핸드맨 M. S. Handman은 억압된 민족주의 Oppression Nationalism(압제 아래 놓인 민족의 민족주의, 러시아 압제하의 폴란드인의 민족주의), 회복주의자의 민족주의 Irredentist Nationalism(19세기 이탈리아인이나 루마니아인처럼 다른 국가 영토에 거주하고 동일 민족의 일부의 주권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민족주의), 예방적 민족주의 Precaution Nationalism(현대 국가조직처럼 자신의 국가 이익과 번영을 보호하고자 하는 민족주의 때론 제국주의와 동일시된다), 국가주의 Prestige nationalism 등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샤이저 G. Ichheiser는 의식적 민족주의 Conscious Nationalism와 무의식적 민족주의 Subconscious Nationalism(의식화된 국가 이념이 공표 되거나 공식화되진 않았지만 그것의 자각 없이도 자연스럽게 국가적, 민족적 관점에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민족주의를), 헤이즈 C, J, Hayes는 쟈코뱅당의 민족주의 Jacobin Nationalism(프랑스 혁명의 초기에서 보듯이 국가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광적, 맹목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절대적 민족주의), 전통적 민족주의 Traditional Nationalism(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서 휴머니즘에 기초를 두고 계급대신, 다수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려는 보수적 귀족적 민족주의), 예컨대 F. 슐레겔, 에드먼드 버크 Burke 등 자유민족주의의 Liberal Nationalism(전통적인 것과 쟈코뱅 민족주의의 중간적 형태로 영국에서 일어남), J. 벤덤 Bentham 등 (국가의 절대적 통치권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라는 원칙을 중요시함, 모든 국가가 균등하게 독립된 발전을 추구하고 국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념을 지니고 있음), 무한한 민족주의 Integral Nationalism(국제간의 호혜와 상호 번영을 무시하고 군국주의, 제국주의 정복주의를 지향한다), 경제적 민족주의 Economic Nationalism(제국주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윤추구, 시장 개척 원료 확보 등을 통해 경제적 자기충족을 목적으로 함) 등으로 구별하고 있다. 또 오웰 George Orwell은 적극적 민족주의 Positive Nationalism와 소극적 민족주의 Negative Nationalism(가령 모국 혐오증, 트로츠키즘 따위) 그리고 변형된 민족주의 Transferred Nationalism(민족 대신에 인종, 계급, 이념 가령 인도주의나 평화주의 등에 공감을 지닌 집단이 들어앉는다)으로 구분하여 심지어 공산주의까지도 변형된 민족주의의 하나라고 보았다.
이렇듯 다양한 뜻을 지닌 민족주의에 대하여 우리가 특히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인류 발전에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될 때이다. 예컨대 예방적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쟈코뱅 민족주의, 무한한 민족주의, 변형된 민족주의의 특별한 유형 따위이다. 우리가 Nationalism을 경우에 따라 민족주의, 혹은 국민주의, 국가주의 등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하는 것도 민족주의가 갖는 이러한 의미의 다양성을 다소나마 한정시키기 위함에 있다. 한 민족의 통일된 단합을 이루려는 국민주의나 영광된 국가의 건설과 그것의 세계적 확대를 지향하는 국가주의―독일의 예처럼 그것은 쉽게 국수주의로 변신할 수 있다―에 대하여 좁은 의미의 20세기 민족주의란 정치적 경제적 자립을 획득하려는 제3세계 민족의식이 이데올로기화 한 것이다.
민족문학을 「쉽게 정신적 나치즘에 가담하는 문학」이나 혹은 「민족의 주체적 생존과 반식민반봉건(反植民反封建) 의식의 문학」으로 규정한 제 견해들은 그것인 민족문학을 배척하건, 옹호하건 일단 민족주의 이념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민족문학이 아니라 민족주의 문학에 대한 언급이다. 전자가 민족주의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였던 까닭으로 민족주의(실은 민족주의 문학)를 거부하였다면 후자는 긍정적인 측면서 받아들였던 까닭으로 이를 옹호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민족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은 구별되어야 한다. 가령 「춘향전」이 우리의 대표적 민족문학임을 부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정신적 나치즘」을 가졌을 가능성이 많다거나 반식민·반봉건 의식을 이데올로기화했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한편 심훈의 「그날이 오면」과 같은 작품은 민족문학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 문학에 해당한다. 거기에 반식민, 국가의식이 투철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한 민족의 보편적 문학적 감수성이 이상화되었다고 생각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즉 민족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3.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민족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모든 인문학에 있어서 개념의 범주가 그렇듯이 이러한 질문의 해답 역시 분명하게 선을 그어서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원칙적인 관점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민족주의는 이미 그 어원 Nation이 암시하듯이 궁극적으로 국가의식 Nationality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이때 국가의식이라는 말은 의식적이며, 이념적이며, 정치적이며, 현실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한편 민족이라는 어휘는 국가의식에 선행한다. 즉 민족은 국가 성립 이전부터 존재한 자연 발생적 집단이다. 따라서 그것은 국가를 초월할 수도 있고 때로는 국가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미합중국과 같은 나라의 경우 민족과 국가는 합치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민족의식은 보다 기층적이며 자연발생적이며 신화적이며 또한 영속적이라 하겠다. 즉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에 내포된 민족이라는 말은 민족주의의 국가의식과 달리 일종의 folkness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례를 미국 문학에서 쉽게 지적할 수 있다. 로버트 프르스트나 휘트먼의 시는 그것이 아무리 미국적이라 해도 결코 켄터베리 테일스나 셰익스피어의 시와 같은 의미에서 앵글로색슨의 민족문학은 될 수 없다. 미국의 국민 문학일 따름이다. 그러나 미국 국민의 일원인 에스키모의 서사시는 그들의 민족문학인 것이다(여기서 국민문학이라 함은 Nationalism을 국민주의로 파악할 경우의 「국민」이라는 뜻이다. 막스 워즈 M. Wirth는 이러한 국민의 특이한 민족주의를 American Nationalism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Louis C. Snyder, The meaning of nationalism; Westport Greenwood Press, 1977, p.126).
