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사회의 부부예절
전완길(全完吉) / 태평양 박물관장
외국인은 물론 우리나라의 여러 학자들마저 옛 한국인들이 모래알의 만남처럼 타의로 살아왔다고 믿고 있다. 더욱이 남존여비(男尊女卑) 사회에서 여자가 남자의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노라고 분개하고 있다. 특히 여자 대학 여성 강의실에서 그러니 부부 예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야말로 가슴을 죄어 뜯으면서 나의 선조는 불한당이었다고 외쳐대는 바보짓이나 다름없다.
한국의 남자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해서 부부를 이룬다. 아내는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한테서 아들로 혈통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봉사하는 목석(木石)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녀는 별수 없이 대(代)를 이어주는, 그런 가계상의 교량 역할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내 아내와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가 한 사내를 만났다. 그는 돌 위에 주저앉아서 아주 절망한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오 ?」그는 잠깐 치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계속해서 울었다. 이유를 자꾸 캐물었다. 그는 자기의 아내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아이고 ! 아니고 !」하고 통곡했다. 그야말로 죽은 순간 애정의 눈이 떠진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거요 ?」
「사랑이라니요 ? 누가 그 여자를 사랑한단 말씀이요 ? 아무튼 그 여자는 내 옷을 빨아주고, 내 밥을 지어주곤 했소. 그 여자 없이 내가 어떻게 산단 말이오 ? 아니고 아이고 !」1
제임스 게일만이 한국의 부부를 매도하는 게 아니다.
-남존여비를 숭상하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여성은 아무리 문재(文才)에 뛰어 났더라도 사회에의 진출이 장벽으로 가로막히고 들판의 이름 없는 잡초같이 홀로 시들어져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제멋대로의 질곡으로 여성들을 얽어 놓고 남성들은 사색당쟁(四色黨爭)에 급급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어서 여성은 중문(中門) 안에서 남자들이 먹는 술과 의복 만들기에만 전념하는 이른 바 고등식모(高等食母)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삼종지도의 굴레를 훈장같이 소중히 알고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자처하여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남녀 내외(內外)의 별(別)을 한 것은 필경 부녀의 예속적 지위를 표시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른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적 도의관념은 國初이래로 매우 숭상되어 부녀의 社交는 아주 죄악시하였다. 2
비단 두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피스·달레·비숍·하멜 등 외국인이 그렇고 우리나라 학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식자들이 오해와 편견으로 한국의 부부들을 경멸해왔다.3 왜 이와 같이 오해와 편견이 통념화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삼종지도(三從之道)·칠거지악(七去之惡)·내외법(內外法)이 여성을 억압한 생활율(生活律)이라고 오판해왔기 때문이리라.4 뿐만 아니라 여성은 이름도 없이 살아왔다고 서슴없이 속단해왔으니까.5
그러면 한국의 전통 부부상(夫婦像)은 무엇일까 ?
