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예술의 흐름과 動靜. 文學

문학과 인간의 삶




오세영(吳世榮) / 시인·단국대 교수

1.

오늘의 한국 문학적 상황에서 우리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될 일 가운데 하나는 문학을 바라보는 경직된 태도가 아닐까 한다. 근자에 들어서 은연중에 우리들은 문학을 흑백 논리로 재단하는 버릇에 익숙하게 되었다. 가령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가리켜 「그게 연애 이야기지 어디 소설이냐」고 비난하면 그 작가는 상대방을 가리켜 「그가 정치꾼이지 어디 문학가냐」고 되받는다. 언제부터 우리는 문학을 「사랑 놀음」이 아니면 「정치 놀음」이라는 양단 논법에 의해서만 이해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문학을 한 가지 측면에서만 이해하려는 태도는 문학의 본질이 논리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논리성이란 세계를 평면으로 바라볼 때 성립될 수 있는 사고이다. 즉 논리성이란 세계를 부분적인 것-선이나 면으로 바라볼 때 파악된 질서이지, 총체적인 것-원으로 바라볼 때 파악된 질서는 아니다. 이 세계는 여러 다양한 페러다임으로 구성된 전체로서 우리가 그중 어느 한 개의 페러다임으로 세계를 볼 경우 그것은 논리성으로 드러나지만 동시에 총체적 페러다임으로 볼 경우 그것은 논리성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사물이 지닌 전후, 상하, 좌우의 각 면은 서로 모순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문학은 세계를 선이나 면으로서가 아니라 원으로 바라보는 인식태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학은 모순과 갈등의 구조를 본질로 한다. 문학은 그 매재인 언어에서부터 문체 형식 구조 이념 기능 및 세계인식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모순의 긴장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2.

문학의 언어가 논리성을 벗어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는 새삼 논란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문학언어를 「역설」 혹은 「장력언어(張力言語) tensive language」 혹은 「의이진술(擬以陳述)」 따위로 규정한 현대 비평가들의 제 주장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문학 언어의 비(非)논리성-모순은 때로 의미론적 영역 뿐만 아니라 문법적 체계, 또는 통사론적 질서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개가 사람을 물었다」라는 진술은 시가 될 순 없지만, 「사람이 개를 물었다」라는 진술은 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엘리어트의 어떤 시에는 「나의 유일한 질병은 건강이다」라는 시구가 있고 한용운의 어떤 시에는 「나는 님을 보냈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시구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적 진술이 없다면 아마도 위 시행이 쓰여진 시들은 시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두진의 다음과 같은 시구도 일상적 언어용법에서는 의미론적, 통사론적 질서가 벗어나 있다.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

