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 2

양반의 정심(正心)과 한(韓)문화




김완길(金完吉) / 태평양 박물관장

한국의 양반들은 전례의 행동규범이나 고례(古例)에 적응하려 애썼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나 동료에 대하여 거침없이 충고하고 질책함으로서 상류사회가 상류사회답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겐 표상이 있었다. 전인(全人) 즉 군자(君子)였다.

이처럼 모두가 군자 지향의 삶을 영위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칭송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양반이 어떤 특질을 지녔기에 남(외국인)들이 우러르는 것일까.

알렌의 양반론―신의(信義)·인정(人情)·예절중시

알렌은1) 남을 잘 믿는 한국 신사의 성품에 놀란 나머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2)

알렌과 가깝게 지내던 한국인 몇 사람이 한일 항로 개설을 계획하고 황금노선이 외국인이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본금 12만냥을 마련하여 대표 한 사람을 일본에 파견했다. 일본에 도착한 한국 신사는 매우 예의바르고 친절한 한 일본인과 곧 친숙해졌다. 일본인은 며칠 동안 일본의 이곳 저곳을 관광시키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여 환심을 얻더니 외국인들이 조선을 약탈하거나 자원을 고갈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선박회사가 필요하며 그 사업에 자신의 조언이 필요하다는 등 동지 행세를 하였다. 선박 소유주인 자기의 사촌이 마침 선박을 매각하려 한다고 귀뜸 했다. 배 값이 1천 2백 엔(12만냥)이라함으로 쉽사리 흥정이 진행되었다.

사기에 필요한 모든 예비 공작이 마무리되자 그는 원매자(願買子)를 데리고 일본과 영국을 왕래하는 「반도·동양 기선상사」의 대형 선박으로 갔다. 그는 조선 신사를 귀공자로 꾸미고 외국 선박을 처음 구경하는 것처럼 선주에게 소개하였다. 그들은 친절한 영접을 받았으며 배 구석구석을 구경하였다. 그러는 동안 교활한 일본인은 통역이 되어 양쪽에 자기가 원하는 엉뚱한 말만 전하였다.

배를 돌아보고 두 동업자는 해안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일본인 사촌은 매도증서를 작성하고 날인하였다. 돈이 지불되자 그 일본인 사기꾼은 자기 고향으로 달아났다. 다음날 조선 신사는 배에 올라 제물포로 가라고 선장에게 명령했다. 이 귀찮은 조선 사람을 배에게 끌어내기 위해서 경찰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조선 최초로 만들려던 선박회사의 자본금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 얼마나 순진한 한국 신사의 모습인가. 바보라 할만큼 천진하고 소박하다. 남을 속이지 않기에 남을 믿고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한국인을 가리켜 신의가 투철하다 일러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인, 국가가 믿을 수 있는 한국인, 맹방(盟邦)이라고 불려지는 데는 복중(腹中) 혹은 유구시(幼舊時) 혼약하여 상대가 불구가 되더라도 불행한 혼인(결코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을 파기하지 않던 선비들의 신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박평산(朴平山)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군수 유종인(柳宗仁)과 의병을 모아 적을 쳤다. 그는 재식(才識)이 남보다 뛰어나고 호걸다운 데다가 기개가 있었으므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불러 막료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박평산이 「이미 남과 생사를 같이 하자고 약속했으니 불가합니다」하므로 곽 장군이 그의 어짐을 칭찬하고 다시는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알렌은 또 한국인의 상부상조하는 미덕에 경탄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흔히 거지 떼를 목격했지만 한국인은 인정이 많고 친절한 탓에 조선에 거지가 없다 하였다.

