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문화의 참모습 7.

선비정신과 그 파문




전완길 / 태평양박물관장

1.

선비는 한국 역사에서 긴 세월 뚜렷한 주역이었기에 그들의 사상과 관습이 오늘날 유·무형으로 작용하고 있다, 요소요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전통문화 혹은 생활문화를 재현하자면서도 선비에 대한 고구가 활발하지 못하다. 활발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이미 지적하였듯이 오해와 편견의 시선으로 보아왔다. 그 까닭은 우리보다 먼저 외국인들이 양반의 실상과 허상을 왜곡시키기도 했지만 양반이 계급봉건사회의 지배층이었던 탓에 고구를 기피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비사상과 관습이 한국인의 특질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지금도 우리네의 언행을 적잖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선비정신의 파문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2.

선비정신의 영향을 논하려면 먼저 선비사상을 살펴야겠다.

선천적으로 충효가 뛰어나고 학문이 정심하였다는 평판을 얻은 李彦迪이 27세 되던 해 초하룻날 五箴과 敬身 十箴을 지었는데, 5잠은 1畏天 2養心 3敬신 4改過 5篤志이고 10잠은 1孝親 2輔君 3祭祀 4正家 5友愛 6謹刑 7去讒 8愼色 9結友 10安貧이었다.

김정 역시 천성이 충효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였으며 죽음에 임하여서도 낯빛이 변하지 아니한 선비라고 칭송받았는데 그가 지은 11잠을 보면 1言 2行 3志 4勇 5廬 6逸樂 7憂懼 8欲 9儀容 10念恨 11好惡 다.

성현도 열가지 잠명을 지어 행동지침으로 삼았는데, 하늘을 공경하고(敬天) 홀로 있을 때 삼가고(愼獨) 마음을 바로 가지고(正心) 욕심을 적게 가지고(寡慾) 잘못을 고치고(改過) 수치를 알고(知恥) 검약을 지키고(守約) 간단하게 행동하고(行簡) 사람의 도리를 해야 하고(踐形) 예에 돌아와야 한다(復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선비의 표상이라 칭송받던 조식은 「남의 나쁜 일을 들으면 혹시나 한 번이라도 만날까 염려하여 책상을 닦고 책을 펴 심안을 모아 묵관하며 깊은 사색에 잠기되 책 읽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눈은 음란한 것을 보지 않고, 귀는 엿듣지 않으며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을 지녀 태타스런 빛을 보이지 않았다」한다. 또 홍?은 귀양가다가 과거를 보러 상경하던 선비무리중에서 「내가 듣건대 홍섬은 사류라 하였소. 죄 없이 매맞고 귀양가는 것을 보니, 필시 이는 소인들이 국정을 담당한게요. 우리가 어찌 이런 때에 과거에 응할 수 있겠소」하더니 말채찍을 돌려가므로 그 사람의 이름을 물은바 임형수였다는 것이다.

한편, 문장과 기절로써 이름 높았던 김일손은 다음과 같이 선비론을 피력했다.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는 자는 신유가 아니다. 훈화나 하는 선비는 고루하고 사장을 하는 선비는 화사하며, 문학하는 선비는 과장을 잘하나, 진유는 실속이 있어 활쏘기·말타기·셈하기가 그 분수 안에 있어, 재정이나 무기 처리에 있어 그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면 가장 존경받았던 선비는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존경받았을까?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조광조의 밝고 곧음, 이황의 침착하고 근신함, 이이의 자상하고 화평함과 조헌의 부지런하고 확고함은 유자의 으뜸가는 표준」이라 하였다.

3.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선비들은 수신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수신하는가. 자신을 위하여 수신하였다. 덕을 갖춘 군자가 되려 하였는데 그렇게 됨으로써 사회의 표상이 되고 표상이 됨으로써 존경받기를 염원하였다. 물론 선비들의 도덕율은 사회의 표상이 되고도 남지만, 그러한 도덕율을 자기완성의 수단으로만 삼았던 점에 문제가 있다. 더욱이 군자는 소인배들과 어울리지 않고 사군자처럼 고고하게 사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선민의식에 젖어 남을 경멸하였기에 계급사상이 심화되었다.