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

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

「묘지송(墓地頌)」

주검이란 사람이 이미 죽어 있는 상태 즉 시체를 뜻한다. 따라서 일상적 언어 용법에서는 「설던 주검(서러웠던 시체)」이라는 말이다. 더욱 시체가 죽는다(「주검 죽었으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위의 시행에서 「언제」라는 의문 부사 역시 통사론적 질서에서 벗어난 용법이다. 즉 「언제」라는 말은 항상 의문문에만 사용될 수 있는 부사임에도 불구하고(일반 서술문에서는 「언제인가」라는 말을 써야 한다) 위 시행에서 시인은 그것을 서술문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지닌 이러한 모순의 원리는 그 형식이나 구조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서사양식이건, 서정양식이건, 극양식이 건간에 모든 문학작품의 구조가 갈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주동(主動) Protagonist과 반동(反動) antagonist이라는 인물 혹은 성격의 갈등이건, 선악, 진위라는 테마적 갈등이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모순으로 시작된 이 두 가지 행위(행위자)는 서로 상반하는 가치 추구를 위해서 싸우다가 결국 그 어느 한편이 패배하거나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구조를 아이러니, 혹은 역설로 설명코자 했던 제 이론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서정시 역시 그 정서, 의미, 시상 등 제 가치가 서로 모순의 긴장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구조적 완성을 이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학을 내용과 형식의 문법으로 파악해 왔던 오랜 습성은 현대 문예학에서 자주 비판받아 왔지만, 그 편의주의로 인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듯 싶다. 그런데 문학을 내용과 형식으로 구분하려는 태도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전통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에 의하면 모든 인식의 기초는 주체 subject와 객체 object의 확실한 근거 위에서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의 코기토 cogito가 이러한 전제 아래서 주체의 확실한 근거를 밝히려는 노력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주의자들에 의하면 문학 역시 이 객체의 주체가 결합체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즉 그들에 의하면 문학의 내용이란 주체의 반영이며, 문학의 형식이란 객체의 반영이다. 한편 내용은 작가의 자유스러운 이념, 혹은 사상을 뜻하며, 형식이란 이를 미적 규범에 의하여 정제시키는 하나의 틀, 즉 속박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문학은 거기에 표현된 이념이나 철학은 작가의 인생관에서, 그것을 형상화시키는 규범은 이 세계에 내재한 질서의 원리에서 구한 셈이다. 이렇게 보면 내용과 형식의 이원적 대립 또한 주체와 객체, 자유와 구속이라는 모순의 관계 위에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의 관계는 세계 인식의 태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문학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시도했던 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논쟁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감히 문학을 단지 주관의 표현이라고만 단언한다든지, 또는 객관의 반영이라고만 단언할 수는 없다. 문학은 「거울」(모방적)에 의해서도 「램프」(창조적)에 의해서도, 혹은 노미널리즘에 의해서도, 리얼리즘에 의해서도 그 어느 한편만으로는 완전하게 해명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 양립성은 문학의 매재인 언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흑자는 문학의 언어가 전달의 언어라 하기도 하고, 흑자는 하나의 객체로서 사물 바로 그 자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만을 수용할 경우 주관적으로 우리는 한편의 소설이 역사기록이나 신문기사와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인지, 후자만을 수용할 경우 그것이 무당의 축문(실제로 서구의 어떤 유파에서는 시가 무당의 축문과 같다고 극언한바 있다)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설명해 내기 어렵다. 20세게 신비평 그룹의 한 비평가가 시의 언어는 관념적인 것도 즉물적인 것도 아니라 이 둘이 조화를 이룬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이러한 고충의 한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문체 역시 그렇다. 문체를 정의하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으나 대체로 문체란 일반 언어의 공분모(共分母)와 그 개인차, 다시 말하여 언어가 갖는 보편적 규범과 이를 운용하는 각 개인의 편차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흑자는 이를 달리 표현하며, 문체란 언어의 객관적 요소(사고의 핵심부)와 주관적 요소(정의적(情意的) 요소)가 이루어 놓은 각 개인의 차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 개념 규정이야 어떻든 우리는 이상의 견해에서 문체가 보편적인 것과 개성적인 것, 또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결합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체 역시 그 본질은 원리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보편적인 것과 개성적 인 것, 주관과 객관은 상호 대립의 관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는 언어에 있어서 모든 개인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보편적인 언어를 가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언어를 유니보컬 Univocal이라 부르면서 이의 이상 실현을 꿈꾸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유니보컬이라는 언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설령 그의 말과 같이 그와 같은 이상이 실현되었다고 할 경우 과연 이 세상에 문학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편 언어의 공분모, 혹은 보편적 규범이 완전하게 무시된 언어, 개인적 편차만이 전부인 언어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로 쓰여진 문학작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혀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적 규범이 배제된 언어는 그 전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체는 그들이 서로 모순의 관계에 놓인다 할 지라도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 규범과 편차 사이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는 시대에 따라 각각 한 편이 옹호되고 다른 한 편이 경시되긴 하였지만 문학이 갖는 중요한 제 특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보편성이 배제된 문학은 영속되는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며 특수성이 배제된 문학은 각 시대, 각 개인을 통 털어 모든 작품이 동일해져 버린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작품 「햄릿」은 당대나 오늘에나 인간 삶이 주거하는 보편적 양식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20세기의 인간 삶과는 다른 그 시대의 한 특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학이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조화하는데서 존재하는 언어 행위인 것이다.

