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차(茶) 정신
용운(龍雲) / 대흥사일지암(大興寺一枝庵)
차(茶)의 정의
다도(茶道)란 법도에 맞도록 잘 울어 낸 차를 마시면서 느끼는 현현(玄玄)한 아취(雅趣)가 지극(至極)한 경지(境地)에 이르러 묘경(妙境)을 터득할 수 있다고 해서 다도라고 했다.
이처럼 현묘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차(茶)―차란 무엇인가 ?
차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커피나 주스, 홍차처럼 시중의 다방에서 마시는 대용차(代用茶)를 차로 알거나 또 옛날부터 대용차로 즐겨 마셔오던 백산차(白山茶), 유자차(柚子茶), 강차(薑茶) 모과차(木瓜茶) 두충차(杜盓茶) 등을 차로 알고 있다. 허나 이는 모두가 다 대용차일 뿐이고 진짜 차는 산차화과(山茶花科)에 속하는 상록관엽수(常綠灌葉樹)로서 가을에 다섯 잎의 흰 꽃이 피며 동백 씨앗 같은 열매가 맺는다. 이 차나무의 어린 눈엽(嫩葉)을 이른 봄(곡우(穀雨)와 입하(立夏) 간)에 따서 양호(良好)한 불에 잘 볶아 탕수(湯水)에 울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차는 인간의 정서생활과 건강에 많은 이로움을 주었다. 이 차 생활은 철학의 범주를 벗어나 형이상학 최상승(最上乘)의 경지인 묘경(妙境)에 이른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네 가지 측면에서 차를 정의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차는 「선(禪)」이다.
선(禪)이란 특수한 수행(修行)의 길이다. 진리를 체득하고자 하는데 드는 방편의 문으로 선나(禪那)라고도 하며, 번역하면 고요히 생각하는 정려(精慮), 또는 생각하고 닦는 사유수(思惟修) 또는 적멸(寂滅)한 마음의 극치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일하는 것은 선(禪) 아닌 것이 없다. 모두가 선(禪)인 것이다. 차가 선과 같다는 말은 선의 삼매(三昧)에 들어 묘경(妙境)에 이르는 것이나, 차의 삼매에 들어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것이 한 가지라는 뜻이다. 즉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 다도의 중흥조이신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진차(眞茶)를 구하여 신(神)과 체(體)를 규명하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없애고 나면 대도(大道)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였으며, 또 차는 묘한 근원을 가지고 있어 그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면 파라밀(波羅蜜)이라고 했다. 일절법(一切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음으로써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차를 마시면 신(神)과 체(體)를 규명하여 건(健)과 영(靈)을 얻어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묘경(妙境)하는 것이다. 스님은 이처럼 파라밀(波羅蜜)에 이르는 길에서 모든 법이 불이(不二)하고 고(故)로 차와 선이 불이(不二)하니 제법(諸法)이 일여(一如)한다고 했다. 이런 사상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추사는 초의선사(草衣禪師)께 「명선(茗禪)」「선탑다연(禪榻茶烟)」「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라는 글을 써서 보내게 되었다. 이런 글귀는 모두가 선다여(禪茶如)의 경지를 천명한 것이다.
둘째로 차는 「멋」이다.
멋이란 인간의 사고와 언행이 이상(理想)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즉 차를 마시면서 느끼는 정취가 절정의 안락(安樂)에 이를 수 있어서 서화묵객(書畵墨客)들이나 시객(詩客)들이 음풍롱월하하거나 불승(佛僧)들이 자연과 마주앉아(백운(白雲)과 청산(靑山)) 차를 기울이는 아취(雅趣)는 격외지인(格外之人)이나 방외객(方外客)의 이상경(理想景)이라 할 것이다. 우리 조상은 역대로 풍류를 아는 민족이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이나 명승지(名勝地)에는 언제나 자그마한 정자를 지어 놓고 춘하추동 한가한 틈에 여가를 내서 모여 끽다(喫茶), 음주(飮酒)로 즐기고 시회(詩會)를 열어 뜻 있는 벗을 청해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가재(家財)에 여유가 있는 자는 집안에 정원과 연지(蓮池)를 만들고 기화이초(奇花異草)로 꾸며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지지 않도록 하였으며, 축대를 쌓아 누대(樓臺)를 만들고 연(蓮)을 심고 정자를 세우고 다조(茶爬)를 만들어 좋은 벗을 청해 다주시화(茶酒詩畵)로 함께 즐기니 그 정취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정신적 편안과 육체적 안락을 함께 도모하였느니 「멋」 그것은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풍미이다.