조식이 남의 나쁜 일을 들으면 교화하지 않고 만날까 염려했듯이 남의 과오를 외면하였다(가족에 대하여는 매우 준엄하게 나무랐다). 과우뿐만 아니라 참견이나 조언을 꺼렸다. 대신에 경멸하여 계급사상이 응고된 이유로 개인이나 잡단간에 위화감이 켜졌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하나라는 일체감이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백로더러 가마귀와 어울리지 말라고 권유하듯이 집단 속의 나가 아니라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우월감에 자족하였다.

그러기에 양반이 서민을 서슴없이 조롱하는 추태가 빚어졌다.

1828년 동실정사 일행이 정에 다녀오다가 정주에 이르렀을 때다. 한 농부가 외발차를 몰고 있었는데 그 차는 두손으로 양쪽 가로막대를 붙잡게 되어 만약 한쪽 가로막대 잡은 손을 놓으면 기울판이었다. 차에 인분과 재를 싣고 있었는데 일행가운데 장형득이란 자가 지팡이에 인분을 칠해 농부의 코에다 발랐다. 농부가 피하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면서도 가로막대를 놓지 못하는 괴로운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이 웃어댔다. 이를 나무라자 장형득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멀고 긴 나그네 길의 무료를 풀고 웃을 수 있겠읍니까」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특별이지 흔한일이 아니겠지만 서민의식이 확고했던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선비가 남의 일, 특히 과오에 간여하지 않는다 하였으나 예외가 있다. 불의를 목격했을 때 방관하면 군자가 아니므로 불의다 싶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논박하였다. 그런데 불의의 개념이 매우 모호하다. 반대로 당한 쪽에서 당연히 반박이 뒤따르게 된다. 불의로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물러나지 않더라도 불의 논의에 오르내리면 인간파문을 당하는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선비로서 최대의 수모였다. 그러므로 불의의 논의에 오른 자는 생명을 걸고라도 반박해야 되고, 거론한 자 역시 쉽사리 후퇴하지 않으므로 관념적이어서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기 어려운 논쟁이 달과 해를 넘고 더러는 대를 물려가면서까지 지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원한이 싹트고, 한번 싹튼 원한은 외곬형의 사고로는 해소되지 않아 감정대립으로 발전하여 문벌·학벌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이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관념적인 논쟁을 장기간 하다보면 저절로 동조자가 생기고 자신을 청유, 상대방을 탁유라 하는 등 당을 형성케 한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에서나 견해차이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타협 혹은 토론으로 합일점에 도달시킨다. 그러나 관념논쟁은 과학적인 실험으로 자기주장을 입증하거나, 상대방을 승복시킬 수 없는데다가 타협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파가 민주적인 토론장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리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분파되었다. 이러한 선비 관습이 오늘날 희미하게 나마 남아 토론회가 활발하지 못하고 싸움터이기 일쑤며 툭하면 흑이냐 백이냐를 가리려 하고 타협이나 토론을 모색하는 조정자를 「사꾸라」로 내몬다. 아무튼 선비정신이 불의논쟁―관념논쟁을 낳고 그것이 당파를 유발 시켰는데 당쟁으로 발전함으로써 고질이 되었고, 그 결과 선비정신이 쇠락하여, 도덕률로 이사회를 구현하려했던 조선왕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이는 일찍이 박제상이 지적한 병폐였다.

「네 당파의 자손은 선비로서 비록 글을 몰라도 사족으로 행세하며 마을에서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시골 백성을 억압하여 밭을 갈지 않고 베를 짜지 않으면서 부유한데, 모두 백성에게 강탈한 것이다. …사족이 있는 곳마다 백성을 못살게 굴지만 소원이 가장 심했다. 간통 하나를 띄워 먹 도장을 찍은 다음 고을에 보내 제사비용을 내라 한다. 사족이건 평민이건 주머니를 쏟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원에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을 가한다. …백성들이 아전에 시달리고 다시 서원 유생들에게 침략당해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4.