이러한 미덕이 알렌에게는 좋게만 느껴지지 않았던지 이렇게 적고 있다.3)

조선 사람들은 비교적 낯선 사람도 초대한다. 언젠가 나는 한국인 친구에게서 조반을 대접받았는데 그 때 많은 밥상을 손님방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고 단체 손님을 접대하느냐고 물었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나에게 방을 보여 주는데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했고 손님 각자에게 밥상 하나씩이 놓여 있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볼일이 있어 온 사람들로서 그 중에서 약간 안면이 있다는 구실로 머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부자들에게 적잖은 부담이 된다.4)

그런가 하면 알렌은 예절바른 한국인을 만나 당황한다. 자전거에 부딪혀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땅바닥에서 일어나더니 흙 묻은 옷을 털기도 전에 길 복판에서 자전거 타는 데 불편을 드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을 보았다.

선비의 예절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에게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는 행동이다. 즉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불쾌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20년 이상이나 조선에 머물렀던 알렌은 정직한 신사가 남을 도우며, 친절을 베풀고 남에게 해꼬지 하지 않는 미덕을 발견하였다.

의(義)

선비는 초당(草堂)에서 청경우독(晴耕雨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검소를 자랑한다.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인조대왕의 명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일본 막부에서 조선 사신을 공궤(供饋)하다가 미찬(米饌)이 남았으므로 그것을 팔아서 황금 1백 70정(錠)을 만들어 환귀(還歸)하는 김동명에게 주었다. 김동명은 일본측 성의를 생각하여 황금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는지 당황하였다. 일행에게 나누어주더라도 돈을 함부로 받았다는 누명을 면하지 못할 테고 반송한다면 외교상 결례가 아닌가. 고민하던 끝에 김동명은 대판(大版) 근처에 와서 금색하(金色河)를 건너오다가 황금을 중류에 던져버렸다.

이러한 김동명의 투금일화(投金逸話)는 조선 사대부(士大夫)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만일 뇌물을 받으면 사대부가 아니라 규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탄핵하였다. 다만 뇌물 아닌 선물은 예사롭게 자주 교환하였는데 무릇 사양하고 받고, 주는 경우에 반드시 의(義)와 비의(非義)를 깊이 생각하여 의(義)거든 받고 불의(不義)한 것이면 한사코 받지 않았다.

불의(不義)한 것이 아니고 우정의 선물이라 생각되더라도 선물 목록(누구로부터 무엇을 언제 받았다는)을 작성하여 보관하고, 훗날 그에 상응한 선물을 반드시 보냈다. 사대부는 득실을 따지지 않고 재화를 말하지 않는 법인데 이는 바로 이러한 염결성(簾潔性)을 가리키는 말이다.5)

선비나 사대부는 의(義)를 매우 중시하였다. 불의(不義)이면 절대권력자인 왕도 능멸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부모에 거역하는 불효도 개의치 않았으며 관직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의 현손(玄孫)인 이심원(李深源)은 나이 25세에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치도(治道)를 논하였는데 조정에서 숙모부인 임사홍(任士洪)이 부도(不道)하여 이심(異心)을 품고 있음을 논란하다가 조부(祖父)의 눈밖에 나서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

그런가 하면 지평(持平)인 허척(許倜)은 세종이 말년에 호불(好佛)하여 절에서 친히 기제(忌祭)를 지내려 하자 간(諫)했지만 듣지 않으므로 아전을 거느리고 가서 차려 놓은 제사상을 부수어 행사를 못하게 하고는 도망하여 숨었다가 왕의 노여움이 풀린 뒤에 나왔다.7)

이러한 의기(意氣)는 「의(義)가 이(利)를 이기면 치세(治世)가 되고, 이(利)가 의(義)를 이기면 난세(亂世)가 된다」는 치도론(治道論)에 근거한 것인데, 의기 있는 사대부가 「인신(人臣)의 도리는 의(義)에 따르는 것이고 임금에게 순종만 하는 것은 아니니 의(義)에 따르는 것이 바로 임금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義)와 불의(不義)를 헤아리지 않고 한갓 임금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면 아첨만 들끓을 것입니다」하여 사직하기도 하였다.8)

도박·복수하지 않는다

흔히 조선의 사대부들이 매우 호색(好色)한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관직을 이용하여 기생을 접간(接姦)하고, 첩을 두었으며 상전이라는 구실로 여종을 농락한 예가 야담과 역사소설, 역사극의 주제인 데다가 호색이 인간의 상정(常情)이라 해석했고 양성(養性)을 위하여 소녀동침(少女同寢)한 실례도 있으므로 사대부들이 마음껏 색욕(色慾)을 빈(貧)했었던 듯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실은 여종이라도 희롱하지 않아야만 사대부로 숭앙 받았다.