여자의 지위와 대우
게일이나 달레가 한국 전통사회의 특성을 남존여비였다고 단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국 부부의 실상을 구명하기 위하여 그런 의문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게일 일행이 한국을 여행하다가 배를 어느 포구에 대니 마을 사람들 특히 여자 구경꾼들이 둘러 싸자 겁에 질렸다. 그 정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쪽은 클리이언 같은 소리를 내는 여성들인 모양인데 그들은 예의고 뭐고 없이 오만불손하게들 다가와서 나를 심문하려 들었다. 특히 몸이 아주 건장한 여장부 한 사람은 긴 담뱃대를 빨며 앞으로 나서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좀 자세히 봐 둬야겠다. 내가 이 사내의 나라에 가면 거기서도 나를 잘 보고 싶어 할 테니 피장파장이지 !」
여기서 나는 존 녹스처럼 남자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를 만난 셈이었다.6…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그 울안에 갇힌 여자는 남편의 요구에 의해서 그처럼 비천해진 것이 아니며, 그녀는 남편의 배우자인 동시에 가정 내에서 상위에 있고7…
또 달레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자들은 조선에서 사회에서나 자기들 자신의 가정에서마저도 전혀 무시되고 있기는 하나 그 어떤 대외적인 존경을 흠뻑 받고 있는 셈이다. 그들과 이야기할 때는 경어를 쓰는데, 자기의 여종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감히 경어를 안 쓸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숙녀에게, 평민의 숙녀에라도 길을 사양한다. 부인 방은 침범할 수 없다. 관청 사람들일지라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며, 양반 남자가 내실에 들어가 있으면 결코 강제로 체포하지 못할 것이다. 역모사건만은 예외다. 여자들도 공모자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경우에는 포졸들은 범인을 합법적으로 체포할 수 있는 곳으로,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계략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집 살 사람이 팔 집을 구경왔을 때는, 자기가 온 것을 알리어 여자 방문을 닫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사랑방만 살펴본다. 남자가 자기 집 지붕에 올라가려 할 때는 이웃 사람들에게 알리어 문과 창을 닫게 한다… 여자들은 일정한 친등(親等)의 친척이나 소정의 예법에 의해서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무릎 꿇고 절하지 않는다. 마차나 가마를 타고 가는 여자들은 궐문 앞을 지나갈 때도 내리지 않아도 된다… 여자들은 어디고 집안에 들어 갈 수 있으며 언제고 심지어 밤중이라도 서울 거리를 돌아다닐 권리가 있는데, 이에 반하여 남자는 종소리가 통행금지를 알리는 밤 아홉 시부터 아침 두 시까지는 외출할 수 없고 위반하면 막대한 벌금을 내야한다… 과부나 노비가 아닌 이상,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는 완전히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참여한다. 출생은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반에게 시집가면 그 여자도 양반이 된다.8
그리피스 역시 비슷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서,
가정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성격상의 결함, 폭력, 불복종을 자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낙네들은 시어머니와 싸우고 남편에게 짐을 지우고, 악다구니와 추태의 장면을 끝없이 보인다. 하층 계급에서는 이럴 경우 여편네를 몽둥이로 갈기거나 주먹으로 갈겨 끝장을 내지만, 점잖은 양반 집에서 아녀자를 때릴 수가 없기 때문에 남편으로서는 아내를 쫓아버리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9
게일, 달레, 그리피스가 의아해하면서 소개한 사례들이 바로 전통사회(양반)의 부부예절이며 이러한 예절을 볼 때 여성이 결코 천대받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달레가 「재치 있고 기개 있는 여자들이 스스로 존경을 받고 자기들이 정당한 지위를 획득 할 줄 안다」고 전제한 뒤 소개한 예기(例記)를 보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 가정 내에서의 위치 그리고 부부의 윤리가 무엇이었나를 파악하게 된다.
서울이 지체 높은 양반이 자식을 여럿 둔 채 상처했다. 나이가 많아 재혼이 쉽지 않던 차에 중매로 경상도의 어느 가난한 양반 집 딸과 혼인하였다. 그런데 늙은 신랑은 신부와 상배하려고 대례청(大禮廳)에 올라섰다가 기겁을 하였다. 신부가 뚱뚱보인데다가 박색이고 곱사등이었다. 그렇다고 내려올 수도 없으므로 혼례를 치르고, 처갓집에서 3일을 보낸 다음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 여자를 친정에 두고 혼례 자체를 아예 잊어버리려 하였다.
소박대기가 된 여자는 가끔 남편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절개를 지켰다. 2∼3년이 지나자 남편이 판서 벼슬에 오르고 장성한 아들을 성취시켰다는 소문도 들었다. 다시 몇 년 뒤에는 남편이 환갑을 맞아 잔치를 성대하게 열 계획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자 그는 가족들의 충고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 남편 집을 향해 떠났다. 서울에 이르러 가마를 빌어 타고 판서의 집 앞에 이른 그는 판서의 아내가 왔음을 알렸다. 집안에 당당히 들어서더니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태연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무도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드디어 마님이 비복을 불러 모두 불러모으고 호령하기 시작했다.