이제 보다 더 구체적으로 민족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의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민족주의 문학은 역사의식에 근거하여 민족주의 이념을 현실적으로 실현코자 하는 문학이지만, 민족문학은 시대성을 초월한다. 그것은 민족의 원형질에 토대를 둔 일종의 영원지향의 문학이다.
둘째, 민족주의 문학은 민족의 현실적인 삶과 민족의 주체적 생존을 지향하는 목적의식을 지닌 반면, 민족문학은 무자각적, 자연발생적인 민족성의 표현에 그 본질을 둔 문학인 까닭으로 그 자체의 문학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따라서 민족주의 문학은 사회적 현상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지만, 민족문학은 꼭 그렇지 않다.
넷째, 민족주의 문학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들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국가나 그 이념에 최상의 충성심을 보이지만 민족문학은 이를 꼭 의식적으로 따르지는 않는다. 민족문학은 국가의식 보다도 민족의 저층에 내재한 공감영역의 자기 확인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신화적이다.
다섯째, 민족주의 문학은 이 특별한 이념의 문학적 표현임으로 해서 무엇보다 작품에 의해 전달되는 내용―메시지나 주제가 중요하다. 그러나 민족문학에 있어서는 주제보다 작품 그 자체―장르, 구조, 언어, 문체 등이 더 중요하다.
여섯째, 민족주의 문학은 하나의 이념이 이론적 체계를 갖춤으로 해서 보다 지적인 태도를 지닌다. 그러나 민족문학은 민족 형질의 자연발생적인 표현인 까닭으로 민족 문학적 경향을 지닌다. 그러한 예로써 각 민족의 대표적인 구비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민족문학이 보다 민족의 신화성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과 그 의미상의 중심에 민족적 전통의 계승이라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4.
나는 앞에서 민족문학이 문학의 자율성에 기초한 문학, 즉 목적의식을 배제한 문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민족문학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의식화하지 않는 문학임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화된 이념에 구속받지 않으면서도 민족문학이 민족적 속성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민족의 보편적 감수성에 토대를 두고 그들의 공감 영역을 최대로 집약한 이상적인 문학작품을 창작하는데 있는 것이다. 물론 문학작품이라는 말과 「최대의 공감 영역」이라는 말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여기엔 이념이라던가 작가의 메시지(사회나 정치 현실에 대한) 따위 등도 작품을 이루는 요소(주제)로 포함됨이 물론이다. 가령 한 시대의 민족의 처해있는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한 삶의 문제 역시 주제상에 있어서 「최대의 공감 영역」의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문학의 범주를 언급하면서 내가 명백히 해 두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첫째, 주제(의식화된 이념, 또는 작가의 메시지)가 작품에 우선할 경우 그리고 둘째, 그러한 작가의 메시지가 시대성을 초월하지 못할 경우, 달리 말하여 영원성을 지니지 못하고 한 시대의 문제로 한정될 경우는 민족문학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주제가 작품에 우선하는 문학은 이미 목적 문학인 까닭이요 한 시대에만 국한된 주제는 민족문학의 본질인 보편성과 영원성으로부터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나치스하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문학은 나치스가 패망했을 때 단지 역사적 문헌 이상의 의미를 가지 못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덴마크 왕실의 부정이라는 시대적 소재를 취재하여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원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결국 민족문학이란 작품 그 자체로서 보편적인 민족성이 가장 이상적으로 형상화된 문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민족문학은 복고적 과거 지향적 폐쇄적인 배타 문학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민족의 과거성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성변화 자기창조를 거듭하면서 미래, 영원 지향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의 이상을 표현한 문학이 과거에만 집착하나 폐쇄적인 자기 구속에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민족문학의 신화성을 지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과거 지향성을 뜻하는 말이 아님을 명백히 해둔다. 라인홀트 니어버 R. Niebuhr의 견해와 같이 신화란 과거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 미래의 역사로서 현존하며 영원성을 지니고 도덕적 정신적 가치관을 마음속에 그려주는 것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R. Niebuhr, The truth Value of Myth The Nature of Religious Experience, New York, 1937)
민족문학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자기창조를 실현하는 문학 행위이다. 그것은 외래적인 것을 수용하되, 결코 주체성을 잃지 않으며 새롭게 변신하되 결코 전통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이다.(전통이란 것 역시 고찰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 발전하는 자이다) 그것이 구현하는 민족의 전형적 인간상은 과거의 역사상에 토대를 두면서도 실은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어떤 것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우리의 삶의 정신적 규범을 예시해 주는 존재이다. 한편 참다운 민족문학이란 외래 문학을 수용하여 자기 창조를 거듭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세계 문학과 대립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괴테의 말과 같이 그 자체가 세계 문학인 것이다.