셋째로 차는 「절개(節介)」다.
절개란 선비의 굳은 충절이나 부녀의 정절, 또는 윤리 예의범절을 말한다. 차가 선비의 충절과 같다는 말은 다수(茶樹)가 상록수로써 세한(歲寒)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부녀의 정절과 같다는 말은 여자가 일부종사(一夫從事) 함이 다수(茶樹)가 태어난 땅을 옮겨가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차 나무는 옮겨 심으면 잘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의 여인들은 처음 시집을 가게 되면 시댁 사당(祠堂)에 가서 남편과 함께 폐백을 드리는데 이것을 「묘견(廟見)」이라고 했다.
이 묘견(廟見)시에 반드시 차를 올렸다. 차를 올리는 까닭은 차 나무처럼 옮겨가지 않고 이 집안에 뼈를 묻을 때까지 가문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무언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예법이 다례(茶禮)이다.
이 다례(茶禮)는 신라 시대에는 「헌다의식(獻茶儀式)」이라고 해서 제천의식의 제단이나 불전(佛殿)에 헌다(獻茶)하는 의식으로 출발하여서 고려 시대에는 「진다의식(進茶儀式)」으로 발전하였다. 진다의식(進茶儀式)이란 길례(吉禮), 흉례(凶禮), 빈(賓), 예가예시(巤嘉禮時)에 전묘(殿廟)의 단(壇)에 차를 올리고 제사하는 것을 말한다. 불전을 향하여 임금이 직접 차를 달여서 올리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는 「다방(茶房)」이라는 관청부서(官廳部署)를 설치하여 진다(進茶) 및 전다(煎茶)하는 일을 맡도록 했다.
그래서 고려 때는 진다의식(進茶儀式)이 지극히 발달해서 왕묘제(王廟祭), 제신상(諸臣喪), 사신권차(使臣勸茶), 책봉의(冊封儀), 공주하가의(公主下嫁儀), 팔관의, 연등회의(燃燈會儀) 등의 모든 대소사에 진다를 했으며, 사대부의 집에서는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등에 다의(茶儀)를 갖추었다. 이 진다의식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다례의식(茶禮儀式)」으로 바뀌었다.
다례란 「행다례(行茶禮)」라는 말로써 「차로써 예(禮)를 행한다」는 뜻이다. 이 다례는 궁중(宮中)다례와 사원(寺院)다례, 그리고 민간(民間)다례로 나눈다. 궁중에서는 사신권차(使臣勸茶)와 다시(茶時), 그리고 제묘(祭廟)에 「상차(尙茶)」라는 정삼품(正三品)의 관원을 내시부(內侍府)에 소속시켜 두고서 다의(茶儀)를 행하도록 했다. 사원에서는 불전 헌다와 조사제(祖師祭) 및 대소사에 다례를 행했으며, 민간에서는 관혼상제에 모두 다례를 행했으며 원조(元朝), 상원(上元), 삼월(三月), 단오(端午), 유두(流頭), 칠석(七夕), 중양(重陽), 동지(冬至), 납월(臘月)과 삭망(朔望)의 참례 때에도 다의(茶儀)를 갖추었다. 이 다례는 한글이 창제 반포된 후에든 「차례」라고 해서 명절 등에 행하는 의식을 차례라고 하나 이는 변질된 의식이며 본시 다례(茶禮)이다.
네째로 차는 「불기(不器)」다.
불기(不器)란 공자의 말씀에 「군자는 불기(不器)이다」라는 말이 있다. 군자가 그릇(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릇이란 크거나, 작거나, 둥글거나, 모지거나, 여러 가지 모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즉 한계성을 갖추고 있으면 그 한계 내에서만 쓰여질 뿐 다르게 응용되거나 대용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처럼 군자나 차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차는 왕이나 귀족이나 서민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으며 많이 마시거나 적게 마시거나, 산에서 마시거나, 들에서 마시거나 장소와 때와 양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초의선사의 시구에 「고래현성구애차(古來賢聖俱愛茶) 차여군자성무사(茶如君子性無邪)」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예로부터 성현이 다 차를 사랑했는데 차가 군자와 같아서 성품이 사특하지 않다는 말이다.