이덕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광조는 선비중의 선비라 할 만하다. 한갓 서생의 신분으로 효도와 청렴이 드높아 발탁되지 4년만에 대사헌에 특진되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고, 학문이 「정자·주자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멀지 않았다하여 조부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사회가 혼탁해질대로 혼탁해진 연산시대를 뒤이은 중종대여서 그의 학문과 이론―요순성대를 재현하려는 꿈이 환영받아 더욱 돋났는데 끝내 굽히지 않는 기개의 소유자였다. 대사헌이 된 뒤 입?하면 극히 추운 날이나 몹시 더운 여름이라도 해가 한낮이 될 때까지 논리정연한 주장을 굽히지 않아 임금으로부터 모두 허락을 얻어내 임금이나 측근 신하들이 차츰 경원했다. 임금이 내린 밀지도 결국엔 거두게 하고, 정승이나 여러 관에서 차자를 올려 윤허를 얻지 못한 일이 있으면 윤허를 얻어 내겠다고 공언한 뒤 윤허를 얻어 냈으므로 동료 관원들이 시파를 청하고 홍문관 역시 날마다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를 본 조광조가 「오늘 윤허를 얻지 못하면 물러나지 않겠오」하더니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아뢰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왕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이런 일들로 시기와 질투가 누적된데다가 그로부터 경멸당한 남곤과 침정이 일을 꾸미고 중종마저 경원하던 터라 결국 그는 귀양갔다가 사사됨으로써 38세에 요절하였다. 한마디로 조광조는 타협이나 양보를 외면하여 융화되지 못했던 탓에 그의 이상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다. 만일 그가 상대방을 설득만 하려말고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택했더라면 사사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뜻을 펴 국가가 정화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학자의 고집을 꺾지 않아 학자의 체모를 훌륭히 지킨 대신 정치가로서는 실패하였는데 정치가로서도 성공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아쉬움을 표시하지 않고 곧은 행동만 칭찬하였다.

이것이 바로 선비정신의 맹점으로서, 훌륭한 선비〓훌륭한 경륜가의 등식이 성립되지 않음에도 그러한 기질이 잔존하여 더러 문제가 된다. 외고집이 융화의 저해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5.

선비정신을 관찰하면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전무하며 대부분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각기 주관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은 판단기준이 여러 가지라는 말과 같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오래 사노라면 기준이 모호해진다. 절대평가기준이 없다. 그러기에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각양각색이다. 이를테면 푸른 하늘을 표현할 경우 퍼렇다, 시퍼렇다, 푸르스름하다, 푸르죽죽하다, 파르스름하다 따위로 다르듯 동일한 사물을 서로 달리 본다. 더욱이 문학적인 표현으로는 마땅히 달라야 재능이 있어 보였기에 남에게 동조하지 않는 기질이 응고되었다.

그러므로 칭찬하는 사람이 있으면 헐뜯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6.

선비는 가난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안빈낙도를 생활지침으로 삼아 치산은 물론 가사관여마저 부끄러운 일로 간주한다.

서경덕은 치산에 관심이 없어 여러번 식량이 떨어져 주렸으나, 주림을 참는 것이 다른 사람들로서는 감히 견디지 못할 지경인데도 그는 태연하였다. 어느 날 문하생 강문우가 오자 해가 한낮이 되도록 이야기하였지만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아니었다. 부엌에 들어가 그 집 사람에게 물으니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 밥을 짓지 못했다」하더라는 것이다.

윤석보는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 남녀종 하나씩만을 데리고 갔다. 부인과 자녀를 풍덕 본집에 남겨두었는데, 배고픔과 추위에 살아 갈 수 없어 부인이 비단을 팔아 토지 1묘를 샀다. 이 소식을 들은 윤석보가 편지를 보내 빨리 토지를 물려주라면서「선현들은 한 자 한 치의 땅이라도 넓혀 임금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지금 나는 군수가 되어 녹을 먹으면서 토지를 사 둘 수 있겠는가. 백성과 매매하여 나의 죄를 만들지 말라」한 바람에 부인이 땅임자에게 토지를 물려주었다.

박팽년도 밭을 샀다가 도로 팔았다. 집현전 학사일 당시 전지를 사자 벗이, 봉록이 있지 않느냐니까 얼른 팔았는데 이런 행동을 가리켜 선비의 기풍을 갖추었다고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어변갑은 직제학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함안으로 가 집 벽에 「돌아와 사는 곳이 좁은 집 두세 칸뿐이나 비바람에도 아우 형이 이야기하고 아침저녁으로 어버이께 뵈옵네. 문 앞에 두 갈래 시냇물 소리들리고 다락에 오르면 사면에 산이로다…」써 놓고 치산을 외면한 채 오로지 소요하면서 살았다.