5.
이제 구체적으로 민족문학의 성립에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을 검토하여 보자.
첫째는 민족어, 즉 모국어의 이상적인 구사이다. 민족문학은 모국어만이 지닌 특징을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게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음운, 음성, 어휘, 운율, 문체, 통사론적·의미론적 관계 등 모국어가 가진 제 특성이 민족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승화된 상태의 언어이다. 예컨대, 고대 소설이나, 판소리, 시조 등이 갖는 한국어의 리듬, 문체, 어휘구사, 톤, 수사법 등이 한국 현대 문학의 언어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둘째, 한국적인 인간형의 탐구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몇 사람이 진솔한 견해를 밝힌 바 있지만(김범부, 김동리 등) 이러한 노력은 아무리 투자되어도 결코 아깝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화랑」이나 「춘향」이 같은 인물을 재현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토대로 하면서도 보다 창조적인 인간상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적 문학 양식의 계승 발전이다. 가령 시조나 판소리 같은 것은 외국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우리 문학만의 양식이다. 물론 나는 이것을 독자들의 공감이 허락되지 않는 상태에서 유물로 전시하자는 뜻이 아니다. 예컨대 수년 전 어느 시인이 판소리의 리듬과 구성을 현대시에 수용하여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예시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민족의 기층적 사고―인생관이나 세계관 또는 전통적 사상에 대한 충분한 탐구와 자기 반성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보급한 대로 유교, 불교, 사상이건, 혹은 민간신앙으로서 무속사상이건, 그렇지 않다면 민중의 소박한 삶의 태도이건 간에 이와 같은 한국적 사상의 원형을 인식한다는 것은 민족문학의 창조적 계승에 필수적 요건이 괸다.
다섯째, 민족의 보편적 문학적 감수성에 대한 일체감의 체험이다. 가령 「한」과 같은 것이 정서에 있어서 보편적 감수성이고, 해골 골계 등이 행위에 있어서 보편적 감수성이라 한다면 설화, 전설 등 전통세계는 문학적 소재에 있어서 보편적 감수성을 야기 시킬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감수성이 한국 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이미 김소월의 시나, 김유정, 채만식, 김동리 등의 소설에서 이들이 성공적으로 형상화되었음을 알고 있다.
여섯째, 민족 정신의 탐구이다. 사회적 정신적 실천 윤리로서가 아니라 한 민족이 근거하고 영원한 생명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힘, 소위 낭만주의자들이 신봉했던 저 민족혼 Volk's Seele(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왔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한 민족에게 일체감을 형성시키는 동질성 National identity라는 뜻으로 사용하자)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정치 이념과 결부되어 잘못 악용되면 국가주의를 합리화 시켜주는 명분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독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문학의 확립을 위하여 언제인가 한 번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안될 명제이기도 하다.
민족문학이란 편견을 가지고 바라다 볼 것도, 또한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것도 아닌 하나의 문학 유형이다. 가령 우리들이 문학을 그 기능상으로 보아 순수문학과 목적문학으로 나누듯이 문학세계가 지닌 개성에 따라 일반문학, 세계문학, 민족문학 따위로 나눌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가치의 비교 개념이 될 수는 없다. 즉 그것이 민족문학인 까닭으로 다른 문학작품보다 더 훌륭하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백합꽃이 있고 장미꽃이 있고 무궁화 꽃이 있는 것처럼 그것은 그렇게 있을 따름이다. 사람에 따라서 무궁화 꽃은 장미꽃보다 덜 아름다울 수도 있다. 민족문학이란 비유해서 말한다면 한 가정의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가정에서 보다 위대한 인물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들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민족문학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과민 반응을 보이지 말자. 민족문학은 그저 민족문학으로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