3.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문학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보다 부분적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 문학이 기본적으로 모순의 긴장 위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일면에서만 바라보려고 한다. 그리고 문학이 갖는 그 반대의 측면은 외면해 버리거나 부정하려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문학이고 저것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식의 태도는 문학에서-그것이 자유를 본질로 하는 까닭에-바람직하지 못하다. 문학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도덕성을 외면하지 않는 한(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문학이 도덕성 바로 그것만도 아니라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 본질이 자유이며 어떤 이념이나 도그마에 의해서도 억압될 수는 없다. 이 경우 우리들은 이 넓은 의미의 도덕성을 포괄적으로 휴머니즘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의 도덕성을 넓은 의미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문학의 도덕성이 오로지 휴머니즘만을 지향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 휴머니즘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 문단에서 문학을 평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가장 두드러진 예 가운데 하나가 문학을 인간 삶의 한 양태에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이다. 즉 일부에서는 문학이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일부에서는 삶의 현실적인 문제 즉 사회 상황으로서의 하층구조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문학의 영원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면 후자는 또한 문학의 시대성 내지 역사의식을 강조한다. 또한 결국은 같은 논리로 환원되겠으나 문학이 개인적 삶의 의미와 그 천재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반면, 문학은 전체 삶의 의미를 반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이 글의 서두에서 내가 인용한 에피소드에는 이러한 두 가지 태도를 우화시킨 것이다. 상대방의 소설을 「연애 놀음」으로 몰아세운 사람들의 의식 속엔 문학이 삶의 현실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도사리고 있고 반대로 상대방을 「정치꾼」으로 몰아세운 사람들의 의식엔 문학이란 삶의 근원적인 문제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강한 집착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편의 견해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수평적인 삶과 수직적인 삶, 개인의 삶과 전체의 삶, 이 각기 상반하는 두 가지 삶의 지향성 앞에서 문학이 가야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그 자체가 어리석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이 두 가지 세계 중에서 어느 한편하고만 관련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수직적인 삶과 수평적인 삶, 개인적인 삶과 전체의 삶을 동등하게 반영하거나 표현한다. 그리고 두 세계의 반영은 도시적일 수도 있고 선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택적인 경우라도 그것은 배타적인 입장에 서지는 않는다. 바람직한 문학이란 이 두 가지 세계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놓은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신학자가 기독교 십자가의 의미를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로 설명했던 것에서 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그는 십자가가 수직적인 삶과 수평적인 삶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의미하는 수직적인 삶이란 신의 문제, 즉 인간의 존재론적 유한성과 그 구원의 문제에 관련된 것이요, 수평적인 삶이란 인간과 인간의 문제 즉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소명에 관련된 것이다. 인간은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세계에 필연적으로 몸을 담고 있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허무하며, 고독하다. 따라서 그는 그의 삶이 영속하기를 바라고 완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는 육신의 삶을 초월하여 영원한 존재가 되고 싶다. 여기에 인간 구원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현실적으로 이 지상에 삶을 누리는 자이기도 하다. 지상의 삶이란 사회적인 삶, 상황 안의 삶, 그리고 공동 운명체로서의 삶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공동체의 일원인 한, 그 사회가 가장 정의롭고 행복한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가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여기에 지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한 가지 과정으로만 받아들이고자 한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신앙이란 오직 구원의 문제에서만 있는 것이요 사회 정의나, 현실 개선 따위는 다른 문제라 하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이야말로 참다운 신앙의 실천이요 구원의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라고 한다. 에리히 프롬은 전자와 같이 신앙을 오로지 천국 가는 문제로만 받아들여 사회정의의 실현에는 냉담한 사람을 가리켜 불타는 얼음 burning ice이라 부른 적이 있다. 그는 그들이 교회에 기부금을 많이 내는 데는 열성이지만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들을 구제하는 데는 인색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이란 이 어느 한 편이어서는 안 된다. 이 둘이 조화를 찾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가 수평적 삶과 수직적 삶의 조화를 상징한다는 말은 바로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와 사회상황의 문제가 공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현되어야 한다는 기독교 신앙을 뜻하는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허무, 절망, 고독, 죽음, 사랑 등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와 관련되며 사회, 역사, 정치, 상황 등의 문제는 삶의 현실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이중 어느 하나만이 문학의 영역에 속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발견할 수 없다. 문학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반영하여 그것이 보다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인간의 정신적 표현이다. 때에 따라서 한 작가는 이 중 어느 한 쪽에 비중을 두어 창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작가의 신념에 따른 선택일 뿐, 문학 그 자체에 어떤 필요성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때 작가의 신념이란, 그가 사는 시대의 상황과 그의 문학적 선호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문학은 수평적인 삶과 수직적인 삶의 조화 위에서 꽃피워야 한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의 의미가 그러한 것과 같다. 예컨대 우리의 이상은 인간 삶의 영원성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현실적 삶의 부조리를 극복해 주는 그와 같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일이다. 그러한 일례를 우리는 「햄릿」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품 「햄릿」이 주인공이 성격적 결함으로 인한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그린 것이라면 그것은 삶의 수직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다른 일면에서 야스퍼스가 지적한 대로 이 작품이 가치가 전도된 세계에서 진실을 추구하다가 파멸 당한 비극적 인물을 그린 것이라면 그것은 수평적 삶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작품을 주의 깊게 읽으면 주인공 햄릿은 허위와 위선과 부정으로 가득 찬 덴마크 왕실과 싸워 진실을 밝혀내고자 외롭게 투쟁하는 인물이다. 살인자요, 왕위 찬탈자요, 파렴치범이 정의와 진리의 대행자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진실을 추구하는 햄릿은 미치광이로 대접받는다. 이야말로 그 시대의 수평적 삶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투철한 현실 인식이 아닐까. 따라서 햄릿의 유명한 독백, 「To be or not to be, that's question」은 그것을 「죽느냐 사느냐」로 해석할 때, 수직적 삶의 문제와 관련된 독백이지만 「이것이냐 저것이냐」, 즉 진실이냐 허위냐의 선택으로 해석할 경우 그것은 수평적 삶의 문제와 관련된 독백인 것이다. 한 작품에서 이 두 가지 삶의 문제를 조화시키기란 어렵다. 그러나 훌륭한 작품은 이를 이상적으로 조화시킨다.