「무슨 가문이 이러하냐 ? 나는 너희 마님인데 아무도 나를 맞이하려 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이런 버릇을 어디서 배웠느냐 ?」 그리고 이번에는, 「나의 며느리들은 어디 있느냐 ?」하더니,
「어째서 그들이 나에게 인사 올리지 않느냐 ? 내가 시어머님이 분명하니 인사를 마땅히 하여야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곧 두 며느리가 나와 용서를 빌고 앞으로는 잘 하겠노라고 아뢰었다. 마님은 그들의 잘못을 점잖게 꾸짖은 다음 앞으로는 자식의 도리를 조심성 있게 하라고 타일렀다.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남자들이 나타나지 않자 하인더러 아들들을 불러 오라 하였다. 얼마 후 아들들이 당황한 모습으로 사랑채에서 나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내가 온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인사하지 않느냐 ? 그토록 배우지 못하고 처신할 줄 모른데서야 어떻게 출세하겠느냐 ? 비복들과 며느리들의 실수는 용서해주었지만 너희들은 잘못은 용서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한 마님은 하인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도록 하여 아들들의 종아리를 치도록 명령했다.
일이 이쯤 되자 판서는 사랑채에서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잔치가 끝나고 판서가 입궐하자 임금이 잘 끝났는지 물었다. 판서는 그간 자기가 결혼했었다는 사실과 아내가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시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왕에게 소상히 아뢨다. 그랬더니 사리 밝은 왕이,
「그대는 아내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공의 아내는 의기 있고 비범한 재주가 있는 여자인 것 같소. 부인의 행동은 칭찬 받을 만하오. 아무쪼록 공은 부인에게 저지른 과오를 고치기 바라오.」
판서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며칠 후 그의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칭호가 내렸다.10
이런 경우는 물론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부인이 보여준 주장과 권리가 바로 당시 부인들의 주장과 권리 아닌가. 그러기에 그 부인이 그런 주장과 권리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계모이면서도 조금도 굽힘없이 당당한 어머니이자 시어머니이고 아내인 그에게 남편이나 아들, 며느리 모두 정중한 예의로 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전통사회의 풍속도가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가정은 부부끼리는 물론 부모와 자식간에도 예절이 철저히 준수된 「소법치국가(小法治國家)」였다.
방실잡의(傍室雜儀)의 부부예절
이미 소개한 단편들에서 부부의 동등한 사회적 지위와 가정 내 위치를 확인하는 동시에 부부예절이 엄연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즉, 반드시 경어를 사용하고 내실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으며, 남편은 아무리 화가 치밀더라도 아내를 때리지 못하고 욕지거리도 하지 않는다.
이밖에 어떠한 예절이 부부의 가교 역할을 했을까. 그것을 「방실잡의(傍室雜儀)」11와「방실잡의」의 저자 조목영이나 「사소절」의12 저가 이덕무는 양반13으로 전통사회의 파수꾼으로 자처하여 각기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조목영은 명문세도가인 풍양 조씨로서 구체적이고도 엄격한 부부예절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물론 부부가 동등한 지위라는 전제하에서 예절을 서술하였다.
조목영은 군자(君子)와 요조숙녀(淑女)의 만남이 이상적인 부부라 가정하고, 암·수컷이 서로 관관하고 부르면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배필과만 교접하되 교접행위를 사람의 눈에 띠지 않도록 조심하는 휴구(물새)를 부부유별의 표본이라 하였다. 그리고 군자의 요조숙녀는 정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감정을 다스려 겉에 나타내지 않으며 행동을 가볍게 하지 않는다.
부부가 동석할 때는 화친 다정하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부인은 아무리 더운 복중이라도 하얀 살결을 노출시키지 말고 기뻐하되 깔깔대고 웃지 말며 말씨는 부드럽고 또렷또렷하되 너무 수다스럽지 않아야 하며 얼굴 표정은 유순하고 찌푸리지 않아야 한다.