다도관(茶道觀)
다도란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을 함께 얻는 것이다. 신체건령(神體健靈)을 얻고자 한다면 문(門) 행(行) 득(得)의 길을 거쳐야한다.
대저 문(門)이 있어서 들고 행(行)해서 얻는(득(得)) 법이다. 문에는 사문(四門)이 있으니 채(採), 조(造), 수(水), 화(火)가 그것이며 행에는 사행(四行)이 있으니 묘(妙), 정(精), 근(根), 중(中)이 그것이며 득에는 사득(四得)이 있으니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이 그것이다. 사문의 채(採)란 채다(採茶)를 말하며, 조(造)란 조다(造茶)를 말하며, 수(水)란 수품(水品)을 말하며, 화(火)란 화후(火候)를 말한다. 사행(四行)의 묘(妙)는 채다(採茶)의 현묘(玄妙)함을 말하며, 정(精)이란 조다(造茶)의 정성스러움을 말하며, 근(根)은 수품(水品)의 근본(根本)을 말하며, 중(中)은 화후(火候)의 중화(中和)를 말한다.
사득(四得)은 진다(眞茶)와 진수(眞水)를 얻어야 만이 얻을 수 있는데, 차(茶)는 수(水)의 신(神)이요, 수(水)는 차(茶)의 체(體)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진다(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 수가 없다. 체(體)와 신(神)이 비록 온전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잃으면 안 된다. 중정(中正)을 잃지 않으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는다. 그러므로 신(神)이 건(健)하면 기(機)가 이(理)하고, 신(神)이 영(靈)하면 기(機)가 묘(妙)하고, 체(體)가 건(健)하면 용(用)이 이(理)하고, 체(體)가 영(靈)하면 용(用)이 묘(妙)하다. 신(神)과 체(體)는 기(機)와 용(用)과 같아서 불이(不二)해야만 건(健)과 영(靈)을 얻는다. 건(健)과 영(靈)이 불이(不二)하면 묘리(妙理)하고, 묘리(妙理)하면 묘경(妙境)하고, 묘경(妙境)하면 묘각(妙覺)한다.
이를 도해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채다(採茶)란 차를 따는 일을 말한다. 차나무에 차 잎을 따는 것은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너무 빠르면 맛이 온전하지 못하고 늦으면 싱그러움이 흩어진다. 곡우(穀雨)와 입하(立夏) 사이가 적기인데 일창일기(一槍一旗) 이기(二旗)의 잎이 자줏빛이 나거나 쭈글쭈글 하거나 돌돌 말린 것이 좋다. 밤새 구름이 끼지 않고 이슬이 흠씬 내린 후에 딴 것이 좋으면 비온 후나 구름이 끼었을 때는 따지 않는다. 그리고 계곡이나 암석 사이에서 자란 것이 좋다. 이처럼 채다(採茶)는 그 현묘(玄妙)함을 다해야만 된다. 그 묘(妙)를 다해서 채취한 차 잎을 가지고 조다(造茶)를 하는데, 솥이 매우 뜨거워졌을 때 급히 차를 넣어서 볶아야 한다. 차가 익어서도 안 되며, 또한 태워서도 안 된다. 차가 익으면 검고, 타면 노랗고 희게 된다. 불은 연기가 나지 않아야 되며 불의 온도가 고르게 되어야 한다. 양질의 차 잎과 고르고 순수한 불과 제다인(製茶人)의 정성스런 마음을 합쳐서 진다(眞茶)가 나오는 것이다. 수품(水品)은 차를 끓일 물을 말하는데 산정에서 나는 석간수(石間水)가 좋고 정중수(井中水)가 다음이며 강하수(江下水)는 하품(下品)이다. 물에는 팔덕(八德)이 있으니 가볍고(경(輕)), 맑고(청(淸)), 차고(냉(冷)), 부드럽고(연(軟)), 아름답고(미(美)), 냄새가 나지 않고(불취(不臭)), 비위에 맞고(조적(調適)), 먹어서 탈이 없는 것(무환(無患))이 그것이다. 물은 그 근본을 구하지 않으면 상하거나 오염되기가 쉬워서 고여있는 우물이나 강물은 쓰지 않는다. 바로 그 근원지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어야 한다. 이 샘물을 구하여 체성이 튼튼한 불로 끓이면 좋은 탕이 된다. 만약 대나무나 썩은 나무 가지나 낙엽 같은 연료는 불의 체성이 허약하여 탕도 또한 체성이 약해진다. 이런 탕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연기가 나지 않고 체성이 강한 불을 구하여 가볍게 빨리 끓여야 한다. 이때 문(文)이 과하면 수성(水性)이 유(柔)하게 되고 수성(水性)이 유(柔)하면 차가 뒤지며, 무(武)가 과하면 화성(火性)이 극열해져서 차를 위해 물이 억제된다. 이것을 「문무화후(文武火候)」라고 하는데 지나치면 모두 중화(中和)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 적절함을 다하여 중화(中和)를 얻어야 진수(眞水)가 나오는 법이다.