문학이 포괄하는 영역이 개인적 삶에 국한되는 것이냐 혹은 전체의 삶으로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어떤 작가는 개인 삶의 문제에 보다 비중을 두고, 또 어떤 작가는 전체 삶의 문제에 몰두하며, 또 다른 작가는 이 둘을 포괄한 변증법적 태도 위에서 칭찬한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문학외적 편견을 가지지 않는 한, 그 어느 한 편을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을 훌륭한 작품이란 이 두 가지 세계가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① 향내 없다고 버리실나면

내 목숨 꺽지나 마르시오

외로운 들꽃은 들가에 시들어

철없는 그이의 발끝에 조을걸

<김영랑(金永郞) 사행시>

②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르는 까마귀와 같이

중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고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沈熏) 그날이 오면>

③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

서는 차디찬 띄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한용운(韓龍雲) 님의 침묵>

①이 개인적 삶의 문제를 시화(詩化)한 작품이며, ②가 전체 삶의 문제를 시화(詩化)한 작품이라면 ③ 은 이 양자가 조화된 상태로서의 삶이 시화(詩化)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용운의 시에 지칭된 님을 가리켜 우리가 흔히 그 님은 조국이나, 사랑하는 연인이나, 열반에 이르는 영원한 진리, 이 모두를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님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개인과 전체, 특수와 보편, 시대성과 영원성이 통합된 구원의 이상으로서의 님이다. 우리는 인용된 김영랑의 「사행시」나 심훈의 「그날이 오면」 중 그 어느 하나만이 진정한 문학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훌륭하게 형상화된 시작품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4.

나는 지금까지 문학이 모순 혹은 갈등의 원리에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내가 판단키로 오늘의 한국 문학이 다른 문학관을 지닌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서로 경직된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학을 한 특수한 삶의 일면으로만 파악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문학은 여러 다양한 관점에서 삶을 조명할 수 있는 것이며, 보다 훌륭한 문학작품일수록 그것은 상반하는 두 세계를 이상적으로 조화시킨다. 나는 특히 오늘의 한국 문학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수평적 삶과 수직적 삶의 관계를 한 가지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참다운 문학은 이 어느 한쪽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수평적인 삶과 수직적인 삶, 혹은 개인적 삶과 전체의 삶을 포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문학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모순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순을 지양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데 그 본질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이란 모순의 대립과 그 화해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립되는 가치가 모순을 지향하여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키는 과정을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혹은 「초월」이라는 개념으로 혹은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으로 혹은 「평형」이나 「조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으며 따라서 문학이 모순과 화해의 원리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오늘의 한국 문학이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해야 될 진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