왜 이토록 치산을 외면했을까? 안빈이 선비의 도리이자, 정빈해야 학덕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관리의 고예가 덕치위주였기 때문에, 자신의 가난을 과장하고 산업경영에 소홀하였다. 끼니를 이을 만큼의 행복에 만족하였던 관리들이 산업경영에 소홀했고, 소홀했던 탓에 그 방면에 무지하여 조선사회에서는 어느 것이건 상품화되거나 산업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상업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방면의 종사자를 경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위도 비?하였다. 실학자인 이수광마저 어부를 흉보고 있다. 영천의 어느 어부가 허리에 노끈을 두르고 물속에 들어가서 이 노끈으로 생선의 아가미를 꿰어 금시에 수십마리씩 잡아가지고 나오곤 하더니 어느날 한참만에 피투성이가 된 채 빈 손으로 나왔다. 이 어부를 가리켜 이수광은 「좋은 꾀를 써서 물고기를 잡더니 마침내 곤경을 치르고 말았으니 이는 보응의 이치가 그러했던 것」이라고 비꼬았다.

그러므로 산업이 부진하였고, 산업의 부진은 조선을 정체의 늪으로 몰았다.

이러한 상황이 외국인에게 그대로 비쳐지고 있다. 조선주재 초대 미국공사였던 알렌은 「조선 사람이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범인처럼 취급된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재산의 축적은 좋지 못하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것 이상으로 생산하고 재배할 의욕을 주는 자극이 없다」하였다.

그러니 재상으로 수년간 봉직했으면서도 재산이 초가삼간뿐이어야 청렴해보였을 것이다. 가난은 청렴이고, 청렴은 정직이고, 정직은 유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청렴 관리를 표창하고, 그런 관리의 자손을 특별 채용하기까지 하였는데 청백리 표창은 승진을 보상받는 동시에 청사에 남을 가문의 영광으로 간주되었다. 밭을 사서 일굼으로써 가난을 면하려 한 부인을 나무랐던 윤석포는 그 자신이 염근리 명부에 올랐고 훗날 자손이 등용될 길을 열었다.

이와 같은 선비정신의 일부가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데 문제는 어떻게 해서 청렴하냐이다. 청렴결백하여 청렴결백하면 문제가 없지만 치산할 줄 몰라서 청렴한 경우다. 이는 무능한 가난뱅이이지 청렴이 아니다. 게을러서 그렇게 되는 수도 있다. 또 충분히 치산하여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낭비하여 가난하고 청렴해보이기도 한다. 이런 예는 예전에도 문제가 됐었다.

함종부원군 어세겸은 대사헌·형조·호조·병조판서·홍문관 대제학을 거쳐 문형을 맡았다가 좌우차성을 지냈고 우의정·좌의정까지 올랐는데 그가 죽었을 때 집안에 남은 곡식이 조금도 없었다. 문견이 넓고 많으며 청백하게 지조지켰다 하여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그런데 그는 원래 게으름쟁이여서 한성판윤 재직시 한낮이 되어서야 출근하여 조롱의 대상이 되고 오?당상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런가하면 청백리 조원기는 먼저 누이들을 도와주었고 다음에 집안이나 이웃을 도와 자기집 부엌에는 늘 소금과 나물뿐이었으나 먹을 것이 부족하더라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선비정신은 게으름과 낭비습성을 배태시켰다. 선비가 청빈과 아울러 검약을 생활지침으로 삼았으니 낭비가 웬말이냐겠지만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사상이 바로 낭비다. 헐버트가 예리하게 한국인의 낭비벽을 관찰하였다. 「한국인들은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돈을 비웃고 돈이 없었을 때처럼 무심한 마음으로 길에 뿌리며 돌아다닌다. 또 한국인들은 의로운 일이라면 돈을 우습게 알고 쾌척하는 성질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하여는 우리도 칭송을 금할 수가 없다」

뿐아니라, 가난은 수치가 아니기에 가난하더라도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데다기 돌고 도는 돈이 굴러올 행운이 있으려니 막연히 기대하면서 설마 산 입에 거미 줄 치랴고 태연하다보니 게으름이 습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웃이 도와 줄 수도 있고, 집안의 누군가가 잘 되면 도움을 얻는 법이니까…그대로 더욱 게을러지고 의타심이 커졌다.

