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 오늘에 되살리는 전통생활 문화. 婚禮

우리의 혼례풍습




박대순 / 민속박물관

1. 혼인의 역사적 변천

혼인은 인륜의 대사로서 인간과 인간 즉 성을 달리하는 남녀의 결합이다.

신화시대의 결혼에 있어서도 개국의 시조나 훌륭한 영웅 같은 인물은 인간이 아닌 비인간과 결합하는 예가 많다.

이른바 신으로 일컬어지는 환웅과 곰의 화신인 웅녀가 결혼하여 단군 할아버지를 낳고, 백제 무왕의 어머니는 연못의 용과 결합하여 무왕을 낳았다. 또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는 용이 낳은 알영을 왕비로 맞았다고 삼국사기에 쓰고 있으며, 고려 왕건의 할아버지 또한 용의 딸과 결혼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화시대에는 인간이 아닌 것과 결합하여 건국시조나 영웅의 탄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이 남녀간의 애정보다는 오히려 훌륭한 후계자를 얻는 전제로서 더 큰 의미를 지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이밖에 결혼 풍속을 문헌에 의하여 살펴보면, 부여에서는 일부일처제였으나 사실상 일부다처제가 행해졌으며, 옥저에서는 여자 나이 10세가 되면 장차 남편이 될 소년의 집에서 데려가 성장한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혼인하고 부부가 되었으니 일종의 매매혼(賣買婚)에 의한 민며느리제(예부제(預婦制))였고, 고구려에서는 혼인이 결정되면 신부집 뒤에 사위집(서옥(斷屋))을 짓고 사는데, 밤이 되면 여자 집에 찾아가 문 앞에 절하고 꿇어앉아 딸과 동침하기를 애걸한다. 간신히 허락을 받아 함께 거처하는 사이에 아들을 낳아 자라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이른바 데릴사위제이다.

신라의 왕족이나 고려의 왕족은 계급적 내혼의 형태를 취하여 혈족혼·인척혼 등이 행하여졌으며,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동성동본의 인척끼리 무질서한 결혼이 성립되어 후세의 비난이 되었다.

조선조에 이르러 유교사상이 정치나 사회생활의 바탕을 이루면서 동성동본의 금혼은 물론 모계 및 처족과의 혼인이 금지되었으며, 배우자의 계급적 제한도 엄격해 졌다.

한편 가계의 존속을 위하여 첩 제도를 인정하였으나 처첩의 구별이 엄격했고, 여자의 재혼은 금지되었으며, 원나라나 명나라에 대한 헌녀(獻女), 당파간의 금혼, 궁합에 의한 불혼, 계급적 차등에 의한 불혼 등으로 조혼의 폐풍이 생겨 많은 가정적 비극을 초래하였다. 또한 과부의 재혼을 금지하는 이유 때문에 민간에서는 약탈혼이 성행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결혼제도의 단점을 시정하여 조혼의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등 복잡한 혼례식을 시정하기에 노력하였으니 오랜 세월 동안 유교 사상에 젖어온 혼인의 풍습은 쉽사리 시정되지 않았다.

2. 혼례의 절차

조선조에 혼례는 육례(六禮)를 바탕으로 양반계급에서 지극한 예를 갖추어 행해져 오고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여러 가지 예서(禮書)가 나와 혼례식에는 거의 전형(典型)이 확립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유교 사상에 뿌리박은 한국 혼례의 본격적인 의식으로 굳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육례라 함은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 등 혼례에 따른 여섯 가지 의식 절차를 말한 것으로 첫째, 납채는 신랑 될 사람의 집에서 신부 될 사람의 집으로 혼인을 청하는 의례인데(지금은 납폐의 뜻으로 통용된다) 합의가 되면 채단과 서찰을 주고받는다. 둘째, 문명은 혼인을 정한 여자의 장래 운수를 점치기 위하여 그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 것이다. 셋째 납길은 신랑집에서 점을 쳐서 길조를 얻고 혼인날을 받아서 신부집에 보내는 것이다. 넷째, 납징은 납폐(納幣)라고도 하는데,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청·홍의 비단을 보내는 것이다. 이 때에 혼서(婚書)도 함께 보낸다. 다섯째, 청기는 신랑집에서 택일을 하여 그의 가부를 묻는 편지를 신부집에 보내는 것으로, 이 혼례와 신행 날을 확정하는 서찰을 교환하게 된다. 여섯째,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직접 맞이하여 오는 것 등이다. 이 육례가 사실상 간소화되어 전형적인 절차를 의혼(議婚), 납채·납폐·친영의 네 가지로 줄어들었다. 이 중에서 의혼(議婚)은 남녀간의 혼사를 성사시키는 첫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결혼의 적당한 연령은 어떠한지 예서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인과 개인의 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의사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는 16세에서 30세에 이르는 사이가, 그리고 여자는 14세에서 20세에 이르는 사이가 적당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의 성숙하는 나이를 참작하여 그 한계를 정한 것 같다.