최세원(崔勢遠)이 몹시 흥분하여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친구 한경신(韓敬愼)이 절조가 있어 사대부답다 하였더니 그렇지 않더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울타리 틈으로 들여다보니, 한경신이 문 앞 추녀 끝에 앉아 있는데 여종이 세숫물을 올리니까 세숫물을 움켜서 여종 얼굴에 뿌리면서 희롱하지 않는가」9)

우리나라에는 원한을 사면 반드시 해를 입는다는 설화가 많다. 해꼬지 하면 해꼬지 한 이상으로 해꼬지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반드시 복수극을 반복하는 양 오해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10) 조선의 사대부들은 아무리 원한이 맺혔더라도 복수하지 않는 미덕을 지켜 내렸다.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11)

정운정(鄭雲程)이 귀양갈 때 그를 미워하던 유자광(柳子光)이 독약을 주머니 속에 넣어 보내면서 「공(公)의 이번 귀양이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할 테니 이것으로 자결하는 편이 좋을게요」하므로 받아 간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정운정이 죄를 풀려 돌아오고 반대로 유자광이 죄를 얻어 귀양가게 되었다. 정운정이 간수해 두었던 독약 주머니를 돌려주면서 「이것은 그대가 전날 나에게 준 것인데 귀양가는데 필요하겠으므로 돌려준다」 하였다. 이 일을 기록한 임보신(任輔臣)은 정운정을 나무라면서 손영숙(孫永淑)의 말을 적었는데 손영숙의 말인즉 이렇다.

「남이 나에게 거슬리는 짓을 했다하여 그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는 일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설사 직(直)으로써 원수를 갚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당한 짓이다.」

사대부들은 도박을 하지 않으면 도박 기구를 집안에 두지 않는다.12)

정희계(鄭熙啓)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는데 일찍이 사람들과 도당(都堂)에서 도박한 일이 있었다. 이를 안 문하성(門下省)의 낭관(郞官)들이 상관을 맞는 영후례(迎候禮)를 행하지 않아 정희계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때 수상(首相) 조준(趙俊)이 위문(衛問)으로 나가려다가 서사(書史)로부터 정희계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돌아간 사유를 아뢰자 웃으면서 「낭사(郎舍)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만 하다」고 칭찬하였다.13)

사대부에 오르지 못한 선비라 할지라도 투전놀이를 하지 않으면, 이른바 잡기(雜技)를 익히지 않는 법이다.

허미수(許眉未)의 자계(自戒)

미수(眉未) 허목(許穆)이 매일 자계(自戒)하던 다음 명(銘)이 사대부 정신을 이해하는데 도움될 것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며, 일을 많이 벌이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고 일이 많으면 해가 많다. 안락(安樂)을 경계하여 후회할 짓을 행하지 말라. 뭐 다칠 일이 있으랴 하고 말하지 말라, 화(禍)가 자랄 것이다. 뭐 해가 되랴 하고 말하지 말라. 화가 커질 것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불꽃이 붙기 시작할 때 끄지 않으면 치솟는 화염을 어찌하며, 물이 졸졸 흐를 때 막지 않으면 끝내는 넓은 강하가 될 것이며, 실날같이 가늘 때 끊지 않으면 아마도 그물처럼 될 것이오, 터럭 끝처럼 작을 때 뽑지 않으면 장차에는 도끼자루를 써야 할 것이니 진실로 삼가야 복의 근원을 이룬다. 그리고 입은 무슨 해가 되는가, 화의 근원이다.