〔옛 한국인들이 게으르고 재물에 욕심이 적어 낭비벽이 심했던 까닭을 풍족한 자연자원에 돌리는 견해도 있다. 한반도의 토지가 비옥하여 쌀·보리 등 주곡이 풍족하게 생산되는데다가 임산물도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먹고 살 만큼만 일하였지 아둥바둥 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급자족이 되고보니 외국과 교역할 필요성이 적어 대량생산(산업화)이 불필요했고, 외국과의 교역도 절실하지 않아 문호개방이 늦어져 근대화가 뒤쳐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치를 망국풍조로 보는 ?율과, 고려가 상류층의 사치와 부패로 패망하였다고 판단한 조선 지배층의 청빈·검약 강조가 선비정신화하고 그러한 선비정신이 5백년간 의식화하여 서술한 바와 같은 부작용을 잉태한 사실은 종도가 문제이지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7.

선비는 입신양명을 지상의 과제로 삼았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가문의 영예를 위하여 양명을 모색한다. 그런데 양명의 길은 단 한가지다. 벼슬에 올라야 한다. 관직이 아니고는 양명할 길이 없다. 재산을 모았거나 기술이 뛰어났댔자 조롱거리였으므로, 그래서 예전에는 자식 전부가 아니면 하나라도 입신시키기 위해 온 가족이 전력하였다. 지금도 자녀가 여럿이면 한·둘은 반드시 관직자로 키우려는 꿈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관직에 오르는 길은 외줄타기와 같았다.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해야된다. 그러나 과거 응시자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데 반하여 관직은 늘지 않았으므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꿈을 버리지 못한 선비들은 다른 방법으로 현달하려 하였다. 즉 과거를 대리로 치르거나 답안지를 사전에 작성했다가 제출하는 등의 비상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러느니 관직을 아예 사는 편이 수월했다. 물론 과거부정이나 매관매작은 부정부패자들의 농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성행되는 것이다. 더욱이 계급사회에서 짓눌렸던 원한을 관직으로 보상 받으려던 평민들이 매관에 나선 까닭에 부정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매관매작이 고려 중·말기와 조선 중·말기에 빈번하였다. 임진란중에는 고갈된 국고를 채우기 위해 1백섬에 3품, 30섬에 5품을 조정이 직접 판 적도 있다.

집요한 벼슬품을 매관으로 달성하는 현상은 조선의 경우 중기 이후에 나타난다. 그 이전에는 다른 방법이 강구되었다. 상소하는 방법이었다.

조선사회는 제도상 언로가 개방되어 있었다. 누구나 무슨 일이든 건의하고 시비를 논할 수 있었다. 상소가 일단 해당 관서에 접수되지만 내용에 따라 왕에게 보여지기도 한다. 왕에게 보여져 헌의가 채택되면 즉시 등용되는 행운을 얻는다. 등용의 행운을 잡지 못하더라도 어전에 이르렀다는 그 자체가 영광이고, 내용이 어록이나 유명인의 문집에 수록되고 화제에 오른다. 그러므로 선비는 항상 왕과 조정일에 촉각을 곤두세워 실마리가 잡히길 기다린다.

특히 서술했듯이 불의 외면은 선비 도리에 어긋나므로 불의다 싶은 일이 생기면 너 나 가림없이 소 대열에 참여하였다. 개인적으로도 올리지만 천·만명이 연서하여 천인소·만인소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거나, 백성의 정치력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을 때 직언을 구하기도 하여끨. 직언을 구할 때는 왕의 관심이 높고, 눈에 들면 즉시 발탁되었던 까닭에 직언을 통하여 정치관심을 표면화시켰다. 만일 이런 대열에 끼지 못하더라도 선비들은 정치지망생이니만큼 조정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엔 물론 오늘날에도 정치관심이 높은 까닭이 선비정신에 얼마간 연원하고 있다.