과거 우리 풍속에는 참으로 놀랄만한 의혼이 있었다. 어른들의 친분만으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복중의 아이를 두고 약혼을 하는 일이라든가, 또는 갓 태어나 강보(襁褓)에 싸여 있는 어린애들을 약혼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장본인들에게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라 하겠다. 어린것들이 무사히 자라면 다행이건만, 불치의 병에 거리거나 불구자라면 무뢰한이 된다든지 그 운명을 점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장한 뒤에 하는 것이 인생을 두고 후한이 없다는 것이다.

혼사는 중매쟁이가 양가를 왕래하면서 의사 타진을 하고, 여자 집에서 이를 허락한 후에야 납채를 할 수 있다. 신랑집에서 합당하다고 생각하여도 신부집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혼사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의혼에서 중요한 것은 신랑이나 신부 될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나 인간적인 바탕과 각각 그 가문의 법도이지, 경제력과 배경을 따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본인들의 인품과 건강 그리고 가능성 등이 우선해야지 현재 경제력이 없다고 하여 훗날에 가서 부귀를 누릴 수 없다는 이론은 당치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동성끼리의 혼인이 문제이다. 우리 풍속에 본관이 다르고 성이 같은 경우는 통혼이 되지만, 본관이 같고 성이 다른 경우는 통혼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창령 조씨와 창령 성씨,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서로 혼인을 할 수가 없다. 제주도의 고(高)·양(梁)·부(夫)의 세 성씨는 현재는 그렇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혼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의혼에서 성을 보는 것은 우리 풍속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점이었다.

혼사가 결정되면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납채를 하게 되는데, 납채는 청혼서를 신부집에 보내고, 신부집에서는 이에 대한 회답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납채의 절차도 없어지고 최근에까지 납채 대신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를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허혼(許婚)을 뜻하는 의미에서 연길(涓吉)(택일이라고도 함)을 보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 사주는 신랑·신부의 궁합을 보는데도 필요하고 혼인 날짜를 받는 택일에도 필요하지만, 신부집에서 택일을 보내지 않을 경우는 그 혼사를 거절하는 뜻이 된다. 만약 연길을 받은 뒤에 어느 편에서든지 파혼을 하게되면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해진 날짜에 예식을 올리는데 그 전날 밤 신랑집에서 청홍보에 싼 혼서지와 납폐를 함에 넣어 함진아비에게 지어 보낸다.

지방에 따라 장가가는 날 신랑과 함께 함진아비가 가는 경우가 많다.