남편은 부인이 잘못하여 아무리 노엽더라도 안색을 바르게 하고 몸가짐을 정중하게 지니고 말씨는 거칠지 않아야 한다. 큰소리로 욕지거리를 하거니 발길질 할 수 없다. 옛 성현은 노복에게도 욕지거리를 삼갔는데 하물며 아내에게랴. 아내의 잘못을 도저히 고치지 못할 때는 헤어질지언정 함부로 때리거나 욕하지 않을 일이다. 어떤 이유로든 아내를 때리는 짓은 죄악이다. 퇴계는 아내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아내에게 손찌검한다면 이는 여권을 유린하는 야비한 행위라 하였다.
부부가 화친하고 다정하더라도 세면이나 머리 빗질을 함께 한 자리에서 하지 않고 측간 역시 동시에 사용하지 않는다. 잠자리를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조목영은 침실 예절도 예시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밝은 불빛, 한낮을 피한다. 불을 끄고 옷을 벗으며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다(원저(原著)에는 탈의 이유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생략).
술에 취했을 때, 배불리 먹은 직후, 앓고 있을 때, 아내가 생리중이거나 임신 중일 때 합궁(合宮)을 피한다. 실내에 다른 사림이 있을 대도 합궁하지 않는다.
침실엔 병풍을 두르거나 휘장을 치며 만일 가난하여 병풍이나 휘장을 치지 못할 때는 창틀을 밥알로라도 막는다.
잠자리 주변이 흐트러져 더럽거나 오물이 버려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아야 한다. 목욕하고 침실에 향을 뿌리면 더욱 좋다.
이부자리는 부인이 펴는데 안쪽으로 가지런히 핀다.
합궁이 빈번하지 않아야 하고 긴 시간 끌지 않도록 하고, 하룻밤에 여러 차례 합궁하는 것도 정도에 어긋난다. 방외범색(房外犯色)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삼가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노여움보다 기쁨이 많아 노여움도 잘 다스려야 하지만 기쁨을 억제하지 않으면 순간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실수가 누적되며 부부가 서로 업신여기게 되니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이와 같이 조목영이 범하기 쉬운 일상사를 삼가도록 예시하였는데, 우리나라 최대의 예절 지침서인 이덕무의 「사소절」 역시 부부유별, 부부예절을 명시함으로써 무너지기 시작하는 전통사회를 지키려 하였다.
사소절(士小節)의 부부도(夫婦道)
「군자는 행동거지에 있어서 온아(溫雅)하며 개결(介潔)하고 너그러워야 한다」고 전제한 이덕무는 「부부가 화목하면 비록 거친 밥을 먹고 나쁜 옷을 입더라도 그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요, 부부가 불화하면 비록 비단 옷을 입고 진수성찬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 근심과 탄식은 견디지 못할 것」이라 하여 부부화합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부부는 작은 과실이라도 잘 알기 때문에 꾸짖기가 쉽다 하였다. 그러나 조용히 경계해야 하고 큰 소리와 화난 얼굴로 나무라면 안 된다. 이럴 때에는 부모가 걱정하고 자녀가 상심하게 되니 화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부부간에 화목하지 못하는 까닭은 남편이 천존(天尊地卑說)을 믿어 스스로 높은 체 하고 아내를 억눌러 꼼짝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부부는 강유의 분수를 어기면 안되며, 평상시에 너무 친근하게 지내면 서로 공경하지 않게 된다.
아내가 재주와 지혜가 있더라도 남에게 자랑하지 말고, 아내가 혹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남에게 말하지 말고, 큰소리로 나무라지 말고, 남이 모르게 하고 쫓아버린다느니 관계를 끊어버린다느니 따위 여지없이 정을 끊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친척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묻거든 누워 있을 때라도 반드시 일어나서 공경히 듣고, 임금이나 남의 부인의 재주를 함부로 칭찬하거나 비방하지 말라. 길에서 부녀자와 마주치면 길을 사양하고 남의 집에 갔을 때 사랑방과 안방이 가깝거든 큰 소리로 마구 떠들고 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땅히 안방을 등지고 앉아야 한다.