힘이 센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하며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적수를 만날 것이다. 도둑이 주인을 미워하고, 백성이 그 윗사람을 원망하므로, 군자(君子)는 천하에 윗사람 됨이 어려움을 알아 스스로를 낮추며 중인(衆人)에 앞섬이 쉽지 않음을 알아 자신을 뒤로하는 것이다. 강하(江河)가 비록 낮지만 백천(百川)보다 큼은, 낮기 때문이다.」14)

한(韓)문화의 특징

이상 관구(管具)한 바와 같이 양반의 특성은 상류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특질로 응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의 특질은 민족 문화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길래 최형우(崔笘雨)씨의 말마따나 면면히 5천년이나 이어 내려오는 한국 미술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한 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몇 마디로 간추리면 이렇다.

① 그 색채나 의장(意匠)이 담담하고 욕심이 없다.

② 민족의 생활정서와 감정이 매우 솔직하게 꾸밈새 없이 표현되어 있다.

③ 그다지 끈덕지지도 않고, 그다지 나약하지도 않으며, 표현이 정력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끈기가 아쉽다.

④ 기름지가 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아름다움이 더 빛난다. 말하자면 마치 조촐한 샘터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고 맑고 담담한 샘물처럼 한국 미술의 맛은 싱겁고 헤식은 듯도 싶고, 또 때로는 고향의 냉수 맛처럼 잊을 수 없는 순정과 자연스러움이 스며 있다.15) (필자는 최형우씨의 견해 일부를 수정하고 싶지만 앞으로 각론(各論)에서 언급하겠다).

민족문화가 민족성의 앙금이니, 한국 문화의 참모습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심성과 관습도 함께 고구(考究)해야 합리적일 것이다.

사족(蛇足)-양반과 양반문화 서술에 전제(前提)가 있다.

한인은 세계 으뜸 민족이 아니며, 반대로 열등민족도 아니다. 5천년 한문화가 세계에서 독보적이라거나 보잘 것 없다 말자.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민족·평범한 문화라고 말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흥분과 비하사면(卑下史眠)으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관찰하였던 편견과 오류에서 벗어나 냉철한 시각으로 한국 문화의 참 모습을 구명하자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 양반과 양반문화를 서술하여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전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사회의 주역인 양반이 온갖 누명을 쓰고 있기에 본고를 초(草)하였다.


1. 선교사·외교고문·초대 주한 미공사로서 1884년부터 1905년까지 한국에 거주하였기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어느 외국인보다도 잘 알고 있다.

2. Things Korean(1908)에서 간추렸음.

3. 전게서(前揭書)

4. 선비들은 부잣집 자제가 보리밥이라도 달게 먹고, 주식(酒食)의 모임에는 가지전에 누가 내는 것인가. 모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상세히 알고 가며, 참석해서는 「시다」,「짜다」하는 말을 하지 말고 집에 돌아와서 음식이 좋지 않다는 등 헐뜯지 않는다.

5. 선비의 표상인 전인 즉 군자는 도(道)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으며 욕심이 없고 사심도 없다.

6. 남효온(南孝溫)·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7. 임보신(任輔臣)·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8. 연산이년이월(燕山二年二月)·태간(台諫)의 사직소일구(辭職疏一句)

연산군(燕山君) 일강권십이(日江卷十二)

9. 성구(成俱)·소용제총담권이(小庸齊叢談卷二)

10. 당사가 아닌 다름 힘에 의해 앙갚음된다.

11. 임보신(任輔臣)·전게서

12. 다만 내기 아닌 바둑이나 쌍륙(雙陸)·투호(投壺)놀이만 허락하되 이들 놀이는 민가에서 용인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랑(新增東國與地勝覽)

13. 서거정(徐居正)·필원잡기권이(筆苑雜記卷二)

14. 허목(許穆)·증언서(證言序)

15. 최형우(崔笘雨)·한국미·한국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