다음 절차는 친영(親迎)으로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집에 가서 친히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교배(交拜)의 예를 지내고, 신부의 집에서는 안(雁)이라고 하며 기러기만을 드렸었다. 그런데 근세에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전안과 교배례를 동시에 시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로 되었다. 근래는 신랑이 말을 타고 가는 예는 없어지고 시골에서 최근까지 가마를 이용하던 풍습도 이제는 택시를 활용하고 있어 마을마다 가마를 소지하고 있던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옛날 신랑의 행렬에는 초사초롱, 기럭아비·일산·신랑배행 등의 순으로 신부집으로 간다. 신랑 일행이 신부집 근처인 사처(舍處)에서 머물렀다가 기럭아비의 안내로 신부집으로 향한다. 신부집에 이으러 신랑은 기러기(최근에는 산 기러기 대신 목기러기를 사용함)를 바친다. 기러기는 길조라하여 결혼 때에 쓰기 위해 미리 집에서 길러서 가져간다. 이 기러기는 부부가 금실이 좋아 기러기처럼 부부 생활을 잘 하라는 뜻인데 사랑의 징표로 신부의 어머니께 바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전안은 신부에게 백년회로를 서약하는 의식이다. 옛날에는 신랑이 대청에서 북향하여 꿇어앉아서 기러기를 땅에 놓으면 신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시자가 받고 신랑은 재배한다. 그러나 근세에는 대문밖에 병풍을 치고, 멍석과 짚자리를 깔고 간단한 전안의 의식을 올리던가 또는 마당에서 올리기도 하되 반드시 북향하여 올리게 된다. 이때 미리 준비된 탁자나 상위에 목기러기를 놓고, 신랑이 재배를 한다. 두 번째 절이 끝나기 전에 신부집 하님이 기러기를 들어가 버린다. 옛날에는 신부집에서 전안이 끝나면 이어서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에 와서 초례를 치렀는데 지금은 대게 신부집에서 이 초례까지 치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초례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마주 서서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가장 뜻 있고 엄숙한 행사이다. 대청이나 마당인 경우는 차일을 치고 교배상을 놓고 신랑은 동편에서 서쪽을 향하고, 신부는 서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마주 선다.

주례자의 홀기에 따라 신부는 네 번 절하고 신랑은 두 번 절하여 이에 답례한다. 그리고 집례자가 합근배(合変盃)를 신랑 신부에게 교대로 권함으로서 초례의식이 끝난다. 이 초례가 끝나면 그 날로 신랑 신부가 함께 신랑집으로 가기도 하고 또는 신부집에서 첫날을 지내는 경우도 있다. 당일로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도신행이라고 하고, 신부집에서 3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것을 3일 신행 또는 3일 간귀(干歸)라 하고 해묵이를 할 경우는 묵신행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신랑집에 도착한 신부는 시부모를 뵙는다. 이를 견구고례(見舅故禮) 또는 신부의 폐백(幣帛)이라 한다. 페백이란 원래 아랫사람이 윗사람 즉 어른께 드리는 예물을 말한다. 제자가 잘 되어 간단한 음식을 마련하여 스승을 찾아 뵙는 것들을 폐백이란 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폐백이 예식의 한 절차로서 결혼식 직후에 신부가 시댁의 부모를 중심 한 어른들께 처음으로 인사드릴 때 드리는 예물을 지칭한 말로 통하게 되었다. 폐백 음식은 대개 육포나 닭 한 마리 정도 그리고 술이 기본이다. 이 밖에 이불, 의류 등 시가 식구의 개개인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여야 하며, 먼 친척에게도 간단한 버선 정도로 인사 치레를 하게 된다. 폐백은 웃어른부터 차례로 드리게 되면 한 사람 앞 한 번씩 하고 약주를 한잔씩 올린다. 시부모는 큰절을 받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맞절을 해야한다. 이때 시어머니는 대추를 신부 앞에 던져주고 신부는 이것을 수건에 싼다. 대추는 부귀와 다남(多男)을 의미하는 것이다. 폐백이 끝나고 신부는 다시 친정으로 오는 이도 있고 석달 후에 돌아오는 이도 있는데 넉넉하지 못한 친정에서는 3일만에 보내게 된다.

끝으로 사당(祠堂)차례이다. 사당차례란 새로 시집 온 신부가 선영들게 인사드리는 것이다. 이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폐백에 앞서 행하는 경우와 3일 또는 석 달만에 행하는 곳도 있다.

3. 맺음말

이상에서 상고시대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의 결혼의 변천과정과 조선조에서 현금에 이르기까지 예서에 바탕을 둔 혼례절차를 간략하게 살펴왔다.

예서에 바탕을 둔 혼례가 유교식이라고는 하지만 수세기를 지나오면서 우리의 전통이 형성된 것이다. 물론 혼례 절차가 복잡한 일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의 정신을 이해함으로서 의식의 간소화와 서구식 결혼방법 속에서도 언제나 조상들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자손들에 대한 사랑이 한없이 깊을 것을 믿고 싶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 양식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 맥을 이어야 된다고 다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