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이 된다

중앙청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이승우(李丞雨) / 한국건축가협회장

이 태조가 즉위한 후 당시의 남경(서울)을 신도로 정하고 경복궁을 처음으로 건립할 당시는 3백 90여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겨우 10여 동만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바라보는 듯하다. 수차의 복원과 소실의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전통 건축문화의 정수를 반영하고 있다. 경복궁은 한 국가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는 중심의 역할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의 윤리적 표상이었고 우리 문화의 맥락이었다. 그것은 형식과 규모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10년 일제침략 이후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통치하게 되자 식민지 통할에 편리한 행정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구를 조직 개편하였다.

조선총독부를 주축으로 해서 각 도와 시에 청사들을 새로 건립하고 식민지 관아건물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일본 자체의 관아건물에 다른 양식주의를 도입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저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었지만 1912년에는 조선총독부의 대지를 경복궁 내에 내정하고 총독부 청사 착수 준비를 하였다. 독일인 게데라란데가 기본 설계를 마칠 무렵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일인 기사 둘을 불러들여 설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일인(日人)들은 이 건물의 설계자까지도 일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일인들은 조선총독부 청사(현 중앙청)의 위치를 경복궁 내에 정하는데 있어서도 침략의 근성을 십분 발휘하여 근정전 전면의 흥례문과 그 회량을 헐어버리고 근정전을 가로막는 자리에 건물을 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근정정은 문무백관이 조하(朝賀)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국가의식을 거행하던 곳임을 미루어 생각할 때 일인들의 의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인들은 광화문도 이축하고 말았다. 경복궁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버린 것이다. 일본인 미술 연구가 유종열(柳宗悅)은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애통하게 적고 있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묻혀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내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무자비한 끌과 매정한 망치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이제는 멀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을 생각하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너를 구해낼 수는 없다. 불행하게도 너를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은 너를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직도 세상은 모순의 시대이다. 문 앞에 서서 우러러볼 때 아무도 그 위력 있는 미를 부정할 자는 없다. 그러나 지금 너를 죽음에서 구하려는 자는 반역의 죄를 받게되는 것이다……(중략)

오오 광화문이여 웅대하도다. 너의 모습 지금부터 50여 년 전(이 글을 쓴 때가 1922년임)의 옛적 너의 왕국이 강력한 섭정(攝政) 대원군이 그 주저를 용납하지 않는 의지에 의해 왕궁을 지키고자 남쪽으로 면한 명당 자리에 너의 주춧돌을 굳게 다졌던 것이다. 여기에 조선이 있노라는 듯이 으리으리한 여러 건축들이 전면좌우에 이어지고 광대한 대로를 직선으로 하여 한성(漢城)을 지키는 숭례문과 멀리 호응하여 북쪽은 백악(白岳)으로 장식되고 남쪽은 남산과 마주 대하여 황문(皇門)은 그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 개의 궐문(闕門)을 안에 품고 거대하고 견고한 화강암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전통을 잘 지킨 광대한 중층의 건물을 세웠다. 말할 것도 없이 문 좌우로 균등한 높은 벽을 뻗쳤는데 그 벽이 끝나는 곳에 각루(角樓)가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우러러보는 자는 누구나 그 자약(自若)한 위엄의 미에 감동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 나라 최대의 왕궁을 지키기에 족한 정문의 자세이다…(중략) 최대의 주요건축인 근정전을 광화문을 통하여 우러러 볼 날은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바로 앞에 이들 동양 건축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방대한 양식 건축 즉 장차의 총독부 건물이 지금 준공을 서두르고 있다. 아아 일찍이 자연의 배경을 고찰하고 건물과 건물의 배치를 숙고하는 모든 것에 균등의 미를 간직하게 하여 순 동양의 예술을 보존하려던 노력은 송두리째 파괴되고 버려지고 무시되어 이 대신 아무런 창조적 미도 갖지 않은 양식 건축이 별안간 이 신성한 땅을 범한 것이다.

이 분노와 비통의 심정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 묻히고 말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래도 어떤 이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어떤 이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어떤 이는 무관심 속에 지낸다. 지금은 이 일본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은 고통과 치욕을 쉽게 잊을 수도 있다. 더구나 세대가 바뀌면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단순한 활자의 기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새로운 세대는 무심코 중앙청 건물을 바라보고 지나칠 지 모른다.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쓰면 건물 자체가 역사적 증거물의 전시일 수도 있겠다.

인도은 4백년간 영국 통치하에 식민지 당시 건물을 보존하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후세들의 교육과 학습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빼앗긴 쓰라린 과거의 상징으로 현대 생활 속에서 희박해져가기 쉬운 올바른 국가관의 확립과 자성의 기회를 부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은 연구, 조사의 활동뿐 아니라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전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므로 그 기능 역시 수집, 정리, 보관, 전시, 교육, 레크레이션 등이 된다. 일반인의 교양과 교육적 배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 건물은 역사교육의 장으로 이용될 수 있다. 다만 청사 용도의 건물로 설계된 것을 박물관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공간 구성의 질서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가능한 건물의 원상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박물관 기능을 충족시키도록 현대적 기술로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내외 유물이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시공간의 부족으로 전시하지 못하는 문화재가 상당수가 있다고 하므로 전시 공간 확보에 주안점을 두고 내부개조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현재 새로 들어서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내의 고유한 질서를 교란시키는 또 하나의 현대의 졸속이 저지른 과오이다. 그 건물은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천연과 인공의 조화가 훌륭하게 이루어진 것이 우리의 건축이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수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일이다. 이 기회에 경복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한 일이 현실적으로 곤란한 점이 있다면 적어도 경복궁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은 더 이상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 경복궁 밖의 오늘의 도시환경은 개인의 소유욕과 형태만을 위한 잡동사니 건물의 집적으로 무질서하기 그지없다.

피폐해진 거리환경에서 도시인은 피곤하다. 왕궁 터만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녹지공간을 이루고 있다. 중앙청 광장은 우리의 슬픈 역사를 되새기고 지친 도시인에게 활기를 줄 수 있는 휴식과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조상의 얼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의 흐름을 몸으로 체험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과 연상으로 보다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가 되고 그것이 일반인과 더욱 가까워지면 좋은 것이다. 국민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는 분명히 의의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