진다(眞茶)와 진수(眞水)를 얻었을 때 비로소 중용(中庸)의 덕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진다(眞茶)와 진수(眞水)가 아니면 신(神)과 체(體)를 규명할 길이 없고 신(神)과 체(體)를 규명하지 못하면 건(健)과 영(靈)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다(眞茶)와 진수(眞水)를 얻어서 신(神)과 체(體)의 불이(不二)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포법(泡法)을 하는데 포법은 차를 끓이는 것을 말한다. 만약 차가 많아도 안 되고 물이 많아도 안 되며 너무 빨리 꺼내도 안 되며 늦게 꺼내도 안 된다. 서둘러서 망치거나 게을러서도 지나쳐서도 안 된다. 적당한 양을 넣어서 적당한 시간에 꺼내서 마시는 것이다. 이것을 「중정법(中正法)」이라고 하는데 그 덕은 중요에 있다. 이 중용(中庸)을 행하는 데는 팔에 그 책임이 있다.
마음이 조급하거나 착잡해도 안 된다. 그래서 완주(緩注)나 급주(急注)를 해도 안 되며 이는 오직 마음에서 그 덕을 실천하도록 적의함을 다 해야만 한다. 이처럼 중정(中正)을 얻게 되면 자연히 신(神)과 체(體)를 규명하게 되는 것이다. 신(神)과 체(體)를 얻으면 건(健)과 영(靈)을 얻게 되는데 신체(神體)가 불이(不二)하고 건령(健靈)이 불이(不二)하면 기용(機用)이 불이(不二)하니 뜻한 바를 얻게되는 것이다. 이치로 궁구할 일이 아니로다. 오직 체득하는데 그 진체(眞諦)가 있으니 참고해 볼일이다.
근래에 일본의 다풍(茶風)이 도래하여 시중에 널이 보급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다시 찾고자 하는 이때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들의 예법과 정신까지 그대로 본받아 유입하는가하면 한술 더 떠서 그들 유파의 분점까지 개설하고 있으니 해도 너무나 지나친 것 같다. 일본의 차가 본래 우리의 유풍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정립한 차 정신까지 받아들여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주변에서 「화(和), 경(敬), 청(淸), 적(寂)」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 왔다. 이 말은 일본 다도를 정립한 천리휴(千利休)라는 사람이 혼란한 정세를 바로 잡고 불안에 떠는 국민을 차로써 구제하고자하여 세워놓은 「사규(四規)」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에 의해서 일본은 차가 널리 보급되어 훌륭한 차 문화를 이루어 놓았다. 더욱이 우리 조상들이 완성한 도자기 문화를 받아다가 그들 나름대로의 전통을 세우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우리의 것을 상실하고도 찾으려는 자세와 노력이 부족한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 다행스럽게도 요사이 차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값진 우리의 문화 유산을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첨언해 두고자 하는 바는 일본의 다도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우리의 다풍을 전해주고 배우고 익히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은가 생각한다. 차를 마실 줄 아는 국민은 흥한다는 고인의 말씀을 음미하면서 붓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