반면에, 부인들이 다닐 때 치마를 흔들지 말고 손씻고 나서 물방울을 창문이나 벽에 튀기지 말고 남을 대할 때 이를 쑤시지 말라 하면서 만일 남편이 사납게 성질을 부리거든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받들어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비위에 거슬리지 않아야 무사하다고 충고하고 있다. 또 남편이 비록 조급하더라도 대들어 이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서로 이길 마음을 지니면 불화하고 불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화평할 때를 기다려서 전 번에 잘못을 말하되 밝은 얼굴에 부드러운 말소리를 한다면 어찌 뉘우치지 않겠는가. 만일 남편이 술을 즐길 경우 아내는 남편의 주량을 기억했다가 적당히 들고 그만두게 조종해야지, 요구하는 대로 제공하여 품위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불의하거든 좇지 말고, 경우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집안 사람에게 화를 내거든 아내가 곁에서 그것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너그럽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리고, 남편은 결코 내실(內室)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며 안방과 사랑방에서 따로 거쳐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부간에 좋은 점은 종신토록 떨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방안에 늘 같이 있게 되면 허물없이 만만한 마음이 생기게 되고 만만한 마음이 생기면 말이 지나치게 되고, 말이 지나치면 방자한 짓을 하게 되고, 방자한 짓을 하게 되면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율곡의 말이,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부부도리를 명쾌하게 표현했다 싶어 빌리기로 한다.
「남편은 화(和)하되 의(義)로써 제(制)하고, 아내는 순(順)하되 정(正)으로 받들어서 부부간에 예경(禮敬)을 잃지 않은 연후에 가사(家事)를 다스릴 수 있다. 」14
그렇지만 무조건 순(順)하란 것은 아니니 현모양처의 표본이라 일컬어지는 신사임당의 다음과 같은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부인은 남편에게 잘못이 있으며 도(道)를 권하고 타일러서 잘못이 없는 경지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
이상 관견(管見)한 바와 같이 한국의 부부들이 예(禮)와 경(敬)으로 도리를 다하였음에도 오해와 편견으로만 보아왔기에 한국의 문화 특히 생활사를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누구의 죄인가.
주
① 제임스·게일 저 <코리언·스케치> 소수(所收). 그는 1889년에 한국에 와서 9년간 체류하였는 데 미국의 선교사이자 신학 박사이며 한국어 학자였다.
② 정효섭·이조시대에 있어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한국여성연구총서 제1집: 이조여성연구소서, 숙명여대 아세아 여성문제 연구소 1976 간)
③ 특히 김열규 교수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한을 체질화하며 살아왔다고 오판(誤判)하고 있다. 동 씨(同氏)저 <한맥원류(恨脈怨流)> 창조
④ 삼종지도(三從之道)·칠거죄(七去罪)·내외(內外)가 결코 여권(女權)을 위축시키는 금율(禁律) 이 아니었다는 견해는 이미 다른 곳에서 밝힌 바 있다. 본고는 지면관계로 생략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논급할 예정이다.
⑤ 여자에게 이름이 없었다는 견해야말로 넌센스다.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모욕이자 터부였 기 때문이다. 여자의 이름에 대하여 따로 논급할 예정임.
⑥ 코리언·스케치 (장문평 역본 pp 55∼56)
⑦ 상동 pp. 225∼226
⑧ 달레 저·조선 교회사 청설(朝鮮敎會史廳說). 정기수 역 1975 탐구당(探求堂) 간 pp 201∼213. 초생(抄生)
⑨ 그리피스 저·隱者의 나라 한국 Ⅱ P136 신복용 역 1976 탐구당 간
⑩ 달레·상동 pp 211∼213
⑪ 풍성(豊城) 조말영이 1839년에 슨 친필본(親筆本).
그는 가문을 명예롭게 지키기 위하여 저술했다고 동기를 밝히고 있으며, 종손 조모씨의 칠대 조. 미공개. 필자소장. 곧 번역하여 소개할 예정이다.
⑫ 아형(雅亨) 이덕무(1741∼1793) 저. 영·정조 때 실학자이며 문장가. 사소절(四小節)은 일상 생 활에 있어 도덕적 수양을 위하여 가져야 될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한 행동 규범을 엮어 놓은 수양서로 924장.
⑬ 이덕무는 서자(庶子)였다.
⑭ 격몽요결(擊蒙要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